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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랄라 Feb 14. 2020

생후 6주만에 한국으로

최연소 탑승객

*이번 글은 아이가 태어나서 살아온 나라들(미국, 한국, 다시 미국을 거쳐 영국, 그리고 스웨덴)을 바탕으로 제가 기억하는 추억들과 경험들을 더듬어 시리즈로 연재할 계획입니다*




   2010년 유학시절 미국에서 태어난 아이는 출생 6주 만에 한국행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출산 후 6주간 많은 일을 겪었다.


   아기는 태어난 지 일주일 만에 선홍색 핏빛 오줌을 쌌다. 겁이 덜컥 나 회복이 덜 된 몸으로 어그적 거리며 병원에 가보니 의사 선생님이 탈수와 영양부족이 의심이 된다는 이야기를 해 주셨다. 아기가 모유를 잘 먹고 있다고 생각하였는데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모유 수유가 처음이었던 초보 엄마의 실수였다.

   의사 선생님은 고 농도의 정제된 영양 포뮬러를 처방해 주었고, 모유 수유하는 방법에 대해서 매우 꼼꼼하게 실습을 동반한 상담을 해 주셨다. 갓 태어나자마자 신생아가 일주일 동안 탈수와 영양부족에 시달렸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그런데 더 기가 찰 노릇은 그때 당시 나의 식욕에 관한 것이었는데, 아기는 모유를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상태였다고 하는데 나는 왜 그렇게 시시 때때로 배가 고픈지, 먹고 나면 2시간 만에 또 먹을 것을 찾는 나의 모습이 참 동물적이었다. 출산 후 이틀 만에 퇴원하여 다리는 계속 후들거렸고, 아물지 않은 상처들로 아프고 불편하여 식욕이 생길 리가 만무한데  배에서는 그렇게 먹을 것을 달라고 요동치고 있었다. 양수가 예정일보다 3주 먼저 터지는 바람에 미역국을 끓여서 냉동실에 잘 정리해 놓으려던 계획은 물거품으로 돌아갔고, 출산 후 이틀 동안 병원에서 주는 크로와상과 샌드위치 등으로 배를 채웠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온 첫날 남편이 미역국을 끓여주었다. 그런데 미역국의 양이 정말 작았다. 시간이 너무나 오래 걸렸고 그 양이 내 허기진 배를 채우기에는 정말  참으로 작았다. 그리고 끓이면서 본인이 국자로 후루륵 후루룩 얼마나 맛을 보았는지 미역국의 반은 이미 본인 입으로 훌러덩 넘어가 버린 상태... 출산 후 집에 돌아온 첫날 기억은 <배고픔> 그 한 단어로 충분할 듯하다.


   그날도 병원에서 아기의 선홍색 피의 정체를 알고 슬픈 마음이 가시기도 전에 또다시 배가 고파오기 시작하였다. 급한 김에 남편과 코스트코에 가서 큰 피자를 주문하고, 피자가 나오기 전의 시간을 이용하여 아기에게 처방받은 영양 포뮬러를 먹이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아기가 영양 포뮬러를 다 먹기도 전에 피자가 나왔고 피자의 치즈 냄새와 잘 올려진 토핑들을 보니 입안에 침이 고이기 시작하였다. 빨리 먹고 싶은 급한 마음이 생겨났다. 아기에게 포뮬러를 조금 더 속도를 내어 먹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이제껏 먹지 못한 아기가 농축된 영양분을 이겨 내지 못하였고 갑작스러운 트림과 함께 먹었던 포뮬러를 분수처럼 쏟아 내기 시작하였다. 포뮬러는 우리가 주문하였던 피자 위로도, 테이블 위로도, 아기의 옷 위로도, 모두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피자 위에 쏟아진 아기의 토를 치우고 토가 묻지 않은 피자 한 조각을 입에 배어 무는데... 그 순간 왜 그렇게 눈물이 나오는지... 피자를 입에 물고 그치지 않는 눈물과 콧물을 맛보며 아기가 쏟아 버린 포뮬러를 겨우 겨우 휴지로 훔치고 코스트 코를 빠져나왔다. 몇 미터 떨어져 앉은 흑인 아주머니의 그 놀란 눈이 한껏 참아 보려던 눈물을 다시 터트려 주었다.


   학교를 옮겨 박사를 다시 받던 남편은 한창 논문의 결과를 내야만 하는 바쁜 시기였고, 세상에 처음 나온 아기와, 태어나 처음 엄마가 된 나는 미국이라는 타국에서 하루하루 외롭고 힘겨운 생활을 해 나가고 있었다. 남편의 박사 월급은 태어난 아기의 기저귀와 분유값, 장난감, 카시트, 침대 등을 제공해 주기에는 모자람이 있었고, 여기에 출산을 하며 과외를 관둔 배고픈 산모의 <허기진 배>가 생활을 더욱 팍팍한 것으로 만들어 가는 중이었다. 뭔가 결단이 필요했다.


   그즈음, 친하게 지내며 가까운 곳으로 이사 오신 교환교수님 댁 마당 앞에서 총알의 탄피가 발견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우리가 살던 뉴헤이븐(New Haven)이란 도시는, 예일 대학교(Yale University)가 위치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대학가 주변을 제외한 외곽은 우범 지역으로 크고 작은 도난 사건이 자주 일어나고, 마약사건, 그리고 총기사고도 간혹 일어나곤 했다. 정보의 부족으로 우범지대에 집을 구하신 교수님 가족과, 무조건 싼 집을 구하여 살던 우리 가족이 그렇게 이웃이 되었는데, 임신한 당시 집에서 100여 m 떨어진 곳에서 일어났던 살인사건과(시체가 휴지통에서 발견됨), 창문을 열 때마다 아래층에서 슬슬 올라오는 마리화나의 냄새가 하루하루 걱정이 되기도 하였다. 산모용 음식과 함께 아기를 보러 와 주시곤 했던 교수님 내외 분이 우리 집에 오실 때마다 "이 집에서 애를 어떻게 키우려고?"라는 진심 어린 걱정을 많이 해 주셨다. 그리고 때 마침 그 교수님 댁이 총알 탄피 사건 이후로 <이사 갈 집을 서둘러 알아보고 있노라>는 소식이 <우리도 이대로는 안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더욱 견고하게  하였다.


   아기를 데리고 한국에 돌아가야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남편이 박사를 받는 동안 나는 돌아가서 우선 복직을 하고 경제적으로 가족이 다시 생활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것이 급선무였다. 딸아이가 태어나며 처음 덮은 흰 천을 곱게 편 뒤 아기를 그 위에 눕히고, 생후 3주 된 아이의 여권 사진을 찍었다. 자~알 나왔다. 떡뚜꺼비 같이!

   여권을 만들러 이민국에 가니 우리가 나름 애쓰며 찍은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여권 담당자가 불평을 하였다. 배경이 어둡다고 안 될 것 같다고 하는데.. 우리 복둥이가 울기 시작한다. 앙작하는 울음소리에 여권 담당자의 불평이 들어가고 그냥 사진을 달라고 하였다. 여권 통과! 잘했다. 장한 딸!


그렇게 우리 딸은 생후 6주 만에 뉴욕 JFK 공항에서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소중한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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