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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vence Arles] 고흐의 유토피아, 아를

깁스하고 떠난 40일간의 산티아고 순례

네덜란드 출신 화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는 파리에서 2년여의 생활을 마치고 이곳 아를로 와서 1888년 2월부터 다음 해 5월까지 머문다. 프로방스의 파란 하늘과 강렬한 태양 속에서 그는 200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네덜란드 시절의 어두웠던 작품에 파리 생활부터 색감이 들어가기 시작하고 아를에서부터는 풍부한 색채들로 강렬한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고흐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그의 작품들은 물론 동생 테오와 주고받았던 편지글들을 통해서 그의 매력에 빠져있던 나로서는 아를에서의 시간이 흥분되고 감사했다. 그가 이곳에 처음 도착했던 나이와 같은 나이에 같은 공간에서 삶을 잠시 멈추고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게 된 것이 새삼 신기하고 감사했다. 35살의 고흐는 이곳에서 무엇을 꿈꿨을까. 

아를의 론강

알프스산의 론 빙하에서 시작해 떼제 전에 들렀던 프랑스 리옹(Lyon)을 거쳐 이곳 아를까지 흘러오는 '론(Rhône) 강'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곳에 머물게 된 것도 참 감사할 일이었다. 주인아저씨 부부가 무척 친절했는데 혼자 강을 보며 아침을 먹는 나를 보고는 사진기사를 자청하며 여러 각도로 기록을 남겨주셨다. 


구시가지는 걸어서 15분, 20분이면 충분하다며 지도에 볼거리들을 표시해주셔서 감사를 표하며 숙소를 나섰다. 강바람이 아직 찼지만 고흐도 반했던 파란 하늘과 뜨거운 태양이 여전해서 걷기에 딱 좋았다. 어제 숙소 오는 길에 봤던 고흐의 노란집부터 제대로 보고 싶어 역 쪽으로 걸었다.


#고흐의 '노란집'

고흐의 '노란집'이 있던 광장

광장의 분수가 뿜어내는 물로 작은 무지개가 생겨 환영인사를 받는 것 같았다. 고흐는 아를 역과 가까운 이곳에 집을 빌려 생활하면서 '노란집(The Yellow House)'을 그렸다. 1888년 9월 작품이다. 2차 세계대전을 지나고 그때의 집은 남아있지 않지만 오른쪽 뒤편의 기찻길은 여전해서 고흐의 그림과 현재를 이어주고 있었다.


"태양빛 아래 노란집들과 청색의 비할 데 없는 산뜻함이란 굉장해."


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도 그의 말대로 '태양빛 아래의 집들과 청색'의 대비가 주는 산뜻함만큼은 굉장했다. 고흐는 이곳 아를에서 화가들의 공동체, 유토피아를 꿈꿨고 실제로 고갱이 '노란집'에서 10월부터 2개월 정도를 고흐와 함께 생활했다. 해바라기를 좋아하는 고갱을 위해 고흐가 그의 대표작 '해바라기'를 그리게 됐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두 달 만에 고갱이 떠나고 결국 그의 꿈이 실현되진 못했지만 고흐 덕분에 아를이 많은 사람들에게 유토피아가 되어주고 있음은 확실해 보였다.  


#구시가지 Amedee Pichot 분수

동그란 교차로가 있는 광장에서 오래된 성문(Porte de la Cavalerie) 안으로 들어서면 줄지어 있는 레스토랑과 카페들 사이로 두 갈래 길목에 오래된 그림과 분수, 그 너머 원형경기장이 보인다.

