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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를 떠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하다

깁스하고 떠난 40일간의 산티아고 순례

| 바르셀로나, 체크아웃

어제 과하게 걸었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아침에 일어나니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숙소 체크아웃 시간, 아침 10시를 맞추기 위해 좀 더 일찍 일어났다. 짐을 챙겨 나가려는데 처음으로 집주인과 마주쳤다. 아직 잠옷 차림의 그녀에게 저녁 비행기라는 사정을 이야기하고 오후까지 배낭을 맡아줄 수 있는지 물었더니 어려울 것 같다고 한다. 검색해 두었던 공항버스 정류장이 있는 카탈루냐 광장 근처 락커룸에 짐을 넣어두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집 앞 버스정류장에서 마리아와 만나 바르셀로나의 마지막 시간들을 챙기러 나섰다. 

체크아웃 후에 바르셀로나 카탈루냐 광장으로 가는 길
'카탈루냐 광장(Plaça de Catalunya)'을 중심으로 크게 남쪽 구시가지와 북쪽의 신시가지로 나눌 수 있다. 북쪽에는 명품 매장과 패션 상점들, 가우디의 카사 밀라가 있던 '그라시아 거리(Passeig de Gràcia)', 남쪽으로는 해안가로 이어지는 산책길 '람블라스 거리(Las Ramblas)'와 바르셀로나 대성당이 있는 고딕지구(Gothic Quarter)가 있다. 람블라스 거리에는 카페와 레스토랑이 많은데 특히 '보케리아 시장(Mercat de la Boqueria)'이 유명하다. 

바르셀로나 엘프라트 공항(Aeroport de Barcelona-Elprat)으로 가는 공항버스가 카탈루냐 광장에서 출발해 스페인 광장을 거쳐가기 때문에 이 두 광장 근처는 항상 사람들로 넘친다. 이에, 카탈루냐 광장 근처에는 캐리어나 배낭같이 큰 짐까지 맡겨둘 수 있는 락커룸 시스템이 운영되고 있어 편리하다.
카탈루냐 광장 근처의 거리들

남아있는 교통패스권으로 버스를 타고 카탈루냐 광장에 도착했다. 마리아는 이곳도 소매치기가 많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귀띔해 주었다. 광장에서 5분 정도 걸어 골목으로 들어가면 락커룸 가게가 눈에 띈다.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사물함만 놓여 있는 것이 아니고 아예 전문 shop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이 신기했다. 세계적인 여행지인만큼 별게 다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안전하고 편리했다. 사람들이 짐을 정리하면서 소지품을 꺼내는 일이 많기 때문에 문 앞에도 직원이 서 있었다. 


사물함 크기에 따라 비용을 지급하고 자신만의 비밀번호를 새로 지정해 잠근다. 아침 9시부터 저녁 9시 사이 원하는 시간에 락커 번호가 적힌 영수증을 보여주고 짐을 찾아가면 된다. 나는 가장 작은 크기의 사물함에 가방을 구겨 넣다 포기하고 좀 더 큰 사이즈 락커에 겉옷과 보조가방 짐들까지 다 넣었다. 가격은 7유로로 비싸게 느껴졌지만 몸도 마음도 가볍게 바르셀로나의 마지막 시간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늘 그렇듯 몸이 가벼워지니 구시가지의 독특한 건물들이 눈에 잘 들어오기 시작했다. 


#카탈루냐 음악당(Palau de la Musica Catalana)

카탈루냐 음악당이 있는 거리

카탈루냐 광장에서 10분 정도 걸었을까. 마리아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고 바르셀로나의 유명한 건축가가 지은 건물'을 소개해주었다. 프랑스부터 이곳까지 유럽에서 한 달을 넘게 있었더니 이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이라는 표현에도 별로 놀라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또 늘 그렇듯이 '그 옛날 어떻게 이런 건물들을 세웠을까.' 했다. 바르셀로나의 건축물 투어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었다.

