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떼제_끝과 시작, 부활과 순례의 2막

깁스하고 떠난 40일간의 산티아고 순례

| 떼제의 부활 첫 월요일,

Easter Monday Morning

""그러니 가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렇게 일러라. '예수님께서는 전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대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무덤에서 나와 달아났다. 덜덜 떨면서 겁에 질렸던 것이다. 그들은 두려워서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다.(Mark 16.7-8)"

부활절 이후 첫 월요일, 오늘 아침 기도에서 나온 마르코 복음(16.1-7)은 한국서 마르코 복음을 공부했을 때 가장 깊게 다가왔던 부분이었다. 이곳 갈릴래아로 먼저 오셔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던 예수님과 만날 수 있어 감사하다고 생각했다. 이제야 800km 순례길 대신 이곳으로 부르신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아침 기도를 마치고 '사랑합니다 유닛'이 함께 모여 마지막 '떼제 조식'을 즐기기로 했다. 그런데 토마스가 화장실을 갔다 오겠다고 하면서 이상한 방향으로 갔다. 피오나에게 물어보니 "몰라~ 뭐 가져올 게 있나 봐~"하면서 빙긋 웃었다. 밥을 거의 다 먹을 때쯤 헐레벌떡 돌아온 토마스는 케이크를 내밀었다. 


| 피오나's 생일잔치와 마지막 이별

토마스가 직접 구워온 피오나의 생일 케이크

직접 구워 조금 투박스럽게 생겼지만 맛은 정말 좋았다. 나는 "이게 정말 네가 직접 만든 거야?"라고 10번 넘게 물어봤다. 토마스에게 아까 이상한 소리 하면서 뛰어갈 때 너무 티가 났다고 했더니 볼이 발그레해지며 웃었다. 토마스와 피오나는 떼제에서 몇 번 만났던 사이인데 알고 보니 사는 동네도 같아서 특별한 사이처럼 보였다. 


어쨌든 키야와 나는 '사랑합니다 그룹'이 헤어지기 전 1유로씩 걷어서 떼제 기념품샵에서 준비한 '떼제의 상징 십자가 펜던트'와 롤링페이퍼를 대표로 전달했다. 오늘 아침 멤버 벨기에 토마스와 싱가포르의 줄리아까지 함께 축하해주고 각 나라의 언어로 생일 축하 인사를 건넸다. 피오나에게 들키지 않고 서프라이즈 생일파티를 준비한 뒷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는 한없이 웃는데 피오나는 늘 그렇듯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여리여리하고 핑크색을 좋아하는 피오나는 K-POP에도 관심이 많고 비보잉을 즐기는 반전 매력에 속이 깊은 친구여서 나눔 할 때 특히나 사랑스러웠다. 이렇게 눈물을 글썽일 때가 많았는데 떼제의 마지막 날 생일파티라니 모두가 피오나를 따라 울다 웃다 했다. 


키야는 이제 바로 떠나고 독일 토마스와 피오나는 한두 시간 있다가 같은 방향인 사람들과 합승해서 간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우선 '할 수 있을 때' 오래오래 작별인사를 했다. 식사시간에만 종종 마주쳤던 벨기에 토마스와 싱가포르 줄리아와도 이제야 SNS 친구를 맺고, 이메일 주소를 교환하고 작별인사를 했다. 


| 10시, '떼제 1주 차' 체크아웃

떠나는 날에는 10시까지 방을 비워줘야 한다고 해서 인사를 마치고 서둘러 방으로 돌아갔다. 우리 방에는 이제 나와 이탈리아 할머니, 둘만 남았다. 은빛 숏커트가 매력적인 할머니는 '코 고는 사람들'이 먼저 다 가서 지난밤은 아주 편하게 잤다면서 찡긋 윙크를 해주셨다.

이제 정말 체크아웃 준비를 할 시간! 떼제의 체크아웃은 조금 특별하다. 별도의 하우스키퍼가 없이 자기 자리와 방을 사용할 다음 사람을 위해 내가 첫날 누군가에게 받았던 것처럼 각자 직접 원상복귀를 시켜놓는 것이다. 보통은 침대 시트와 베개 시트를 갈고, 빗자루와 물걸레로 바닥을 청소하고 환기를 시켜놓는 정도의 일을 한다. 전체 샤워장 청소나 주방, 복도 청소 등을 담당하는 사람들도 모두 봉사의 개념으로 일을 하는 것이지 돈을 받고 근무하는 사람은 없다.

떼제 유경험자였던 프랑스 줄리엣과 호주 의사 아주머니는 청소를 깔끔하게 하고 갔는데 포르투갈 두 친구는 그대로 두고 가서 할머니와 내가 대신 청소를 했다.  