'Fontaine Amedee Pichot'는 파리 생 미셸 분수에서 영감을 받아 아를의 작가이자 번역가였던 Amedee Pichot(1795-1877)의 아들 Pierre-Amedee Pichot에 의해 1887년 설치되었다. 작은 타일을 모자이크 형식으로 붙여 만든 동그란 메달은 아를 출신 화가 Paul Balze(1815-1884)가 사망 직전 파리에서 전시했던 작품이다. Pierre-Amedee Pichot은 이 메달을 전시하기 위해 이 곳의 집을 구입해 기념관을 세웠다. 파리의 건축가 Joseph Flandrin가 디자인하고 Paul Balze의 형제인 Raymond Balze, 화가이자 기업인 Ferdinand Besse가 공동작업을 했다. 현재 분수는 작동하지 않고 건물은 바(bar) 등으로 운영된다.

골목골목 고흐 이전의 로마시대부터 있었을 것 같은 아치와 건물들이 아름답다.

Fondation Vincent Van Gogh Arles

고흐의 마을답게 그림을 그리는 아틀리에와 독특한 갤러리들이 눈에 띄었다. '빈센트 반 고흐 재단(Fondation Vincent van Gogh Arles)'은 고흐 기념사업을 하는 비영리재단으로 한 가지 주제에 고흐와 현대 작가의 작품을 함께 배치하는 전시들을 선보인다. 건물 자체도 15세기 주택에 현대적 요소를 가미했다. 걷기 좋은 날씨에 실내 전시는 다음으로 미루고 길을 따라 걷다 보니 다시 고흐와 마주쳤다. 


#고흐의 '아를 병원의 정원'

L'espace Van Gogh
고흐의 '아를 병원의 정원(The Courtyard of the Hospital at Arles)'은 1889년 4월 작품이다. 고흐가 다니던 병원은 현재 시민문화회관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그의 그림 속 동그란 분수를 가진 정원과 노란색 아치들은 놀랍게도 그대로다. 고갱이 아를을 떠난 후 고흐는 자신의 귀를 자르는 등 정신적으로 힘들어했다. 나중에는 아를 근교 생레미(Saint Rémy)의 생폴 병원(Saint-Paul de Mausole)에 1년여간 입원하기도 했다. 그곳에서도 그는 계속해서 그림을 그렸다. 

고흐 그림의 진한 노란빛이 슬프게 느껴지는 이유다. 1층에는 기념품샵들이 늘어서 있는데 쉬거나 앉아있을 곳은 없어서 오래 머물지는 못하고 돌아 나왔다. 계속해서 걷다 보니 높이 솟은 오벨리스크가 눈길을 끈다.


#아를 '오벨리스크(Obelisque d'Arles)'와 '세인트 앤 성당'

오벨리스크는 고대 이집트에서 태양 신을 숭배하는 의미로 세워지던 첨탑이다. 아를의 오벨리스크는 4세기경 전차경기장, '로마 서커스' 첨탑 주변에 세워졌다가 6세기 후반 두 동강이 났다. 14세기에 다시 발견되어 앙리 4세 때 원형 극장 중앙에 배치됐다가 태양왕이라 불리는 루이 14세 때 이곳으로 옮겨졌다. 이동에만 40일이 걸렸다고 한다. 이후에도 사자조각과 분수 등 개보수가 끊임없이 이루어졌고 현재의 모습이 완성된 것은 1867년이다. 1981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오벨리스크를 둘러싸고 '생 트로핌 대성당(Cathedrale Saint-Trophime)'과 아를 시청사, '세인트 앤 성당(Eglise Sainte-Anne d'Arles)'이 위치해 광장을 이루고 있다. '세인트 앤 성당' 아를 시내 최초의 교구 성당이었지만 프랑스혁명 이후 폐허가 되었다가 복원되어 2009년부터는 문화센터로 기능하고 있다. 내가 방문했을 때도 일반에 공개되지 않는 전시행사를 진행해서 내부는 들어가 볼 수 없었다.

