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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끝, 묵시아-피스테라와 콤포스텔라의 마지막 밤

깁스하고 떠난 40일간의 산티아고 순례

| 8:40 AM, 접선 장소로

일요일 오전에 출발하는 일일투어의 접선(?!)장소, '갈리시아 광장(Praza de Galicia)'으로 가기 위해 8시부터 일어나 준비하고 숙소를 나섰다. 멀리 보이는 대성당의 첨탑이 첫날의 설렘을 떠올리게 했다. 거리는 한산했고 어느새 Alameda 공원까지 다다랐다. 공원을 거닐며 어제 사둔 빵과 인스턴트커피로 아침을 해결했다. 

Alameda 공원에는 'As Duas Marias'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는 여인 둘이 서있다. 이들은 실존 인물인 Maruxa와 Coralia의 모습으로 1936년 프랑코 독재정권의 피해자들을 기억하자는 의미로 세워졌다고 한다. 철마다 새로운 색을 칠해서 옷을 갈아입는다. 

공원 근처 광장에는 관광객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이미 무리를 지어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 몇몇에게 '원데이 트립' 출발지가 맞는지 물었더니 그런 것 같다며 함께 기다리자고 해주었다. 순례길 이야기로 분위기가 달아오를 무렵 여행사 직원들이 도착했다. 명단을 체크하고 15인승 미니버스에 몸을 실었다. 

부부, 가족, 나처럼 혼자 온 사람들까지 10명이 채 되지 않았다. 경험 많아 보이는 운전기사와 내 또래로 보이는 여자 가이드가 영어와 스페인어로 우리의 하루를 책임지기로 했다.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을 깔면 한국어로도 장소마다 오디오 가이드를 들을 수 있었다. 설렘을 가득 안고 콤포스텔라를 빠져나왔다. 


20분 정도를 달려 첫 번째 경유지 '폰테마세이라(PonteMaceira)'에 도착했다. 


| 세상의 끝을 향해서 

#마세이라 다리(Pontemaceira)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의 브래드 피트가 어디쯤에선가 플라이 낚시를 하고 있을 것 같은 풍경이었다. 시원한 물소리와 시원한 하늘이 아름다웠다. 차에서 내려 설명을 듣고 자유시간 15분을 받아 흩어졌다.

Tambre 강이 흐르는 Pontemaceira(마세이라 다리)는 순례길 루트 위에 있는 곳으로 묵시아-피스테라 대륙 끝에서 산티아고 콤포스텔라로 가는 길목에 있다. 14세기 콤포스텔라 대주교에 의해 세워졌고 18세기에 다시 현재 모습으로 재건되었다. 다리 끝에서는 18세기에 세워진 작은 예배당도 만날 수 있다. 전형적인 갈리시아 지역의 모습을 간직한 곳으로 야고보 성인의 유해도 이곳을 건너 콤포스텔라로 갔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옛 물레방앗간이 그대로 남아있는 다리 아래로도 내려가 볼 수 있었는데 일행 중 한 명이 손을 물에 담가보려다가 발을 헛디뎌서 물에 빠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얕은 곳에 발을 걸치면서 다치지는 않았는데 가방이 물에 떠내려갔다. 재빠른 몇몇이 가방과 소지품을 건져냈지만 선글라스와 파우치는 물살에 휩쓸렸다. 아찔했지만 모두를 하나로 만들어 준 해프닝으로 마무리되었다.

한바탕 소동이 지나고 멍하니 흐르는 물을 바라보는데 차에서 내 옆자리에 앉아있던 부부가 말을 걸어왔다. 아시아계 미국인으로 샌디에고에서 온 Jun 아저씨였다. 나에게 "한국에서 왔냐"고 물어보시고는 어떻게 알았는지 놀라 묻는 나에게 "한국사람처럼 생겨서"라고 대답하셔서 우리는 한참 웃었다. 아저씨는 혼자 온 나를 위해 자청해 사진을 찍어주시면서 그동안은 어떻게 했는지 물어보셔서 "셀카나 풍경사진 위주로 찍었다"고 말씀드렸더니 "오늘은 내가 전속 사진사가 되어주겠다"며 호탕하게 웃으셨다. 


