깁스하고 떠난 40일간의 산티아고 순례
5월 3일 금요일, 내가 도착한 바로 다음 날은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의 축일이었다. 이날의 야고보(James) 성인은 '작은 야고보'라고도 불리며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지만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성인 '큰 야고보'와는 다른 인물이다. 그래도 괜히 작은 연관성을 찾으며 아침부터 마음이 설렜다.
작은 야고보는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으로 알패오의 아들이라 구분된다. 로마에 열두 사도 대성전을 봉헌할 때 필립보 성인의 유해와 함께 모셨다는 전승에 따라 두 사도의 축일을 함께 지낸다. 마전장이와 모자 제조업자의 수호성인이다. 신전 지붕에서 던져져 몽둥이에 맞아 순교했다고 전해지며, 이에 곤봉이나 방망이를 든 모습으로 묘사된다.
매일 오후 12시, 산티아고 순례길의 종착지 이곳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는 그날 도착한 순례자들이 함께 모여 '순례자 미사'를 드린다. 원래 콤포스텔라 대성당에서 향로미사(보타푸메이로; Botafumeiro)로 진행되지만 내가 갔을 때에는 성전이 공사 중이라 근처의 '성 프란치스코 성당'에서 순례자 미사가 열렸다.
미사 시간에 맞춰 숙소에서 11시 반에 나왔다. 언덕길이라 좀 힘들어서 그렇지 걸어서 5분-10분이면 순례자 사무소와 그 대각선에 위치한 성 프란치스코 성당(Igrexa de San Francisco)에 도착했다. 순례자 사무소를 지나는데 익숙한 한국어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노년의 한국인 부부들이 많았다.
"한국사람이야?!~ 반갑네~ 우리는 어제 왔어~ 800km 다 걸었어?!~"하며 아버지 또래의 남자분이 말을 걸었다. 나도 멋쩍게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 그렇게 길에 서서 '평소 등산을 좋아하셨으며 운동하면서 틈틈이 연습해서 완주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완주증서를 구경해야 했다. 거기까지만 했어야 했다. 그런데 딱히 할 말이 없던 나는 "와 멋지네요! 그런데 순례자 미사는 드리셨어요?! 여기 프란치스코 성당에서 미사 하는 거 맞죠?! 전 거기 가려고요"라 했고 아저씨는 "아니지 아니지~ 여기 아니고 저기~ 거기 성당이야~ 거기서 뭐 한다고 하더만~ 글로 가야지~ 여긴 아니야 빨리 가봐~!" 하시며 사라지셨다.
당황한 나는 고개를 좌우로 살피다 '콤포스텔라 대성당'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헉헉거리며 도착했는데 정문은 여전히 닫혀 있었고 돌아가서 옆문을 살펴보니 미사를 드리는 것 같지는 않았다. '와... 멍청이 짓, 또 시작이냐...' 다시 성 프란치스코 성당으로 뛰었다. 선선한 날씨인데도 온몸이 화끈거렸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성 프란시스코 수도원과 성당(Convento e Iglesia de San Francisco)'은 1214년 이곳으로 성지순례를 왔던 아시시(Assisi)의 프란치스코(Francis) 성인에 의해 설립되었다. 이 지역 수도원(San Martino Pinario) 소유의 토지를 물고기를 잡아 바치는 조건으로 구입해 지었다고 전해진다. 원래 건물 중 일부만 보존되어 있으며 현재의 모습은 1742-1749년 사이 완성되었다.
성당 안은 나와 비슷한 차림새의 사람들로 이미 가득 차 있었다. 미사가 시작되려는 것 같았다. 오른쪽 중간쯤 기둥에 기대어 섰다. 그런데 기둥 옆 자리 어떤 커플이 사진 몇 장을 찍더니 일어서 나가면서 갑자기 자리가 났다. 흰머리와 수염이 멋있는 할아버지가 옆으로 당겨 앉으시며 나에게 앉으라고 손짓하셨다. 감사를 표하며 자리에 앉아 크게 심호흡을 몇 차례 한 후에야 성당 안의 모습이 하나하나 들어오기 시작했다.
