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만난 떼제 'Perfecto'

깁스하고 떠난 40일간의 산티아고 순례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나기 전 만났던 한 선배는 일 때문에 바르셀로나에서 몇 년간 살았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는 스페인과 유럽 전체를 통틀어서라도 다시 가서 살 곳을 선택한다면 '바르셀로나'라고 했다. 맛있는 음식도 많고 편리하고 없는 게 없는 곳인 데다가 가까이 해변도 있고 자연환경도 좋다면서 자신의 '최애' 도시라고 했다. 하지만 나에게 바르셀로나는 파리보다는 좀 더 따뜻한 대도시, 콤포스텔라로 가기 전 마지막 도시일 뿐이었다. 이곳이 그리워진다면 아마 떼제에서의 인연 마리아가 있는 곳이기 때문일 테다. 


#바르셀로나, 아침엔 산책

바르셀로나 거리

아침에 일어나 마리아를 만나기 전에 그동안 못 빨았던 옷들을 모두 세탁하려고 어제 갔던 La Bar의 오픈 시간에 맞춰 나왔다. 휴일 아침이라 그런지 거리에 사람들이 별로 없어 걷기 좋았다. 

바르셀로나 거리

바르셀로나 거리는 나에게 좀 새롭게 느껴졌는데 차도와 인도 사이에 가로수가 있고 인도와 건물 사이에도 가로수가 심겨 있는 곳이 많아서 거리를 걷는데도 공원에서 산책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바르셀로나 원형교차로의 로버트 박사 기념비

숙소서 10분 정도 걸으면 어제의 회전 교차로와 거대한 기둥 위에 동상이 보인다. 로버트 박사 기념비

'로버트 박사(Doctor Bartomeu Robert)'는 19세기 후반 바르셀로나의 의사이자 1899년 바르셀로나 시장까지 역임했다. 그는 멕시코 탐피코 시 출생이었지만 바르셀로나 의대를 졸업하고 카탈루니아 지역의 정치지도자로 활약했다. 이곳 말고도 바르셀로나 시내 곳곳에서 그의 동상을 찾아볼 수 있다.  
멀리 보이는 파밀리아 성당

고개를 돌려보면 파밀리아 성당이 보인다. TV나 책에서 보던 천재 건축가 가우디의 건축물은 가까이 가서 볼 수록 할 말이 없어진다. 거대하고 웅장하고 사람이 지을 수 있는 게 맞나 싶었다. 100년 넘게 공사 중이라고 하지만 중장비와 함께여도 그 위대함 만큼은 감출 수가 없어 보였다. 거리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는데 이곳만큼은 아침부터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 앞의 벤치에 한참 앉아있다가 정신을 차려 빨래방을 향했다. 


#바르셀로나, 아침엔 빨래

La Bar에서 모닝 빨래와 아침식사

빨래 돌리는 법까지 친절하게 설명해주던 어제의 아르바이트생 대신 새초롬한 직원이 나를 맞았다. 세탁기, 드라이 금액을 지불하고 크로와상과 카페 콘레체를 주문했다. 뽀송한 공기와 섬유유연제 향기가 가득한 이곳에 고소한 커피 향과 빵 냄새가 더해져 포근히 아침을 감싸주었다. 거품을 맞으며 깨끗해지고 있는 빨래를 보며 자리를 잡고 앉아 간단한 아침식사를 했다. 이런 사소한 것에도 감사와 행복이 충만하게 차올랐다.

카페 콘레체(café con leche)는 카페라테, 카페오레의 스페인식 표현이다. 커피(café)와 함께(con) 우유(leche)를 넣어 만든 커피의 한 종류로 스페인 사람들이 흔히 즐기는 커피다. 맛도 좋고 가격도 우리나라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아서 스페인에 있는 동안은 카페 콘레체를 열심히 마셨다.

빨래를 마치고 깨끗해진 빨래만큼 깨끗해진 마음으로 숙소로 돌아가려는데 또 다른 성당이 눈에 띄었다.


#성 프란치스코 드 살 성당(Parroquia de Sant Francesc de Sales)

전 날에는 문이 닫혀 들어가 보지 못했었는데 활짝 열린 성전 안으로 들어갔다. 제대 옆의 부활초가 눈에 띄었다. 아침 햇살이 스테인드글라스로 교회 곳곳을 비추며 들어와 여러 가지 오묘한 색을 냈다.