프랑스 곳곳에 오래된 성당들이 많은데 어떤 곳은 Eglise, 어디는 Basilique 다양하게 표기되어 있다. 이는 성당의 규모나 의미에 따라 구분된다. 불어인 Eglise는 영어 Church와 동일한 개념으로 '일반적인 성당'을 일컫는다. Chapelle은 영어의 Chapel과 같이 성당, 수도원, 학교 등에 속해있는 '작은 성당'을 말한다. Cathedrale은 영어의 Cathedral처럼 주교좌성당, 즉 교구의 중심이 되는 '대성당'을 말한다. Basilique는 Basilica로 루르드의 로사리오 대성당처럼 '종교나 역사적으로 특별한 의미가 있는 성당'을 의미한다.


#생 트로핌 대성당(Cathedrale Saint-Trophime)

세인트 앤 성당 바로 맞은편에는 '생 트로핌 대성당'이 위치해 있다.

'생 트로핌 대성당(Cathedrale Saint-Trophime)'은 중세 로마네스크 건축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아를 첫 주교 트로핌 성인(Saint-Trophime)에 봉헌되었다. 트로핌 성인은 3세기 중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파견되어 아를의 첫 번째 주교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다만 5세기부터 이 지역에서는 그를 바오로의 제자로 성경에도 언급되는 트로피모(Trophimus) 성인과 동일시했다고 하는데 이 부분에서 혼란이 시작된다. 현재 가톨릭 성인 목록에서 'Saint-Trophime'은 검색되지 않는다. 

트로핌 성당은 고대 성벽 근처에 위치하다 5세기경 'St. Stephen 대성당' 자리에 옮겨져 오랜 시간에 걸쳐 현재의 모습이 되었는데 대부분의 기념비들은 12세기부터 세워지기 시작해서 15세기 중반에서야 완성되었다. 특히 성경의 '최후의 심판'장면을 묘사한 성당 정문의 팀파눔(tympanum) 조각이 유명하다. 사람(마태오), 사자(마르코), 황소(루카), 독수리(요한)가 예수 그리스도를 둘러싸고 있고 그 아래에는 12명의 제자가 새겨져 있다. 성당 안에는 생 트로핌의 유해와 또한 아를의 주교였던 생토노라(Saint Honoratus; 호노라토 성인) 유해가 담긴 석관이 모셔져 있다.
최후의 심판 장면이 새겨진 팀파눔

거대한 입구를 한참 올려다보다가 내부로 들어가면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벽화와 조각들을 마주하게 된다. 

생 트로핌 대성당 내부

떼제에서 묵상했던 '예수님의 세례'장면과 '천사와 마리아의 만남'이 눈에 들어왔다. 내부를 두세 바퀴 둘러보고 다시 정문으로 나왔다. 


#생 트로핌 대성당 안뜰과 수도원

문화센터와 간호학교로 일부 쓰이고 있어서 입구를 놓치기 쉽지만 트로핌 성당 입구 옆의 아치로 들어서서 작은 공터 구석의 문으로 들어서면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트로핌 성당 안뜰과 수도원이다. 

트로핌성당의 안뜰과 수도원 공간

마치 다른 세상으로 시간여행을 온 것처럼 순식간에 주변이 조용하다. 멋진 회랑들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시원한 바람과 파란 하늘, 따뜻한 햇빛을 즐길 수 있는 루프트탑이 나온다. 성당이 내려다보이는 이곳에서 새소리를 즐기며 앉아 쉬었다. 한참 뒤에 다시 겨우 몸을 일으켜 광장 쪽으로 나오니 사람들이 시청 건물로 들락날락하는 게 보였다. 나도 따라 들어갔다. 


#로마 포룸과 지하 회랑(Cryptoportiques du Forum)

뭔지도 모른 채 안내문을 받아 내려가는데 왠지 으스스했다. 한참을 내려갔더니 지하 회랑에 통로들과 공간들이 얽혀있었다. 작은 방들도 여럿 보이고 물이 지나갔던 수로, 환기구도 보여서 또 하나의 완벽한 도시를 이루고 있었다. 현재는 어두컴컴한 곳에 조명을 적절하게 배치해서 갤러리처럼 꾸며놓았다. 