예수님과 십자가, 마리아, 성인들의 모습이 올려다 보였다. 이제 막 도착해서 배낭을 멘 채로 들어오는 사람들, 그들의 웅성거림, 상기된 얼굴 표정들이 내 마음까지 두드렸다. 어느새 자리는 꽉 찼고 기둥 옆으로도 여러 겹으로 사람들이 둘러섰다. 계획했던 대로 된 건 하나도 없는데 결국 이곳에 와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고 감사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성호경을 긋고 감사를 드렸다.
옆자리 할아버지가 그런 나를 보며 다 안다는 듯이 따뜻한 미소를 지어주셨다. 'Santiago' 글씨가 프린트되어있는 회색 티를 입고 있던 그 할아버지는 영국분이신데 은퇴하고 프랑스길을 걸어 어제 도착했다고 했다. 그는 멋진 영국 엑센트로 나는 언제 도착했는지 어디서 왔는지 물었고 난 '한국에서 한 달 전에 출발했고 어젯밤에 이곳에 도착했다'고 대답했다. 영국 노신사는 더 반짝이는 눈빛으로 '밤에 도착했는데 알베르게는 잘 찾았냐고 사람들이 많아서 낮에도 숙소 구하는 게 쉽지 않았다'며 걱정되는 눈빛으로 다시 물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지금의 교황명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이탈리아 아시시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허물어져 가는 나의 집을 고쳐 세워라'하는 부르심을 받고 가진 것을 모두 버린 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수도자의 삶에 헌신했다.
그는 30세 무렵에 산티아고 콤포스텔라까지 순례를 왔고 이후 아시시로 돌아가 작은 형제회를 체계화했다고 전해진다. 평생 청빈한 삶을 실천하며 자연을 사랑했던 이, 성탄 구유를 최초로 만든 이, 최초로 공식 확인된 그리스도의 오상으로 고통받던 이, 임종까지도 그리스도처럼 알몸으로 완전한 가난 중에 맞이하고 싶어 한 이, 그가 '제2의 그리스도'라 불리는 이유다.
나는 '사실은 제대로 걷지 못했으며 한국에서 산티아고를 향해 출국하는 당일 다리에 깁스를 하는 바람에 루르드, 떼제를 거쳐 바르셀로나까지 기차를 타고 이동했고 이곳까지는 비행기를 타고 왔다'고 내 '이상한 순례길'을 요약해드렸다. 그는 내 이야기를 들으면서 점점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나에게 미소 지으며 "하지만 결국에 너는 여기 와있지 않니. 신이 너를 이곳으로 부른 거지. 때로는 우리가 가고 싶은 그 길을 열어주지 않을 때도 있지만 그건 분명히 이유가 있을 거야. 넌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넌 이곳에 있잖아. 그게 중요한 거야. 신은 다 알고 있어. 너의 모든 길과 너의 마음까지도." 하셨다.
결국 눈물이 터졌다. 그 멋진 영국 노신사의 모습으로 예수님이 나에게 말해주는 것 같았다. "고생했다고. 다 알고 있다고. 너의 모든 여정과 너의 마음까지도." 우리는 서로 눈물을 글썽거리며 "고맙다"고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 많았다"고 이야기해주었다.
영국 할아버지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은퇴하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계획하면서 스스로 끊임없이 의심했지. '수백 킬로미터를 걸을 수 있을까. 나는 너무 말랐고 늙고 힘도 없는데. 이 다리로?' 하면서 말이야. 걷는 중에도 발의 물집과 무릎의 고통보다 강력한 적은 '끝까지 완주할 수 있을까?' 의심하는 나 자신이었어. 하지만 결국 난 여기 와있잖아. 중요한 건 내가 포기하지 않았고, 여기 와있다는 거야. 너처럼"하셨다. 계속해서 그는 "네가 기차를 타고 왔든 비행기를 타고 왔든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넌 여기 와 있잖아?! 우리 그냥 지금, 여기서, 신이 우리에게 준 선물을 즐겨보자"하시며 빙긋 웃으셨다. 그리고 곧 미사가 시작됐다.
