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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일간의 '이상한 순례길'을 마치고 집으로

깁스하고 떠난 40일간의 산티아고 순례

| COME BACK HOME, D-day! 

STEP 1. 독일 뮌헨에서 프랑스 파리로

뮌헨서 파리가기

밤새도록 몸에 열이 올랐다내렸다 춥다덥다를 반복하며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그래도 억지로 눈을 감고 누워 있다가 새벽 4시 반쯤 몸을 일으켰다. 아직 집안은 조용했다. 최대한 조용히 움직이며 간단히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마지막으로 배낭을 점검하고 방문을 나서는데 언제 일어났는지 샌디가 눈을 비비며 서있었다. '뭣하러 일어났냐'고 하려다 '고맙다'고 말하며 함께 집을 나섰다. 


아직 밖은 어두웠다. 우리는 새벽의 어스름과 차가운 공기 속으로 들어갔다. 조용한 거리를 지나 지하철역까지, 샌디는 뮌헨의 첫날처럼 플랫폼까지 내려와 나를 배웅했다. 이번에는 잘못 타지 말라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우리는 한국이나 독일이나 미국이나 어디서든 다시 보자고 이야기하고 서로 꼬옥 안아주었다.  


#서프라이즈 1. "안녕?! 독일 신사"

지하철 안에는 새벽인데도 사람들이 꽤 많았다. 작은 출장용 가방을 든 사람부터 큰 트렁크 여러 개를 들고 탄 관광객들까지 대부분 공항으로 가는 것 같았다. 자리를 잡고 편안하게 있는데 안내 방송이 아주 길게 나오더니 객실 안의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내 옆에 앉아있던 독일 신사는 친절하게 다시 한번 영어로 설명을 해주었다. "들었지?! 열차가 다음 역까지만 간다고 하니까 다음 역에서 모두 내려야 해. 기다렸다가 다른 차로 갈아 타야 해." 그는 내 큼직한 배낭을 힐끗 보며 "너도 공항 가는 거지?! 나도니깐, 따라오면 돼"했다.


그리곤 곧 열차가 멈추고 사람들이 모두 내렸다. 얼마쯤 기다렸을까. 다른 열차가 들어왔다. 아까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이미 타고 있었다. 그래도 그 독일 신사를 따라 재빠르게 올라타서 자리를 찾아 앉을 수 있었다. 이내 출근길 지하철처럼 문이 닫히지 않을 정도로 사람이 가득 찼다. 그 독일 신사는 나에게 찡긋 웃어 보이며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열차 한쪽으로 오늘의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얼굴도 곧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몸은 피곤했지만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고 친절한 독일 신사를 보내준 신께 감사드렸다.


#서프라이즈 2. "뮌헨 공항의 비릿한 아침"

뮌헨 공항의 연어 샌드위치

새벽 6시, 늦지 않게 공항에 도착해서 체크인을 마치고 게이트 앞에 도착했다. 독일 뮌헨발 프랑스 파리행 오전 7시 15분 비행기, 탑승 시간까지는 약간 여유가 있었다. 게이트 근처에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할 수 있는 카페가 보였다. 크로와상, 프레첼, 다양한 종류의 빵들과 샌드위치만도 종류가 수십 가지였다. 어디서 그렇게 모여들었는지 사람들이 줄을 길게 늘어섰다. 드디어 내 차례! 고민하다 따뜻한 카페라테와 손가락으로 샌드위치를 가리켜 주문을 했다. 통밀빵에 토마토와 모차렐라 치즈가 들어간 신선해 보이는 샌드위치였다. 


포장된 샌드위치와 라테를 들고 옆에 마련된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봉투를 여는 순간 비릿한 연어 향이 코를 자극했다. 토마토라고 생각했던 건 선홍빛의 생연어살이었고 하얀색 모차렐라 치즈라고 생각했던 건 계란 흰자였다. '....... 휴... 마지막까지 대단하고만!' 이제 오히려 웃음이 났다. '정말 컨디션이 안 좋긴 한가보다'했다. 그래도 커피가 있어서 연어 비린내를 잡아주었지만 결국 '아침에 연어' 샌드위치는 다 먹지 못했다. 커피 한 잔을 원샷하고 나니 곧 비행기 탑승이 시작됐다. 