카탈루냐 음악당 외경
19세기에 바르셀로나의 산업은 호황을 이루었다. 스페인 다른 지역과 비교했을 때 카탈루냐, 바르셀로나 지역은 정치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상태에 도달했다. 당시 부를 축적하여 르네상스 시기를 맞은 상류층들은 카탈루냐 지역과 그들 고유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이를 표출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지역 예술가들을 후원했다. 특히 카탈루냐 지역 출신이거나 자신만의 스타일을 보유한 건축가들을 후원하여 독특한 형식의 건축물들을 지었다. 유세비 구엘(Eusebi Güell) 백작이 후원한 가우디가 대표적이다. 

이러한 건축물들은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세계적인 흐름에도 영향을 받았다. 1878년부터 1910년경까지는 자연의 유기적 곡선 형태를 가져온 '새로운 예술'이라는 뜻의 '아르누보(Art Nouveau)'가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점점 지나치게 화려한 형태들과 일부 부르주아 및 예술가들의 퇴폐적이고 방탕한 태도로 부정적인 인식이 강해졌고 명확한 선과 절제의 미학 '모더니즘(Modernisme)' 움직임이 등장한다. 
카탈루냐 음악당 1층 로비
카탈루냐 음악당(Palau de la Música Catalana)은 '카탈루냐 음악협회(Orfeo Catala)'가 산트 파우 병원(Sant Pau) 건축가 루이스 도메네크 이 몬타네르 (Lluís Domènech i Montaner)에게 의뢰해 1905년에 지었고 1908년에 개장했다. '음악을 위한 정원(garden for music)'을 테마로 1900년대 바르셀로나의 부유한 상인과 사업가들의 후원을 받아 설립되었다. 내전 때 손상되었지만 1980년대, 건축가 Óscar Tusquets에 의해 복원되었고 1997년 산트 파우 병원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궁전 같은 겉모습만큼이나 내부 로비부터 화려하다. 콘서트홀에서는 현재까지도 오케스트라 공연, 오페라, 댄스 공연은 물론 합창단의 정기연주회가 100년 이상 지속되고 있다. 공연장을 둘러보는 1시간짜리 가이드 투어도 가능하다. 마리아는 투어를 해보겠냐고 했지만 얼마 안 남은 바르셀로나에서의 시간을 실내 관광에 쓰고 싶진 않았다. 우리는 우선 카페에 가서 차도 마시고 쉬면서 여유 있게 이야기해보기로 했다. 

고딕지구의 거리와 건축가 푸이그의 Casa Marti

항상 나에게 여러 선택지를 주던 마리아는 지금 가장 유행하는 현대식 카페와 피카소가 즐겨 찾았다는 아주 오래된 카페,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했다. 우리는 고딕지구의 구시가지 골목에 있는 Els 4 Cats로 향했다. 

외관부터 심상치 않다 했더니 어제 본 '장미 빛 성, Casa de les Punxes'를 지은 건축가 푸이그(Puig i Cadafalch)가 섬유 재벌가의 의뢰로 1897년에 설계한 중세 스타일의 건축물, 'Casa Marti'이다. 모서리의 성요셉상과 장식, 창문 등에는 당대 조각가들이 힘을 합쳤다. 위층은 호스텔 등의 주거 공간, 1층은 바, 카페 등으로 사용되어 오다 스페인 내전 때 일부 파괴되었던 것이 현재는 복원되었다. 1976년, 스페인 국가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건물 1층의 카페 'Els 4 Cats'도 함께 복원되어 현재도 활발하게 운영 중이다.


#피카소의 'Els 4 Cats'

피카소의 카페 포스터와 카페 설립자들의 자전거 그림
'Els 4(Quatre) Cats'는 카탈루냐어로 직역하면 '네 마리 고양이'라는 뜻인데 그 안에는 '단 몇 명의 사람들'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이 표현은 '좀 이상한 사람' 혹은 '아웃사이더'를 언급할 때 사용되던 말이다.

이 카페는 'Casa Marti' 건물이 지어지던 1897년, 4명의 예술가 Miguel Utrillo, Pere Romeu, Ramón Casas, Santiago Rusiñol에 의해 시작되어 당시 젊은 예술가들의 아지트 역할을 해냈다. 전시회, 콘서트 등이 계속해서 열렸고 가우디, 피카소를 포함해 건축가, 화가, 시인, 피아니스트, 조각가 등 예술가들이 즐겨 찾았다. 카페 이름과 동일한 이름의 예술 잡지를 정기적으로 발간하기도 했다. 
Els 4 Cats 카페 내부
스페인 출신 화가 피카소(Pablo Picasso)는 17살이던 1899년부터 이곳에 자주 들러 그림을 그렸다고 하는데 카페 포스터와 메뉴판 등을 그려주기도 했다. 그가 첫 번째 개인전을 열었던 장소이기도 하다. 