떼제 접수처' 한글 보이죠?!=)

청소를 마치고 할머니와 찐한 인사를 나누고 배낭을 다 챙겨 사무실에 왔더니 또 닫혀있었다. 사무실도 그렇고 매점도 그렇고 떼제의 모든 곳은 봉사자들에 의해서 운영되기 때문에 시간을 잘 맞춰서 가야 한다. 물어볼 곳도 없어서 꼼짝없이 11시 반까지 기다려야 했다.


체크아웃을 하고 시간이 남으면 부활절 달걀 찾기를 하던 풀밭에서 독일 토마스와 피오나를 다시 만나기로 했던 것이 기억나서 다시 배낭을 들고 뒤편 풀밭으로 갔다. 떼제는 은근히 넓어서 사무실에서 옛날 숙소 뒤편까지 배낭을 메고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동안 숙소에 큰 배낭을 두고 크로스백이나 에코백만 들고 다녀서 다리가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한 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다시 발이 찌릿찌릿 저려왔다. 


캠핑카를 타고 온 또 다른 가족과 독일 피오나, 토마스와 함께 우리로 치면 자치기나 비석 치기 놀이와 비슷한 '스위디시 체스'를 여러 판 했다. 한참 재미있어졌을 때 피오나의 카풀을 해주기로 한 운전자가 왔다. '사랑합니다 유닛'과 작별 인사를 하고 이제 정말 혼자 남아야 하는 때가 왔다. 


| 멀고도 험한 체크인의 길

with 싱가포르 천사

다시 소환하는 떼제의 지도와 떼제의 도마뱀

친구들과 인사를 하고 다시 배낭을 메고 걸어서 사무실 쪽으로 나왔는데 이번에는 또 기도시간이라 문이 닫혀있었다. 오후 접수는 3시 반부터였다. 성당 안에는 안전을 위해 큰 짐가방은 들고 들어갈 수 없게 돼있어서 기도에 참여하려면 다시 짐을 놓는 큰 텐트까지 걸어가서 짐을 놓고 돌아와야 했다. 


생각만 해도 지쳐서 돌 위에 앉아 쉬고 있는데 도마뱀들이 돌 틈에서 왔다갔다 했다. '왜... 앉아있지도 말라는 거냐...' 떼제 첫날의 악몽이 떠오르며 못난이가 다시 등장하기 시작했다. 원래 오늘 점심도시락도 신청했었는데 받으러 가는 타이밍을 놓쳐서 도시락도 못 받아 점심은 꼼짝없이 굶어야 했다. '그래 아까 케이크 많이 먹길 잘했네...' 배불리 먹은 아침 덕분에 배가 고프진 않았지만 기분이 계속 가라앉았다. 


'이렇게 기다렸는데 또 접수가 잘못되어서 잘 데가 없으면 어떻게 하지?!' 수녀님이 잘못 적어준 접수 날짜가 마음에 걸렸다. 수녀님이 기간을 4월 22일부터 일주일 침묵 피정이 아니라 4월 15일부터로 접수증에 적어주셨는데 그걸 오늘 아침에서야 발견한 것이다. '으이그... 바보 멍청이. 내가 너 이럴 줄 알았다.' 어두운 마음들이 스멀스멀 다시 올라왔다. 

닫힌 사무실 문 

혼자 앉아서 멍하니 어두운 생각의 꼬리들을 따라다니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나를 불렀다. "여기서 뭐해? 아직 숙소 배정 안 받았어?" 아침에 같이 밥을 먹고 작별인사까지 했던 싱가포르 줄리아였다. "응? 너는 여기서 뭐해? 집에 간거 아녔어?"


"아~하하하, 마콩 역에가서 기차를 타려고 하는데 오늘 표가 아니라는 거야~ 그래서 다시 봤더니 내가 내일 기차표를 예매했더라고~하하하하, 그래서 하루 더 자고 가려고 다시 올라왔지~ 하핫" 줄리아는 연신 웃는 얼굴로 "정말 웃기고 황당하지 않냐"며 상황을 설명했다. 나도 내 '멍청이 짓'을 들려주며 같이 웃으며 넘길 수 있었다. 감사했다. 


줄리아는 자기 도시락을 함께 먹자고 했다. 빵, 과자, 사과, 작은 것 하나도 나눠주며 "너도 놀랐겠다. 그냥 우선 같이 기다려보자. 힘내"해주었다.


