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5월 8일 수요일 어버이날. 이런 날 혼자 여행 다닌다고 벌 받는 건지 아침이 됐는데도 컨디션이 나아지지 않았다. 집주인 사무엘도 밤새 재채기와 기침을 하는 것 같았다. 거실에서 만난 그에게 '목은 괜찮냐'고 물었다. 그는 하도 풀어서 빨개진 루돌프 코를 하고도 '이 맘 때쯤 마드리드에서는 늘 겪는 일'이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미소 지었다. 그는 또 곱게 포장한 크로와상을 건넸다. 나는 12시 체크아웃 시간보다 좀 더 일찍 나가야 할 것 같다고 이야기했고 우리는 조금 이른 작별 인사를 했다. 마드리드의 2박 3일은 너무 짧다고 꼭 다시 오라는 말을 남기며 친절하고 센스 있는 사무엘은 먼저 집을 나섰다.
나는 크로와상에 카페 콘 레체까지 만들어먹고 짐을 챙겼다. 침낭을 접을 필요가 없으니 짐 싸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떠날 준비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마드리드에서의 짧은 산책을 했다. 못 가본 방향으로 걸어보기도 하고 숙소 옆 산 히네스 성당에 들러 기도도 드렸다. '남은 시간들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갈 수 있길.'
숙소로 돌아와 짐을 챙겼다. 시벨레스 분수광장에 '마드리드 바라하스 국제공항'으로 향하는 공항버스 정류장이 있어서 마드리드의 첫날밤처럼 10kg 배낭을 짊어지고 하나 남은 등산스틱에 의지해 20분을 걸었다. 낮에도 화려한 그 길을 재채기와 콧물로 얼룩진 시뻘건 얼굴과 등산복 차림으로 걸으려니 조금 쑥스러웠다. 순례 때의 마음을 간직하고 도심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이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독일 뮌헨으로
2시 55분 비행기, 이번에는 스페인 항공사 에어유로파였다. 45유로짜리 티켓에는 서류가방 하나만 허용되어서 티켓 가격에 맞먹는 30유로를 더 내고 '짐 추가'를 신청, 기내에 짐을 들고 탑승했다. 정들었던 등산스틱과는 작별을 해야 했다. 40여 일을 함께 의지하며 걸었던 스틱을 공항에 남겨 두고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독일 뮌헨까지는 2시간 반, 공항에서 친구네까지는 시내로 좀 더 가야 했다. 원래 친구가 마중 나오기로 했었는데 벌써 '애 둘 엄마'가 된 그녀에게 짐을 지우기 싫어 혼자 가보겠다고 했다.
10년 만의 독일. 신에게 받은 선물이라고 생각하는 '미국 교환학생'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 이상한 향수병 같은 게 걸렸었다. 그 핑계로 나는 집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또다시 가방을 챙겨 유럽 배낭여행을 떠났다. 미국 학교 기숙사에서 룸메이트로 함께했던 샌디네, 독일 슈투트가르트를 찍어두고 영국과 프랑스, 네덜란드를 돌아봤다. 그녀도 그 사이 한국을 두어 번 다녀 갔고 그때마다 함께이던 사람과 결혼해 예쁜 가정을 이뤘다. 몇 살 차이 안 나는데도 나를 친동생처럼 챙겨주었던 그녀와 있으면 마음이 참 편안했다. 사진으로만 보던 그녀의 예쁜 두 아이까지 볼 생각을 하니 마음이 설렜다.
| 뮌헨 공항에서 도심 가는 열차 타기
공항과 연결되어 있는 지하철 플랫폼까지는 아주 수월했다. 공항에서 40분 정도 걸리는 친구 집 근처 역까지는 11.6유로, 우리 돈 1만 5천 원 정도였다. 매표소 아저씨는 미소를 장착하고 독일어로 열심히 설명을 해주었다. 10년 전, 친구에게 배웠던 몇 안 되는 독일어 '당케쉐(고맙습니다)'로 응답하고 플랫폼으로 내려갔다.
