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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랄라 Apr 28. 2020

기분 좋은 날

오래된 목화 씨앗에서

스웨덴의 겨울이 한참 무르익어가던 작년 겨울이었다. 오후 2시만 넘어가도 어두움이 찾아오는 스웨덴의 겨울은 적응이 힘들기도 하지만, 은은한 조명과 함께 좋아하는 이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거나, 책을 읽으며 음악을 듣기에는 또 그만한 날씨도 없다.


그렇게 겨울이 많이 깊어지던 날, 지인의 집에 초대를 받았다. 문학과 인생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는데, 문학을 좋아하시던 어르신이 본인의 할머님을 회상하며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저희 할머님은 어린 제가 부엌에 가면 늘 부엌 말고 방에 가서 책을 보라고 하셨어요. 책을 보고 공부를 하라고 말이에요. 할머님이 당대 명문가에 시집을 가셨는데 시댁 살이가 힘들어 다시 친정으로 돌아간 일이 있었대요. 그 힘들어하는 할머님을 보고 증조할아버지가 밖에 나가서 뭔가를 사 오셨어요. 그게 뭔고하니 목화씨앗을 빼는 기계인데 그걸 딸에게 들려주며 가마에 태우고 다시 시댁으로 돌려보냈다는 거예요. 그 후로 할머님은 목화솜에서 실을 자아 무명이라는 옷감을 만들면서 삶을 살아냈다고 해요."




그리고 며칠이 지났을까? 그 어르신으로부터 목화솜 한송이를 선물 받았다.  

"혜영 씨, 목화솜 안에 씨앗이 있는 거 아세요? 이 씨앗을 빼내어야만 목화솜을 사용할 수가 있는 거예요. 혜영 씨 인생에도 의미가 있는 이야기지요?"

어르신의 말씀을 되 내이며 참 값진 선물이라고 생각하였다. 받은 목화솜 한송이를 소중히 들고 와 탁자 위 시계 앞에 놓았다.

그리고 시 한 편을 적어 화답의 선물로 어르신께 드렸다.




- 씨    아 -     

(씨아: 목화 씨앗을 빼내는 기계)


솟을대문 문고리 부여잡은 어린 여인네의 손

가녀린 목화솜이 아리다

꽃가루처럼 가라앉은 그녀의 더운 한숨이 남실바람에 정처 없다.


아버지 어린 딸 품지 못한, 한 섞인 두 손에 쥐어 준 씨아

하릴없는 씨아 자루 헛 돌림에 덜거덕 산기슭 한 자락이 기운다


어린 여인 타고 온 가마 그렇게 다시 가니

보고 싶은 부정 어둑한 밤

빛 꺾인 달무리가 그 눈물 훔치어 주고


가마 안 여인네 하염없이 씨아 자루를 돌린다


씨아 자루 한 돌림, 목화씨앗 떨어짐에 아버지 눈물 소산 되어 떨어지고

씨아 자루 또 한 돌림, 목화솜 하얀 분꽃들이 오늘을 살린다.


덜거덕 덜거덕

애 닳은 목화씨앗들이 차름 차름 하얀 분꽃들을 쏟아내면

석죽은 그녀의 마음 고운 청보가 된다


비릿한 젖 먹이 아이도, 성치 못한 낭군도, 억새풀 팍팍한 회향의 간절함도

푸른 빛깔 청자로 만변한다.

비단 겹보, 청보가 된다.




시를 받고 미소 짓는 어르신의 밝은 표정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 후로도 목화솜 한송이는 조그만 탁자 위 시계 앞에 놓인 채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 데, 글을 쓰려고 탁자 앞에 앉을 때마다 솜 안의 씨앗들을 만지작 거리는 버릇이 생겨 나기도 하였다.


어찌 된 일인지, 우리 딸도 그 목화솜을 참 좋아하였다. 그 안에 씨앗이 있다고 이야기해 주니,

"엄마 제 생일날 꼭 심어 보고 싶어요!"라는 것이다.

"그래, 우리 한번 심어보자." 흔쾌히 응하였다.




딸의 생일이 다가왔고, 목화 씨앗을 솜에서 조심스럽게 분리하여 화분에 심었다. 딸아이는 목화씨앗이 싹트기를 바라고 또 바랬지만, 사실 내 마음 한 켠에는 저렇게 오래된 씨앗이 자라 날까?라는 의심이 생겨나는 중이었다.


아이는 씨앗에 물을 주고 햇살이 잘 비치는 곳에 화분을 두고 클래식 음악을 틀어주었다. 그래도 오랫동안 씨앗에서 싹이 나오지 않자, 목화솜 한송이를 씨앗의 화분에 꽂아 두며

"씨앗아, 피어도 돼! 네 엄마가 옆에 있어.", "넌 해낼 수 있을 거야!" 라는 응원의 말도 건네어 주었다.

딸의 모습을 보며 목화씨앗이 싹을 틔우지 못해도 저렇게 뭔가를 바라는 마음을 아이가 느껴보는 것만으로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하고, 나는 곧 목화 씨앗을 잊어버렸다.


그런데...

씨앗을 심은지 3주가 되어 가는 엊그제 밤에 무심코 화분을 바라보다 발견하였다. 축축한 흑 더미 위로 아주 조그만 생명체가 끔 틀 되고 있었다...


목화씨앗이 싹을 틔운 것이었다.

가슴이 두근 되었다. 딸에게 이야기를 해주니 샤워하던 아이가 몸이 덜 마른 채 뛰어나오며

"국 해 낼 줄 알았어요!" 아이가 폴짝폴짝 뛰며 좋아하였다.

나도 기뻤다.


목화솜 한 송이의 긴 사연이 우리 집에서 싹을 틔운 것이다.


이 새싹은 얼마나 자라날까? 꽃을 피우고 목화솜을 맺게 될까? 궁금하고 기대된다.

의미 있고 중요한 일들은 욕심으로 이루어 내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찾아온다는 이야기가 있다. 조그만 씨앗의 긴 기다림이 또 다른 생명과 탄생으로 이렇게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처럼.

 의심하고 기대하지 않았던 내 마음과 달리 씨앗은 자신에게 가장 적당한 시간을 찾아내어 충분히 무르익었을때 피어났다.  욕심으로 이루어 내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찾아왔다.


작은 씨앗에서 인생을 배운다.

나도 이씨앗처럼 내 인생을 자연스럽고 의미있게 펼쳐 내 보고 싶다. 씨앗을 품어보고 싶다.


잘 자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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