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떼제 침묵피정의 마지막 하루, '기쁨으로의 초대'

깁스하고 떠난 40일간의 산티아고 순례

기도와 묵상, 떼제 노래와 자연의 소리들로 마음을 채우고, 소박한 음식들로 배를 채우고, 몸과 마음이 온전히 충만해짐을 느꼈을 때, 떼제에서의 마지막 하루가 밝아왔다. 안개가 가득하고 흐렸지만 괜찮았다. 


생각해보면 침묵 피정 내내 비가 거의 매일 왔는데도 우울함에 빠져 허우적대지는 않았다. 비가 내리면 '해가 곧 비추겠지'하고 기다리며 기도와, 묵상, 예술가 시간을 즐겼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정말 해가 비추고 기분까지 쓱 밝아졌다. 감사하고 소중한 보름이라는 시간의 '마지막 하루'도 역시 동물친구들과 함께 시작했다.

떼제로 가는 길 만나는 동물친구들

오전 7시가 좀 넘어 떼제로 향할 때 가장 먼저 만나는 양들, 엄마 젖을 열심히 찾는 새끼 양과 이슬 촉촉한 풀을 열심히 뜯는 엄마 양, 버스정류장에서는 어제의 애교냥이를 또 만났다. 내 검은색 바지에 털을 잔뜩 묻히고 도도하게 사라지는 냥이를 지나면 그윽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소들과 눈이 마주친다. 신기한 언어로 말하는 새들과 촉촉한 바람, 풀냄새, 꽃들도 하나하나 느끼고 인사하고 성당에 도착해 말씀을 만났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Matthew 28.20)”


마태오복음 끝부분이었다. 갈릴래아로 떠난 열한 제자는 예수님을 뵙고 '더러는 의심하였다'고 성경은 전한다. 그런 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명을 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내가 언제나 함께 있겠다." 말씀을 받아 들고 언제나처럼 벚꽃나무집으로 돌아왔다. 수녀님과 마지막 성경공부가 시작되었다. 


| 떼제에서의 마지막 성경공부

'기쁨으로의 초대'

벚꽃나무집 정원에서 본 벚꽃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Luke 24.32-35)"


침묵 피정의 전체 주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다' 중에서 마지막 부분, 제자들이 돌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는 장면과 요한복음의 '부활하시다'를 함께 읽었다. 다른 복음서들에 나오는 '부활'부분도 추가로 함께 읽고 지난 한 주간을 종합해보기로 했다.

마지막 묵상 주제

요한복음에 따르면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에서 사라졌다'고 제자들에게 이야기한다. 제자들은 직접 달려가 '보고 믿었다'.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복음서들 간에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마리아 막달레나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만나고, 그 이야기를 제자들에게 전하지만 그들은 믿지 않는다. 그리고 몇몇 제자들에게 먼저 나타나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완고하다. 심지어 제자들 한가운데 나타나실 때에도 그들은 유령을 본 것처럼 놀란다. 마리아 막달레나 역시 처음에는 예수님을 정원지기로 착각했다고 성경은 전한다. 

벚꽃나무집 정원

'예수님 시대의 제자들이 이러한데 우리가 '보지 않고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너무나도 자주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으려 하니까. 


하지만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아야 믿겠다'한 토마스에게 '그렇게 해보라'하시고,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제자들과 함께 머물며 성경의 말씀을 직접 설명해주시는 그분은 우리 중 어느 누구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각자에 맞는 방식으로 자신에 대해 알려주시는 분, 우리의 눈과 귀가 열릴 때까지 문 밖에서 노크하며 기다릴 줄 아시는 분이셨다.