문제는 플랫폼 양쪽으로 열차가 다닌다는 것, 하나의 플랫폼에도 여러 노선이 지나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지하철 급행처럼 중간에 몇 정거장을 건너뛰며 운행하기도 하고 서울 5호선에 상일동행 마천행이 있는 것처럼 같은 방향으로 가다 어느 지역부터는 갈라져 다른 방향으로 운행하는 것도 있어 헷갈렸다. 결국, 3-40분이면 갈 거리를 한 시간이 넘게 걸려 도착했고 맛있는 저녁을 먹으며 이야기할 에피소드를 하나 더 쌓게 되었다.
뮌헨에서의 첫 저녁 한 끼 지하철 플랫폼에 서 있는 내 또래의 커플에게 길을 물었더니 서로 의견이 분분했다. 한참 자기들끼리 독일어로 이야기하더니 그새 옆에 앉아 있던 아저씨까지 가세해 결국 나는 오른쪽 열차를 타게 되었다. 곧 열차가 들어오고 사람이 엄청 많았는데도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행운 같았다. 그런데 옆에 있는 아주머니에게 다시 한번 확인할 겸 목적지를 보여주며 길을 물어보면서 순식간에 일이 꼬여버렸다.
아주머니가 놀란 얼굴을 하고 '잘못탔다'고 온몸으로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다른 방향으로 가니까 빨리 내리라"는 것이었다. 놀라서 순식간에 열차에서 내렸고 지하철은 떠났다. 당황하고 있는데 친구에게 차를 탔는지 확인하는 전화가 왔다. 상황을 파악해보니 그 아주머니가 착각을 했는지 내가 타려던 차가 맞았고 급행열차였다. 할 수 없이 기다렸다가 시간이 좀 더 걸리는 다른 열차를 타야 했다. '어느 곳이든 이렇게 처음 가면 꼭 신고식을 치러야 하나보다' 하며 멍하니 기다렸다가 열차를 탔다. 이번에는 내 선택에 대해 의심하지도, 결정해놓고 누군가에게 계속해서 길을 다시 묻지도 않았다.
만나기로 했던 시간보다
30분이나 더 걸려
지하철역에 도착했다.
걱정이 됐는지 친구가 지하철 플랫폼까지 내려와 있었다. 거의 5년 만이었다. 이메일과 SNS로 연락하며 지냈지만 출산 후에는 그마저도 뜸했던 터라 '어색하면 어떻게 하지?!' 하는 쓸데없는 걱정을 했었다. 우리는 소리를 지르며 서로에게 달려가 이산가족 상봉을 했다. 늘 든든한 그녀는 내 배낭을 빼앗아 메고 어찌 된 영문인지 물었고 우리는 금세 10년 전 대학생이던 그때로 돌아가 낄낄대며 그날 겪은 일들을 서로 쏟아내기 시작했다.
버스로 10분 정도를 더 가서 한적한 주택단지에 위치한 그녀의 집에 도착했고 미국 교환학생 시절 같은 기숙사에서 지냈던 그의 남편과 실제로는 처음 보는 갓난쟁이 딸, 개구쟁이 아들과도 인사했다. 그녀는 능숙한 솜씨로 준비해둔 피자와 10년 전부터 확실히 맛이 보장된 그녀만의 특제 소스 샐러드를 내놓았다. 우리는 오래전 어느 시간처럼 식탁에 앉아 오래오래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수다는 다음날 아침까지 이어졌다.
뮌헨에서의 첫 아침 가끔 기숙사 파티 때 보던 대학생 펠릭스가 한 가정의 가장이 되어서 멋지게 양복을 차려입고 출근을 하는데 기분이 묘했다. 그가 출근길에 첫째를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기로 해서 우리는 좀 더 느긋하게 아침식사를 즐길 수 있었다. 빵과 치즈, 버터, 잼, 그리고 신선한 과일과 야채들이 차려졌다.