'성 프란치스코 드 살 성당(Parroquia de Sant Francesc de Sales)'은 1878년에서 1885년 사이 가우디의 스승이자 바르셀로나 출신 건축가 '호안 마르토렐(Joan Martorell)'에 의해 세워진 가톨릭 성당이다. 1909년 내전과 1980년 화재로 파손되었던 것을 2001년 복원하였다. 마르토렐은 31살의 무명 건축가이던 가우디를 파밀리아 성당 건축가로 추천한 인물이다.  
프란치스코 드 살(Francis de Sales) 성인은 살레시오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하다. 주교이며 교회학자였고 수도회 설립자이다. 그는 칼뱅의 종교개혁 때 유럽에 신앙 쇄신 운동을 일으켜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전해진다. 언론인 및 작가들의 수호성인이다.  

교회를 천천히 둘러보고 경당에서 기도도 드리고 한결 더 평안해진 마음으로 숙소로 돌아왔다. 거리에는 사람이 더 많아졌고 차들도 좀 늘어난 것 같았지만 불편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숙소로 돌아와 빨래한 옷가지와 수건들을 정리하고 있으니 떼제의 마리아가 숙소 앞에 도착했다고 SNS로 연락을 해왔다. 그녀의 어렸을 적 주치의 선생님이 내가 머무는 건물에 사셨다는 신기한 이야기를 들으며 마리아와 함께하는 바르셀로나 1일 투어가 시작되었다. 


마리아's 바르셀로나 1일 투어

신기하긴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떼제에서 그것도 부활절의 떼제에서 만난 그녀와 2주 후 바르셀로나에서 다시 만나게 되고, 내가 바르셀로나에서 고른 숙소가 그녀의 집과 10분 거리, 그녀의 어린 시절 주치의가 살던 곳이라니, 놀라운 우연과 인연의 연속을 발견하는 것이 이제 일상처럼 느껴졌다. 그저 지금, 여기에 이렇게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할 뿐이었다. 우리는 우선 집 근처부터 탐색하기 시작했다. 

숙소에서 로버트 박사(Doctor Bartomeu Robert)의 회전 교차로와 반대방향으로 걸으면 나오는 또 다른 교차점(Plaça Cinc d'Oros)에는 오벨리스크(Obelisco Diagonal)가 서있다. 큰 도로들이 교차하는 이곳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스페인의 정치 사회적 상황에 따라 동상과 기념탑들이 추가되거나 철거되는 것을 반복하다 현재는 이 오벨리스크만 남아있다. 

오벨리스크 왼쪽 뒤편의 현수막이 붙어있는 건물은 'Palau Robert'로 불리는 전시관 및 무역센터다. 20세기 초 귀족이자 정치인, 사업가였던 Robert i Suris의 집이었고 1936년부터 3년간은 이곳 카탈루냐의 문화부 관사로 사용되다 현재는 전시관, 무역센터, 카탈루냐 정보센터 역할을 하고 있다. 

카탈루냐(Cataluña)는 카탈로니아(Catalonia)로도 불리며 17개의 자치주로 나뉘는 스페인의 북동부 지역을 말한다. 바르셀로나가 주도이다. 넓지 않은 지역이지만 고유의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스페인 GDP의 20%를 책임지고 있다. 경제 문화적 이유로 카탈루냐는 스페인에 분리독립을 주장하고 있다.  

바르셀로나 곳곳에서 세월호를 떠올리게 하는 노란 리본들을 쉽게 볼 수 있었는데 바로 카탈루냐 분리독립을 상징한다고 한다. 우리의 노란 리본이 실종자들이 살아 돌아오기를 바랐던 마음에서 출발했다면 이곳에서는 독립을 주장하다 감옥에 수감된 정치지도자들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바르셀로나, 신비한 건축물 사전

바르셀로나의 건축물들

마리아는 쉬지 않고 설명을 하며 걸었다. 거리마다 독특하고 아름다운 건축물들로 넘쳐났다. 

동화 속 '장밋빛 성'같은 'Casa de les Punxes'는 모더니즘 건축가 Josep Puig i Cadafalch의 1905년 작품이다. 푸이그는 가우디보다 15살 어린 동시대의 건축가이자 정치가이다. 'Casa Terradas'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 건물은 카탈루냐 지역에서 섬유전문 기업을 운영하던 Terradas가의 Bartomeu Terradas Brutau가 세 명의 여자 형제들을 위해 자신의 친구 푸이그에게 의뢰해 지은 집이다. 내부도 관람을 할 수 있다. 

왼쪽 하단 사진의 Palau del Baro de Quadras 또한 Quadras 남작이 푸이그에게 의뢰해 1904년에서 1906년 사이에 세워진 건물로 아파트를 개조하여 현대식 궁전으로 만들었다. 1980년대 음악박물관으로 사용되다 현재는 카탈루냐 언어와 문화에 대해 알리는 지역 관사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역시 관람이 가능하고 내부가 더 아름답다. 