순례자 미사에서는 지난 24시간 동안 이곳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해 순례 증서를 받은 순례자들의 국적과 인원수가 발표된다. 예전에는 이름을 한 명 한 명 호명해 주었다는데 순례자가 늘면서 지금의 방식으로 바뀌었단다. 국가가 호명되면 순례자들의 박수와 환호성이 동시에 터져 나온다.
영국이 호명될 때 아이처럼 좋아하던 옆자리 할아버지의 모습이 생생하다. 그 눈빛과 예수님 같은 생김새, 나보다 더 말라 보이는 체구, 조용하면서도 확신에 찬 중저음의 목소리는 또렷하게 남아있다. 미사 내내 우리는 울고 웃으며 서로의 곁을 지켰고 '평화의 인사'를 나누며 다시 시작되는 인생 순례길에도 '신의 축복이 있기를' 기도했다. 미사를 마치고는 또 만날 수 있는 행운을 빌어보자며 짧은 포옹과 함께 가벼운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나는 성당 안을 천천히 둘러보며 좀 더 머물렀다. 유난히 고해소가 많아 보였다. 순례자로 보이는 사람들은 배낭을 고해소 앞에 둔 채로 안으로 들어갔고 더 맑고 깨끗해진 얼굴로 더러는 눈물지으며 밖으로 나왔다. 고해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지만 여전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10년 전, 내가 신에게 받은 첫 번째 선물로 기억하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시절이 떠올랐다.
대학교 1학년 겨울, 마음에 상처를 가득 안고 '마음의 평화를 줄 곳'을 찾아 헤매다 처음 내 발로 성당을 찾았다. 성탄 성야 미사였고 아직 어둠이 성전 안에 가득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성당 맨 뒤 의자에 초라하게 몸을 구겨 넣고 앉아있던 내 뒤로 빛이 들어왔다. 신부님 행렬과 함께 아기 예수님이 들어오셨다. 성당 안이 밝아지고 제대 너머로 십자가가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눈물이 고였다. 그 후 나는 일주일에 한 번은 성당에 나가기 시작했고 교환학생에 선발되어 처음으로 부모님과 떨어져 미국에 가보게 되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낯선 그곳에서 감사한 1년이 아름답게 채워졌다. 어둠이 내려앉았던 자리에 빛이 들어왔다. 캘리포니아의 파란 하늘과 따뜻한 햇빛과 좋은 사람들 덕분에 웃을 일이 많았다. 겨우 1년 살이에 향수병이 생길 정도였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다시 열심히 꿈을 좇았고, 돈을 좇았고, 그렇게 10년의 시간이 흘렀다. 내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해 산 것 같은데 사회생활 10년 차를 맞는 내 모습은 초라했다. 결국 꿈 대신 안정적인 직장인의 삶을 택했고 내가 세웠던 수많은 계획들은 물거품이 된 것 같았다. 엉망진창이었다. 매일 안개 가득한 어둠 속을 헤매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챗바퀴를 열심히 돌리는 다람쥐로 영영 갇혀있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익숙했던 것들을 버리고 다시 낯선 곳으로 떠나왔고 초록 깁스와 함께 시작한 이 한 달여간의 여정 속에서 나는 다시 빛과 희망을 품게 되었다. 너무나 초라하고 아프게 시작했던 '이상한 순례길'은 딱 10년 만에 다시 신이 내게 선물해준 휴가였다는 것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바욘, 루르드, 떼제, 아를, 아름다운 자연과 오래된 것들, 그분이 보내준 사람들을 통해 매일매일 빛으로 초대해주는 신의 손길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내 마음속 '제2의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성 프란치스코 성당'에서 '이상한 순례길'의 '순례자 미사'를 드리다니. 그분의 디테일함과 기발함에 자꾸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감사를 드리며 성당을 나섰다.