10년 전 슈투트가르트에서 맞았던 아침에는 10개가 넘는 잼들이 있었던 것, 짭조름한 혹은 아무 맛이 안나는 빵을 먹는 독일과 달달한 디저트류 빵들이 많은 프랑스의 차이들을 다시 이야기했다. 어젯밤에 잠깐 꺼내봤던 그 시절의 앨범이 다시 등장하고 지난 시간들이 무작위로 소환되었다.
"그때 그 건물은 지금은 지진 때문에 허물었대, 그때 걔는 실리콘 밸리에서 일해, 걔는 지금 결혼해서 어느 나라에 산대, 여긴 어디였지?, 아 맞아 맞아, 그때 네가 그랬었잖아, 이제 곧 이사 가야 해, 복직도 하고 싶어..." 그 옛날의 일들부터 현재까지 오가며 우리의 시간들은 빠르게 채워졌다.
10년이라는 시간은 우리를 같은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학생에서 직장인으로, 엄마로 바꿔 놓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별 것 아닌 것에 낄낄대며 웃을 줄 아는 그 시절의 영혼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한참 동안 추억여행을 하던 우리는
첫 째의 어린이집이 끝나기 전,
짧게라도 '뮌헨 구경'을 좀 해보기로 했다.
베를린, 함부르크에 이어 독일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 '뮌헨(Munich)'은 남부 바이에른(Bayern) 주의 주도로 알프스 북부의 이자르 강을 끼고 있다. 12세기 바이에른의 공작 하인리히(Heinrich)가 베네딕토회 수사들에게 시장 개설을 허가하면서 세워져 ‘수도원, 수도사들의 공간’을 뜻하는 '무니헨(Munichen)'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13세기부터 바이에른 공국의 수도였으며 신성로마제국의 루트비히(Ludwig) 4세부터 막시밀리안(Maximilian) 1세까지의 통치기간에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다.
#이자르강가의 공원들
Fruhlingsanlagen/ Kapellenwiese
이자르강 공원 아이와 함께면 잠깐의 외출에도 챙겨야 할 것들이 산더미였다. 간식, 물병, 장난감, 물티슈 등 한가득 유모차에 싣고 나가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지하철을 타고 몇 정거장을 가야 했는데 샌디는 둘째를 아기띠로 안고 유모차를 한 손으로 접었다 펴면서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신공을 펼쳐 보였다. 대단한 '엄마의 모습'이었다.
첫 번째 장소는 '이자르(Isar) 강'이 흐르는 'Fruhlingsanlagen/ Kapellenwiese 공원'이었다. 도심 한 복판에 국립공원 같은 엄청난 규모의 녹지공간이 있었고 강까지 흐르는데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이번 40여 일간의 일정에서 어디가 제일 좋았냐고 묻는 그녀의 질문에 '루르드, 떼제'를 언급하며 '자연이 아름다워서'라고 이유를 댔었다. 그녀는 10년 전 유럽여행 일정을 마치고 왔던 나에게 같은 질문을 했을 때도 내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교외에 있는 치즈 농가에 가서 본 전원풍경'에 대해 이야기했었다고 상기시키며 웃었다.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또 많은 것들이 그대로였다.
물은 차갑고 맑았다. 강 한가운데에는 우리나라 밤섬처럼 Weideninsel이라 불리는 작은 섬이 있었다. 샌디 말로는 여름이면 사람들이 이곳에서 수영을 하는데 헤엄을 쳐서 섬을 오간다고 했다. 어린 시절 한강에서 헤엄치며 놀았다는 아빠의 말이 떠올랐다. 공원 벤치에 앉아 끊임없이 깔깔대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멍하니 물과 풀과 나무를 즐기기도 했다. 역시 취향 저격이었다.
