깁스하고 떠난 40일간의 산티아고 순례
떼제를 떠나는 날이 드디어 밝아왔다. 동화 속에나 있을 것 같은 아름다운 벚꽃나무집에서의 일주일은 감사함의 연속이었다. 부활이 끝나고 모두 빠져나간 덕분에 네 명이서 이 넓은 집에 머물며 침묵할 수 있었던 건 정말 행운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은 정원과 나무, 꽃, 풀, 자연을 더욱 가까이서 즐길 수 있었고 그만큼 신의 흔적 또한 가까이서 알아채고 느낄 수 있었다.
비가 흩날렸지만 평소처럼 정원에 흩어져 소박한 아침식사를 하고 그동안 우리를 품어주었던 방과 벚꽃나무집 전체를 청소했다. 무엇이든 허용되는 떼제에서 몇 안 되는 '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모두 '내가 받은 것'을 기억하며 기꺼운 마음으로 함께했다. 오후에 도착하는 새로운 집주인들을 위해 침대와 베개 시트를 갈고 청소기를 돌리고, 샤워장, 거실, 화장실을 청소했다. 우리가 그전에 머물던 사람들에게 '받은 것'대로 말이다.
내 방이 있다는 것의 소중함, 방 안에 세면대와 거울과 작은 책상까지 있다는 것의 완벽함, 따뜻한 물로 샤워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함을 한꺼번에 느꼈던 벚꽃나무집의 첫날이 떠올랐다.
성경 나눔을 하던 테이블과 일용할 양식을 나누며 어설픈 음감으로 떼제 노래를 함께 부르던 식탁, 쌀쌀한 날씨를 견디게 해 준 여러 종류의 차들과 칠하고 붙이고 쓰고 뭐든 다 만들어 낼 수 있었던 'creativity room', 하얗고 네모난 창 밖으로 보이던 정원과 나무들, 작지만 멋진 우리만의 기도실 경당, 모든 것이 완벽한 이곳에서 무엇보다 '잘 먹고 잘 자고, 몸과 마음이 충만하게 건강해져, 치유받아 나갈 수 있음에 감사했다.
모든 공간들을 비우고 가방을 챙겨서 나선형 1층 계단 밑에 두면 하우스키퍼 봉사를 하는 빅토리아가 첫날 우리를 실어온 낡고 작은 차로 짐들을 떼제의 수녀님이 계신 El Abiodh에 옮겨두기로 했다. 벚꽃나무집에서 떼제까지 거리가 꽤 있기 때문에 무거운 짐을 들고 이동해야 하는 수고를 덜어준 것이다. 또 10시에 있는 성찬예식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성당에 들어가야 하는데 성당에는 트렁크나 배낭처럼 큰 짐을 들고 들어갈 수 없으니 떠나는 시간에 맞춰 각자 자유롭게 짐을 찾아가기로 했다.
헤어지는 것이 못내 아쉬웠는지 떼제로 가는 길 내내 비바람이 쳤다. 활짝 피어있던 프랑스 4월의 꽃들이 떨어지거나 꺾이고 있었다. '꽃은 비바람에 졌지만 또 다른 꽃이 피어날 거야. 계속 걸어 나아가자' 중얼거리며 어느새 떼제에 도착했다. 오전 10시 주일 성찬예식을 알리는 떼제의 종이 치고 있었다.
마콩 빌레 역에서 1시 55분에 출발하는 기차를 타야 해서 여유 있으려면 12시 30분에는 떼제에서 떠나야 했다. 하지만 주말이라 버스가 많지 않아 그런지 배차간격이 커서 기차역에서 한 시간을 기다리더라도 떼제에서 10시 반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야 안전했다. 30분이라도 성찬예식에 참여하고 싶어 성당으로 들어갔다.
