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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랄라 Mar 24. 2020

이제야 사람이 보인다

혼란의 시간 속에서

   부정적인 감정들에 충실했던 시간들이었다. 나만 보였고, 우리 가족만 생각했다. 사회적 위기가 닥치고 그 위기가 개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순간들이 적지 않은 혼란으로 개인을 잠식해 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 것은 며칠 되지 않는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나름 정의감 있고 타인을 존중하며 이제껏 배려 있는 생활을 해 왔다는 자아도취적 마인드를 가진 한 아줌마의 실체를 드러내 버렸다. 위기가 닥치니 쌀, 고기, 화장지, 비상약 등 사재기는 당연지사였고, 오로지 이 위기로부터 손해 되지 않게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고 또 실현해 가는 상황들이 내 삶을 채워 나갔다.


   느린 정책 결정에 하루에 몇 번씩은 스웨덴 정부를 욕하고, 보건 당국을 비난하였다. 아이를 계속 학교에 보내라는 학교장에게 항의 메일을 보내고 학부모들이 나의 의견을 지지해 줄 것을 은근히 재촉하는 메일도 반 전체 학부모들에게 보내기 시작하였다. 담임선생님, 학부모, 아이의 학교 교장 선생님에게 일주일 동안 장문의 메일을 남편과 함께 열을 내며 써 내려갔던 시간들이었다. 아이의 학습권을 안전하게 보장해 달라는 학습의 권리를 앞세운 메일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졌지만, 결국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래서 이에 더더욱 분개하고 격분하였다. 학교의 지침과는 달리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기로 선택한 개인의 판단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인터넷 기사들과 자료들에 집중하였다.


   많은 시간을 인터넷 자료들을 찾아 가는데 소비하였다. 수없이 쏟아지는 기사들과 동영상들을 살펴보고 구글 검색란에 갖가지 정보를 찾는 검색어들을 참 많이도 써 내려갔었다. 그리고 그렇게 많은 인터넷 자료들과 함께하다 보니 내가 찾는 자료들 외에 아주 자연스럽게 다른 기사들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읽고 난 뒤 나 자신이 멋쩍고 부끄러워질뿐만 아니라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기사와 짧은 동영상, 인터넷 게시판들의 여러 사진들이 코로나 바이러스의 수많은 메인 기사들과 함께 곳곳에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저는 괜찮습니다> 라며 묵묵히 인터뷰를 이끌어 나간 간호사님, 퇴직금을 기부한다는 생활이 녹록지 못하신 택시기사님, 더 힘들고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위해 자체적으로 봉사팀을 구성한 영국의 작은 마을 이야기, 나이 드신 분들을 위한 호주 슈퍼마켓의 ‘elderly hour’ 운영... 수없이 많은 곳에서, 그리고 아주 많은 나라에서 따뜻한 사람들의 자발적인 활동들이 말없이, 조용히 전개되고 있었다.


   그들이 그렇게 차분히 <나>보다는 <더 힘든 타인>에게 집중하고 있었을 그 시간 동안 나의 에너지는 어디에서 소진되고 있었던 것일까?


   봄을 알리는 소담한 꽃 봉오리를 발견한 지인이 사진을 보내 주었다. 그분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한참 동안 걱정과 우려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나에게 참 많은 사진과, 이야기, 때로는 시간을 즐겁게 소비할 수 있는 다양한 활동들을 소개해 주셨다. 잠시라도 걱정을 잊고 무언가에 집중해 보라는 고마운 충고와 조언을 보내주시는 메시지로 깨닫게 해 주셨는 데, 한참을 받고 나서야 그분의 깊은 마음이 느껴질 정도로 나는 참 둔해 있었던 것 같다.

<지인이 보내준 봄 꽃>

   

어젯밤 우연히 지인과의 연락을 통해 접하게 된 ‘사피엔스’의 작가 유발 하라리의 기고글 <The world after coronavirus, Financial times >이 인상 깊다.

   이 세대가 맞이한 급격하고 위험한 불확실성의 위기 안에서 인간은 결국 어떤 선택을 하게 될 것인가? 봉쇄령이 내려지고 허가증을 써야 외출이 가능한 전체주의 시대가 다시 도래할 것인가? 아니면 개개인의 시민의식을 더욱 공고히 하고 지구촌 신뢰의 연대가 한층 강화된 새로운 사회로의 전환을 맞이할 것인가? 미래를 알 수는 없지만, 선택과 변화의 시기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는 유발 하라리의 생각에 고개를 끄덕인다.

   프랑스에서는 레스토랑과 커피숍을 닫는다는 봉쇄령이 내려지기 전날 밤 시민들이 마지막 밤을 즐긴다는 명목 하에 밖으로 뛰쳐나와 그날 밤을 즐겼다고 한다. 미국에서는 사재기가 한창이고, 한국에서도 클럽을 전전하는 젊은이들이 많다는 기사들이 보인다. 영화 <다크 나이트>의 히 저레스가 인간의 극한 상황이 선한 인간을 악인으로 만듦과 동시에 그들이 지켜온 가치와 의지를 부셔 버릴 것이라는 믿음은, 결국 인간이 그의 생각과는 다른 선택을 내렸을 때 예상치 못한 반전을 불러오며 관중을 압도하였다.


   나는 개인으로서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스스로 자문을 해 본다. 많은 시간들이 지나갔고 앞으로 또한 많은 시간들이 흘러갈 것이다. 위기와 함께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 앞에서 과연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변화해 갈까?

   인터넷에서 박수근 화백님의 작품을 찾아 잠시 들여다보았다. 얼마전 지인이 보내준 박완서씨와 박수근 화백님의 인연이 담긴 동영상이 떠오른다.   박수근 화백님의 작품들은 가끔 정신이 소란스럽거나 무언가에 의해 내 의지가 아닌 대로 흘러갈 때 보곤 했던 작품들이었는데 참 오랜만에 다시 찾아보게 된다. 시든 잎사귀 하나 없는 앙상한 고목나무에 아이를 업고 또는 머리에 무언가를 짊어진 여인네들의 모습...  희망도 새로울 것도 없지만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짐들을 각자의 머리와 등에 묵묵히 짊어진 채 그 시대를 살아갔던 여인네들이 말없는 감동으로 조용히 다가온다.

<박수근 화백님의 그림: 인터넷에서 다운받은 이미지입니다>

 

   차분해져야겠다. 그리고 불평하지 말고 나에게 맡겨진 짐을 짊어져야겠다. 앞으로  이 시대를 살아갈 우리 모두의 사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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