내가 마리아에게 "저것도 가우디가 지은 거야?"하고 물었던 'La Casa Comalat'는 가우디보다 21살 어린 건축가 Salvador Valeri i Pupurull의 작품으로 가우디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 바로 느껴졌다. 같은 건물인데도 앞뒤 양쪽의 디자인이 확연하게 차이 나는 것이 재미있었다.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 다른 건물로 보이는데 맨 오른쪽 위아래 사진이 둘 다 Comalat이다. 이곳은 사유지로 밖에서만 볼 수 있다. 밖에서는 페르시아나(persiana), 즉 태양을 가리는 블라인드가 잔뜩 내려져 있어서 갑옷으로 무장한 것 같이 보였다.  


건물이라기보다 예술작품들을 따라 거리를 걷다 보면 가우디의 또 하나의 걸작에 저절로 걸음을 멈추게 되는 곳, 카사 밀라이다. 


#가우디의 '카사 밀라(Casa Mila)'

카사 밀라 외부 전경

"직선은 인간의 것이고, 곡선은 신의 것이다." 바르셀로나가 낳은 천재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i)의 말은 그가 남긴 작품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어린 나이부터 질병으로 고생했던 그는 자연스럽게 자연의 아름다움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자연의 곡선과 아름다움을 자신의 건축에 적용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철골이나 벽돌로 뼈대를 잡고 그 위에 돌조각들을 모자이크처럼 덧붙여 곡선을 만드는 식이었다. 

'카사밀라(Casa Mila)'는 '라 페드레라(La Pedrera)'로도 불리는데 채석장이라는 뜻이다. 바르셀로나의 성공한 사업가인 밀라(Pere Mila)가 가우디의 '카사 바트요(Casa Battló)'를 보고 그에게 의뢰해 바르셀로나 중심가 그라시아(Gracia) 거리에 세운 지상 8층짜리 고급 빌라이다. 모두 16가구로 구성되어 있으며 지하에는 바르셀로나 최초의 지하 주차장도 설계됐다. 1906년부터 설계해 1912년에 완공되었다. 

지금 봐도 새롭고 충격적인데 당시의 반응은 상상이 갔다. 비행기 격납고, 말벌집 등으로 비유되며 혹평을 받았던 이곳은 1984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고 현재 수많은 관광객들이 줄을 서서 방문한다.

카사밀라 내부

내부를 구경할 수 있는 입장료는 25유로, 우리 돈으로는 3만 원이 넘었다. 비싼 비용에도 불구하고 건물을 둘러싸며 줄을 설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어서 대중에게는 3개의 층만 개방되어 있다. 바위 산을 그대로 옮겨온 듯한 외관 안으로 들어가면 자연을 품은 정원 공간이 나온다. 애벌레 모양으로 나있는 나선형 계단을 따라 식물들이 심겨 있는데 그 곡선이며 꽃, 풀들을 떠올리게 하는 색감이며 거대한 자연의 품 안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 든다. 


입구로 들어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맨 꼭대기로 이동하게 되는데 옥상은 바닥도 곡선이다. 같은 옥상 공간에서도 오르락내리락해야 이동이 가능하다. 굴뚝과 환기구, 비상구의 모양들도 태어나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비상구가 있는 흰색의 소용돌이 상단의 십자가는 사방이 모두 십자가 모양으로 어느 방향에서 봐도 십자가를 볼 수 있도록 디자인되었다. 영화 스타워즈(Star Wars)를 만든 조지 루카스(George Lucas) 감독은 투구를 쓴 사람 얼굴처럼 생긴 굴뚝들을 보고 '다스베이더'라는 캐릭터의 모습에 반영했고 알려져 있다. 


옥상에서 내려다 보이는 바르셀로나의 모습도 대단하다. 

카사밀라 옥상에서 내려다 보이는 바르셀로나 시내

울퉁불퉁한 옥상 바닥 덕분에 옥상 밑에는 다락이 존재한다. 빨래를 하고 말리는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성서 속에 나오는 고래의 뱃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디자인되었다. 현재는 'Espai Gaudi'라는 이름으로 평생 결혼도 하지 않고 살아갔던 천재 건축가 가우디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박물관으로 꾸며져 있다. 

천장에 걸려있는 샹들리에를 보고 파밀리아 성당의 디자인을 떠올렸고 나무, 동물뼈 등 자연에서 영감을 받아 건축물을 예술작품으로 승화시켰던 그의 천재성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4층으로 내려오면 20세기 초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에 대해 느낄 수 있도록 당시의 거실, 부엌, 침실, 복도 등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다. 천장, 바닥, 손잡이, 몰딩 등 내부 인테리어도 가우디의 작품이라고 한다. 