성 프란치스코 성당에서 5분 정도 걸으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정문이 모습을 드러낸다. 어젯밤 불빛에 비친 성당도 멋있었지만 파란 하늘 아래 하얗게 빛나는 한낮의 성당도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산티아고 대성당 정문과 맞은편 시청 건물 사이의 광장(Praza do obradoiro)에서는 순례자들이 배낭을 멘 채로 앉거나 누워 대성당을 하염없이 올려다본다. 막 도착한 순례자들이 서로 얼싸안고 환호하며 울고 웃는 풍경이 펼쳐진다. 덥수룩한 수염, 헤지고 땀 흘린 옷들, 무릎과 발목의 절뚝거림,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울컥한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Catedral de Santiago de Compostela)'은 스페인에 복음을 전파했던 야고보 사도(큰 야고보; Saintago)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곳으로 산티아고 순례길의 종착지이다. 전승에 따르면, 야고보 사도 순교 후 시신을 이곳으로 모셔왔는데 831년에 빛이 나는 현상과 함께 '여기 제베대오와 살로메의 아들 야고보가 묻히다'라고 쓰인 무덤이 발견되어 'Campus stellae', 즉 '별들의 언덕(Campo della stella)'으로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그 자리에 야고보 성인께 봉헌하는 성당을 1075년부터 짓기 시작하였고 1211년 완공되었다. 성당을 중심으로 동일 이름(Santiago de Compostela)의 도시가 형성되었으며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있다.
중세부터 꾸준히 수많은 순례자들이 이곳을 향해 걷고 있다. 순례자들은 이곳 성당에서 순례자 미사와 특별한 의식으로 순례를 마무리한다. 특히 순례자 미사 때는 20m 높이에 매달린 무게 53kg의 향(香)로를 장정 8명이 움직여 성당 전체에 분향하는 '보타푸메이로(Botafumeiro) 의식'이 유명하다. 또 한 가지, 순례자들은 야고보 성인의 유해 앞에서 기도하고 그의 상(像)을 껴안으며 순례를 마친다.
성당이 공사 중이라 보타푸메이로 의식과 미사는 없었지만 내부에 들어가 볼 수는 있었다. 대부분의 공간들이 커다란 공사장 칸막이로 막혀 있어서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야고보 성인의 유해가 모셔진 부분과 제대 뒷부분 야고보 성인의 상(像)은 개방되어 있었다. 문제는 수많은 사람들이었다. 거의 성당 문 가까이까지 줄을 서 있어서 야고보 성인을 만나려면 몇 시간은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어차피 며칠 더 있을 건데'하는 생각이 들어 짧게 기도만 하고 밖으로 나왔다.
성당 뒤편에도 성당을 둘러싼 광장(Praza da Quintana)이 있다. 테라스 자리를 가진 카페들과 계단들이 있었다. 순례의 기쁨을 만끽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성당 정문 쪽과는 다르게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앉아 스페인의 따뜻한 태양을 즐기고 있었다. 나도 오래된 수도원(Mosteiro de San Paio de Antealtares) 벽에 기대어 앉아 멍하니 눈을 감고 쉬었다.
한참있다가 대성당에 다시 도전했다. 아까보다는 줄이 줄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야고보 성인을 만나기 위해 서 있었다. 성인의 유해를 보기 위해 놀이공원에 입장하는 것처럼 남녀노소 줄을 서서 설레는 표정으로 차례를 기다리는 이 모습이 참 오묘하게 느껴졌다.
입구부터 뱀처럼 꼬불꼬불 나있는 줄을 다 서면 작은 문 위로 가파르게 나있는 계단과 마주하게 된다. 성수대는 덮여있지만 곳곳의 조가비 모양과 장식들이 야고보 성인을 느끼게 해 준다. 난간을 붙잡고 하나씩 계단을 오르면 중앙 제대 정면에 있는 야고보 성인의 옆모습이 보인다.