약속된 시간은 어쩜 그리 빨리 가는지 벌써 버스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 다가왔고 나는 차에 타서 옆자리 Jun 아저씨 부부와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이동했다. 콤포스텔라에 도착해서부터 계속 혼자 지내다 오랜만에 함께 웃고 떠들 수 있는 사람들이 생겨 참 좋았다. 폰테마세이라에서 30분 정도를 달려 '무로스(Muros)'라는 해안가에 도착했다.


#해안가 마을 Muros

갈리시아 지역의 오랜 항구들을 품고 여전히 어업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해안가 마을 무로스(Muros)에서도 20분 정도의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홍합과 해산물이 유명하다며 가게를 들러 쇼핑도 좀 해보라는 가이드의 팁이 있었지만 버스를 내린 곳 근처에 작은 해변이 있어 자연스레 그곳을 향해 가는 내 발걸음을 따랐다.


바닷가에만 오면 부모님이 생각났다. 바다를 좋아하는 엄마와 바다에 젊음을 바쳤던 아빠의 딸이기 때문일 테다. 누가 봐도 내가 한국인인 것처럼 말이다. 이른 저녁시간인 한국으로 영상통화를 걸었다. 이제 돌아갈 날도 얼마 남지 않아 데이터도 충분했다. 부모님의 표정과 목소리가 밝다. 감사했다. 엄마는 "우리 딸 덕분에 스페인 바다도 본다며 아픈 엄마 대신 세계를 누벼주어서 감사하다"한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파란 하늘과 경계를 알 수 없는 수평선, 햇빛에 반짝이는 물결과 속이 훤하게 들여다보이는 바닷물, 산책 나온 강아지를 보여주며 바닷가에 앉아 한참을 통화했다.  

다시 버스 쪽으로 갔더니 사람들이 마을로 올라갔다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마을 안을 둘러보는 것은 포기하고 항구에 묶인 보트와 요트들을 구경했다. 

에메랄드 빛 물은 또 어찌나 맑은지 물고기들이 움직이는 모습과 바닥까지 훤히 보였다. 몇몇이 낚싯대를 들이밀고 있었다. 물 반 고기반으로 수족관에서 낚시를 하는 것처럼 물고기가 계속 올라왔다.  

줄낚시를 하는 이 아저씨는 생선토막을 걸어 던졌는데 바늘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원샷원킬로 꽤 큼직한 문어가 걸려 올라왔다. 아저씨는 큰 문어 한 마리를 들고 유유히 사라지셨다. 냉장고에서 생선을 꺼내가는 것처럼 쉽게 살아있는 해산물을 잡아가는 게 신기했다. 


시간이 다 되어 다시 버스를 탔다. Jun 아저씨네 부부는 언덕 위 작은 성당에 다녀왔다고 했다. 작지만 아름다웠단다. 나도 작지만 아름다웠던 해변에 다녀온 일과 문어 잡는 걸 구경한 일과 사진들을 공유했다. Jun 아저씨는 문어가 들어 올려지는 장면을 특히 마음에 들어하셨다. 그렇게 또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가이드 설명도 듣다 보니 40분이 금방 흘러 다음 장소로 도착해 있었다.  


#에자호 폭포(Cascada do Ezaro)

버스 주차장에서 10분 가까이 걸어 폭포가 있다는 곳으로 갔다. 얼마 전까지는 공사 때문에 가까이에 접근하기 어려웠는데 우리 팀이 운이 좋은 것 같다고 가이드가 말해주었다. 가까이 갈수록 물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그렇게 또 하나의 엄청난 장관과 마주했다. 

낮은 구릉지로 이루어진 스페인에서는 여기가 강에서 흘러나온 폭포가 바로 바다로 이어지는 유일한 곳이라고 한다. 아이 같은 표정의 사람들은 사진도 찍고 물에 손과 발을 담그기도 하고 눕거나 앉아서 각자의 방식으로 폭포를 마음에 담았다. 역시 신이 만들어낸 자연만큼 감동적인 것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도 등장한 Jun 아저씨는 다양한 스폿에서 다양한 각도와 포즈로 사진을 디렉팅 해주셨다. 덕분에 셀카뿐이던 내 사진첩에 전신사진들이 늘어갔다. 


