깁스하고 떠난 40일간의 산티아고 순례
'오늘 저녁이면 또 다른 곳에서 잠자리에 들겠지' 이제 다시 이동이다. 한국에 돌아가기 전, 독일 친구네를 들르기로 했는데 그러려면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처럼 큰 도시로 먼저 가야 했다. 이왕이면 새로운 곳, '마드리드'로 방향을 잡고 들른 김에 하루 이틀이라도 머물기로 했다.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공항, 저녁 8시 20분 비행기였다. 6시 반까지 공항에 도착한다고 치면 넉넉잡아 오후 5시 반 정도에만 출발하면 되는데 숙소 체크아웃 시간이 12시라서 비는 시간들을 어떻게 쓸지 막막했다. 하지만 걱정은 미뤄두고 우선은 어제 쓴 '엽서를 부치는 미션'을 해결하기로 했다. 침낭 안에서 꼼지락 대면서 어제 남겨둔 빵과 주스로 간단하게 아침을 해결하고 나서 짐을 꼼꼼하게 싸놓고 숙소를 나섰다.
거리는 여전히 이제 막 도착하는 순례자들과 관광객들로 붐볐다. 벌써 5일째인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구시가지 골목들이 이제 대부분 익숙했지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아쉬움이 가득했다. '다음번에 오면 꼭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대성당에서 향로 미사를 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생각했다. 기념품 가게 앞의 마녀, 괴물 피규어들을 보니 '다음번에 오면 꼭 밤 투어도 해봐야지.' 하는 마음도 생긴다.
산티아고 콤포스텔라에는 관광객들을 위한 무료 가이드 투어가 다양하게 준비되어있다. 구시가지를 돌아보는 것부터, 저녁 7시부터는 마녀, 전설, 콤포스텔라의 밤, 뒷 이야기들을 들어볼 수 있는 투어도 있다. 미리 홈페이지를 통해 신청하면 된다.
순례자 사무소 근처에 우체국이 있었다.
우표 5장짜리 묶음이 7.5유로, 우리 돈 만원에 가까운 금액으로 좀 비쌌다. 그리고 우체국에서 엽서를 바로 부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도시 곳곳에 있는 동그란 우체통에 넣어야 한다고 했다. 거리로 우체통을 찾으러 나섰다. 그렇게 잘 보이던 것이 왜 오늘따라 안 보이는지 대성당 앞 까지 갔는데도 찾지 못했다.
그런데 대성당 앞에 루르드에서 보던 '쁘띠 트레인' 관광열차가 서 있었다. 7.5유로이던 루르드보다 좀 더 저렴한 6유로였다. '한 바퀴 돌면서 보면 우체통을 좀 더 쉽게 찾을 수 있겠다'는 핑계를 찾아 기차에 몸을 실었다. 콤포스텔라 구시가지 주변과 시내,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대학교와 Belvis 공원 언덕까지 넓은 구역들을 돌았다. 놀라운 건 그 넓은 곳을 내가 이미 걸어서 몇 번씩이나 돌아다녔다는 것이었다. 간단한 오디오 가이드와 함께 산티아고 콤포스텔라를 마지막으로 복습했다.
그렇게 기차는 한참을 돌고 돌아서 다시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대성당 앞 광장에 섰다. 그리고 얼마 안 남은 숙소 체크아웃 시간을 맞추기 위해 나는 다시 구시가지 안의 우체통을 향해 빨리 걸었다. 겨우 우체통을 찾아 엽서를 넣고 숙소로 가는 길에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순례자 사무소와 프란치스코 성당 사이에 떡하니 있는 우체통이 보였다. '그래, 참 고보경스럽다'하며 웃음이 났다.
헐레벌떡 숙소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체크아웃 시간이 10분 정도 지나 있었다. 이미 집주인은 내 방 문을 열고 청소기를 돌리고 있었다. 나를 보더니 '어디 갔었냐'고, '체크아웃 시간 지난 거 알고 있냐'고, '바로 다음 손님이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나는 인사를 하고 열쇠를 돌려주고 다시 배낭을 짊어지고 밖으로 나왔다. 고양이가 탁자 위에 앉아서 내가 나가는 걸 지켜본다.