설립자들은 'food of the spirit', '영혼을 살찌우는 음식'을 제공하고자 했지만 경영자라기보다 예술가였다. 1903년 재정적 어려움으로 문을 닫았다가 1978 년에 식당 겸 카페로 복원되었다. 현재도 레스토랑, 바, 카페의 역할은 물론 그림 그리기 대회를 개최하며 매일 밤 라이브 공연도 펼쳐진다. 

아침 시간이라 그런지 자리가 꽤 여유있었다. 벽에 걸린 오래된 그림들과 실내 분위기가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 작가인 남자 주인공이 자정 무렵 프랑스 파리의 옛 거리를 거닐다 헤밍웨이와 피카소가 활동하던 1920년대로 시간여행을 하는 영화)'의 주인공처럼 피카소 시절로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물론 대부분 진품은 박물관에 있다지만 이곳 어디쯤에서 피카소와 가우디가 열심히 스케치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우리는 우선 간단하게 크로와상과 음료를 주문했다. 고소한 카페 콘레체 한 모금에 달달한 허니버터 크로와상을 한입 가득 베어 물 때의 행복감은 엄청났다. '펄펙또~ 펄펙또~perfecto'를 외치며 기분 좋게 영혼의 에너지까지 가득 충전했다. 잔이 비어갈 때쯤, 나머지 시간들을 어떻게 보낼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마리아는 피카소 미술관, 로마시대 유적 박물관 등 여러 관광명소들을 추천했지만 그중에서 나는 '바르셀로나 성당 미사 후 삼겹살 먹기'를 선택했다. 우리는 몸과 마음을 가득 채우고 다시 오래된 거리로 나왔다. 


#바르셀로나 구시가지

로마시대의 벽들과 Casa de l'Ardiaca 입구

바르셀로나 고딕지구에는 로마시대와 중세의 건물들이 뒤섞여있다. 바르셀로나 대성당을 끼고 로마시대의 벽, 타워, 수로시설 등이 남아있으며 15세기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뒤 후원자 이사벨 여왕을 알현했다는 '왕의 광장(Plaça del Rei)'과 '역사박물관'일대 지하에도 고대 로마의 흔적들이 여전히 발굴 중이다. 

오래된 벽 너머로 보이는 분수가 인상적인 'Casa de I'Ardiaca'는 12세기 건축물로 바르셀로나 대성당 소유였다가 16세기에 개보수되었고 소유권이 계속 바뀌며 20세기 초 산트 파우 병원과 카탈루냐 음악당을 설계한 건축가 몬타네르가 외부 장식을 손봤다. 1920년 이후부터는 바르셀로나'시(市)' 소유로 현재 역사기록보관소가 있으며 지역 문화재로 지정되어있다. 
바르셀로나 대성당 앞 광장

사실 고딕지구 구시가지 전체가 벽이며, 바닥이며, 남아있는 돌기둥이며, 하나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오랜 세월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마리아는 종종 '들어가 볼래?!' 했지만 어제의 피곤인지 트라우마인지가 몸에 남아 '괜찮아'를 연신 외치며 성당 미사 시간에 늦지 않게 바르셀로나 대성당 앞에 도착했다. 


#바르셀로나 대성당 미사

바르셀로나 대성당(Barcelona Cathedral)은 1298년부터 150년 만에 완공되었다. 높은 첨탑으로 이루어진 고딕 양식이지만 좌우 길이가 비슷한 로마네스크 양식이 혼합된 특이한 구조로 카탈루냐 고딕 양식이다. 정문은 500년에 걸쳐 만들어졌다. 중앙 제대 하단의 성당 지하에는 바르셀로나 수호성인 에울랄리아(Saint Eulalia)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다. 수도원 안뜰에는 13세에 순교한 에울랄리아를 기리기 위해 13 마리의 거위를 키우고 있다. 입장료(7유로)를 내고 들어가면 성당 내부, 안뜰, 옥상까지 볼 수 있다.