카사밀라 내부

미역줄기나 나무덩굴이 떠오르는 발코니, 물결이 치는 것 같은 천장, 집이라기보다는 작품이었다. 당시 이곳에 살았더라면 침대나 가구 등의 배치가 고민되었을 것 같았다. 일상에서 가장 가깝게 접할 수 있는 예술은 패션이라고 생각했는데 건축물, 집도 그렇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가우디는 나중에 밀라의 아내와 비용 문제로 다투다 소송까지 하고 다시는 안 보는 사이가 되었다. 소송에서 이긴 가우디는 그 비용을 파밀리아 성당의 공사비로 기부하기도 했다. 이후 밀라 부인은 수차례 개조를 반복했는데 1987년부터 1996년 사이에 복원이 이루어져 옛 모습을 되찾았다고 한다.

가우디의 엄청난 예술 작품 속을 거닐다 거리로 나왔더니 그 잔상들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돌아다녔다. 마리아는 허기가 졌는지 밥을 먹든지, 간식을 먹든지 좀 쉬자고 했다.


#바르셀로나, 간식타임 @Mauri

나는 4시라는 애매한 시간이라 간식을 먹자고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스페인의 식사시간은 우리와 좀 달랐다. 1시부터 4시까지가 보통의 점심, 저녁 8시부터 10시 정도까지가 보통의 저녁시간이었다. 어쨌든 우리는 Mauri라는 스페인의 유명한 디저트 가게에 들어갔다.

마우리(Pastelerias Mauri)는 1929년 시작된 베이커리로 바게트, 샌드위치, 케이크, 타르트 등 여러 종류의 디저트를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커피와 음료, 샐러드, 오믈렛 등까지 판매해서 간단한 식사도 가능하다.

마리아는 쉴 새 없이 주문을 했는데 접시 3개에 빵이 가득 채워졌다. 크로켓처럼 고기, 해산물, 채소들을 넣고 튀겨낸 빵과 치즈, 마리아 엄마의 소울푸드라는 명란 샌드위치와 마리아의 최애라는 생선을 갈아 속을 채운 샌드위치 등 종류별로 맛볼 수 있었다. 마리아는 계속해서 내 반응을 살폈는데 나는 커피가 젤 맛있었다. 


자기 구역이니 자기가 다 사겠다는 마리아의 태도는 한국의 정서와 정말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마리아는 마우리의 시그니처라는 '초콜릿 뚜론(torrons)'도 포장해서 한국의 부모님 갖다 드리라며 내게 건넸다.

'뚜론(torrons)'은 스페인의 전통 먹거리로 우리나라에서는 유럽에서 이를 부르는 '누가(Nougat)'로 더 익숙하다. 아몬드, 마카다미아 등 견과류에 꿀을 넣어 굳힌 딱딱한 음식이다. 

테라스 자리에 앉아 한참을 수다를 떨며 떼제 이야기와 '나에게 맞는 일과 사람을 찾는 것' 등 심오한 주제들까지 나누었다. 한국 집 앞의 어느 카페에서 친구와 만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편안했다.


#파밀리아 성당 가는 길

하지만 나는 바르셀로나를 지나는 여행자에 불과했고 우리에겐 이제 단 몇 시간 정도가 남아있을 뿐이라는 걸 곧 깨닫고는 다시 거리로 나왔다. 발코니에 매달아 놓은 화분들과 가로수로 심긴 오렌지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오렌지들이 스페인의 강한 햇빛을 받아 빛났다. 


'Sant Ramon de Penyafort 성당'은 13세기 도미니코 수도회 수사였던 레이몬드 성인의 이름을 따 15세기에 지어졌다고 한다. 도미니코회 수녀원이었다가 현재는 지역 성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국어 미사도 정기적으로 있다는데 문이 잠겨있어서 내부로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우리는 더 늦기 전에 파밀리아 성당을 향했다. 

바르셀로나 지하철 노선표와 교통패스

카사밀라 근처부터 걷기는 좀 멀어 지하철을 타고 이동했다. 마리아는 나를 위해 자신이 쓰던 교통패스를 가지고 왔는데 바르셀로나에서 버스, 지하철, 트램 등을 모두 이용할 수 있는 티켓이었다. 기계에 넣으면 자동으로 횟수가 차감되고 횟수만 남으면 내일도 사용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고마움을 넘어 미안할 지경이었다.


마리아는 파밀리아 성당의 입장 티켓도 인터넷으로 미리 준비하려고 했는데 예약이 다 차서 현장 구매가 가능한지 직접 가서 확인해봐야 한다며 미안해했다. 이곳의 입장료도 기본이 18유로, 오디오 가이드를 포함하면 25유로, 3만 원이 넘는다. 