여기서 또 차로 40분,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피스테라(Finistere)에 도착했다. 


#세상의 끝, Finisterre

Finisterre는 '피스테라, 피니스테라, 피니스테레' 영어, 갈리시아어, 스페인어 등으로 다양하게 불린다. 대서양이 끝없이 펼쳐지는 이곳은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기 전까지 '세상의 끝'이라 믿었던 곳이다. 지금은 순례길 0km 표지석이 '세상의 끝'을 알리고 있다. 

등대와 십자가, 소원을 담은 돌무더기들이 곳곳에 보였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낡은 운동화 무더기.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대성당에 도착한 순례자들은 80km를 더 걸어 이곳 '세상의 끝'에서 순례를 마치고 자신이 신고 온 신발을 불태운 뒤 새롭게 삶을 시작하는 의식을 치른다. 이 때문에 화재가 발생한 경우가 많아 현재는 신발을 태우는 행위는 법적으로 금지되었다고 한다. 대신 이렇게 낡은 신발을 벗어두고 돌아가는 것 같았다.

어디가 정말 '세상의 끝'일지 내기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해안 절벽 끝에 서거나 바위 끝에 걸터앉아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안전장치나 별도의 펜스가 없어 위험해 보이기는 했지만 '세상의 끝'을 보고 돌아서 삶을 다시 시작하기에는 완벽한 장소였다. 

등대나 표지석 쪽에는 사람들이 많아서 '통일 전망대'를 떠올리게 했는데 벼랑 끝에 서있으면 그런 소음도 아득해지고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와 바람 소리만 크게 들려왔다. 이제 '세상의 끝'에서 돌아 나와 다시 삶 속으로 들어가야 할 때였다. 점심을 먹기 위해 피스테라 시내로 10분 정도를 차를 타고 내려왔다. 


#피스테라 해산물 코스 

with New Asian Fam.

한 시간 정도 머물면서 식사를 할 수 있는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사실 준비해 간 점심 샐러드가 가방에 있었지만 여기까지 온 김에 해산물 요리 한 번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레스토랑들을 기웃거렸다. 그때 또다시 등장한 Jun 아저씨는 "같이 먹을 사람 없으면 우리랑 함께 할래?!" 하셨다. 나는 "아줌마 아저씨만 괜찮다면 그러고 싶다"고 했고 아주머니까지 합세해 "그럼 같이 먹자"고 활짝 웃으며 내게 손을 내미셨다. 


우리는 바닷가 앞의 15유로짜리 '해산물 코스' 식당을 골라 자리를 잡았다. Jun 아저씨 부부는 스페인어도 조금 할 줄 아셔서 우리는 곁들일 와인까지 골랐고 나는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구운 가리비까지 주문했다. 얼큰하고 시원해서 은근히 맛있었던 생선 수프와 이곳 바다에서 바로 잡았다는 신선한 생선 구이, 달큰하고 고소한 쫄깃쫄깃 가리비, 이 모든 음식들을 조화롭게 만들어주는 화이트 와인까지, 완벽했다. 

식사가 더욱 완벽했던 건 Jun 아저씨 부부와의 웃음이 끊이지 않는 대화 덕분이었다. 음식이 나오자 아주머니와 내가 동시에 사진기를 꺼내다 웃음이 터졌다. 아저씨는 아주머니가 맨날 음식 사진만 찍는다며 장난을 치셨고 아주머니는 사리아(Sarria)부터 100km를 걷는데 순례길에서 만난 모든 사람과 친구가 되는 아저씨 때문에 특히 서양 여자들과 가는 곳마다 포옹과 볼뽀뽀를 하는데 깜짝깜짝 놀랐다고 장난스럽게 말씀하셨다. 미국에 사는 아시아인들에 대한 이야기, 내 캘리포니아 시절 이야기, 장남 장녀와 외동의 이야기, 원데이 투어 비용이 호텔에서 살 때의 가격과 여행사에서 직접 지불할 때 차이가 있다는 것, 아주머니의 의료봉사 이야기, 폭넓은 주제들이 오고 갔다.