그리스 시대의 아고라처럼 로마시대에는 포룸(Forum)이 광장 역할을 했다. 아를의 포룸은 기원전 25~10년경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 세워졌다고 한다. 포룸 광장의 지하 회랑(Cryptoportiques)은 기원전 46년에 설립되었다고 하는데 아직도 발굴 중이다 보니 그보다 더 오래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U자 모양의 지하 회랑은 로마시대에는 경사지 위에 세운 포룸 광장을 안정화시키는 건축학적인 용도로, 5세기 초부터는 공간이 세분화되어 금고, 감옥, 가게, 시장 등으로 다양하게 활용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17세기에는 목욕탕도 있었을 것으로 본단다. 이곳 역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까지 구경을 하고 나니 기분이 묘했다. 어둡고 답답했던 지하에서 나오니 햇빛이 더 강렬하게 느껴졌다. 천천히 샌프란시스코의 언덕을 떠올리게 하는 골목을 올랐다. 또 하나의 세계유산, 트로핌 성당의 첨탑 뒤편에 위치한 고대 극장 앞에 섰다.


#아를 고대 극장(Theatre antique d'Arles)

'아를 고대 극장(Theatre antique d'Arles)'은 기원전 1세기 말에 건축된 극장으로 만여 명을 수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5세기에는 주택과 교회가 들어섰다가 1834년 철거하고 복원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오케스트라 공연장 등으로 여전히 사용된다. 현재는 기둥 일부와 남쪽 계단만 남아있지만 '아를의 비너스' 등 주요 유물들이 발견된 장소이기도 하다. 

남아있는 기둥의 높이가 어마어마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리를 잡고 이 오래되고 거대한 돌덩이들을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시원한 바람과 따뜻한 햇빛, 오래된 유물 한가운데 서있자니 가슴이 벅차 왔다. 관중석에 앉아 빛들과 바람을 즐기며 한참을 앉아있었다. 

떼제에서는 자연 속에서 지냈다면 이곳에서는 프로방스의 전원과 고흐, 신과 자연, 그리고 인간이 만든 가장 오래된 것들에 둘러싸여 있다. 2천 년 전과 현재가 공존하는 게 신기하다. 돌덩이 하나도 그대로 보존해서 지금의 것과 함께 간직하는 것. 너무 아름답고 감사하다. 정말 큰 선물이고 축복이다. 오늘 이 발과 이 눈과 이 손으로 이 순간에 초대해주심에 감사하다. 

사실 밖에서도 높은기둥과 내부가 훤이 들여다보여서 입장료를 내면서까지 들어가야 할지 고민했었는데 들어오겠다고 했던 내 결정에도 감사했다. 충만해진 마음으로 다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를 원형 경기장(Arenes d'Arles)

어디서나 눈에 띄는 '원형경기장' 입구에는 고흐의 '아를 원형 경기장(Spectators in the Arena at Arles)'이 서 있다. 고갱과 함께 지내던 시절의 그림이다. 경기장보다 관중들에 더 집중되어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기원후 90년 로마시대에 세워진 '아를 원형 경기장(Arenes d'Arles)'은 2만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경기장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당시 계급 등에 따라 나뉘어 경기를 관람할 수 있도록 관중석은 34개의 구획으로 구분되어 지어졌다. 5세기 말까지 검투사들의 대결이나 맹수와 사람의 싸움 등을 오락거리로 제공했으며 중세시대에는 벽체 안에 예배당 2개와 주택 212채를 지어 요새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 건물들은 1825년 철거되고 현재는 투우 경기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관중석 맨 위에 작은 요새까지 올라갈 수 있는데 맨 꼭대기에 오르면 아찔한 높이에서 아를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고 론강까지 시원하게 보인다. 다만 바람이 엄청 몰아쳐서 오래 있기는 어려웠다. 돌아 내려오는데 로마시대의 검투사가 대기하고 있을 것 같은 원형경기장에서 뮤직비디오 촬영이 한창이다.