그 앞 작은 계단에 무릎을 꿇고 남녀노소 진지한 표정으로 더러는 눈물 흘리기도 하면서 순례자 지팡이를 들고 있는 야고보 성인을 뒤에서 꼬옥 껴안고 쓰다듬고 입 맞춘다. 조개 모양의 표식과 야고보 성인의 등은 사람들의 손길로 반짝반짝 윤이 나있다. 하지만 뒤에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어 지체할 시간 없이 반대편의 가파른 계단으로 내려가야 한다.
내 앞의 노부부는 서로 눈가가 촉촉해져 손을 잡고 의지해 내려갔는데 그 모습이 참 예뻤다.
뒷사람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며 짧지만 정성껏 기도를 했다. '감사합니다. 이곳까지 무사히 올 수 있어서요. 한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아니 그 이후 인생길도 잘 돌보아 주세요. 아멘' 하고 내려오면 이번에는 지하다. 야고보 성인 상(像) 밑의 지하에는 유해가 모셔져 있다. 이곳에서도 무릎을 꿇고 기도할 수 있다. 하지만 이곳도 줄이 길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내일 아침 다시 한번 와봐야겠다'며 길을 나섰다.
그래도 순례자 미사에 야고보 성인에게 인사까지 마치고 나니 '다 이루었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초록 깁스를 하고선 한 달 동안 유럽을 헤매다가 '결국 할 건 다 하고(?!) 가는구나'싶었다. 이 모든 것이 다 감사했다.
감사의 축배를 들기 위해 길을 나섰다. 사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순례지라기보다는 관광지였다. 골목마다 기념품 가게, 카페, 레스토랑들이 넘쳤고 그 모든 곳을 수많은 사람들이 채워 어디든 북적였다. 목요일 밤부터 월요일까지 머물렀는데 주말에는 사람이 정말 많았다.
거리를 헤매다가 정신없는 먹자골목을 피해 숙소 근처까지 왔다. 관광객들이 많아 보이는 세련된 분위기의 레스토랑과 현지인들이 많아 보이는 레스토랑 중에 용기를 내어 후자를 선택했다. 자리를 잡고 영어 메뉴판이 있는지 물어봤더니 서버 아저씨가 두툼한 메뉴판 여러 장을 가지고 오셨다.
영어로 음식 설명이 쓰여있는 메뉴판에서 메뉴 번호를 고르고 스페인어 메뉴판에서 번호에 맞는 이름을 찾아서 주문해달라고 하셨다. "응?!..." 무시무시한 숙제를 받아 들고 옆을 봤더니 노부부가 식사를 하는 테이블에는 영어 메뉴판이 테이블마다 놓여 있었다. '지금이라도 옮길까. 어떡하지' 온갖 생각이 떠오르는데 옆자리 노부부가 말을 걸었다. 이곳에 살고 있는 딸네 집에 놀러 왔다는 그들은 미소 지으며 유창한 영어와 스페인어로 메뉴 고르는 걸 도와주셨다. 덕분에 먹고 싶던 문어요리와 맥주로 만족스럽게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아이스크림 하나를 디저트로 사들고 구시가지 곳곳을 돌아다녔다.
중세시대에 콤포스텔라를 구분하던 7개의 문 중 유일하게 그대로 남아있다는 아치(Arco de Mazarelos)와 골목마다 있는 작은 광장들,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들이 멋스럽다. 아치를 지나 USC(University of Santiago de Compostela) 건물들(지리 역사학과, 성당, 도서관 등이 일부 위치해있음)을 지나면 Entrepracinas 광장에 아스투리아스의 알폰소 2세(Alfonso II of Austurias) 왕의 석상이 우뚝 서있다. 그의 통치기간에 야고보 성인의 무덤을 발견했다고 알려져 있다.
가다 쉬다 이곳저곳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보니 벌써 해가 조금씩 넘어갔고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대학교(USC) 캠퍼스 주변까지 이르렀다. 콤포스텔라 성당 근처의 관광지 분위기에서 벗어나 조용하게 산책하기 좋았다.