아저씨는 내 순례길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시더니 '이상하고 용감한 순례길'라고 이름을 붙여주셨다. 가톨릭인 부부는 루르드와 떼제에 관심을 가졌고 '이상하고 용감한 순례길' 이야기는 우리를 울고 웃게 했다. 특히 콤포스텔라 고양이방 이야기를 듣던 아주머니는 샌디에고에 오면 화장실 딸린 큰방을 준비해주겠다고 해서 한참을 웃었다. Jun 부부는 한국인 친구들이 꽤 있는데 일 때문에 종종 한국에 들를 때도 있다며 서울에서도 회동을 한 번 갖자는 이야기도 오갔다. 행복한 상상들과 웃음들이 이어졌고 모든 음식들과 와인병이 비어갔다.


정신을 차려보니 버스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 5분도 남지 않아서 서둘러 계산을 하고 나와 차에 올랐다. 다음 행선지 묵시아(Muxia)까지는 피스테라에서 차로 40분 정도, 우리의 수다는 계속됐다. 


#또 다른 '세상의 끝', Muxia

묵시아(Muxia)는 피스테라보다 좀 더 위쪽에 위치해있다. 이곳에도 순례길 0km 표지석이 있어서 피스테라와 '어디가 진짜 세상의 끝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대형 등대와 기념품샵들이 있는 피스테라보다 한적한 묵시아의 분위기가 '세상의 끝'에 와 있는 느낌을 주었다. 

주차장에 내려서 수평선을 바라보며 작은 예배당과 종탑 사이를 지나면 널찍한 자연 그대로의 돌들을 치는 거센 파도와 탁 트인 대서양 바다를 만날 수 있다.  

이곳은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품고 있다. 산티아고(St. James), 야고보 성인은 스페인 지역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왔지만 처음에는 결과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갈리시아 지역 사람들은 이미 여러 신들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성모님이 야고보 사도를 응원하기 위해 돌로 된 배를 타고 이곳에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있다. 성모님 모습이 바위에 새겨져 사람들은 이를 옮겨 교회 안에 모셨는데 그 바위에서 성모님 모습이 사라지고 이곳에 다시 나타났다는 이야기도 있다. 바위틈을 통과하면 병이 낫는다는 이야기와 7번을 왕복으로 뛰어넘으면 10년씩 생명이 연장된다는 바위 이야기까지 다양했다. 

여기도 별도의 안전장치가 없이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었는데 위험하면서도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어떤 사람은 몰아치는 파도에 가까이 가고 어떤 사람은 낚시를 하고 어떤 사람들은 폴짝폴짝 바위를 뛰어넘으며 생명을 연장했다. 가이드는 특히나 검은색을 띠는 바위들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거친 파도 때문에 이곳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해상사고가 잦다고 했다. 지난 2002년에는 대형 유조선이 좌초되어 두 동강이 나는 사고로 엄청난 양의 기름이 유출됐고 일대가 검게 물들었다고 한다. 당시 수많은 자원봉사자가 몰려와 손으로 일일이 기름을 닦아냈지만 아직 그 검은 흔적이 남아있는 거라고 한다. 그 일을 잊지 말자는 의미로 언덕 위에는 두 동강 난 커다란 비석이 세워졌단다. 우리나라 태안의 기름 유출 사고가 떠올랐다. 인간이 힘을 합치면 못 하는 것이 없을 거라는 말도 함께 떠올랐다. 

Virxe da Barca Sanctuary

바닷가 바로 앞에 작은 성당이 있었지만 잠겨있어서 창문 틈으로만 살짝 내부를 볼 수 있었다. 

이곳은 켈트족(Celtic)의 신전이 있던 곳으로 12세기에 가톨릭 성당으로 바뀌었고 17세기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지난 2013년 크리스마스 때는 번개를 맞고 큰 불이 나서 내부가 많이 손상되었다가 재건되었다.