벚꽃나무집 정원으로 이어지는 옆문

수녀님은 예수님의 몸이 사라지고 나서, 부활한 후가 정말 '새로운 시작'이지 않겠냐고 하셨다. '육'이 사라져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언제나 함께 계신 분', 성경 말씀을 통해서, 자연을 통해서, 이웃의 말들을 통해서, 각자에게 알맞은 방법으로 '일깨워주시는 분'. 한 주동안 묵상했던 '엠마오로 가는 길'의 제자들은 자신들이 만난 부활하신, 늘 함께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제자들은 그곳에서 서로 자신들이 만난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수녀님은 '누가 얼마나 알아들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발견한 것들을 내 삶 안에서 실천하고 공유할 책임이 있는 것'이라고 덧붙이셨다. 이것을 '기쁨으로의 초대'라고 부르시며, 우리도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이 떼제에서 만나고 느낀 '기쁨'을 표현하고 나누자고 하셨다. 이렇게 마지막 시간이 끝나고 우리는 기념사진을 찍고 연락처를 교환했다. 다만 내일 오전 식사시간까지는 침묵을 지키기로 했다. 


| 수녀님과의 마지막 면담시간 

'기쁜 소식을 전하는 기쁜사람'

수녀님과의 마지막 면담시간,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두렵다"고 말씀드렸다. "이곳에서의 시간이 없었던 일처럼 되면 어떡하냐고, 돌아가면 여기서 보고 느꼈던 모든 것들을 다 까먹을 것 같다고, 모든 게 다시 옛날로 돌아갈 것 같다고, 가기 싫다고", "여기서 초막 셋을 지어 살고 싶다는 성경 속 베드로의 말이 떠오른다"고 말씀드렸다. 


수녀님은 특유의 미소와 반짝이는 눈빛으로 대답하셨다. "그 어떤 것도 이 소중한 시간을 네게서 빼앗아 가진 못 할 거야. 물론 기억이 흐려질 수도 있고, 바쁜 일상 속에서 잊고 지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네게서 이 기억이 꼭 필요한 그때, 다시 떠올려 주실 거야. 기억나게 해 주실 거야.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를 내. 이 기쁜 소식을 전하는 기쁜 사람이 되길 기도할게." 해주셨다. 


또 눈물이 고였다. '그래, 내가 또 두려워하고 있었구나.' 떼제의 첫날, 이 벚꽃나무집의 첫날처럼,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나는 또 두려워하고 있었다.  

루카스 스파이더 "don't be afraid"의 상징

"그러니 가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렇게 일러라. '예수님께서는 전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대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무덤에서 나와 달아났다. 덜덜 떨면서 겁에 질렸던 것이다. 그들은 두려워서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다.(Mark 16.)"

 

내 두려움의 상징 '루카스 스파이더'와 침묵 피정 첫날의 마르코 복음 말씀이 함께 생각났다. 세 여인들은 가장 먼저 기쁜 소식을 들었지만 '두려워서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다.' '두려움'이라는 것은 '단절'을 의미하는 것 아닐까. 수녀님 말씀대로 용기를 내어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랐다. 이젠 귀여운 내 친구 '루카스 스파이더', 거미가 거미줄의 한가운데를 중심으로 동그랗게 동그랗게 집을 넓혀 나가는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중심에 두고 기쁜 소식을 넓게 퍼뜨려나가는 그림이 떠올랐다.


| 떼제 벚꽃나무집의 마지막 '예술가 시간'

떼제에서의 마지막 예술가 시간
어떻게 지나는지도 모르게 떼제에서의 보름이 지났다. 루르드가 치유의 기적을 보여주었다면, 떼제는 일상으로의 파견을 준비하는 천국 같았다. 여기, 특히 침묵 피정을 하는 동안 만났던 모든 순간들에 감사하다. 그분의 섬세함을 느낄 수 있었다. 거미로 시작해서 거미로 끝나다니... 오늘은 클레이 작업까지 하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더 이상 이 천국에 머물지 못하는 것이 아쉽지만, 우리는 돌아가서 이 충만한 기쁨을 공유해야 할 책임이 있으니까!

수녀님과 인사를 하고 다시 개인 묵상 시간으로 들어갔다. 지금까지 그린 그림들을 좀 더 보강하고 정원 한편에 마련되어 있는 도예 작업실로 가서 찰흙을 좀 꺼내왔다. 원하면 그릇도 만들 수 있다고 수녀님이 첫날 말씀하셨는데 이제야 용기를 냈다. 흙을 조물조물 만지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꽃 한 송이와 웃는 얼굴, 십자가를 만들었다. 작은 십자가는 떼제에 묵을때 호주 의사 아주머니가 나에게 주고 간 것처럼 옆방의 독일 줄리아에게 편지와 함께 작별 선물로 건넸다. 줄리아도 내게 멋진 말씀과 함께 이별 편지를 건넸다.