밝혀져있는 부활초를 보며 늘 앉던 십자가 아래서 떼제의 보름이라는 시간에 감사드렸다. 상처투성이로 왔던 나를 이곳으로 직접 불러주시고, 함께하고 있다고 이렇게 찐하게 몸으로 느끼게 해 주시다니, 처음 산티아고 순례길을 계획할 때는 정말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인간의 머리를 뛰어넘는 신의 계획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느낄 수 있었다. 어떠한 말과 글, 사진으로도 담아낼 수 없는 무언가를 분명히 믿게 됐음에 감사했다.
귓가에 하루 종일 맴돌 떼제 노래를 뒤로하고 시간에 맞춰 성당을 나서는데 늘 지나던 통로의 스태인드 글라스가 눈에 들어왔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예수님을 잉태할 거라고 예고하는 모습이었다. 마리아의 적극적인 순종, 적극적인 선택,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앞으로 어떤 길을 걷게 될지 상상할 수 없지만,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아멘" 성호경을 긋고 성당을 빠져나왔다.
El Abiodh 처마 밑에 트렁크 2개와 함께 놓여있는 배낭을 챙겨 메고 입구 종탑 쪽으로 걸었다. 버스 시간이 다된 것 같았지만 사진은 한 장 남기고 싶어 지나가던 사람을 붙잡았다. 방금 도착했다는 내 또래 일본인 여자였다. '동양인은 많은지, 일본인은 봤는지, 떼제에 얼마나 있었는지, 어땠는지' 사진을 찍으면서 질문을 퍼부었다. 나는 활짝 웃으며 답했다.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았어. 떼제가 처음이라고?! 나도 그랬어. 분명히 너도 떼제를 사랑하게 될 거야. 모든 걸 다 치유해주는 이곳을!" 내가 처음 떼제에서 들었던 말처럼 말이다.
숙소에 열쇠가 없다는 것도 가방을 놓고 돌아다니는 것도 못 견디게 불안했던 떼제의 첫날과는 많이 변한 내 모습에 웃음이 났다.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를 내서, 지금, 여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며, 일어나 다시 한 걸음씩 나아가자.' 다짐했다. 주저앉아 울던 나를 일으켜 세워준 이곳을 평생 동안 기억하고 싶다.
떼제의 첫날처럼 버스 한 대가 꽉 차서 기차역으로 향했다. 버스에서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 조나단을 만났다. '사랑합니다 그룹'과 함께하며 부활을 기다리던 떼제의 첫 주에 종종 마주쳤던 한국계 캐나다인 가족이 있었는데 엄마와 아들 둘이 함께였다. 홍콩 친구 리타가 '한국인을 만났다'며 소개해주어 함께 식사를 하곤 했다.
어머니와 동생은 부활절 후에 먼저 돌아가고 조나단은 남아서 침묵 피정을 하며 수사님들과 함께 일주일을 지냈다고 했다. 종종 기도하러 떼제에 왔을 때 마주치긴 했지만 침묵 중이라 서로 웃어주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떼제에서 마콩 기차역까지 오는 한 시간 동안 그 덕분에 심심하지 않았다.
마콩 역은 보름 전에 비해 북적거렸다. 대부분 떼제에서 마주쳤던 얼굴들이었다. 파리를 거쳐 북유럽 쪽으로 간다는 조나단을 먼저 보내고 나는 떼제 첫날의 악몽을 선사해줬던 '추억의 리옹(Lyon Part Dieu)역'을 지나 아를로 가는 기차를 기다렸다.
고등학교 동창들이 함께 모여 독일에서 왔다는 아주머니들의 수다를 한참 듣다가 무사히 기차에 올랐다. 고흐의 마을 '아를'은 어떤 모습일까. 떼제에 대한 아쉬움보다 새로운 곳에 대한 설렘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아를(Arles)'은 프랑스 남동부, 프로방스 지역의 도시로 론강의 하류에 위치해있다. 고대 로마 시대에 번성기를 누리다 16세기 무렵 론강 하구의 토사가 퇴적되어 메워지면서 상권이 마르세유로 넘어가 쇠퇴하였다. 로마의 원형극장, 원형경기장, 목욕탕, 지하묘지, 12세기의 생트로핌 성당 등 고대와 중세의 유적이 곳곳에 남아있어 현재는 관광산업의 비중이 가장 크다. 원형경기장, 생트로핌 성당 등은 '아를의 로마시대와 로마네스크 기념물' 목록에 포함되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19세기에는 빈센트 반 고흐가 '해바라기',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 등 수백여 점의 작품을 그린 곳으로도 유명하다.
