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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랄라 Jan 15. 2020

노란 손수건

힘든 시간을 이겨낸 딸 아이를 위한 동화

   철봉에 얼마나 걸터앉아 있었는지 엉덩이가 저려온다.

‘선생님은 언제쯤이면 나를 또 찾으러 올까? 파란 하늘 아래 시린 햇빛이 지겨워지는데……. 그래도 교실보다는 여기가 나으니까.’

  저 멀리서 빠글빠글 고슬 거리는 단발머리를 한 모슬리 선생님이 소리쳤다.

   “Oh. Lucy. you again, what are you doing here? why are you still here?

   나는 오늘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 사실할 수도 없지만 말이다. 모슬리 선생님은 작은 눈, 보드라운 검정머리를 쫑긋 올려 묶은 한국에서 왔다는 나의 손을 잡고 교실로 향했다.

   ‘점심시간이 한참 지났는데 아이가 얼마나 오랫동안 철봉 위에 앉아 있던 걸까? 영어는 언제쯤이면 늘까? 차차 적응하겠지. 아직 어리니까.’

   모슬리 선생님의 머릿속에 이런저런 생각이 빠르게 지나갔다. 시끄러운 교실로 들어서자 나는 모슬리 선생님의 손을 재빨리 뿌리치며 교실에 놓여있는 테이블 밑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운이 좋게 벽에 붙어 있는 테이블이다. 이 희멀건 벽은 교실에서 시끄럽게 알 수 없는 언어로 쉴 새 없이 종알거리는 파란 눈의 아이들로부터 나름 안전한 보호막이 되어 주곤 하였다.

   ‘아이들이 다가오면 귀를 두 손으로 막은 채 벽으로 시선을 돌려야지. 그럼 긴장이 덜해 오늘은 오줌을 바지에 지리지는 않을 거야.’

   하루도 빠짐없이 다가오는 Sophie, Claudia, Harry가 모슬리 선생님이 가져온 애완용 토끼에 눈이 팔려 나를 잊어버린 듯했다. 정말 운 좋은 날이다. 그리고 너무나 기쁜 소리. 땡, 땡, 땡. 선생님이 울리는 종소리는 바로 엄마들이 아이들을 데리러 왔다는 소리다.

   “엄마다!!”

나는 금방이라도 흘러나올 것 같은 오줌을 꾹 참은 채 교실 문을 둘러싼 울타리 빗장이 열리자마자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엄마는 눈에 참 잘 띄어서 좋다. 검정머리, 큰 키, 마른 몸, 그리고 이제는 루시(Lucy)가 아니고 ‘유수야’라고 부르는 소리, 다른 엄마들이 흘끗흘끗 엄마를 쳐다봐도 엄마는 루시 대신 ‘유수야’라고 다시 한번 나를 불렀다. 그 소리가 좋으면서도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니까 어색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집으로 도착한 엄마는 밝은 얼굴이지만 슬픈 눈으로 조용히 이야기했다.


   “유수야, 오늘도 노란 손수건 필요해?”

   나는 엄마에게 대꾸도 하지 않은 채 학교에 가 있는 동안 신데렐라를 덮어 두었던 인형의 집에서 노란 손수건을 꺼냈다. 

   “엄마 묶어 주세요!”

엄마는 아무 말 없이 노란 손수건을 내 머리 위에 씌우고 볼살이 통통한 얼굴 아래로 살짝 잡아매어 벗겨지지 않게 고정시켜 주었다. 이제는 안심이다. 검은 머리카락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나도 아이들처럼 머리가 노랗지? 나도 이제 노란 머리야!”