#사그라다 파밀리아(La Sagrada Familia) '성 가족 성당'

파밀리아 성당 정면

아침 산책 때는 정문 앞까지 가보지는 않았는데 가우디가 죽기 전까지 43년간 지었다는 부분들을 보면 입과 눈이 저절로 동시에 벌어진다. 마리아, 요셉, 아기 예수 '성가족'의 모습이 정면에 담겨있는 '사그라다 파밀리아(Sagrada Familia; 성가족) 성당'은 1882년 공사가 시작되어 현재까지 137년 동안 지어지는 중이다.

종교서적 출판사를 운영하던 주제프 마리아 보카베야(Josep Maria Bocabella)는 산업화로 도시는 발달하는데 신앙심은 떨어지던 상황에서 '성 요셉 협회'라는 신자들의 모임을 만들었다. 이탈리아 로레토 성당을 보고 감명을 받은 보카베야는 1874년 회원들이 한자리에서 미사를 드릴 수 있도록 성당을 건설하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회원들의 기부금을 모아 성당 건립이 추진되었다.

명망 있던 교회 건축가 비야르(Francisco del Villar)가 무료로 설계를 맡고 가우디의 스승 호안 마르토렐(Joan Martorell)이 자문을 맡았다. 이 둘은 건축비로 인한 재료 선택 문제 등에 의견이 갈렸고 보카베야는 비야르를 사임하고 저렴한 공법을 주장했던 마르토렐에게 공사를 맡기려 했다. 하지만 마르토렐은 제자 가우디에게 이를 넘겨주었다. 가우디는 당시 건축사 자격을 얻은 지 5년 된 31살의 무명 건축가였다. 

가우디는 1883년부터 파밀리아 성당 건축을 이어받아 초기에는 지하 경당과 원형 제대 등을 선임 건축가의 설계에서 일부 변형하여 완성시켰다. 하지만 그는 곧 파격적이고 거대한 현재의 모습을 다시 디자인하고 제안해 공사를 진행한다. 가우디가 살아있을 때는 물론 사후에도 파밀리아 성당은 혹평을 받았지만 200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하루 평균 1만 2천여 명이 방문하고 있다.
파밀리아 성당의 새롭게 지어지는 부분들
가우디는 생전에 1/4 정도까지 완성시켰고 후대의 건축가들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2026년, 가우디 사후 100년에 맞춰 완공하는 것을 목표로 아직도 공사가 진행 중이다. 완성되면 높이 172.5m로 유럽에서 가장 높은 종교 건축물이 된다. 2017년부터는 주일마다 미사가 봉헌되고 있다고 한다.  

스페인도 '노동자의 날'로 휴일이라 그런지 관광객과 현지인들이 뒤섞여 몸이 밀릴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소매치기 주의 구역이라 경찰도 많았다. 암표상도 있었는데 현장에서 티켓을 구하려면 줄을 몇 시간은 서야 한다고 했다. 너무 아쉬웠지만 나는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마리아는 2026년에 완공되는 것에 맞춰 꼭 다시 오라며 나보다 더 아쉬워했다. 우리는 내부를 보는 대신 성당 밖으로 한 바퀴 돌아보자고 했다.


보는 위치에 따라 느낌이 달랐다. 가우디 시절 돌조각과 지금의 것은 색과 느낌부터 달랐다. 1936년 화재로 성당 지하에 있던 가우디의 도면과 자료들이 불타는 바람에 1902년 스케치 단 한 장만 남아있다고 한다. 현대의 첨단 장비와 기술을 접목시키고 있다고 하지만 나는 왠지 옛날 가우디 시절의 거뭇하고 칙칙한 부분들이 더 마음에 들었다. 완성되면 어떤 모습일까. '하늘과 땅을 잇는 교회를 짓자'는 그의 생각이 실현될 수 있을까.

한국에 돌아온 후 한 달 만인 올해 6월, 파밀리아 성당이 1882년 공사가 시작된 후 137년 만에 건축허가를 받았고 그동안 무허가로 공사를 한 것에 대해 우리 돈 61억여 원의 수수료를 시에 지급했다는 기사를 접했다. 총공사비는 한화로 4천994억여 원, 지금까지도 기부금과 입장권 판매금 등으로 충당되고 있다고 했다. 실제 규모만큼이나 엄청난 소식들이었다.

파밀리아 성당 옆 연못과 공원

마리아와 나는 한 바퀴를 돌아 다시 정문 앞 연못에 섰다. 다시 봐도 엄청났다. 마리아는 여기 사람들은 '이곳에 3개, 4개의 파밀리아 성당이 있다'라고 말한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밤이 되면 '실제 파밀리아 성당'과 이 '연못에 비친 파밀리아 성당',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눈동자에 비친 파밀리아 성당', 마지막으로 '술잔에 비친 파밀리아 성당'이란다. 어쩜 이런 이야기들도 우리나라의 옛날이야기들과 비슷했다.