줄리아는 내 발의 안부도 챙겨 묻더니 가벼운 자기 가방과 바꿔 들자고 했다. 괜찮다고 했지만 막무가내로 내 가방을 대신 짊어지고 웃으며 "괜찮아! 여긴 떼제니까"라고했다. 우리는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할 시간이 생김에 서로 감사했다.


싱가포르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대학원을 다니고 있다는 줄리아는 엄마의 영향으로 어렸을 때부터 떼제에 자주 오고 있다고 한다. 오래전에 침묵 피정도 해봤다고 했는데 자기는 침묵 피정이 떼제에서 가장 좋았고 언젠가 다시 한번 꼭 해보고 싶다고 했다. 

첫주차의 등록증과 식권

즐겁게 수다를 떨다 보니 벌써 3시 반, 접수가 시작되고 나와 줄리아는 줄을 서서 함께 들어갔다. 나는 수녀님께 받은 접수증을 보여주며 '침묵 피정' 접수를 하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모든 것이 봉사자 체제로 굴러가는 떼제의 또 다른 오류가 발생했다. 침묵 피정이라는 것에 대해 잘 몰랐던 봉사자가 나에게 일반 숙소를 배정해 준 것이다. 옛숙소와 같은 라인의 260번 방이었다. 뭔가 이상해서 "이거 침묵 피정 숙소 맞니?" 몇 번이나 확인했는데 봉사자는 계속 맞다고 안내했고 나는 일주일 체류 접수비를 내고 배낭을 챙겨서 숙소로 향했다. 


나와는 다른 도미토리로 배정을 받은 줄리아는 두 갈래 길이 나올 때까지 내 배낭을 들어주었다. 우리는 숙소에 짐을 두고 다시 식사를 하던 잔디밭에서 만나기로 했다. 


숙소에 들어갔더니 이미 도착해서 짐을 풀고 있는 독일 아주머니가 계셨다. 'Happy Easter'로 시작해서 자기소개를 하고 배낭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아주머니도 침묵 피정하시는 것 맞나요?!" 그분은 밝게 웃으며 아니라고 하셨다. 도착한 또 다른 한 명도 침묵 피정은 신청 안 했다고 했다. 뭔가 잘못된 게 분명했다. 

2주차 잘못받은 등록증과 식권

너무 무거운 내 10kg 배낭은 그 숙소에 잠시 맡겨두고 다시 접수처로 확인을 하러 갔다. 이번 주에는 단체 방문객이 많은지 접수처는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입구의 봉사자에게 "침묵 피정에 들어가기로 했는데 배정해준 숙소에는 침묵 피정인 사람이 없대요. 침묵 안 하는 사람들과 같이 지내면서 혼자만 말 안 하는 게 '침묵 피정'맞아요? 별도의 공간에서 머문다고 들었는데 뭔가 잘못된 것 같아요."


그녀는 숙소 봉사자에게 다시 설명하라며 나를 그쪽으로 보냈다. 그녀는 또 나를 책임자처럼 보이는 봉사자에게 보냈다. 나는 똑같은 얘기를 세 번이나 해야 하는 것에 점점 화가 나고 있는데 그 봉사자는 내 이야기를 듣지도 않고 오히려 나에게 화내듯이 말을 했다. "뭐가 문제니? 침묵 피정은 여기서 방 배정받는 게 아니야. 돈은 냈니? 돈 냈으면 끝난 거야. 나가. 여기는 아니야." 황당했다. 영어를 잘 못하는 건지, 내가 영어를 못한다고 생각해서 명령조의 단어들만 나열하는 건지, 정말 화가 났다. 


"그럼 방은요? 어디서 신청해야 하는 거예요? 저기 있는 봉사자가 나한테 이 방을 줘서 갔는데 거기는 내가 지난주에 묵었던 곳이고 침묵 피정하는 사람이 없다고 했어요. 나만 말 안 하는 게 침묵 피정 맞아요? 소리 지르기 전에 설명을 해줘요!" 그제야 그 봉사자는 나를 밖으로 데리고 나와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접수증에 적힌 시간에 맞춰 수녀님께 가면 그때 그곳에서 숙소를 안내해줄 거라고 말해주었다.

옛날 숙소를 지나며

숙소에 짐 풀고 만나기로 했던 곳에 안 나오니 접수처까지 줄리아가 찾아왔다. 상황을 이야기했더니 줄리아는 "오늘같이 사람이 많을 때는 다들 예민해져서 그런가 봐, 하하하하" 하며 공감해주고 웃어 넘겨주었다. 접수처에서 실랑이하는 사이에 벌써 수녀님과의 약속시간인 5시가 다 되어갔다. 