4인조 보이밴드였는데 모두가 관중석에서 숨죽이며 촬영을 지켜보고 있었다. 영화 코코에 나오는 기타 치는 소년의 모습이 떠올랐지만 나도 카메라에 안 잡히게 숨어 구경하다 나왔다. 


뜻밖의 아를 관광을 제대 하며 너무 많이 걸었더니 발목이 다시 아파왔지만 멈출 수 없었다. 숙소 근처의 반쯤 무너져 내린 것 같은 오래된 건물만 둘러보고 쉬자는 생각으로 계속 걸었다.  


#로마 콘스탄틴 목욕탕(Thermes de Constantin)

4세기 로마 콘스탄틴 황제 때 세워진 '목욕시설(Thermes de Constantin)'로 역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론 강 가까이에 위치해 강물을 끌어다 장작으로 끓여서 뜨거운 물을 공급했다고 한다. 냉탕을 비롯해 사우나, 체육시설까지 다양한 온도와 형태로 목욕을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진 시설이다. 로마시대의 목욕탕은 단순히 몸을 씻는 곳을 넘어 정치와 사교의 장이었다고 하는데 이곳은 궁전의 일부였다고도 한다.

주차장 너머로 언뜻 봐도 세월이 느껴지던 외벽, 그 건물이 천년이 넘은 목욕탕이었다는 것 자체가 흥미로웠다. 규모도 엄청나고 탕의 개수도 크기도 다양해서 얼음동굴과 한증막, 헬스장이 있는 우리나라의 대형 찜질방이 떠올라 신기하면서도 계속 웃음이 났다. 


아를의 세계유산 도장깨기

숙소로 돌아가려다 해가 지려면 아직 한참이기도 하고 '아를의 세계유산' 중 문 닫힌 'Reattu 현대미술관'을 빼면 딱 한 군데 남은 거라 아까운 마음이 들었다. 6번에서 5번은 끝에서 끝이었지만 다시 힘을 내보기로 하고 아를의 골목 속으로 들어갔다. 

아를의 아름다움은 이렇게 오래된 건물들과 초록, 빨강 집집마다 개성 있는 색깔의 창문들, 파란 하늘, 자연과 인간이 만든 것과의 조화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 골목마다 내 발길을 잡았다.


#고흐의 '공원에서 신문 읽는 남자'

여름공원(Jardin d'été)

발이 아파올 때 고대 극장 옆으로 작은 공원이 나온다. 프랑스어로 Jardin d'été, '여름공원'이라는 뜻이다. 

Jardin d'été은 18세기에 조경이 시작되어 1820년대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아직 발굴 중이라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겨울공원도 있다고 한다. 이 '여름공원'은 고흐의 '공원에서 신문 읽는 남자(Man Reading a Newspaper in the Public Garden)'의 배경이 되었다. 1888년 9월 작품이다. 

그래서인지 고흐의 얼굴 조각이 공원에 세워져 있다. 규모면에서는 크지 않지만 울창한 공원의 끝에는 고대 성벽 타워가 남아 있는데 이곳의 교차로를 넘어서면 옛 성문 밖, 구시가지 밖으로 나가게 된다.


#알리스캄프(Les Alyscamps)

'알리스캄프(Les Alyscamps; 알리스캉)'는 파리 샹젤리제(Champs-Élysées)의 프로방스식 표현으로 '엘리시온(Elysion)의 들판'이라는 뜻이다. 엘리시온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사후에 신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만 가서 불멸의 상태로 지낼 수 있다고 믿은 일종의 낙원을 말한다.

고갱과 고흐가 작업했던 장소로, 이곳을 배경으로 각각 2점, 4점의 작품을 남겼다고 알려져 있다. 그림은 고흐의 '알리스캄프, 떨어지는 단풍(Les Alyscamps, Falling Autumn Leaves)' 1888년 작품이다.