#서프라이즈 3. "에어프랑스 기내식 어게인"

에어프랑스 기내식 아침

이번에는 프랑스 국적기였던 '에어프랑스(Airfrance)' 뮌헨에서 파리까지의 비행거리는 2시간도 넘지 않지만 기내에 탑승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분주해지는 승무원들이 보였고 곧 아침이 제공되었다. 내 얼굴만 한 크로와상과 따뜻한 커피 한 잔이 서비스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연어 샌드위치에는 도전하지 않는 건데...' 그래도 연어 샌드위치의 비릿함을 잊을 수 있는 고소함과 따뜻함이었다. 아침을 두 번이나 먹으면서 오전 9시, 한 달 전 깁스를 하고 순례를 시작하러 왔던 파리 샤를 드 골 공항에 다시 도착했다. 

짧은 시간 안에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나라와 도시가 바뀌었고 차편을 또 놓칠 뻔했고 연어를 토마토로 착각했다. 생각해보면 크든 작든 나를 당황시키는 일들은 지난 40일간 매일매일 발생했다. 다만 그러한 일들이 내 하루를 망치거나 그렇지 않거나 하는 데에는 내 몫이 절반 이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더 힘든 일도 별 것 아닌 것처럼 넘길 수 있었지만 정말 별 것 아닌 일을 붙잡아 더 큰 절망과 좌절로 만들 수 있는 놀라운 재주도 나에게는 있었다. 이전의 경험에서 비롯된 두려움이나 기분들이 현재의 사건으로 들어오면 감정을 증폭시키고 일을 더 꼬이게 만들었던 것 같다.

나에게 일어나는 좋은 일, 나쁜 일, 그건 그저 사건일 뿐이라고, 거기에 굳이 어떤 라벨을 붙이지 않고 지나가게 열어두는 것, 이것이 내가 유일하게 해야 할 일이었다. 


이제 파리에서 상해를 경유해
한국으로 가는 길만 남았다.

워낙 딜레이 되는 일이 많다고 해서 파리로 오는 비행시간을 너무 이른 시간으로 잡았더니 오후 1시 25분으로 예정된 출발 시간이 더욱 멀게 느껴졌다. 뮌헨에서 파리로 도착한 터미널과 파리에서 상해로 출발할 터미널이 동일했고 체크인도 모바일로 마쳐놓은 상태였다. 또 빠른 환승을 위해 배낭도 기내에 들고 탄 데다가 상해를 통해 한국으로 돌아갈 때에도 위탁 수하물이 자주 없어진다는 이야기가 여전히 신경 쓰여 기내에 짐을 들고 타기로 마음먹어서 시간이 오히려 더 늘어난 느낌이었다.


그래서 시작된 면세점 구경, 파리 샤를 드 골 공항 2 터미널 면세점은 넓지는 않았다. 어차피 깁스로 시작된 순례길 덕분에 예상치 못한 지출들이 많아서 남아 있는 예산도 많지 않았다. 본 데를 또 보고 또 보고 수십 바퀴를 돌고 나서 정신을 차려보니 시간이 금방 지나 있었다. 게이트 앞으로 좀 일찍 가서 머플러, 외투, 편한 슬리퍼를 작은 가방에 옮겨 담으며 장거리 비행을 꼼꼼하게 준비했다.  


STEP 2. 프랑스 파리에서 중국 상해로?!

"순례 배낭 안녕, 한국에서 만나~ 제발?!" 

파리 샤를 드 골 공항에서의 마지막 컷

파리에서 마지막 경유지 상해까지의 비행시간은 11시간 30분, 탑승이 시작되고 에어프랑스 승무원들이 티켓을 확인했다. 내 짐을 보더니 한 승무원이 배낭이 큰데 위탁 수하물로 부쳐줘도 괜찮겠냐고 물었다. 그녀는 에어프랑스와 중국 동방항공은 '스카이팀'으로 항공동맹이 맺어져 있다며 이곳 파리에서 짐을 부치면 최종 목적지 인천공항에서 받을 수 있게 해주겠다고 했다. 