엄마는 여전히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나는 다섯 살, 오늘도 학교에 간다. 엄마랑 아빠랑 영국이라는 나라에 온 지 몇 달은 지나간 것 같다. 엄마가 너무 보고 싶은데, 한시간 이라도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은데, 자꾸 엄마는 나를 무서운 애들이 있는 학교로 보낸다. 아이들은 무슨 소린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며 나를 둘러싸기도 하고, 내 손을 잡아끌기도 하고, 하하하 거리며 자기들끼리 웃기도 하였다. 때로 내 머리카락을 만지거나, 알 수 없이 큰 소리를 내며 내 손을 잡아 끌 때는 그 설명할  수 없는 공포감이 나를 감싸 않았고 그 공포감은 바로 ‘앙.’ 하는 울음소리로 변하고 마는 것이다. 울음으로만 그칠 때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왜 오줌이 자꾸만 나오는지 젖어버린 팬티 앞에서 움직일 수 없는 돌멩이처럼 앉아 있는 것은 곤욕 중에 곤욕이다. 그럴 때면 선생님은 잽싸게 오줌이 묻은 바지를 벗기고 엄마가 마련해 둔 가방 속에 든 여벌 옷을 찾아 얼른 갈아 입혀 준다. 이렇게 하루에 4번 넘게 옷을 갈아입은 날도 있었던 것 같다.


   오늘도 어김없이 테이블 밑으로 향하려는데, 어찌 된 일인지 모슬리 선생님이 나를 교실 밖 다른 장소로 이끈다. 그곳은 내가 있던 교실과는 많이 다른 곳이었다. 커다랗고 말랑말랑한 핑크빛 별이 그려져 있는 노란색 볼이 여러 개 있었는데 그 볼은 엄마의 커다란 요가 볼과 많이 닮아 있었다. 그리고 책상 대신 파란색 바다 색깔 조개 모양의 소파가 있고, 무지개 색깔 줄넘기, 여러 가지 색색의 모래가 들어있는 통들도 있었다. 한쪽 구석 책꽂이에는 글자는 하나도 없고 뭔가 숭숭 알 수 없는 구멍들이 뚫려 있거나 누르면 소리가 나는 책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어쨌든 학교에 와서 이렇게 좋은 장소는 처음이었다. 모슬리 선생님이 곧 거기에 앉아 있던 하얀 머리의 할머니처럼 보이는 선생님과 얘기를 시작했다. 여전히 알 수 없는 말을 많이 했는데 그중에 ‘special’이라는 단어는 알아들을 것 같았다. 스페셜은 뭐 좋은 거니까. 


   얘기를 마친 모슬리 선생님이 떠나고 하얀 머리 선생님이 내 손을 잡아 이끈 곳은 여러 가지 색색의 모래들이 놓여 있는 모래판 안이었다. 빨강, 노랑, 주황, 보라, 파랑과 같은 멋진 색깔 모래들이 나를 유혹했다. 나는 모래들을 살며시 만져보기 시작했다. 편안했다. 아이들도 없고 ‘wheels on the bus goes round and round’ 노래도 마음에 참 들었다. 이렇게 평화로운 시간이 얼마만인지, 학교가 처음으로 좋아질 수도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바로 그때 종소리와 함께 또 다른 선생님이 남자아이 손을 잡고 교실 문을 들어섰다. 하얀 머리 할머니 선생님이 인사했다.

“안녕, 조지?”

조지와 함께 왔던 선생님은 곧 모슬리 선생님처럼 어디론가 가버렸다. 하얀 머리 할머니 선생님은 조지의 손을 잡고 나에게 다가왔다. 

“루시, 이 아이는 조지야.”

조지는 눈처럼 하얀 얼굴에 내가 갖고 싶어 하는 노란 머리를 가진 아이였다.

“아아아, 르루.”

하고 조지가 나에게 인사했다. 조지는 자꾸만 입 한쪽으로 고여 드는 침과 함께 헤헤 웃으며 뭔지 모를 말을 하곤 했는데, 조지의 말은 신기하게도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시간이 흐르면 무슨 말인지 자연스럽게 이해되는 그런 말을 하는 아이였다. 조지는 곧 나에게 핑크 별빛의 말랑말랑한 큰 볼을 굴렸다. 그리고 나도 다시 조지에게 그 공을 돌려보냈다. 한 번, 두 번, 왔다 갔다. 조지는 자꾸 웃었다. 왠지 모르게 나도 웃음이 나왔다. 조지와 공을 굴리고, 소파에 서로 뒹글 거리다가 할머니 선생님과 서로 손 잡고 빙글빙글 돌며 춤도 추었다. 이렇게 신나는 날은 영국 와서 처음이다.