바르셀로나의 지하철

우리는 다시 지하철을 타고 가우디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파밀리아 성당(2005년)'보다 더 이른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산트 파우(Sant Pau)' 병원이었다.


#'산트 파우(Sant Pau)' 병원

산트 파우 병원 정면

파밀리아 성당 정문에서 연못을 바라보고 왼쪽 대각선으로 1km 정도 직선으로 된 길이 나있는데 이 '가우디 길(Avinguda de Gaudi)'의 끝에는 '산트 파우 병원'의 정문이 나온다. 

'산트 파우 병원(Hospital de Sant Pau)'은 이 지역 은행가 '파우 길(Pau Gil)'이 가우디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카탈루냐의 대표적 모더니즘 건축가 '루이스 도메네크 이 몬타네르 (Lluís Domènech i Montaner; 1850-1923)'에게 의뢰해 지은 건축물이다.

14세기에 바르셀로나에도 흑사병이 퍼져 인구의 1/3이 사망했고 이를 계기로 15세기 초에 병원 단지가 조성되었는데 산업화에 따라 19세기 후반부터 병원을 확장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에 1902년 파우(Pau)가 유산을 받아 병원을 새롭게 짓기 시작했고 몬타네르 사후에 그의 아들이 공사를 이어받아 1930년에 완공되었다. 현재 병원은 옆에 새 건물을 지어 옮겼고 예전 병원 건물들은 관광객들에게 개방되고 있다.

가우디가 몬타네르에게 '파밀리아 성당 첨탑이 보이도록 45도 틀어서 건물을 세워 환자들이 병실에서도 성당을 보며 위로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제안을 했고 실제로 설계에 반영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가우디도 1926년 교통사고 후, 이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병원 앞으로 펼쳐지는 '산트 파우 광장'

'산트 파우 병원'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병원'으로 불린다는데 이 날은 공휴일이라 오후 2시 반부터 문이 닫혀 있어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평일에는 동절기(11월~3월)에는 오전 9시 반부터 오후 4시 반까지, 하절기(4월~10월)에는 같은 시간부터 저녁 6시 반까지 열려있다. 


파밀리아 성당에 이어 이곳도 울타리를 따라 외부만 빙 둘러보고 돌아섰다. 거대한 수도원 같은 전경에 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병원'으로 불리는지 알 것 같았다.


'구엘공원'과 '파리구엘'의 차이
바르셀로나의 거리 풍경

사실 파밀리아 성당 티켓을 못 구해서 내부를 못 들어갔을 때부터 마리아는 당황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산트 파우 병원도 오픈 시간을 잘못 알아서 허탕을 치자 그녀는 극도로 미안해했다. 나는 괜찮다고 계속 이야기했지만 그녀는 계속 미안하다고 했다. '미안하다-괜찮다' 게임이 시작됐다. 


저녁 6시, 우리는 다시 지하철과 버스를 차례로 환승해서 그라시아 거리로 나왔다. 다만 아까 먹은 식사 같은 간식으로 배가 고프지 않았고 마리아의 말로는 '저녁 먹기는 이른 시간'이라 한 군데만 더 둘러보고 저녁을 먹기로 했다. 그녀는 나에게 선택권을 줬는데 나는 바르셀로나에서 보고 싶던 딱 두 가지 '파밀리아 성당'과 '구엘공원' 중에서 이미 포기한 성당을 뺀 나머지를 이야기했다. 

바르셀로나의 거리 풍경

'구엘공원'을 가기 위해서는 다시 왔던 길을 돌아가야 했는데 그마저도 버스를 잘못 타서 10분 거리를 한 시간 넘게 돌아갔다. 입구에 도착했을 때는 마지막 입장 시간이 한 시간 남았는데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끝까지 기다려도 들어갈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마리아는 "오전 8시 이전에 오면 무료로 볼 수 있다""내일 아침 일찍 다시 오는 것 어떠냐"고 제안했다.


나는 버스 타는 한 시간 넘는 시간 동안 많이 지쳤고 무엇보다 마리아가 현지어로 '파리구엘[Parc Guell]'이라 발음하는 것을 '파리구엘[Pari Guell]'이라는 '또 다른 명소'에 대해 이야기하는 줄 알고 "그냥 빨리 가자"고, "'구엘공원(Guell Park)'으로 빨리 가자"고 말했다. 그런데 그녀도 내 말을 잘 못 알아듣고 "정말 괜찮겠냐"며 여러 번 확인한 후에 "그럼 위로 좀 더 올라가자"고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나를 데려갔다.