고대 묘지들은 성벽 밖에 주요 도로를 따라 위치했는데 이곳도 아우렐리아 도로(la via Aurelia)를 따라 조성된 여러 묘지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4세기경 순교자 제네스트 성인(Saint Genest; Genesius 제네시오)과 아를의 첫 번째 주교 생 트로핌(Saint Trophime)이 안장되면서 명성을 얻었다. 11세기 중반 생토노라(Saint Honorat; Honoratus; 호노라토 성인) 이름을 딴 수도원이 생기고 산티아고 순례길의 주요 순례지가 되었다. 12세기에는 생토노라 성당(église Saint-Honorat)이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다시 세워졌다.
석관들과 église Saint-Honorat
하지만 트로핌 성인의 유해도 생트로핌 대성당으로 옮겨지고 묘지 유물들이 약탈당하기 시작했다. 석관이 농가의 가축 여물통으로 쓰이기도 하고 15세기까지 묘지 절반이 파손된다. 특히 1584년 근처에 크라폰느 운하(Craponne Canal)가 건설되면서 훼손이 심각해진다. 18세기에 도시 곳곳으로 흩어졌던 유물들을 다시 모으고 정리하려는 고고학적인 노력이 있었지만 19세기에 주변에 철도가 들어오면서 다시 주춤했다. 1980년대 이후 현재까지 계속해서 복원되고 있고 역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석관이 양쪽으로 줄지어 늘어서 있는 길을 한참 따라 걷게 되는데 나무들의 키가 너무 높아서 낮에도 햇빛이 가려지는 느낌이었다. 포룸의 지하회랑 보다는 밝았지만 조용하면서도 스산한 기운이 넘쳤다. 꽃가루까지 눈처럼 날려 코가 간질거렸다. 재채기를 하며 걷다 보니 길 끝에 '생토노라 성당' 건물이 나온다.


1500여 년이나 묘지로 쓰였던 곳을 현재의 사람들은 연신 사진을 찍어대며 구경했다. 명품 브랜드 구찌는 이곳에서 패션 컬렉션을 선보였다는 기사도 기억났다. 기분이 이상했다. 누군가에겐 영원한 안식의 낙원, 누군가에겐 죽음을 묵상하는 순례지, 누군가에겐 관광지, 누군가에겐 일터. 언제나처럼 각자의 시간이 흘렀다.


숙소로 가는 길

문 닫을 시간에 거의 딱 맞춰 나왔다. 알리스캄프에 영향을 줬다는 크라폰느 운하와 이제는 멈춰버린 옛 기찻길을 지나 다시 숙소로 향했다. 중세부터 주요 순례지였다고 하더니 구시가지로 가는 길에 조개 모양의 순례자 표식이 자주 눈에 띄었다.

크라폰느 운하와 옛 기차길, 그리고 순례자 표식

아를의 대표적 세계문화유산을 클리어했다니 신기했지만 하루 종일 걷느라 발목을 포함한 온몸이 심하게 아파왔다. 이렇게까지 관광객 모드로 모든 곳을 둘러볼 생각은 아니었는데 좀 더 느긋하게 즐기지 못한 것이 아쉽고 옛날의 나로 돌아가는 것 같아 불안했지만 이제는 이런 부족한 '나다움'도 미워하지는 않기로 했다.

오히려 열정적인 나를 칭찬하며, 돌아가는 길에는 떼제의 어느 날처럼 지나며 만나는 모든 꽃과 풀과 나무들에 참견을 하며 천천히 걸었다. 지도도 보지 않고 발길 닿는 대로 가겠다고 하다가 길을 몇 번 잃기는 했지만 그래도 무사히 광장 쪽으로 걸어 내려올 수 있었다. 포룸 광장에서 숙소로 갈 때 지나는 곳이 있다.