숙소까지 오는 길에도 고흐의 손길과 옛 유적들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아를강가 바로 앞에 위치한 숙소에 짐을 풀고 나니 저녁 6시가 조금 넘었다. 떼제에서 10시 반에 출발해서 하루를 꼬박 이동했더니 지치고 힘들었지만 숙소 밖으로 보이는 아를강가가 너무 아름다워서 짐만 풀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아를강가부터 발길 닿는 대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바람이 심하게 불었지만 파란 하늘과 따뜻한 햇빛은 걷는 것으로도 기분이 좋아지게 만들었다. 오는 길에 검색하면서 봤던 고대로마의 원형경기장과 그 시절부터 있었을 것 같은 프로방스의 오래된 집들, 집집마다 저마다의 색으로 칠해놓은 창문들과 거기 매달려있는 작은 식물들이 참 예뼜다.
원형경기장을 지나 더 올라가니 문 닫힌 작은 예배당이 있었고 그 앞으로 엄청난 바람과 함께 엄청난 뷰가 펼쳐졌다. 아를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이곳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빨간색 지붕들이 오밀조밀 붙어있는 모습이 눈 부시게 아름다웠다. "감사합니다"하며 성호경을 긋고 왼쪽 가슴을 두 번 톡톡 치며 기도를 드렸다.
우연히 갔지만 동네 경치를 보기 좋은 곳이라서 그런지 사진기를 들고 사람들이 꽤 드나들었다. 멋진 경치와 바람에 놀라 돌아서면 따뜻한 햇빛을 쬐며 졸고 있는 고양이를 마주친다. 벚꽃나무집 앞 버스정류장에서 만나던 고양이와 그곳의 동물친구들이 떠올라 벌써부터 그리워졌다.
다시 경기장을 끼고 반대방향으로 걸어 나가면 작은 광장을 지나 카페와 레스토랑들이 몰려있는 골목들이 이어진다. 좁은 골목길을 반쯤 걸어가다가 내일을 위해 남겨두고 다시 돌아 나왔다. 원형경기장을 따라왔던 길을 다시 돌아왔다. 어느새 아를강가의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강가에 기대어 한참을 있다가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맥주와 간단한 저녁거리를 사들고 숙소로 들어갔다. 숙소는 오래되고 낡았지만 깔끔했다. 침대에 누워 아를강가에 밤이 내리는 걸 가만히 지켜보았다.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이 찾아왔다. 천국 같은 떼제에서 나와 들르는 첫 번째 쉼터로 아를은 완벽한 선택이었다. 빛나는 별만큼이나 아름다운 아를에서의 하루가 저물었다.
고흐가 파리에서 아를로 넘어온 게 서른다섯 살 되던 해 2월이라고 한다. '좀 더 일찍 이곳에 왔으면 좋았겠다.'고 말했다는 고흐와 같은 마음으로 한참을 아를 강가에 서 있었다. 그와 같은 나이에 이곳에 와서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파리 생활을 접고 아를에 와서 1년간 200여 점의 작품을 남긴 고흐는 지독한 추위와 우울함 대신 일 년 내내 작업을 할 수 있는 이곳의 태양을 그림에 가득 담아냈다. 그의 그림은 밝아지고 빛이 났다. 나도 이 시간들을 내 인생에 가득 담아내 밝아지고 빛 날 수 있을까. 다시 도시로 나온 첫날, 아를은 너무 완벽하게 아름다웠다.
깁스하고 떠난 40일간의 순례 기록 <이상한 순례길>, '침묵 피정(Silence Week)'까지 떼제에서 보름을 머물다 드디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향해 다시 이동을 시작했습니다. 끝까지 함께 걸어주실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