   땡, 땡, 땡. 벌써 엄마를 만날 시간이다. 조지와 함께 사이좋게 그 멋진 장소에서 나오는데 엄마의 눈이 동그래 진다. 엄마는 평소처럼 내 손을 잡았지만 자꾸만 기다리라고 말했다. 모슬리 선생님에게 꼭 할 이야기가 있다고 말이다.

   잠시 뒤 아이들을 모두 보낸 모슬리 선생님은 엄마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 손을 꽉 잡은 엄마의 손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축축이 젖어 있는지 난 알 수가 없었다. 엄마와 모슬리 선생님의 대화는 역시나 내가 모르는 말들뿐이다. 엄마는 왜 저리 슬퍼 보일까? 꼭 내가 노란 손수건을 머리에 씌워 달라고 얘기할 때마다 나오는 그 표정이다. 모슬리 선생님과 이야기를 마친 엄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손을 잡고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나를 조용히 쳐다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유수야, 오늘부터 유수가 다른 교실에서 공부했지? 

   “응, 엄마 나 교실이 아니고 엄청 좋은 곳에서 공부 안 하고 놀았어. 조지랑.”

   “그래, 유수야, 앞으로 학교에서 선생님이 유수 많이 놀게 해 주려고 하는 거야. 나중에 말도 잘하게 되고 긴장도 안 하게 되면 다시 교실로 돌아올 수 있어.”

   “아니야, 엄마, 나는 교실보다 조지가 있는 곳이 훨씬 좋아! 정말 스페셜이야!

   엄마는 슬픈 눈을 한 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집에 도착한 나는 신발을 벗어던지고 노란 손수건을 찾아 머리에 덮어 쓰고 인형놀이를 하기 시작했다. 


   다음날 아침, 나는 교실로 들어가지 않고 할머니 선생님과 함께 그 멋진 곳으로 다시 향했다. 저 멀리 할머니 선생님 손을 잡고 들어가는 내 모습을 바라보는 엄마의 눈이 유난히도 반짝거린다는 생각을 했다. 스페셜한 그곳에는 조지가 먼저 와 있었다. 조지는 커다란 종이에다가 뭔가를 열심히 그리고 있었는데 입 한쪽에서 자꾸 침이 나와 하얀색 티셔츠의 왼쪽 가슴이 이미 반쯤은 젖어 있었다. 


   나는 조지에게 다가가 조지가 그리는 그림을 쳐다보았다. 정말 알 수 없는 그림을 조지는 매우 심각하게 그리고 있었다. 사람인 것 같기도 하고 희끄무레한 물체에다가 온통 주변에 검은색으로 물감 칠을 했는데 검정말처럼 보이기도 했다. 갸우뚱해하며 궁금해하는 내 모습을 보며 조지는 또 헤헤 웃었다. 그리고 갑자기 조지가 검정 물감이 뚝뚝 떨어지는 그 이상한 그림을 나에게 바짝 갖다 대면서

“루... 르... 르.. 루.”

하고 외쳤다. 그 순간 번개처럼 깨달았다. 조지가 그린 것은 남들과 너무나 다른 시커먼 내 머리카락이었던 것이다. 나는 너무나 놀라 ‘앙’하고 울면서 다시 오줌을 싸고 말았다. 오줌이 나오는 채로 조지를 피해 도망치며 있는 힘껏 다해 비명을 질러 댔다. 할머니 선생님이 다가와서는 나를 꼭 안고 뭐라고 말을 했다. 괜찮다고 말하는 듯했지만 울음이 멈춰지질 않았다. 나를 그렇게 놀라게 한 조지도 나를 따라 덩달아 울기 시작했다. 우리들만의 스페셜한 그곳이 비명소리로 꽉 채워지고 있었다. 할머니 선생님은 계속 괜찮다는 말을 하며 분주히 움직였다. 내 바지를 갈아 입혀 주고 검은색 물감을 치우고 조지와 나를 달래면서 달콤한 주스까지 순식간에 마련해 우리를 진정시켰다. 주스를 홀짝 거리던 조지는 나를 슬쩍 바라보더니 다시 헤헤 웃기 시작했고 나도 울음이 더 이상 나오지는 않았다. 우리가 진정이 되자, 선생님은 조지가 그렸던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지에게 이 멋진 그림이 무엇일까?라고 물어보았다. 조지는 다시 나를 가르치며 