에울랄리아 성인은 로마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시기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났다. 13살 어린 소녀였던 성인은 잔인한 고문에도 배교하지 않고 X자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했다. 

성당 앞에는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서 있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처음에는 우리도 입장료를 사는 줄에 서 있었는데 마리아가 문 앞을 지키고 있는 경찰에게 다가가 또 폭풍 대화를 하더니 '그라시아스(Gracias; 감사합니다)'를 반복하며 나에게 돌아왔다. 그녀는 활짝 웃으며 "미사만 드릴 사람들은 따로 줄을 서서 입장권을 사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고 우리는 성당으로 바로 들어갔다.


신자석 너머로 중앙 제대가 살짝 보였지만 칸막이가 있어 제대로 보지는 못했다. 미사는 입구로 들어가서 바로 오른쪽에 있는 경당에서 진행되었다. 자리가 꽉 찼다. 떼제를 떠나 처음, 스페인에 와서 처음 드리는 미사에 관광 대신 미사를 선택한 건 참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콤포스텔라로 가는 마지막 발걸음만 남겨놓은 이 순간, 한국을 떠날 때는 상상도 못 했던 장소와 시간들이었다. 


정말 이상하게 흘러가는 내 모든 걸음을 함께 걸으며 길잡이가 되어주시는 그분께 감사를 드렸다. 마리아와도 감사와 기쁨이 담긴 '평화의 인사'를 나누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나오는 길에 성당 안쪽을 다시 한번 슬쩍 봤지만 잘 보이지 않았다. 이 아쉬움도 그분께 맡기고 다음 방문까지도 허락해주시길 기도했다.     

바르셀로나 대성당 앞 풍경

대성당 앞에는 버스킹 연주가 한창이었다. 주일 정오부터 오후 2시까지는 카탈루냐 민속춤 사르다나(Sardana) 춤판이 벌어진다고 한다. 맞은편에는 벼룩시장(flea market;플리마켓)이 열려 책, 옷, 액세서리 등이 사고 팔리고 있었다. 주변을 서성거리며 구경도 하고 사진도 찍다가 마지막 식사를 위해 버스를 탔다.

바르셀로나 버스로 개선문 지나기

버스를 타고 1888년 세계박람회를 위해 세워졌다는 개선문(Arc de Triomf)을 지나 파밀리아 성당 쪽을 향하다 중간지점에서 내렸다. 5분 정도 골목 안으로 걸어 들어가면 바르셀로나의 첫날밤을 따뜻하고 충만하게 만들어주었던 한식당 '가마솥'이 나온다. 사실 어제부터 마리아가 돌아가기 전에 '한식을 소개해달라'는 이야기를 줄곧 해왔기 때문에 바르셀로나의 시작과 끝은 한식이 되었다. 


주인 아주머니, 아저씨 부부와 반갑게 인사를 하고 삼겹살에 된장찌개, 공깃밥 2개를 주문했다. 


#바르셀로나 삼겹살 파티 '가마솥 어게인'

바르셀로나 한식당 '가마솥'의 삼겹살

메인 메뉴가 나오기 전에 김치와 함께 깔리는 5종류의 반찬들과 쌈장, 기름장에도 마리아는 손뼉을 쳤다. 가끔 가는 초밥집에서 젓가락은 사용해봤다면서 손가락으로 젓가락질을 해 보이며 아기처럼 좋아하는 그녀의 모습에 '바르셀로나에서는 바르셀로나 음식을, 어제 못 먹어 본 타파스' 등을 떠올렸던 마음은 싹 사라졌다.


삼겹살, 송이버섯, 양파를 불판에 직접 구워 먹는 요리법과 노릇노릇 구운 삼겹살을 상추에 쌈장과 함께 싸 먹는 걸 보더니 마리아는 '펄펙또~!'를 외치며 정말 좋아했다. 올해 자기 생일파티는 여기서 하겠다며 아직 여러 날 남은 예약까지 했다. 주인 아주머니는 마리아와 나의 통역사 역할을 하며 빠르게 사라져 가는 밑반찬을 리필해주셨다. 삼겹살 한입, 밥 한입, 뜨끈한 된장찌개 한입이 '입 안에서 춤을 추면서 조화를 이룬다'는 마리아의 맛 평가와 함께 만찬을 즐겼다. 역시 음식은 맛으로만 먹는 게 아니라는 것을 느꼈던 시간이다. 