우리는 다시 트램을 타고 구시가지 쪽으로 향했다. 그 유명한 마리엔 광장 근처의 시장이었다.
#빅투알리엔 마켓[Victuals Market]과 구시가지
옥토버 페스트 때 세워진 것 같다는 대형 구조물을 중심으로 과일, 채소 등의 신선한 식재료들부터 수프, 빵 등의 식사를 판매하는 곳까지 천막과 가게들이 다양하게 들어서 있었다. 점심시간에 맞춰 식사를 하러 온 직장인들이 많은 것 같다고 샌디가 말했다. 우리는 착츱 주스를 한잔씩 하고 근처에 유명하다는 빵집을 향했다.
'옥토버 페스트(Oktoberfest)'는 뮌헨에서 매년 9월 말부터 10월 첫 번째 일요일까지 보름간 펼쳐지는 축제다. 1810년 테레즈(Therese) 공주와 루트비히(Ludwig) 1세의 결혼식에서 하객들에게 경마 등의 볼거리를 제공했는데 이듬해부터는 기존 바이에른 지역의 가을축제와 결합되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 지역에서는 16세기부터 확정된 맥주 제조법에 따라 매년 새 맥주를 만들기 전, 지난해 제조했던 맥주를 소진하기 위해 가을 축제를 열었다. 19세기 중반부터는 뮌헨 6대 맥주회사들의 후원을 받으면서 세계적인 축제로 거듭났다. 뮌헨 인구가 145만인데 축제 기간에 이곳을 찾는 방문객이 60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Schmalznudel Cafe Frischjut'의 전통 빵이었다. 어린 시절 우리나라 전통시장 길목에서 팔던 설탕 솔솔 뿌린 도넛이 떠올랐다. 갓 만들어 뜨끈뜨끈한 게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루에 정해진 수량만 만들고 다 팔리면 문을 닫는 맛집이라서 늦게 가면 맛보는 것도 어렵다고 한다. 이것저것 먹고 마시면서 유모차를 끄는 묘기를 선보이며 뮌헨 구시가지로 들어갔다.
뮌헨은 중세 페스트, 17세기 '30년 전쟁' 등을 겪으며 폐허가 된 적이 있다. 20세기에 들어서는 히틀러가 나치당 지도자가 되었던 곳이기도 해서 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의 공습으로 다시 한번 큰 피해를 입었다. 현재의 건물들은 대부분 복원된 것들이다.
뮌헨에서 가장 오래된 12세기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성 피터(베드로) 성당(St. Peter's Church)'과 13세기부터 19세기까지 수차례 다시 지어진 '성령 성당(Church of the Holy Spirit)', 14세기에 지어졌다가 2차 세계대전 때 크게 파손되어 20세기에 들어 다시 지어진 '옛 뮌헨 청사(Old Town Hall)'까지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여기서 좀 더 걸으면 거대한 건축물을 품은 광장이 나온다.
#마리엔 광장과 신시청사
뮌헨 구시가지의 중심가 '마리엔 광장(Marienplatz)' 한 면을 차지하고 있는 건물, 아주 오래된 성당인 줄 알았는데 20세기에 세워진 뮌헨의 신시청사다. 광장 가운데 우뚝 솟은 탑 위에 황금빛 성모마리아상(Mariensaule)이 서 있다. 한두 방울씩 떨어지는 빗방울과 잔뜩 흐린 하늘에 어울려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신시청사 가운데에 있는 시계탑 앞은 매일 오전 11시와 오후 12시에 특별한 장소가 된다. 43개의 종을 쳐서 소리를 내는 '글로켄슈필(Glockenspiel)'과 함께 실물 크기의 인형들이 빙빙 돌며 10분간 빌헬름 5세의 결혼 이야기와 흑사병이 지나간 것을 축하하는 민속춤을 보여준다. 1시쯤 도착해서 실제로 보지는 못했지만 테트리스 게임에서 러시아 무곡에 맞춰 춤추는 사람들 모습이 떠올랐다.