줄리아는 또 다시 내 배낭을 대신 메고 수녀님 계신 곳까지 데려다주었다. "시간도 많고 할 일도 없는데 뭐, 심심해서 그래~ 하하하하하" 줄리아의 웃음소리는 걱정을 멈추고 웃음을 가져오는 신기한 효과가 있었다. 이제는 쓸모 없어진 등록증과 식권은 또 어떻게 하냐고 중얼거리자 "떼제의 모든 건 다 기념품이 되니깐 일단 챙겨가~ 하하하하하하"했다. 줄리아에게 "어쩜 너는 그렇게 긍정적이니, 오늘 너 없었으면 나 아마 엄청 우울하고 슬펐을 것 같아. 정말 고마워. 넌 천사야"라고 이야기해주었더니 그녀는 특유의 웃음으로 호탕하게 "나도 그렇지 뭐, 너 아니었으면 오늘 나도 우울할 뻔했어~ 하하하하하"라고 이야기했다. 

 

아침부터 짐을 들고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한 건지 멘붕이었던 떼제의 첫날이 기억났다. 줄리아에게 고맙다고 이야기하고 저녁기도시간에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고, 그렇지만 못 볼 수도 있으니 미리 인사하자고 서로 꼭 안아주었다. "내일도 또다시 오진 않을게~하하하하하" 웃으며 헤어졌다.


| 5시, '떼제 2주 차' 체크인_@침묵 피정

수녀님의 작은 정원에는 사람들이 몇몇 모여있었다. 어색하고 떨리는 눈인사를 마치고 짧게 오리엔테이션을 받은 후에 걸어서 15분 거리, 차로는 5분 정도의 침묵 피정 숙소로 출발했다. 다들 첫날이라 짐이 많다고 티코 크기의 오래되고 낡은 차에 짐과 사람을 꽉 채워 이동했다.  

침묵 피정의 집

떼제 옆 마을까지도 사람들은 종종 산책을 갔지만, 난 이쪽으로는 처음이었다. 예쁘고 아기자기한 마을을 지나서 옛날 성 같은 숙소가 나왔다. "우와..."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수십 명은 머물 수 있는 이 큰집에 폴란드에서 온 아가타, 독일에서 온 또 다른 줄리아, 나, 그리고 우리를 돌봐주는 하우스키퍼 봉사자, 러시아에서 온 빅토리아까지, 4명이 침묵 피정을 하게 되었다. 

침묵 피정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새로운 일정들

이곳의 일정과 규칙들을 듣고 서로 머물 방을 정했다. 수녀님이 성경공부를 위해 매일 아침 이곳으로 직접 와주실 거고 침묵은 내일 오전부터 시작할 거니까 지금은 말을 해도 된다고 했다. 아직은 모든 것이 낯설었지만 프랑스의 시골 마을에 와 있는 것처럼 아름답고 깔끔한 집에 반해서 기분이 쓱 좋아졌다. 무엇보다 '이게 얼마 만에 독방이냐!' 싶어 그것만으로도 감사했다. 


나는 새로 지은 부분의 2층 방을 선택했는데 내 옆옆방에는 독일에서 온 또 다른 줄리아가 들어갔다. 아가타와 빅토리아는 옛날 건물 부분이지만 좀 더 넓은 방을 한층씩 차지했다. 방에는 세면대와 작지만 책상과 의자, 난방시설까지 설치되어 있어서 너무 신이 났다. 


| 나만의 방과 '루카스 스파이더'

침묵피정 숙소와 루카스 스파이더

그런데 그것도 잠시, 침대 머리맡 천장에 '거미'가 눈에 띄었다.  


'사랑합니다 그룹'의 키야는 지난 한주 내내 '루카스 스파이더'라는 노래를 부르며 다녔는데 독일의 어린이들이 영어를 배우기 위해 만들어진 거미 캐릭터라고 했다. 물론 다른 독일 친구들은 처음 들어본다고 했지만...;;


키야는 내가 풀밭에 앉기를 두려워하거나 개미, 거미 등의 벌레를 보고 놀랄 때마다 "이건 그냥 벌레잖아. 신이 우리처럼 만든 창조물"이라며 "내 이름은 루카스~ 루카스는 거미~"로 시작하는 노래를 불러주었다. 내가 '두려워하지 마라, 나다, 용기를 내어라'라는 성경 말씀에 대해 나눔을 할 때도 "앞으로는 두려울 때마다 우리 귀여운 친구, 루카스를 기억"하라며 노래를 불러주었다.

소박하지만 깔끔한 침대

그 루카스가 내 방, 그것도 얼굴 바로 위의 천장에 붙어있었는데 나는 또다시 놀라고 말았다. 