   “루, 루, 르 프, 프 티.”

라고 얘기했다. 선생님은 곧 조지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챘고 크게 외쳤다. 

   “조지 너 루시 예쁘다(Lucy, pretty)라고 얘기한 거구나, 그래, 조지 이 그림 정말 예쁘다. 루시 이것 좀 봐, 정말 멋있지?”

라며 나의 손을 잡아끌었다. 나는 슬그머니 그 그림을 다시 쳐다보기 시작했다. 

   “예쁘긴 뭐가 예뻐? 그냥 새까만 머리인데…….”

속으로 생각하며 그 그림을 바라보는데 할머니 선생님이 어디선가 급하게 반짝거리는 풀을 가지고 우리들에게 다시 돌아와 그것을 조지와 나에게 나누어 주셨다. 

   “자, 여기를 봐봐, 선생님은 자신의 손에 반짝이는 풀을 치약처럼 짜내고 양손으로 비빈 다음 조지가 그린 검은색 머리카락 위에 찍어 대기 시작하였다. 그새 바짝 마른 검정 물감 위로 은하수 같은 아름다운 빛이 찍혔다.    선생님은 조지와 나의 손에도 반짝이는 풀을 짜 주셨고 우리는 그것을 서로 비빈 후 선생님이 한 것처럼 검정 머리카락 위에 찍어대기 시작했다. 


   우리가 반짝 거리는 풀을 한번, 두 번, 찍어낼 때마다 조지가 그린 까맣기만 한 검은색 머리카락이 새롭게 춤추기 시작하였다. 달님의 빛을 품은 달무리도 되었고 저 멀리 별님과 함께 춤추는 은하수도 되었다. 온갖 빛을 모두 담아내는 검정 머리카락이 너무나 신기하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선생님은 예쁘다는 소리를 연거푸 내셨고, 조지도 ‘에, 쁘, 에쁘.’라고 외쳤다. 조지가 헤헤 거리며 나를 보았고, 작은 수수깡 같은 손으로 내 머리카락을 만졌다. ‘에, 쁘, 에쁘.’ 하면서 말이다. 


   나는 얼른 일어나 선생님 책상 옆 벽걸이 거울에 내 모습을 비춰 보았다. 내 검정 머리. 조명 아래서 우리가 찍어댔던 무수히 반짝이는 그 빛들이 바로 내 머리카락에서 나오고 있었다. 은색과 금색을 섞어놓은 은은한 반짝임이 고개를 흔들어 될 때마다 머리카락 사이사이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거울 앞에 서서 한참 동안 나 자신을 바라보았다. 신비한 빛을 품어내는 내 머리카락! 나는 너무나 기뻐서 조지와 할머니 선생님을 번갈아 껴안았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 껴안은 채로 빙글빙글 돌면서 춤을 추었다. 

엄마는 오늘도 학교 정문 앞에 서 계신다. 언제나처럼 집에 돌아온 나는 엄마가 빨아놓은 노란 손수건을 바라보았다. 노란 손수건을 바라보는 내 시선의 움직임을 쫓은 엄마가 노란 손수건을 꺼내 내 머리카락을 감싸 주려고 하였다.

“엄마 노란 손수건 하나도 안 예쁘다. 내 머리카락이 예쁜 거야.”

  엄마의 슬픈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리고 그 슬픈 눈이 이제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노란 손수건과 함께 저 멀리 사라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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