신시청사 뒤편으로는 뮌헨 최대 규모인 15세기 '프라우엔 대성당(Cathedral of Our Blessed Lady)'의 둥근 쌍둥이 탑이 보인다. 악마의 발자국(Teufelstritt)이 있다고도 하며 뮌헨의 성직자들과 비테르스바흐 왕족의 무덤이 있다. 뮌헨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는 전망대를 찾는 사람도 많다. 이곳의 대주교였던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있었던 곳이라 프라우엔 성당을 포함해서 그의 흔적을 찾아보는 투어도 있다고 한다.
성당들을 천천히 둘러보지 못한 건 아쉬웠지만 몰려드는 먹구름에, 갓난쟁이 둘째의 인내심도 점점 바닥이 나고 있어서 '오랜 친구와 시간을 함께한다는 것'에 좀 더 집중하기로 했다.
#뮌헨 국립극장
한 군데만 더 들렀다 가자며 앞서가는 샌디 앞에 엄청난 인파가 나타났다. 뮌헨 국립극장, 오페라 하우스 건물이라는데 방송국 중계차와 독일 전통 의상을 입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었다. 알고 보니 영국 왕실의 찰스 왕세자 부부가 방문하는 행사가 있었다.
#오데온 광장과 펠트헤른할레
영국정원이라는 곳을 향해 가는데 세월의 흔적이 묻어있는 동상들과 함께 광장이 하나 더 나타났다. 19세기 초에 개발되었다는 오데온 광장(Odeonsplatz)이다. 펠트헤른할레와 노란색의 성당이 오데온 광장의 한 면씩을 각각 이루고 있다.
옛 백작의 저택인 팔레프리싱(Preysing Palais) 건물과 붙어있는 '펠트헤른할레(Feldherrnhalle)'는 이탈리아 피렌체의 Loggia dei Lanzi를 모델로 1841년 루드비히 1세 왕 때 세운 것이다. 전쟁영웅들, 30년 전쟁을 이끌었던 Johann Tilly와 나폴레옹과의 전투에 앞장섰던 Karl Philipp von Wrede 동상이 서 있다. 중앙에 위치한 프랑스와의 전쟁을 이끈 Ferdinand von Miller의 동상은 1892년에, 1906년에는 뮌헨을 상징하는 사자 두 마리가 추가되었다.
1933년 히틀러가 집권했을 때는 1923년 히틀러가 일으켰다 실패한 'Beer Hall 쿠데타'에서 사망한 16명의 나치당원들을 기리는 기념관으로 꾸며지기도 했다. 당시 사람들은 이곳을 지날 때마다 나치식 경례를 해야 했는데 이를 피하기 위해 팔레프리싱 건물 뒤편의 'Viscardigasse길'을 사용했단다. 이 길은 여전히 남아있다. 펠트헤른할레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다시 바이에른 영웅을 위한 기념관으로 복구되었다.
내가 서울에 온 샌디에게 이것저것 검색해가며 설명해줬던 것처럼 샌디도 나에게 열심히 가이드를 해주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재건된 것이면 아직 100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수백 년은 이곳을 지켰던 구조물들 같았다. 영화의 어느 장면처럼 전쟁으로 폐허가 된 회색빛 도시의 모습이 겹쳐져 보였다.
빗방울이 심상치 않아서 우리는 잠시 오데온 광장의 또 다른 면을 이루는 테아티너 성당 안으로 피했다.
#테아티너 성당[Theatin Church]
17세기에 지어진 성당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겉모습과는 달리 내부는 새하얗고 세련된 '새것'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 때 폭격으로 크게 파손되어서 전후에 오랜 시간을 들여 재건했다고 한다.