'배낭이 분실되면 어쩌나'하는 걱정이 됐지만 40일 전, 험난했던 상해의 입출국 심사가 떠올랐다. 배낭을 대신 들어줬던 천사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제대로 해낼 수 없었을 그 경험을 다시 하는 것은 생각만 해도 지쳤다. 공항 안에서 카트로 끌고 다녔는데도 버거웠던 10kg짜리 배낭은 운명에 맡기기로 하고 짐을 부쳐달라고 했다.


그녀는 컴퓨터로 이것저것 입력하더니 내 배낭에 표식을 붙여서 게이트 한쪽 구석에 놓고 비행기를 타면 된다고 했다. 그 사이 담당자도 바뀌고 뭔가 불안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내 순례 배낭을 사진으로 찍어두고 비행기에 올랐다. 참고로 다행스럽게도(?!), 무사히(?!) 인천공항에서 순례 배낭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안녕 프랑스!

홀가분한 몸으로 크로스백에 에코백 하나 옆에 들고 내 자리를 찾아갔다. 발을 앞으로 뻗을 수 있는 곳은 아니었지만 두 명만 앉을 수 있는 좌석의 통로 쪽이라서 옆으로는 마음껏 발도, 팔도 뻗을 수 있었다. 


내 옆자리에는 중국 상해에서 일하며 프랑스를 자주 오간다는 4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프랑스 여성이 앉았다. 그녀는 간단히 인사를 나누자마자 이어폰을 꽂고 눈가리개를 하고 잠들어버렸다. 특별식으로 미리 주문해놓은 기내식을 먹을 때에만 잠깐 깼다가 화장실도 잘 안 가고 내내 꿈나라였다. 


10시간이 넘는 비행시간, 사진과 메모를 정리하면서 지난 40일간의 여행에 함께 했던 인생의 물음들에 대해 답을 이제는 내야 할 것 같았다. 꿈같은 시간들이 머릿속을 지났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다는 것처럼 여전히 답은 흐릿했다. 마드리드부터 시작된 감기 기운과 기내의 건조한 공기는 컨디션까지도 최악으로 만들었다. 답이고 뭐고 옆자리 사람처럼 그저 눈을 감고 시간이 빨리 가서 비행기에서 내리기만을 기다렸다. 

중국 동방항공 기내식

기내식 릴레이와 함께 장시간 비행에 점점 지쳐가던 그때, 나와 내 옆자리 프랑스 여성의 잠자는 코털을 건드리는 사건도 발생했다. 바로 뒷자리 프랑스 커플들의 예의 없는 발 냄새 공격! 


영화를 세 개째 보고 있는데 감기 기운으로 제 기능을 못하던 코를 뚫고 어디선가 콤콤한 냄새가 올라왔다. 이상하게 퍼지는 냄새를 따라 두리번거리다가 발견한 발! 뒷자리 커플 중 내 또래의 여자애가 남자 친구의 무릎 위에 발 한쪽, 나와 내 옆자리 사이에 발 한쪽을 얹어 놓은 것이었다. 나와 옆자리 프랑스 여성은 동시에 뒤를 돌아봤다. 그들은 움찔하면서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발을 뺐지만, 그 이후로도 발 냄새 공격이 계속됐다. 


나와 내 옆자리 여성은 약속한 것도 아닌데 번갈아 불침번을 섰다. 덕분에 11시간 반의 비행을 마치고 나서는 이상한 동지애 같은 게 생겼다. 상해에서 내리는 그녀와 환승구간까지 수다를 떨다가 또다시 금방 만날 것처럼 유쾌한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STEP 3. 중국 상해에서 드디어 인천공항으로! 

현지시간으로 5월 11일 토요일 오전 7시, 역시나 정신없고 사람 많고 불친절한 상해공항에 도착했다. 환승 절차를 마치고 드디어 한국으로 돌아가는 '정말 마지막 비행기' 게이트 앞으로 왔다. 10kg 배낭은 수하물로 붙이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급격하게 저하된 당을 충전하기 위해 근처 카페에 들러 오렌지를 직접 갈아 만든 주스를 주문해 원샷했다. 이제 몇 시간 후면 한국에 도착이다. 2시간의 아주 적당한 환승시간 후, 오전 9시 상해공항을 떠나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상해에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은 텅텅 비어 좌석 여유가 많았다. '내 옆자리도 비려나'했지만 세네갈 국적에 상해에 산다는 내 또래의 남자가 거의 마지막으로 탑승하고 비행기는 이륙했다. 한국에 있는 친구를 만나러 간다는 그는 한국은 처음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약간 들떠 보이고 그걸 넘어 좀 불안해 보였다. 