마침 옆 옆방에 독일 줄리아가 있길래 "너 혹시 거미 잡을 수 있니?"라고 물어보며 줄리아에게 상황을 알리고 도움을 청했다. 줄리아는 키야랑 짜기라도 한 듯이 "이거 그냥 거미일 뿐이야. 널 헤치지 않아. 두려워하지 마. 그리고 이미 죽었는데?!"라며 종이로 거미를 잡아 창밖으로 버려주었다. 그리고 내가 귀엽다는 듯 웃었다. 


덕분에 우린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친해질 수 있었다. 그녀는 침묵 피정을 이전에도 해봤다며 '정말 일주일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가능한 지' 묻는 나에게 "그럼, 당연하지, 우리가 침묵할 때 그분의 소리를 들을 수 있거든. 난 떼제의 침묵 피정이 정말 좋아. 치유받고 영혼이 건강해져서 나갈 수 있거든! 너도 좋아하게 될 거야"하며 다시 빙긋 웃어주었다. 마음이 한결 편해지고 진정되었다. 


| 오롯이 혼자만의 '저녁기도'

혼자 갔던 '첫 저녁기도'

저녁을 빠르게 먹고 20분 거리의 떼제 성당으로 '저녁기도'를 갔다. 두리번거렸지만 싱가포르 줄리아는 찾기가 어려워 왼쪽 앞부분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모두 떠나고 다시 혼자가 되었다. 새로운 곳은 꽤나 괜찮다. 거미, 벌, 두려운 것들이 가득하지만. 독일 하우스메이트 줄리아와 싱가포르 줄리아도 이곳 어딘가에서 함께 기도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큰 위안이 된다. 저녁에는 떼제의 첫날 먹었던 콩죽인지 콩 비빔인지가 똑같이 나왔는데 첫날보다는 덜 차갑게 느껴졌다. 예수님께서 보자고 하던 갈릴래아. 과거, 미래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놀랍도록 섬세한 손길이 느껴진다. 감사하다. 
독일 줄리아의 쪽지와 오늘의 발걸음

숙소에 돌아왔더니 방문 밑으로 줄리아가 쪽지를 써서 밀어 넣어놓았다. '보경, 주님이 너에게 가서 말하래. "두려워하지 마라!" 신의 축복이 있길!=)' 또 눈물이 울컥했다. '감사해요 주님, 두려워하지 않을게요'중얼거렸다. 


오늘 왔다 갔다 하느라 떼제 안에서만 2만 보 넘게 걸었다. 발이 욱신거리고 부활절 밤부터 차가운 물만 나와 제대로 씻지 못했더니 뜨거운 물 샤워가 절실했다. 이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감사했다. 


씻고 나와서 침대에 기대어 오랜만에 한국으로 전화를 했다. "엄마 난 잘 지내고 있어. 오늘도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잘 지나갔어. 이사한 곳은 훨씬 좋아. 독방도 있고 뜨거운 물도 콸콸 이야~! 한국은 별일 없지?!"


엄마의 목소리는 무언 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았고 나의 끈질긴 추궁 끝에 결국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또 갑자기 두려워졌다. '그래 여기와서 너무 행복하다 했어.' 내 안의 못난이가 또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러니 가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렇게 일러라. '예수님께서는 전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대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무덤에서 나와 달아났다. 덜덜 떨면서 겁에 질렸던 것이다. 그들은 두려워서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다.(Mark 16)"


깁스하고 떠난 40일간의 순례 기록 <이상한 순례길> '떼제_끝과 시작, 부활과 순례의 2막'편으로 2막을 맞이하게 되는데요. 이후에는 [떼제의 침묵 피정-고흐의 마을 '프랑스 아를'- 사랑합니다 그룹 마리아의 고향 '스페인 바르셀로나'- 대망의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스페인 마드리드' -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독일 뮌헨' -파리-한국]으로 돌아오는 일정을 묶어보려고 합니다. 


한편 한편 거북이걸음으로 써 온 저의 발자취를 따라 여기까지 와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서른다섯이나 먹은 애가 시집도 안 가고 멀쩡하게 다니던 회사까지 그만두고, 발에 깁스는 해가지고 산티아고를 향해 40일간의 여정을 떠날 때, 돌아서서 눈물을 훔치면서도 허락해주신 저의 첫 번째 독자 '엄마'에게 이 책을 드립니다. 아파서 함께 갈 수 없었던 많은 곳들을 이렇게라도 함께 걸으며 전해주고 싶었던 부족한 딸에 대한 이야기, <이상한 순례길>의 나머지 일정들도 한편으로 묶어 곧 여러분들과 함께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2019년 11월 서울에서 보경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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