'테아티너 성당(Theatine Church)'은 페르디난트 마리아(Ferdinand Maria) 대공이 1662년, 오랫동안 기다려 온 왕자를 얻은 것에 감사하며 지은 성당이다. 이탈리아 출신 건축가 아고스티노 바렐리(Agostino Barelli)가 로마 '발레(Valle)의 성 안드레아 성당'을 모티브로 설계했다. 이후 독일 남부 바로크 건축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성당 안에는 바이에른 왕실 가족들과 귀족들의 무덤이 있다.
천천히 한 바퀴 돌고 잠시 앉아있다 나와 '레지덴츠(Residenz)' 쪽으로 향했다. 여전히 하늘은 흐리고 비가 오락가락했다.
#뮌헨 레지던츠[Residenz Munchen]와 다이애나 사원
'레지던츠'라고 하길래 주택단지들이 모여있는 곳인가 했는데 바이에른 왕가의 궁전이었다. 열 맞춘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는 레지던츠 입구로 들어갔다. 우리는 안뜰만 좀 돌아보기로 했다.
1385년 작은 성으로 지어졌던 '뮌헨 레지던츠(Residenz Muchen)'는 비텔스바흐(Wittelsbach) 왕조가 1918년까지 저택으로 사용하던 곳이다. 바이에른 왕가의 궁전으로 쓰이면서 증축을 거듭했고 100여 개의 방과 7개의 안뜰을 둔 복잡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 현재는 다양한 양식으로 장식된 방들과 왕실의 미술품 등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일반에 공개된다.
북적이던 구시가지에서 갑자기 공기 좋은 숲으로 순간이동을 한 것 같았다.
작은 분수에서 떨어지는 물소리와 함께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스피커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동그란 돔 지붕 아래 모여 있는 사람들과 하얀색 그랜드 피아노, 그 앞에 앉아있는 연주자가 보였다.
레지던츠의 안뜰 한가운데에서는 르네상스 시대부터 서 있던 '다이애나 사원(Dianatempel)'을 만날 수 있다. 자리를 잡고 앉아 초록 나뭇잎에 호도독 떨어지는 빗소리, 가끔씩 불어오는 신선한 공기를 느끼며 여기 어우러지는 피아노 소리를 들었다. 감사하고 감사했다. 정신없는 하루 속에서도 꼭 이런 시간들을 만들어야 한다는 샌디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영국정원[Englischer Garten]
레지던츠의 끝에는 또 다른 공원이 있었고 그 길 건너에는 또 다른 공원 '영국정원'이 끊임없이 펼쳐졌다.
'영국정원(Englischer Garten)'은 18세기 바이에른의 왕자 'Charles Theodore'가 바이에른의 장군이며 사회 개혁자였던 Benjamin Thompson의 조언에 따라 이자르강 북쪽의 늪지대를 공원으로 조성한 것이다. 처음에는 군사들의 휴식을 위한 목적으로 계획되었지만 19세기까지 확장되고 개선되면서 현재는 시민을 위한 공원 역할을 하고 있다. 여의도 면적 '2.9 제곱 km'보다 큰 '3.7 제곱 km' 규모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심 공원 중 하나이다. 18-19세기 영국 스타일로 조성되어 '영국정원'이라 불린다.
Japanese Teahouse 앞의 오리가족 영국 정원에는 1972년 뮌헨에서 열린 하계 올림픽을 기념해 일본 교토의 Tea School에서 만들었다는 'Japanese Teahouse Kanshoan'이 있었다. 날이 따뜻해지면 해마다 '다도(茶道) 행사'도 열린단다. 18세기에 세워졌다는 25m짜리 중국식 목조 5층 탑도 있다고 한다. '독일 뮌헨'의 '영국정원' 안에 '일본의 다도'와 '중국식 목조탑'이라니 이것저것 섞여 어색할 법한데도 자연은 이 모든 것을 잘 버무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흥미로웠던 그것이 등장했다. 처음에 샌디가 '서핑하는 데가 있다'고 했을 때, '공원에서 웬 서핑?!' 귀를 의심했지만, 정말 눈을 의심케 하는 장면이 펼쳐졌다.