서툰 영어로 기내식을 주문하는 것부터 고생을 하더니 입국신고서를 작성하는데 무척이나 애를 먹었다. 직업, 경유지, 한국에 체류할 곳 주소 등 한 칸씩 채워가면서 스튜어디스를 한 번씩 불렀다. 나와 승무원이 계속 설명을 해주었지만 의심하는 눈초리로 '이거는 왜 써야 하냐'고 계속 같은 질문을 했다. 나중에는 승무원이 여권을 받아가 대신 작성해 주었는데도 다시 나한테 하나씩 물어보면서 맞게 썼는지 확인을 했다. 승무원이 나에게 '도와주셔서 고맙다'고 계속 인사할 정도였다. 도움의 손길조차도 불안했던 순례의 첫날이 떠올랐다. 이 친구에게도 '도움의 손길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여행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웰컴 투 코리아?! 생일 선물 도착이요!
인천 공항 입국장

상해 푸동공항에서 인천공항까지는 2시간 정도가 걸렸다. '웰컴 투 코리아, 한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반가운 사인과 함께 한국시간으로 5월 11일 토요일 오후 12시, 40여 일의 대장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 날은 사랑하는 엄마의 예순아홉 번째 생신이었다.  


작년 1월 말, 퇴사를 하고 피레네 산맥이 폐쇄되는 겨울을 피해 봄으로 출국 날짜를 잡았다. 그 사이 한 달 넘게 순례 준비와 함께 봉사활동을 했다. 정해진 봉사가 끝나는 바로 다음날, 4월 1일부터 엄마 생신 전까지가 딱 40일이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유혹을 받았던 40일,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떠돈 시간 40년, 성경에서 중요한 장면에 등장하는 '40'이라는 숫자가 꼭 마음에 들었다. 앞뒤가 꼭 정해진 무리한 일정 같았지만 나에게 꼭 맞춰진 시간이라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출국하는 날 다리에 깁스를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초록색 깁스를 하고, 돌아오는 날보다 더 처참한 얼굴로 엄마와 울면서 인사하던 순례의 시작이 떠올랐다. 물론 그사이 틈틈이 전화도 하고 SNS로도 소식을 알렸지만 부모님을 만나러 입국장을 들어서는 그 길은 첫 날 만큼이나 두근거리고 떨려왔다.  

40일의 이상한 순례길을 마치고 인천공항에서

"짜잔~! 어버이 날은 못 챙겼지만 엄마의 선물 같은 딸 등장이요!" 마중 나온 부모님과 찐한 포옹을 했다. 고집불통 자식이 발에 깁스를 하고 40일간 여행을 간다는 걸 그냥 보고만 있어야 했던 엄마의 심정은 아마 내가 나랑 똑 닮은 딸을 키우게 될 때나 어렴풋이 알 수 있지 않을까. "너 없는 40일 동안 한숨도 못 잤다"며 울먹이는 엄마를 보고 같이 울음이 터지기 전에 나는 화장실로 도망을 갔다. 다녀오는 길에 꽃집에 재빠르게 들러 엄마가 좋아하는 장미꽃 몇 송이를 포장해 나와 함께 다시 돌려드렸다. 


순례길을 다녀오고 한 달 가까이는 마드리드부터 시작된 감기인지 여행 후의 몸살 때문인지 앓아누워 있었다. 깁스를 했던 내 오른쪽 발목은 기상청보다 더 정확한 날씨 예보관이 되어 비가 오거나 눈이 오기 전에는 '욱신거림'을 통해 꼭 알람을 해주고 있다. 돌아오는 길, 상해공항에서 오렌지 주스를 사 마시며 사용했던 카드가 복제되어서 해외 결제가 계속되는 바람에 카드를 새로 발급받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
깁스를 하고 떠나던
'이상한 순례길'의 첫날로 돌아가서
'순례길을 떠날지 말지'
다시 결정하라고 한다면?