#고흐의 '아를 카페테라스'

'반 고흐 카페(Le Cafe Van Gogh)'는 고흐의 '아를 포룸 광장의 카페테라스(the Cafe Terrace on the Place du Forum, Arles, at Night)' 배경이 된 곳이고 현재도 영업 중이다. 평이 좋지 않아서 들어가 보지는 않았지만 최근에는 맛도 서비스도 나아졌다고 한다.


"푸른 밤, 카페테라스 가스등이 불을 밝히고 있어. 그 위로는 별이 빛나는 파란 하늘이 보여. 검은색 없이 아름다운 파란색과 보라색, 초록색만 사용했어. 특히 이 밤하늘에 별을 찍어 넣는 순간 정말 즐거웠어. 모파상의 소설 '벨 아미'는 거리의 밝게 빛나는 카페들과 함께 파리의 별이 빛나는 밤을 묘사하며 시작되는데 이 장면은 내가 방금 그린 것과 비슷한 거야"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글이다. 평소 즐겨 찾던 카페(Café de la Gare) 내외부를 그리던 이 무렵부터 그는 밤에 작업하는 것을 즐겼다. 고갱이 아를에 오기 전 1888년 9월 작품이다. 그의 또 다른 대표작 '론 강의 별이 빛나는 밤(Starry Night over the Rhone)'도 같은 시기의 작품이다. 고흐 말처럼 여전히 '카페의 노란 불빛이 짙은 청색의 하늘과 대비'되어 낮보다 밤에 더 운치 있게 아름다웠다. 이 모습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해 밤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카메라를 들고 이곳을 찾는다. 


아를의 밤은 낮보다 아름답다?!

숙소로 돌아와 침대로 직행해 한동안 누워있었다. 그래도 아를의 마지막 밤이 다 지나기 전에 몸을 일으켜 좀 즐기고 싶었고 무엇보다 배가 고팠다. 한국을 떠난 지 한 달, 가장 맛있게 먹은 음식이 루르드에서 만난 한국인의 밥상과 쌀국수였는데 구시가지에는 분위기 좋은 '프로방스 가정식'을 파는 곳이 많다고 해서 제대로 된 레스토랑에 혼자서라도 가보기로 했다. 천근만근한 몸을 이끌고 방을 나섰다. 


원형경기장 뒤편까지 걸어 올라가야 했는데 낮보다 더 북적이는 것 같았다. 그런데 숙소에서 너무 오래 쉬었는지 미리 골라둔 식당들이 모두 만석, 손님을 받지 않는다고 했다.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는 곳으로 뛰어 들어갔다. 손님이 아무도 없어서 영업을 하는지 물었더니 아저씨가 활짝 웃으며 앉으라고 하신다.


#아를에서 맛 본 모로코

약간 불안했지만 배는 고프고 비는 내리고 근처 식당들은 다 만석이라 우선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았다. 혼자 운영하시는 건지 나를 맞아주었던 셰프로 보이는 아저씨가 직접 메뉴판을 가지고 오셨다. 불어 메뉴판 뿐이었는데 나는 불어를 못하고 아저씨는 영어를 못하셨다. '비~프, 메(양 울음소리)~램(lamb), 꿀꿀(돼지 울음소리)~피그(pig)' 단어와 손짓, 표정들로 알 수 없는 요리를 주문했다. 알아들었던 몇 안 되는 단어로 이곳이 나에게 생소한 '모로코 음식점'이라는 것을 알게 됐을 뿐이었다. 더 불안해졌다.


물과 와인, 빵이 먼저 나왔는데 물에서 생선 맛이 났지만 배가 고파 불평 대신 먹기 시작했다. 바구니에 있던 빵을 순식간에 비워갈 무렵 애피타이저가 나왔다. 짰지만 리필된 빵과 함께 먹으니 먹을만했다. 메인 메뉴는 나오지도 않았는데 배가 불렀다. 그때 '웰던'한 거대한 스테이크가 등장, 너무 구워져 질기긴 했지만 익숙한 맛이었다. 와인과 곁들여 먹는 사이에 이 식당도 만석이 되었다. 사람이 많아지자 아들인지 아르바이트생인지 청년이 나와서 서빙을 담당했다. 영어도 가능한 그는 꽤나 능숙하게 아이스크림과 따뜻한 차를 내왔다. 모로코 음식인지 알 수 없던 음식 맛은 그저 그랬지만 취하는 맛만 느끼게 해 준 와인 빼고는 거의 다 비웠다.