'고양이 안녕, 고양이 방 안녕'
이제 다시 출발이다.
이 무거운 배낭을 메고 걸어 다니는 건 무리인 것 같기도 하고, 이미 콤포스텔라는 볼 만큼 봤다는 생각에 우선 점심을 먹고 공항이나 여유 있게 가자고 마음먹었다. 원데이 투어의 접선장소 근처에서 공항으로 가는 버스가 있어서 우선 그쪽을 향해 걸었다. 눈에 띄는 패스트푸드점에 오랜만에 실험적인 맛 대신 아는 맛을 선택하기로 했다. 주문을 하고 배낭을 내려놓고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는데 맞은편에서 한국말이 들려왔다.
남자둘 여자 하나, 함께 순례를 한 친구들 같았다. 한참 이런저런 이야기들로 티격태격하더니 자유시간을 갖고 저녁에 만나기로 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그렇게 밖으로 나가다 나를 발견하곤 "안녕하세요"하며 목례를 했다. 이곳에서는 서양사람들이 눈이 마주치면 서로 'Hi, what's up, how are you' 등으로 인사하는 것처럼 한국인들끼리도 서로 눈이 마주치면 최소한 목례로 인사를 나눴다.
내 또래 여자가 "지금 오셨어요?!~"하면서 나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지난 목요일에 왔고 이제 돌아가는 길이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저희는 어제 도착했어요"하면서 대뜸 "혹시 추로스 좋아하세요?! 저랑 추로스 먹으러 가실래요?!" 한다. 여기 추로스 유명한 집이 있는데 남자 애들은 별로 관심 없어한다는 것이었다. 나도 사실 저녁 비행기인데 체크아웃 시간이 일러서 시간이 애매하게 뜬다고 했더니 그녀는 자리를 잡고 앉았다.
파리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그녀는
휴가를 받아 순례길을 걸었다고 한다.
계속 이방인으로 프랑스에 남아야 할지,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지 고민하고 있단다. 걸으면서 해답을 얻고 싶었는데 결국 이곳까지 도착해서도 그 질문에는 아직 답을 내리지 못했다고 한다. 나도 퇴사하고 이곳으로 오는 첫날 다리에 깁스를 하고 결국 이상하게 돌아 돌아온 이야기를 해주었다. 우리는 패스트푸드점에서 한참을 이야기했다.
그녀는 '가까운 곳에 1인실 알베르게를 잡았다'며 '자기 숙소에 짐을 놓고 추로스도 먹고 시간을 보내다가 비행시간에 맞춰서 가면 어떠냐'고 제안했다. 처음 보는 사람 숙소에 배낭을 놓고 반나절을 함께 보낸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여기서는 가능했다. 우리는 숙소로 향했다. 엘리베이터 없는 건물의 맨 꼭대기 층이었는데 그녀는 그곳까지 내 배낭을 대신 들어주었다. 화장실을 쓰고 숙소에 짐을 두고 좀 쉬다가 추로스를 먹으러 거리로 다시 향했다.
그녀는 불어는 물론 스페인어도 좀 했는데 덕분에 제대로 맛있는 '인생 추로스'가 등장했다. 진하고 고소한 초콜릿이 따뜻하게 커피잔에 담기고 겉바속촉(겉은 바삭하면서도 속은 촉촉한) 추로스가 접시에 함께 나온다. 순식간에 접시들이 비워지고 우리의 대화는 점점 진해졌다.
30대의 우리들은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던 20대의 무모함에 세상의 진한 맛을 좀 본 뒤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의심하는 것이다. '이 길이 나의 길인가. 정답인가.' 그런 깊은 고민들이 우리가 이 길을 걷게 만드는 것 같았다. 이제는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 같은 인생의 시점에서 그 열매가 무엇이든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이 맞는지' 최소한 나 자신에게라도 확인을 받고 싶은 것 같았다.