망설이지 않고 또다시 "순례를 떠나겠다". '그 길의 끝에서'가 아니라 '그 모든 길 위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길의 끝에서 정답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길이 정답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정한 길과 답'은 계획이 틀어질 때부터 비로소 시작됨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꼼꼼하고 치밀하게 세워두었던 800km 프랑스 순례길과 등지고, 바욘에서 루르드-툴루즈-리옹-떼제로, 떼제에서 아를-바르셀로나를 거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했던 '이상한 순례길'은 '쉼'과 '치유'가 필요했던 나에게 완벽하게 맞춰진 선물 같은 루트였다. 

40일간 다녀온 '이상한 순례길'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길로 신이 나를 초대했을 때, 내가 했던 건, 욕심으로 가득 찼던 무리한 계획들을 내려놓고 슬픔에 싸여 주저앉아 있는 것 대신 용기를 내어 '첫 발'을 뗀 것뿐이었다. 두려움을 떨쳐내고 내딛는 나의 작은 발걸음에 응답하듯 신은 사람을 보내어, 아름다운 자연을 보여주며, 함께 걸어주며 '잊지 못할 40일'을 선물해 준 것이다. 내 머리로는 상상도 못 했던 길, 하지만 그때의 나에게 꼭 맞는 '완벽한 길' 말이다.


그 사이 나는 상했던 몸과 마음의 건강을 회복했고, 새로운 직장도 구했다. 그러다 또 한 번의 퇴사와 이별의 아픔을 겪고 엄마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차갑고 차가운 겨울을 보내야 했다. 여전히 '내 계획대로 되는 것 하나 없는 이상한 길'을 걷고 있지만, 여전히 지독한 고독과 슬픔이 나를 어둠으로 초대하곤 하지만, 그때마다 주저앉는 것 대신 '첫 발'을 떼어 보려 용기를 내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이상하게 흘러가는 내 인생 순례길도 분명히, 나를 '지금, 여기' 있게 한 신이 이끄는 나에게 아주 꼭 맞는 '완벽한 길'이 될 거라 믿는다.


오늘도 거북이처럼 느리게 느껴지는 내 발걸음 또한 받아들이고 한 걸음, 한 걸음씩, 마음을 다해서 '지금, 여기'의 이 '이상한 순례길'을 기쁘게 걸어낼 뿐인 것이다. 


와! 여러분, 드디어 마지막 편이네요=) 저의 느릿느릿 거북이걸음을 함께하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이 기록은 2019년 4월 1일부터 5월 11일까지 다녀온 저의 산티아고 순례길 이야기입니다. 


우선은 40일 동안 지나쳐온 감사하고 놀라웠던 장면들을 정리하고 싶었고, 더 많은 분들과 나누고 싶었어요. 무엇보다도 다리에 깁스를 하고 울면서 떠났던 못난 딸을 기다리며 40일간 초조해했던 엄마에게, 누구보다 여행을 좋아하는 소녀감성의 소유자이지만 아파서 장거리 해외여행은 할 수 없는 엄마를 위해, 제가 보고 느꼈던 모든 것들을 전해드리고 싶었어요. 


지난 7월 17일의 첫 글부터 이번 편까지 6개월이 넘게 걸렸네요. 기록을 정리하는 이 과정도 쉽진 않았지만 역시 제 '이상한 순례길'처럼 분명한 건 정리하고 글을 쓰면서도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감사한 순간들이 참 많았다는 거예요. '그거면 됐지' 싶어요=) 


앞으로도 퇴고 과정을 거쳐서 종이책으로 묶어보려고 하는데요. 수정이나 보강이 필요한 부분들이 있으면 언제든 귀띔해주세요! 이스라엘 순례기와 방송 인터뷰-취재 기록, 콘텐츠, 일에 대한 이야기들, 영화음악 라디오 제작기까지 나누고픈 이야기들이 많지만 제 속도대로 꼭꼭 씹어서 계속해볼게요. 함께해요♡


깁스하고 떠난 40일간의 순례기 <이상한 순례길> 지금까지 함께 걸어주시고 응원해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걷게 될 우리 모두의 '이상한 순례길'에도 신의 축복이 함께하길 기도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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