거하게 한 상 차려먹고 다시 카탈루냐 광장 근처 라커룸을 찾았다. 배낭을 메고 카탈루냐 광장 공항버스 정류장으로 함께 갔다. 기다리는 줄이 줄어들수록 마리아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그녀는 진한 포옹과 볼 키스를 퍼부으며 '꼭 파밀리아 성당 완공인 2026년에 맞춰 다시 오라'고 외쳤다. 내가 버스에 올라타고 버스가 출발할 때까지 그녀는 정류장에 남아 손을 흔들어 주었다. 마음이 찡하게 따뜻했다. 


#바르셀로나에서 산티아고까지, 

'이상한 순례길'의 마지막 발걸음

바르셀로나 공항 부엘링 에어

아쉬움이 많이 남는 바르셀로나의 2박 3일을 뒤로하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향한 마지막 여정을 위해 공항을 향했다. 카탈루냐 광장에서 바르셀로나 엘프라트(El Parat) 공항까지는 30분 정도가 걸렸다. 비행기 출발 시간인 6시 55분까지는 2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지만 짐 부치는 것과 등산스틱 기내 반입 여부 확인 때문에 체크인 데스크를 먼저 찾았다. 


바르셀로나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는 스페인 저가항공사인 부엘링(vueling)을 이용했다. 떼제의 어느 날 38.12유로에 저렴하게 구입했던 티켓이었는데 내 순례 배낭이 문제였다. 10 kg까지 기내 반입 가능한 것만 보고 예약했는데 가로, 세로, 폭 사이즈가 규정을 넘었다. 데스크 직원이 교대시간에 맞춰 퇴근하다 말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는데 여기서 통과시켜줄 수 있지만 검색대를 통과할 때 문제가 될 수 있고 거기서 걸리면 이쪽으로 다시 나와서 수하물을 부치고 검색대를 다시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항공료 값에 맞먹는 추가 요금 23.13유로를 내고 배낭에 등산스틱을 구겨 넣어 수하물로 부쳤다.


가격은 마음 아팠지만 짐을 수하물로 부치고 나니 몸이 날아갈 것 같았다. 검색대를 거치고 게이트를 향해 가는데 탑승시간 까지도 여유가 있어서 눈 앞에 보이는 스타벅스로 가서 '아이스라테'를 주문했다. 거의 한 달만에 마시는 아이스라테의 고소하고 시원한 맛이 삼겹살의 텁텁한 뒷맛을 완벽하게 잡아주었다. "우와 살 것 같다"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리아의 눈물 맺힌 얼굴이 자꾸 아른거렸다. 

이상한 순례길과 마지막 발걸음

4월 1일 저녁 비행기로 한국을 떠나 바욘, 루르드, 툴루즈, 리옹, 떼제, 아를, 바르셀로나까지 7개 도시를 거쳤다. 그리고 5월 2일 저녁 비행기로 바르셀로나를 출발해 드디어 그곳, 이 '이상한 순례길'의 목적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하게 되는 것이었다. 믿기지 않았다. 한국을 떠나는 날에는 중간에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비행기를 타고 한달음에 그곳으로 가게 되다니 마음이 먹먹해왔다. 


밤 8시 45분, 바르셀로나에서 출발한 지 2시간 만에 산티아고 공항에 도착했다. 


| 체크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공항

아직 스페인의 해는 콤포스텔라의 얼굴을 붙잡아주고 있었다. 공항에도 조개 모양의 순례자 표식이 있었다. 그곳을 따라 공항버스를 타고 30분 정도 들어가서 구시가지 근처 교차로에서 내렸다. 이곳부터 숙소까지는 10분 정도를 더 걸어가야 했다.  