#리버서핑 @Eisbach welle
물살에 떠내려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강둑에서 출발해 서핑보드를 타는 사람들의 무리가 줄을 서 있었다. 샌디는 영국정원 안에 몇 군데가 더 있는데 지날 때마다 늘 이렇게 보드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서핑하는 사람뿐 아니라 가이드와 함께 와서 설명을 들으며 눈으로 즐기는 관광객들도 많았다.
'Eisbach'는 영어로 'ice brook', 즉 '얼음 개울'이라는 뜻이고 Welle은 파도로 해석된다. Eisbachwelle은 2km 정도의 인공 강으로 인해 생긴 파도가 있는 곳으로 영국정원 안에 위치해있다. 1972년부터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이 생겨나면서 서핑 대회가 열렸다는데 2010년부터는 공식적으로도 허용되었다고 한다. 하류에도 하나 더, 이자르 강 쪽에도 하나가 있어서 모두 세 군데에서 리버서핑을 즐길 수 있다.
이제, 짧은 데이트를 끝내고
첫 째를 데리러 어린이집으로
가야 할 시간이었다.
뮌헨의 교통수단, 트램 트렘을 타고, 지하철을 타고, 집에 잠시 들러 짐을 풀어 둘째 기저귀를 갈고 밥도 먹이고 잠깐 쉬다가 다시 짐을 챙겨서 첫째 어린이집으로 향했다. 10년 전 슈투트가르트에서와는 완전히 다른 삶이라며 우리는 서로 마주 보며 알쏭달쏭한 웃음을 지었다.
3시, 어린이집 끝날 시간이 가까워오자 근처로 엄마, 아빠들이 모여들었다. 우리처럼 둘째와 함께 유모차를 끌고 나온 사람도 있고, 부부가 함께, 아빠 혼자, 엄마 혼자서 나오기도 했다. 첫째 페페의 여자 친구네 부모님과도 어색한 인사를 나누었다.
문이 열리고 하나 둘, 꼬마 친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페페는 거의 마지막으로 등장했다. 한 손에는 공룡 풍선을 들고 한 손으로는 보조바퀴가 달린 자전거를 끌고 나왔다. 우리는 다 함께 구시가지로 향했다.
오전에 갔던 구시가지가 경복궁 근처라면 오후의 이곳은 서촌 정도로 표현하면 될 것 같다. 샌디는 이곳의 집들은 수리하려면 간단한 것도 시청에 신고를 해야 하고 자기 마음대로 사고파는 것도 어렵다고 이야기해주었다. 그래도 관광객 모드인 내 눈으로는 색이며 모양이며 모두 예뻤고 독일스러운 곳이라고 느꼈다.
아니 잘 느낀 건지 모르겠다. 오전에는 샌디가 둘째를 안고 내가 유모차를 담당했었는데 페페가 등장하면서 내가 페페와 공룡 풍선, 페페의 자전거를 맡고 샌디가 둘째와 유모차를 맡았다. 개구쟁이 페페가 합세하자 우리의 뮌헨 투어는 활기차 졌지만 그만큼 더 큰 에너지가 필요했다.
사실 내가 도착하던 어제 페페는 어린이집에서 놀다가 넘어져 왼쪽 눈썹 위에 상처를 입었다고 한다. 병원에 간 페페는 씩씩하게 치료를 잘 받았다고 공룡 풍선을 선물 받았는데 원래 공룡을 좋아하던 페페는 그 풍선과 하나가 되었다. 그래서 어린이집에 갈 때도 같이 갔다고 한다.
정말 귀여운 이야기였지만 페페는 '공룡이 너무 높이 떠있다', '공룡이 너무 낮아서 땅에 끌린다', '공룡이 나를 계속 따라온다' 등등 수많은 이야기들을 만들었다. '휴...' 한참을 어디를 다녔는지도 모르게 돌아다니다가 우리는 젤라토 아이스크림 맛집에 도착해 영혼의 안정을 찾았다. 능수능란하게 페페를 다루면서 둘째를 안고 유모차와 자전거, 나까지 챙기는 샌디의 모습이 너무도 대단해 보였다.