표지판을 따라 오르면 멀리서 바람개비처럼 열심히 도는 풍력 발전기와 더 먼바다까지 내다볼 수 있다.

Jun 아저씨의 도움으로 '순례 0km 표지석' 기념사진도 남기고 뒤편의 거대한 기념비와 그 뒤로 펼쳐지는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까지 마음에 담고 내려올 수 있었다.

Mirador Jesus Quintanal

모든 근심과 걱정을 풀어놓기에 바다만큼 완벽한 장소가 또 있을까 싶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아주 많은 사람들의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 이 바다의 이야기를 실컷 듣고 이제는 정말 세상 속으로 돌아가야 했다.


오늘 밤이 지나면 정말 '집으로 돌아가는 길'만 남아 있었다. 일주일은커녕 하루 이틀 버티는 것도 자신 없었던 출국날부터 어느새 한 달이 넘게 지나 있었다. 나의 작은 용기로 이 엄청난 시간들을 허락해주심에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이 '이상한 순례길'보다 더 이상하고 더 아름다울 앞으로의 내 인생 순례길에서도 더 큰 용기를 낼 수 있길 기도하며 돌아 나왔다. 

세상의 끝을 찍고
다시, 세상 속으로
논밭의 오레오(Horreo)

오후 5시, 다시 오늘 아침 처음 만났던 곳으로 돌아가는 차 안. 논밭마다 직사각형 모양의 작은 집, 혹은 관처럼 생긴 '오레오(Horreo)'가 눈에 들어온다. 십자가까지 달려있어서 처음에는 우리나라 제주도의 무덤들처럼 논밭 안에 가족의 무덤을 두는 풍습이 있나 했는데 곡식창고였다. 

오레오(Horreo)는 수확한 곡식들을 쥐나 해충 등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바닥에서 공간을 띄워 만든 곡식 창고로 작은 최대 35m짜리까지 다양한 크기로 존재한다. 수확물을 지켜달라는 뜻으로 한쪽 끝에는 십자가도 세운다. 가이드 말로는 동그란 검은색 쿠키 '오레오'의 이름도 여기서 유래됐다는데 확인할 수 없었다.

교외를 씽씽 달리다가 콤포스텔라에 가까워 올수록 주말이라 그런지 차가 막혔다. 하나 둘 잠들어 조용해진 차는 한 시간 반 만에 처음의 장소에 도착했다. 오늘 하루를 멋지게 이끌어준 가이드와 기사님께 박수를 치고 하루 만에 정이 담뿍 든 Jun 부부와도 인사를 하고 가장 가까운 성당을 찾았다. 


| 콤포스텔라 살로메 성당서 주일 미사

Santa Maria Salome 성당 내부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 주일이라서 꼭 미사를 드리고 싶었다. 오는 길에 검색해보니 투어 해산 장소에서 5분도 안 되는 거리의 '살로메 성당(Igrexa de Santa Maria Salome)'에서 7시 미사가 있었다. 10분 정도 전에 성당에 도착해 중간 정도에 자리를 잡았는데 어느새 뒷자리까지 가득 차고 미사가 시작됐다. 


관광객들과 지역 주민들이 반반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유럽 미사에서는 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많았는데 여기는 고등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여학생들이 전례를 담당했고 스페인어로 미사가 집전되었다. 한 시간이 채 지나기 전에 미사가 끝나고 단체로 온 관광객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옆의 경당에 모여 묵주기도를 드렸다.  

'Santa Maria Salome 성당'은 살로메 성인에게 봉헌된 스페인의 유일한 성당으로 12세기에 처음 지어졌다가 17세기에 La Soledad 경당이 추가되는 등 다시 지어졌다. 

살로메(Salome)는 성 제베대오의 아내, 사도 요한(Joannes)과 야고보(Jacobus; James)의 어머니로 “주님의 나라가 서면 저의 이 두 아들을 하나는 주님의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했던 인물이다. 성서에 따르면 살로메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목격했으며 빈 무덤을 발견한 사람 중 한 사람이다.