캠퍼스를 둘러싸고 공원이 넓게 조성되어 있었고 자연사 박물관, 도서관 등의 학교 내 건물들도 작품 같았다. 수업 끝나고 캠퍼스를 떠나는 학생들과 공원에서 조깅하는 사람들, 학교 안에는 거위와 새 떼들이 서식하는 연못과 개울도 있었다. 어린애 만한 거위들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유롭게 공원을 활보했다.
캠퍼스 옆에는 리조트 같은 숙소도 보였는데 동백나무 숲이 아름다웠다. 바닥에 카펫같이 깔린 빨간 꽃잎들과 아직 촘촘하게 매달려있는 동백꽃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그 넓은 숲을 혼자 거닐고 있으니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된 것 같았다. 그렇게 조금씩 콤포스텔라의 노을과 밤이 찾아왔다.
이곳에는 샌프란시스코를 연상케 하는 크고 작은 언덕들이 많았다. 언덕을 올라 길을 따라 쭉 걸으면 순례자 미사를 드렸던 성 프란치스코 성당이 다시 나온다. 숙소로 돌아가기 전에 밤을 맞이하는 콤포스텔라 대성당의 얼굴을 다시 한번 보고 싶어 광장(Praza do obradoiro)으로 향했다. 오늘 밤도 어김없이 시끌벅적한 춤판이 벌어졌고 노을과 가로등 불빛에 거리가 아름답게 빛나기 시작했다.
밤 10가 다 되어서야 가로등 불빛을 따라 조용해진 거리를 걸어 내려왔다.
숙소로 향하는 길에 길냥이를 만나 인사를 하면서 내 '고양이 방'이 떠올라 다시 머리가 아파왔다. 떼제의 잘 터지지 않는 인터넷으로 짧은 시간에 열심히 검색해 마련한 방이었다.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성당과 걸어서 5-10분 정도 거리에 아주 저렴한 숙박료를 자랑하는 내 방은 예술가 부부가 사는 집의 방 한 칸을 빌린 것이었다. 예술가답게 인테리어는 예뻤지만 중앙 복도로 나있는 유일한 창 하나에 커튼이 반투명 천으로 되어 있었는데 부엌 창문에서 내 방 침대가 훤히 들여다 보였다. 집주인은 첫날 집을 소개해 줄 때 먼저 언급하면서 절대 보이지 않으니 안심하라고 했지만 그 사실을 인지한 이상, 그러기는 쉽지 않았다.
집주인 부부와 다른 방 손님들까지 5명이 함께 써야 하는 하나뿐인 욕실도 쉽지 않았지만 가장 힘들었던 것은 고양이였다. 집주인 부부는 흰색 고양이 한 마리를 키우고 있었는데 이건 이미 숙소 소개에 나와있었고 동물을 사랑하는 나로서는 기대되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 방이 고양이가 생활하던 방이었다는 것이다.
어제 숙소에 짐을 풀고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는데 그새 흰 고양이가 내 방 침대 위에 앉아있다가 후다닥 나를 지나쳐 거실로 빠져나갔다. 귀엽다고 생각하며 침대 위에 앉았는데 내가 입고 있던 검은색 바지에 흰색 고양이 털이 잔뜩 묻어났다. '그새 묻히고 사라진 거겠지' 생각했다. 나중에 씻고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었는데 코가 간질간질하고 재채기가 계속 나더니 입 안으로 털이 들어왔다. 참고로 나는 개털 고양이 털 알레르기가 있다. 불을 켜고 일어나 살펴보니 이불 안 쪽도 고양이 털 천지였다. 이후에도 고양이는 종종 내 방에서 목격됐는데 틈만 나면 들어와 쉬고 있는 걸 보면 그 방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첫날밤에는 너무 늦어서 주인 부부에게 이야기를 하지 못했고 그다음 날부터는 이 가격의 숙소로 옮기는데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 싶지 않아 침묵했다. '싼 가격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몸으로 배우며 침낭을 펴고 매일 잠을 청했다.
깁스하고 떠난 40일간의 순례 기록 <이상한 순례길>의 종착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보낸 4박 5일간의 이야기들 계속해서 함께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