뮌헨에서의 마지막 저녁 속으로
오후 5시 반, 우리는 좀 이른 저녁을 먹기로 했다. 펠릭스는 야근 때문에 함께 하기 어렵다고 해서 우리끼리 집 근처 독일 전통 음식점으로 향했다.
'독일 전통 음식'은 소박하고 서민적이다. '독일스러운 음식'으로 알아서 시켜달라고 했더니 스테이크와 감자가 함께 나왔다. 10년 전에도 '독일의 전통 요리'를 먹고 싶다는 나에게 '슈니첼', 우리로 치면 돈가스처럼 고기를 튀긴 것과 감자튀김, 맥주를 추천해주던 기억이 났다. 소시지도 종류가 300여 가지가 넘고 감자요리의 방식도 다양하다지만 독일의 '고기와 감자, 맥주'는 우리나라의 '삼겹살에 소주'같은 느낌이다.
무튼, 뮌헨에서의 마지막 식사도 한 그릇 뚝딱했다. 샌디도 집중력이 떨어진 페페와 얌전하다가도 가끔씩 울음을 터뜨리는 둘째를 저글링 하며 샐러드를 한 접시 뚝딱했다.
저녁 8시 뮌헨의 마지막 밤 그렇게 7시 반,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들과 함께라 오랜 외출을 할 수 없기도 했지만 나도 몸상태가 좋지 않아 좀 쉬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드리드 꽃가루를 잔뜩 마시며 돌아다닌 날 밤부터 시작된 두통과 콧물, 기침에 열까지 계속 올랐다 내렸다를 반복했다. 마지막 진통제를 털어 넣고 샤워를 한 뒤 마지막으로 배낭을 쌌다. '정말 마지막이구나. 이제 이 짐은 한국의 내 방에서 풀게 되겠지.' 40일이라는 시간이 정말 순식간에 지나갔다. 내 방이 아니면 잠도 잘 못 자던 내가 매일 다른 장소에서 짐을 풀고 적응하고 다시 떠나며 유럽 방랑자로 한 달 넘게 살아냈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 사이 퇴근한 펠릭스까지 함께 뮌헨의 마지막 밤 앞으로 모였다. 신선한 과일에 맥주 대신 따뜻한 차를 마시며 늦게까지 이야기를 계속했다. 한국과 독일, 청년들의 일자리, 집 값, 육아, 교육, 연애와 결혼 등등등 캘리포니아의 어느 주말 저녁처럼 울고 웃으며 따뜻한 시간들이 지나갔다.
맨 처음 둘째가 잠들고, 첫 째 페페는 책 읽어주는 아빠 품에 안겨 공룡인형을 꼭 쥐고 잠들다 깨서는 '보경이 내일 새벽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울음을 터뜨렸다가 간신히 다시 잠들었다. 육아 전쟁을 마치고 자유로워진 샌디와 자상한 아빠 펠릭스와도 '내일 새벽에는 못 일어날 수도 있으니 미리 인사를 하자'고 작별을 고했다. 샌디가 내어준 아이들 방에서 페페가 쓰던 펭귄 모양의 따뜻한 물주머니를 꼭 끌어안고 마지막 잠을 청했다. '뮌헨서 파리로 가는 오전 7시 15분 비행기를 타려면 새벽 5시에는 출발해야 하고 그러려면 그 전에는 일어나야 해.'라고 중얼거렸다. 40일간 이상한 순례길의 마지막 밤이 깊었다.
깁스하고 떠난 40일간의 순례 기록 <이상한 순례길> 이제 '프랑스 파리, 중국 상해'를 경유해 한국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길만 남았네요. 끝까지 함께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