기도소리만 가득해진 성당 안을 천천히 돌아보고 자리에 앉아 잠시 감사의 기도를 드린 후 일어섰다. 성당 밖은 주말의 끝을 맞아 어디든 사람들로 북적였다. 


| 마지막, 저녁 산책

#새로운 세계와 익숙한 세계

어느새 또다시 배가 고파와서 점심으로 싸왔던 샐러드 도시락을 먹을 적당한 장소를 찾기 위해 다시 아침의 Alameda 공원을 찾았다. 여기는 사람이 더 많았다. 근처에서 어린이책 축제(Fair)가 열려서 가족단위 인파가 몰려있었다. 특히 공원 한쪽의 작은 연못(Parrulos e xardins)과 다리에는 어린아이들이 거위와 물고기를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람들을 피해 작은 예배당과 분수대를 지나 언덕을 올랐다.  

Estanque da Ferradura
Igrexa de Santa Susana

언덕 위 공원 한가운데에는 오래된 성당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은 또 젊은 청춘남녀들의 데이트 코스인 것 같았다. 커플들이 여기저기 터를 잡고 열심히 애정표현을 하고 있어서 성당을 끼고 한 바퀴 돌아 나와야 했다.

성 수산나 성당(Igrexa de Santa Susana)은 12세기 Xelmírez 대주교가 포르투갈에서 가져온 수산나(Susana) 성인의 유해를 모시기 위해지었다고 한다. 17세기-18세기에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되었다.

성당 문이 닫혀 있어서 내부는 볼 수 없었는데 겉모습만으로는 오랫동안 방치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성당과 함께 세월을 버틴 것 같은 나무들이 초록 초록한 잎들과 이끼들로 둘러싸고 있어 독특하게 아름다웠다.

어느 곳에도 조용히 혼자 앉아 샐러드를 펼칠 곳이 없어서 주변을 배회하는데 점점 해가 내려앉았다. 초록초록하면서도 조용한 곳, 노을을 즐길 수 있는 곳을 생각하다 문득, 어제의 그곳 'Belvis 공원'이 떠올랐다. 여기서 20분은 더 걸어가야 했지만 오늘이 콤포스텔라의 마지막 밤이니까 그 정도의 노력은 할만하다고 생각했다. 해가 다 지기 전에 서둘러 'Belvis 공원'으로 향했다. 


#Before Sunset

헉헉대며 오르막을 올라 9시가 다 되어서야 다시 어제의 그곳에 다다랐다.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석양을 보며 앉아 저녁을 먹는데 바람이 찼다. 상상했던 것처럼 로맨틱하지는 않았다.

벌써 한쪽으로는 어둑해지는데 인적은 없어서 괜히 두려움이 올라왔다. 식사를 마치고 남아있는 해를 따라 바로 대성당 쪽으로 향했다. San Fiz de Solovio 성당 앞 광장, 어제의 십자가상이 좀 더 선명하게 들어왔다.

사람들이 우르르 나오는 곳을 따라가 보니 꽤 규모 있는 전통시장(Mercado de Abastos de Santiago)이 있었다. 해산물, 육류, 치즈, 빵, 온갖 종류의 먹거리를 파는데 해산물을 고르면 그 자리에서 요리를 해주는 곳, 타파스와 맥주를 즐길 수 있는 바(bar)도 있었다. 다만 영업시간이 정해져 있어서 대부분 영업을 끝내고 정리를 하는 것 같았다. '어제에만 알았어도...'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하지만 슬퍼하기에 남은 하루가 너무 짧았다. 다시 걸음을 재촉해서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대성당 앞에 섰다.

아직 대성당 첨탑 끝에 노을이 걸려 있었다.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대성당은 햇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한낮의 모습과 어두운 밤 조명에 빛나는 모습, 그리고 이렇게 노을을 받아 주황빛으로 빛나는 모습이 각각 다른 매력을 느끼게 해 준다. 첫날밤처럼 하염없이 앉아서 대성당이 노을빛을 벗어내고 짙어지는 하늘과 조명을 받아내는 모습을 바라봤다. 그리고 전날 사놓았던 엽서들을 꺼내 들었다. 