34유로, 계산은 처음 주문을 받았던 아저씨가 주방에서 나와 직접 해주셨다. 순박한 얼굴과 선한 눈매로 '음식은 괜찮았는지' 물어보시는 것 같았는데 서로 알아들을 수가 없으니 나는 밝은 얼굴로 맛있었다고 최대한 표현한 후에 다시 숙소가 있는 론 강 쪽으로 걸었다. 


#론강의 별이 빛나는 마지막 밤 

숙소 앞까지 돌아오니 밤 10시가 넘었다. 몸이 날아갈 것 같이 심하게 부는 강바람을 맞으며 론강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고흐가 그린 '론 강의 별이 빛나는 밤(Starry Night Over the Rhone)'이 눈 앞에 펼쳐졌다. 그의 표현대로 '캄캄한 어둠이지만 그조차도 색을 가지고 있는 밤'이었다. 


"지금 아를 강변에 앉아 있어별들은 매혹적으로 빛나지만 저 맑음 속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숨기고 있는 건지이 강변에 앉을 때마다 목 밑까지 출렁이는 별빛의 흐름을 느껴. 날 꿈꾸게 만든 건 저 별빛이었을까캔버스에서 별빛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테오야, 내 영혼이 물감처럼 하늘로 번져갈 수 있을까?"

35살의 고흐가 동생에게 보낸 편지글이다. 그는 할아버지, 아버지까지 목회자 집안의 장남으로 목사, 선교사에 도전했었고, 교사, 화방 직원까지 거치며 20대 후반에서야 전업 화가의 길을 걸었다. 10년의 짧은 활동이었지만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꿈을 살아내려 애썼던 그의 밝은 노란빛 작품들 안에 얼마나 많은 고통이 숨겨져 있는 건지. 별을 꿈꾸다 별이 되어버린 그와 함께한 아를의 마지막 밤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론강의 오리온자리가 빛나는 밤

너무 추워서 숙소로 들어갔다가 금방 다시 나왔다. 새벽녘까지 하늘의 별과 론강에 비친 별들을 구경하다 늦게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별을 그려서 희망을 표현하는 일'을 했다는 고흐의 별이 내 마음속까지 반짝반짝 비추어주었다.


고흐가 아버지의 죽음을 겪고 그렸던 'Still Life with Bible(1885)' 그림 안에는 커다란 성경책과 불 꺼진 초, 그 당시 에밀 졸라의 신간 '삶의 기쁨(La joie de vivre)'이 놓여있다. 성경책은 이사야서 53장이 펼쳐져 있다. 떼제의 침묵 피정 중반에 묵상했던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 부분이다. 


"그러나 그를 으스러뜨리고자 하신 것은 주님의 뜻이었고 그분께서 그를 병고에 시달리게 하셨다. 그가 자신을 속죄 제물로 내놓으면 그는 후손을 보며 오래 살고 그를 통하여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그는 제 고난의 끝에 빛을 보고 자기의 예지로 흡족해하리라.(Isaiah 53.10-11)"


그의 죽음에 대한 여러 이야기가 있지만 나에게 느껴지는 고흐는 어둡고 고달팠던 자신의 삶 속에서 빛을 발견해내려고 애썼던 사람이다. 그가 바랐던 대로 그의 작품들은 깊고 따뜻하며 영혼을 비춘다.


깁스하고 떠난 40일간의 순례 기록 <이상한 순례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향한 다음 발걸음은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잠시 멈춥니다. 드디어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국경을 넘는 그날! 함께 걸어주실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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