바르셀로나의 거리 풍경

내가 정신을 차리고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은 휴대전화로 현재의 위치와 그녀가 '파리구엘'이라고 말하던 그곳이 '구엘공원'이었다는 것을 파악했을 때는 이미 버스가 산 위로,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마리아는 내 눈치를 살피며 "내일 아침 6시까지 숙소 앞으로 갈 테니 함께 '파리구엘'을 가자"고 계속 이야기했지만 나는 다시 "괜찮다"고 계속 이야기했다. 

'구엘 공원(Park Güell)'은 가우디의 후원자였던 '유세비 구엘(Eusebi Güell)'이 1885년 이곳의 땅을 인수해 1890년에 가우디에게 주택단지와 자연이 공존하는 '전원도시(Garden City)' 조성을 의뢰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가우디에게는 파밀리아 성당 건축과 함께 큰 프로젝트였지만, 계획했던 60개의 빌라, 도로들, 대규모 공원 중에 단 두 건물만 완성되었다고 한다. 구엘공원은 1922년 문을 열었고 1929년 공공 소유로 넘어갔다. 1984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포함되었다. 

버스에서 내려 5분, 10분을 걸어서 산동네 같은 골목들을 오르면 바르셀로나 시내는 물론 멀리 바다까지 보이는 지대가 나타난다. 


#바르셀로나 선셋 @벙커(Bunkers del Carmel)

파밀리아 성당과 몬주익 언덕 방향 바다 뷰
이곳 벙커는 1937년 스페인 내전 동안 파시스트의 공격을 막기 위해 지어졌다. 프랑코가 정권을 잡으며 내전은 끝났지만 벙커는 그대로 남아 극심한 빈곤문제를 겪는 주민들의 피난처 역할을 했다. 1940-50년대를 지나면서 이 일대는 판자촌을 이루었고 1960년대에도 3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살았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서야 시정부가 도시 내에 아파트를 마련해 이곳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이후 잊혀 방치되다 2011년부터 Carmelite Agency와 MUHBA(Museum of the History of Barcelona)가 벙커를 복원하고 박물관을 설치하며 스페인 내전과 당시 벙커의 역할을 알리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멀리 바다가 보이던 방향에는 수많은 건물들 사이로 파밀리아 성당의 뾰족한 첨탑들이 눈에 띄었다. 오른쪽 방향의 언덕이 몬주익 성이 있는 곳이라고 마리아가 귀띔해주었다. 360도 파노라마로 거칠 것 없이 펼쳐지는 이 전망을 보려고 많은 사람들이 해 질 무렵부터 이곳을 찾아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멀리 보이는 사그랏 코르 성당 산 뷰

사진을 찍을 때도 줄을 서야 했는데 반대편의 해가 지는 쪽에도 산 뒤로 넘어가는 해를 보며 연인끼리, 친구끼리 벙커 구조물에 걸터앉아 있었다. 악기를 가져와 연주하는 사람, 간단한 간식거리를 파는 사람들 속에서 캔맥주를 손에 들고 석양을 바라보는 모습이 서울의 북악 스카이웨이나 남산, 한강 등을 떠올리게 했다. 멀리 티비다보 놀이공원(Parc d' A traccions Tibidabo) 옆, 사그랏 코르 성당(Temple Expiatori del Sagrat Cor)의 뾰족뾰족한 성 같은 실루엣이 멋있었다.   


하지만 전망 좋은 곳이 늘 그렇듯 바람이 거세 오래 있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우리는 사진을 몇 번 찍고 돌아보며 30분 정도 머물다 다시 버스를 타러 내려왔다. 산 밑의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또 다른 버스로 갈아탔다. 그런데 버스를 또 잘못 타서 가던 길을 다시 돌아오고 걷다가 다시 택시를 타고 내려서 또다시 걸어 총 한 시간 반이 걸려 식당에 도착했다. 


#스페인의 늦은 저녁시간 '빠에야 타임'

밤 9시 반, 1959년부터 영업을 시작했다는 빠에야 전문 레스토랑 'elche'였다. 마리아가 원래 나를 데려가고 싶어 했던 바닷가 앞의 레스토랑은 문을 닫았다고 해서 대안으로 온 곳이었다. 지칠 대로 지친 나는 이 늦은 시간에 밥 대신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했지만 스페인에서는 아직 한창 저녁시간이었다. 마리아는 빠르게 주문을 했다. 애피타이저로는 'Padron peppers와 감자튀김', 메인으로는 '파에야(Paella)'가 나왔다. 

Padron peppers는 스페인 북서부 갈리시아 지방 고추로 굽거나 튀겨서 애피타이저나 술안주로 흔히 먹는 음식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꽈리고추 볶음이 생각났는데 달달하니 끝없이 먹게 된다.  