하지만 늘 그렇듯 정답은 우리 안에 있고 최소한 여기까지 시간과 노력을 들여왔다면 앞으로의 알 수 없는 인생 길도 끝까지 걸어낼 힘과 용기는 확인하고 돌아가게 되는 것 아닐까. 그 길 안에서 언젠가 다시 혼란스러워지고 넘어지겠지만 끝까지 걸어낼, 살아낼, 믿음 같은 것이 아주 작게 움트는 것 같았다.
5시 반, 다시 길을 나섰다.
굳이 버스정류장까지 짐을 들어주던 파리소녀 덕분에 감사한 마음으로 산티아고 콤포스텔라를 떠났다.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공항까지는 공항버스로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바르셀로나에서 산티아고 콤포스텔라로 올 때는 스페인 저가항공사 부엘링(Vueling)을 이용했었는데 이번에는 아일랜드의 저가항공사 '라이언 에어(Ryanair)'다. 수하물 규정이 까다롭고 이를 통해 돈을 번다고 악명 높아서 미리 좀 더 비싼 Priority 티켓으로 구매했다. 짐 하나가 포함되어 있는 티켓으로 배낭은 기내에 들고 타고 기내 반입이 안 되는 등산스틱은 무료로 마드리드까지 부쳐주었다.
공항에 잘 도착해서 비행기를 탔다고 파리소녀에게 연락을 했다. 8시 20분, 마드리드로 향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공항에서 마드리드 바라하스 국제공항까지는 1시간 반 정도 걸렸다. 10시가 다되어서 도착했다. 공항버스를 타고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 중심가에 위치한 숙소로 이동했다.
시내에서 공항까지 이동할 수 있는 공항버스는 스페인 안에서도 가격이 지역마다 차이가 났다. 바르셀로나가 5.9유로로 가장 비쌌고, 콤포스텔라는 그 절반 정도인 3유로, 마드리드는 5유로였다. 티켓은 미리 홈페이지에서 구입할 수도 있고 버스 기사에게 바로 살 수도 있다.
공항에서 중심가 시벨레스 광장까지는 공항버스로 30분 정도가 걸린다. 마드리드 밤거리는 그 어느 곳보다 화려하게 빛났다.
거리의 휘황찬란한 조명이
라스베이거스를 떠올리게 할 정도였다.
밤에도 물을 뿜어대는 시벨레스 분수광장을 지나 숙소가 있는 산 히네스 성당까지는 또 20분 정도를 더 걸어야 했다. 하지만 번쩍이는 건물들과는 대조적으로 거리에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아 스멀스멀 두려움이 올라왔다. 건물 사이사이에는 차가워진 밤바람을 피해 박스를 깔고 덮고 가리고 잠자리를 만들고 있는 노숙자들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 유명한 솔 광장에 이르니 그나마 사람이 많아졌는데 그만큼 구걸하는 사람들도 많아져서 무서움이 커졌다. 난민처럼 보이는 흑인 청년들이 바닥에 보자기 같은 걸 깔고 명품백들을 보여주며 호객행위를 마구 해댔다. 촌에서 처음 시내 구경을 나온 사람처럼 눈과 귀가 잔뜩 커져서는 정면만 보고 걸어갔다.
밤 11시. 드디어 마드리드의 이틀 밤을 책임져줄 '사무엘의 방'에 도착했다. 구조가 특이해서 현관부터 헤매는 나를 위해 사무엘이 문을 열고 마중을 나왔다. 집 안은 그의 첫인상처럼 깔끔하고 스타일리시하게 꾸며져 있었다. 늦은 시간에도 사무엘은 웃는 얼굴로 이것저것 설명을 해주며 집을 소개했다.
사람들이 많이 묻는지 근처의 맛집들도 손글씨로 적어놓은 빨간 노트가 그의 성격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빨래까지 돌리고 나니 금방 12시가 넘었다. 뽀송뽀송해진 빨래를 받아 들고 푹신하고 깨끗한 침대에 누우니 정말 살 것 같았다.
내일은 또 어떤 일들이 펼쳐질지 알 수 없었다. 큰 도시로만 나오면 작아지는 마음을 감추고 잘 지낼 수 있을지, 못 지낼 건 또 뭔지, 이런저런 생각들과 이곳저곳 둘러볼 곳들을 검색하다가 2시가 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