원래 여행지에서 기념엽서를 사는 편은 아니었지만 떼제의 마지막 날, 수녀님이 자신의 버킷리스트인 '산티아고 콤포스텔라'에 도착하면 엽서 한 장 보내줄 수 있겠냐고 소녀처럼 수줍게 부탁하셨던 것이 기억나 겸사겸사 몇 장을 사두었다. 수녀님께 편지를 쓰면서 서울에 도착해 인생 순례를 이어갈 나 자신에게도 몇 자 적기 시작했다. 드디어 완벽한 '순례의 마지막 밤'이 시작됐다. 좀 전의 불편했던 마음들도 사르르 녹았다. 


| 콤포스텔라의 마지막 밤과 고해

내일 떠나지만 저녁 비행기인만큼 엽서 부칠 시간은 충분하니까 우체국 찾을 걱정은 내일로 미루고 노을 지고 밤이 찾아올 때까지 한참 산티아고를 즐겼다. 종일 바닷바람을 맞아서 그런지 날씨가 추워진 건지 몸이 으슬으슬 떨릴 정도가 되고 나서야 숙소로 발길을 돌리는데 어제의 'San Fructuoso 성당'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럼 마지막 기도나 하고 가야겠다'며 안으로 들어섰는데 갑자기 떼제 노래가 흘러나왔다.  


'와 너무 큰 선물이다.'싶어 맨 뒤에 서있다가 성서가 펼쳐져 있는 앞쪽으로 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랬더니 칭찬을 해주는 것처럼 내가 좋아하는 또 다른 떼제 노래가 나왔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내 순례의 처음부터 끝까지 이렇게 누군가 돌보고 계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깁스한 나를 휠체어로 태워서 게이트까지 데려다준 친구, 처음 본 사이에 부탁한 것도 아닌데 내 가방을 들어주고 도와준 수많은 사람들, 바욘 성당의 봉사자와 아주머니, 루르드의 한국 수녀님, 떼제를 알려준 마리아, 떼제에서 만난 엄청난 인연들, 함께 국경을 넘었던 사진작가, 오늘을 함께한 Jun아저씨 부부까지, 매일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았지만 매일이 축복이었던 한 달이었다. 생각해보면 산티아고 간다고 이런저런 팁을 준 선배 순례자들과 신부님들까지, 아마 순례를 결심했던 순간부터 아니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해 처음 들었던 그날부터 이 모든 것들이 신의 커다란 계획과 보살핌 안에 들어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들려오는 떼제 노래 때문에 미루다 결국 못한 고해성사가 생각났는데 그것만 빼면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오른쪽 제의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할아버지 신부님 한 분이 두꺼운 책을 들고 나오셨다. 신부님은 오른쪽 중간쯤 자리를 잡고 책을 읽기 시작하셨다. '고해... 할까? 하라는 신호일까?' 하는데 떼제 노래 '두려워 말라(Nada te turbe)'가 나오기 시작했다. 웃음이 났다. 마치 누군가 내 머릿속을 읽고 있는 것 같았다. 잠시 고민을 하다가 결국 용기를 내서 신부님께 고해를 청했다. 


텅 빈 성당에 신부님과 제대를 보고 나란히 앉았다. 한국어로 고해하겠다고 말씀드렸는데 신부님은 영어나 스페인어를 하면 좀 더 도와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씀하셨고 우리 둘은 더듬더듬한 영어로 '신의 길'을 찾아갔다. 마음 깊은 곳에 남아있던 분노와 원망, 단단했던 바닥의 무언가까지 건드려졌고 지금껏 입 밖으로 내지 못했던 솔직한 속 마음까지 쏟아져 나왔다. 그리곤 이내 완고하던 마음이 무너지고 부드러워지는 느낌이었다. '다 이루어졌다.' 중얼거리며 한껏 가볍고 또, 충만해져서 산티아고 콤포스텔라의 밤 속으로 들어갔다.


깁스하고 떠난 40일간의 순례 기록 <이상한 순례길> 종착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4박 5일을 보내고 드디어 집으로 가는 길, 독일 뮌헨의 친구네를 들르기 위해 '마드리드'로 우선 갔는데요. 한국에 들어올 때까지 함께 해주실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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