노란 샤프란 물을 들인 쌀과 각종 해산물을 듬뿍 넣어 팬에 담아내는 '파에야(Paella)'는 스페인 동부 발렌시아 지역 요리라고 한다. 8세기경 아랍과 베르베르(berber)족이 스페인 남서부를 정복하면서 800년간 스페인에는 이슬람 왕국이 존재했다. 이때부터 쌀이 들어오면서 파에야와 유사한 음식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19세기에 들어 파에야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가족 모임이나 종교 행사에서 고기, 해산물, 채소, 쌀 등을 함께 넣은 요리를 만들어 나눠 먹었다는 설과 아랍어권에서 왕족의 연회가 끝나면 신하들이 남은 음식을 한꺼번에 넣고 요리해 먹었다는 '배크이야('잔반'이라는 뜻의 아랍어)'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마리아 말로는 그래서 파에야는 원래 1인분짜리가 없다고 했다. 집에 있는 재료들을 다 털어 넣어 온 가족이 둘러앉아 먹는 음식이 파에야라고 했다. 우리나라의 비빔밥과 부대찌개가 떠올랐다.


파에야를 다 먹고 후식을 먹을 때쯤 기분이 다시 쓱 좋아졌는데 식당은 한 바탕 난리가 났다. 출입문 앞쪽 테이블에 독일에서 온 부부 두 쌍이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잠깐 식당 앞에 나가 담배에 불을 붙이는 순간 소매치기가 나타나 핸드백을 낚아채 갔다는 것이다. 경찰이 다녀가고 소매치기를 당한 여자분은 여권, 카드, 현금까지 다 잃어버렸다며 울고불고 식당 전체가 어수선해졌다. 


주인아저씨는 오히려 의연했는데 언젠가 소매치기 두 명이 아예 식당에 들어와서 한 명은 주의를 끌고 한 명이 오늘과 같은 자리의 손님이 의자에 올려놓은 핸드백을 가지고 나간 적도 있다고 했다. 마리아는 자신의 소매치기 경험담을 덧붙이며 아저씨와 한참 수다를 떨었다. 나는 한국의 치안이 얼마나 좋은지 다시 한번 떠올렸고 늘어나는 소매치기 에피소드를 들으며 불안해졌다. 우리는 11시가 다 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페인 밤바다 '바르셀로네타 해변'

바르셀로네타 해변

마리아는 여기까지 왔는데 꼭 가볼 곳이 있다면서 또다시 택시를 잡았다. 나는 너무 피곤해서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발도 너무 아프고 그냥 집에 가고 싶었을 때 만난 '바르셀로네타 해변'은 부산 해운대나 광안리 해수욕장, 인천 을왕리 해수욕장 등을 떠올리게 했다.  


아무도 없는 밤바다에서 마리아는 얼마 전에 돌아가셨다는 아버지와 어렸을 적에 자주 오던 곳이라며 이곳을 소개해주었다. 마리아의 눈에 고인 눈물이 반짝거리며 바르셀로네타 해변의 밤바다가 아름다워 보이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에서 패션 디자이너로 일하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에도 아빠만큼은 자신을 온전히 이해해주고 응원해주었다는 이야기는 내 마음 깊이 닻을 내렸다. 

힘들 땐 아빠를 만나러 이곳에 온다는 마리아는 나에게도 자기가 이곳에서 얻는 아빠의 힘과 에너지를 나누어 주고 싶다고 했다. 이 순간 나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떼제를 온전히 느꼈다. 인생의 어떤 순간들은 장소를 초월하고 인생의 어떤 장소들은 시간을 초월하는 것 같았다. 밤바다의 바람을 맞으며 우리는 한참 서 있었다.


#집으로 가는 길 '펄펙또~'

오늘의 행적과 숙소 엘리베이터 컷

결국 택시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다. 마리아는 집 앞까지 나를 데려다주고 돌아가며 내일 아침 체크아웃 시간 10시에 맞춰 오겠다고 했다. 서로 '미안하다-괜찮다'는 말을 수백 번은 한 것 같다. 헤어질 때는 서로 '고맙다'는 말을 수십 번 했다.


이 날 타임라인은 지금 봐도 황당하다. 3만 보 넘게 걸었는데 파밀리아 성당, 구엘공원, 정작 가보고 싶었던 곳은 못 간 것 같아 속상했었다. 하지만 서로의 문화를 잘 몰랐고, 길을 자주 헤맸고, 본의 아니게 일이 꼬인 것도 많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벽했다. 마리아에게 배운 스페인어 표현으로 '펄펙또(Perfecto)~!'였다.  


깁스하고 떠난 40일간의 순례 기록 <이상한 순례길>, 드디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향해 가는 마지막 발걸음! 끝까지 함께 걸어주실 거죠?!=)


이전 08화 프랑스 아를에서 스페인 바르셀로나까지 기차로 넘어가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