멀리 보이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두 개의 첨탑

멀리 교회 첨탑이 보였다. 구글 지도로 위치를 살펴보니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이었다. 가슴이 벅차 왔다.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왔네요. 제가 그래도 왔네요. 감사합니다.' 중얼거리며 성호경을 그었다.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고 나니 10시가 좀 넘었다. 이곳 숙소도 주인이 함께 사는 집의 방 한 칸을 빌린 거였는데 친절한 예술가 부부에게 "지금 밖에 돌아다니는 것이 위험하지는 않은지" 물었더니 웃으면서 "전혀!"라길래 바로 숙소를 나섰다. 숙소로 들어오는 길에 콤포스텔라 성당 첨탑을 봐놓고 그대로 잠들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성당의 높은 첨탑만 보면서 구시가지를 향해 언덕을 올랐다.

어느새 어둑해진 하늘과 조명을 밝힌 구시가지의 골목을 지나 넓은 광장과 그 앞에 야고보 성인의 유해가 묻혀있다는 산티아고 순례길의 종착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이 모습을 완전히 드러냈다. 


5월 2일 목요일 밤 10시 반, 콤포스텔라 성당 맞은편에서는 춤판이 벌어져 시끌벅적했고 몇몇 사람들은 대성당을 바라보며 사진을 찍어댔다. 조명을 받아 하얗고 높고 거대해 보이는 성당을 말없이 한참 바라보았다. 


'왔구나. 결국. 여기까지. 왔구나.' 다리에 힘이 풀렸다. 

내가 주저앉은 그곳에는 순례자 표식, 마지막 조가비 모양이 성당을 가리키고 있었다. 

차가운 돌바닥에 차가워진 바람을 맞으며 바닥에 주저앉아 성당을 계속 올려다봤다. 눈물이 흘렀다. 

순례길을 위해 자료를 모으고, 들르고 싶은 마을들을 정리하고, 비행기 표를 사고, 퇴사를 하고, 배낭, 신발을 준비하던 시간들. 출국 날 아침 병원에서 깁스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시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항으로 가서 씩씩하게 부모님과 인사하고 돌아서서 흘리던 눈물. 내 무거운 배낭을 대신 짊어 준 사람들에 대한 감사. 비 내리는 파리를 깁스하고 헤매다 성당에서 원망하듯 쏟아내던 눈물들. 몸과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어감에 감사하며 흘렸던 루르드에서의 눈물들. 기적의 샘물에 침수하던 순간. 떼제에서 보낸 부활 전후의 보름, 말씀으로 일깨워주심에 가만히 떨어지던 눈물들, 바르셀로나 대성당에서 드린 오랜만의 미사에 흐르던 눈물, 이곳을 향해 오던 그 많은 시간들이 한순간에 필름처럼 지나갔다.

늘 마음에 품고 다니던 못난 생각도 떠올랐다. '남들은 참 쉽게 쭉쭉 잘 나가는 것 같은데, 고속도로를 쌩쌩 달려 저만큼 앞서 가는 것 같은데... 나는 왜 항상 이렇게 느릿느릿 거북이걸음을 걷는 걸까?!'


그리고 이내 떼제에서 깨달았던 신의 세심함이 떠올랐다. 당신을 세 번 모른다고 말한 베드로가 다시 세 번 당신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그분의 디테일함이. 


어쩌면 내가 포기하지 않고 비행기를 타겠다고 결심했을 때부터 이곳에 오기까지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을, 그 시간들을 마련해 주신 것 아닐까. 그리고 이렇게 '내가 원했던 정확한 때와 경로'가 아닌 내가 감히 인간의 머리로는 상상하지 못했던 길들로도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신 것 아닐까. 


남들은 죽어라 걸어오는 이 길을 고속도로보다 더 빠른 비행기로 단 몇 시간 만에 앞질러 오게 해 주신 분과 함께라면 이보다 더 '이상한 길'로 가더라도 두렵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다시 시작될 내 인생 길도 마찬가지겠다고. 내 길이 아무리 이상해져도, 내가 생각했던 것과 점점 멀어지는 것 같더라도, 끝까지 걸어내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 이러한 것들을 알아차리게 해 주심에도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리며 한참 동안 '지금, 여기'를 즐겼다.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요한 21.17)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콤포스텔라 성당 앞 광장과 분위기

깁스하고 떠난 40일간의 순례 기록 <이상한 순례길>, 드디어 최종 목적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에서는 4박 5일을 머물렀는데요. 이상한 순례길의 또 다른 출발점 이야기도 계속해서 함께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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