독일 줄리아의 정성 가득 손편지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여러분과 그들이 마음에 용기를 얻고 사랑으로 결속되어, 풍부하고 온전한 깨달음을 모두 얻고 하느님의 신비 곧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갖추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물이 숨겨져 있습니다.(Colossians 2.2-3)"


콜로새서 말씀이었다. 내가 얼마나 멋지고 사랑받는 존재인지 잊지 말라는 편지와 함께였다.


| 떼제 벚꽃나무집의 마지막 '산책 시간'

향긋한 앞집의 보랏빛 꽃과 내 아지트로 가는 길목의 십자가, 말들, 작은 예배당, 알록달록 동화마을 같은 이웃집들, 넓은 초원과 소떼들의 식사시간을 지나서 떼제에서의 마지막 저녁기도로 향했다.


| 토요일 밤의 떼제 '빛의 예식'

떼제의 토요일 저녁기도에서는 꼭 부활절이 아니더라도 '부활의 빛'을 상징하는 촛불과 함께 기도를 한다. 또다시 익숙한 말씀이 들려왔다.


"그러니 가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렇게 일러라. ‘예수님께서는 전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대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Mark 16.7)"


갈릴래아가 마지막 복음이라니 놀라웠다.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라는 말씀을 품고 한국을 떠나왔었다. 나보다 앞서 걸어가는 그분의 발걸음을 따라 나는 또다시 떠나야 했다. 떼제에 있는 동안 보고 느꼈던 기쁜 소식, 'joy'을 가지고 두려워하지 않고 돌아가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 프랑스 떼제에서의 마지막 밤 

휴대전화 손전등을 켜고 떼제 노래를 흥얼거리며 벚꽃나무집으로 돌아갔다. 어디 멀리 갔던 것도 아닌데 오늘 하루에만 2만 보 넘게 걸었다. 떼제의 마지막을 보내기 싫었던 내 아쉬움만큼이었다. 자정 가까이 되어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서 다이어리를 꺼내 들고 한참을 적었다. 


* 내가 실천할 수 있는 떼제와 기억할 것들

기도하는 시간과 장소 정하기, 새벽 미사 전후 

성경과 친해지기, 복음서부터 읽어보자

악기로 찬미하고, 그림으로 표현하기 (우리는 모두 예술가니까)

모든 것은 제안, 인생에 '꼭 해야만 하는 것'은 없다

한분 외에 '모든 것은 바뀔 수 있다는 것' 받아들이기

지금, 여기, 그분과 함께 현존하기

내 정체성,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 그리고 사랑하기

신이 만든 독특하고 아름다운 나를 느끼고 사랑하기(신은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잃고 싶어 하지 않으니까)

신이 만든 다른 모든 피조물들도 존중하기

내 의식주는 스스로 책임지기, 소박하고 단순하게 살기

40일간의 기록을 사진, 글, 이야기, 콘텐츠로 사람들과 공유하기

기쁨,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길


그리고 저의 이야기는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기쁜 사람'이 되는 건 여전히 쉽지 않지만, 삶에서 지칠 때마다 이때의 기록들이 최소한 저에게는 힘이고 '기쁜 소식'임으로, 또 누군가에게, 단 한 명에게라도 작은 희망을 전할 수 있는 '기쁜 소식'이길 바라며 오늘도 <이상한 순례길>을 한 자 한 자 적어봅니다.


깁스하고 떠난 40일간의 순례 기록 <이상한 순례길>, 떼제의 '침묵 피정(Silence Week)'까지 마치고 드디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향해 다시 이동을 시작합니다. 다음은 프랑스 남부, 고흐 마을 '아를'로 갑니다. 끝까지 함께 걸어주실 거죠?!=)


이전 04화 떼제의 두번째 금요일, 시간이 지난 후에야 보이는 것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