깁스하고 떠난 40일간의 산티아고 순례
4월 30일 화요일, 4월의 마지막 날이다. 어느새 집 떠나온 지 꼬박 한 달이 지났다. 이제 날씨도 완연한 5월의 봄으로 향한다. 더 따뜻한 남쪽을 향해 이동한다. 프랑스에서의 마지막 발걸음이다. 스페인 땅을 드디어 밟다니 꿈만 같다. 비록 바르셀로나는 동쪽 끝, 콤포스텔라는 서쪽 끝이지만. 그래도 감격스러운 순간이다. 오늘도 나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알 수 없지만 지금,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면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걸어가야지. 집으로 돌아갔다면 볼 수 없었을, 느낄 수 없었을, 엄청난 일들을 겪고 있다. 감사하다. 이 모든 것에. 오늘도 아멘=)
새벽까지 아를의 밤을 지키다 늦게 잠든 터라 느지막이 일어나 조식을 먹고 아를에서의 마지막 산책에 나섰다. 천천히 걸어서 원형경기장을 지나 첫날 가봤던 언덕 위의 성당으로 향했다.
성당은 여전히 닫혀있고 햇빛을 쬐던 고양이도 없었지만 경치는 여전히 아름다웠고 바람도 여전히 마음까지 간질였다. 구시가지의 골목골목을 천천히 거닐며 눈에 꼭꼭 눌러 담았다.
많은 유적들을 보며 꽉 찬 하루를 보냈던 날보다 이렇게 지도 없이 천천히 발길 따라 걷는 시간들이 훨씬 좋았다. 그리고 이렇게 지도 없이 다니게 된다는 건 이곳을 떠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숙소로 돌아와 짐을 챙겨서 아를의 노란방을 빠져나왔다. 숙소 앞 론강의 바람도 여전히 거셌지만 산책 나온 사람들과 관광객들의 웃음소리가 여전히 사랑스럽게 퍼져갔다. 강둑을 따라 별빛 대신 햇빛에 빛나는 론강을 보며 기차역을 향해 걸었다.
낙원이었던 떼제를 떠나 목적지인 콤포스텔라로 가기 전 프랑스 마지막 경유지로 아를(Arles)은 나에게 아주 완벽한 시간들을 선물했다. 고흐에게 그랬던 것처럼 아를의 파란 하늘과 강렬한 태양은 '잦은 비'로 '4월의 프랑스가 주는 우울함'을 깨끗하게 지워주었다. 흐리던 하늘이 지나고 화창한 5월의 봄이 시작되고 있었다.
회전 교차로가 있는 고흐의 노란집 앞 광장으로 나왔더니 구시가지로 가는 성문 앞에 시장이 열렸다. 채소, 과일, 치즈, 자신이 직접 농사지은 것들을 가지고 나와 파는 '파머스 마켓(Farmer's market)'같았다. 물건을 고르고 흥정하는 소리가 활기찼다. 시장 구경까지 마치고 아를 기차역으로 향했다.
아를에서 일반열차를 타고 30분 정도 가면 '님(Nimes)', 이곳에서 스페인의 고속철도 렌페(RENFE)를 갈아타야 했다. 님에서 스페인 '바르셀로나 산츠'역 까지는 3시간 반 정도가 걸렸다. 프랑스 아를에서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숙소에서 숙소까지 가는 데에도 반나절이면 충분했다.
렌페(RENFE)는 우리나라의 KTX, 프랑스의 TGV처럼, 스페인의 고속철도다. 프랑스의 기차들과도 연계되어 있어서 렌페 홈페이지에서 따로 예약할 필요 없이 프랑스 기차 예약 애플리케이션으로도 예약이 가능했다. 국내에서 예약할 때는 예약을 대행해주는 업체도 있다.
리옹에서 떼제로 이동하는 날 아침 벌어졌던 '리옹사건(?!)' 이후에는 기차를 탈 때 나도 모르게 긴장을 했다. 이 날도 일찌감치 플랫폼 전광판 아래에서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다. 오가는 사람도 많지 않은 시골 간이역 풍경이었다. 그런데 아시아인으로 보이는 여자분이 유창한 영어로 말을 걸어왔다.
말레이시아계 미국인으로 LA에 사는 그녀는 사진 작업을 위해 아를에 왔다고 했다. 큰 캐리어에 배낭, 카메라 가방까지 40일 여행 온 나보다 짐이 훨씬 많아 보였다. 우리는 아시아인에 아를을 사랑했고 순례길에 관심이 많다는 공통점들을 찾았다. 그중 가장 큰 공통점은 '아를에서 님을 거쳐 바르셀로나 산츠역'을 간다는 것이었다. 동행이 생겨 다행이라며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우리는 여기서 영어가 통하는 사람을 만난 것도 감사하다며 본격적인 수다를 시작했다. 그녀는 아를에서의 사진 작업에 대해서, 나는 깁스를 하고 루르드, 떼제를 거쳐 가고 있는 '이상한 순례길'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떼제를 특히 흥미로워했는데 다음번에는 떼제에 가봐야겠다고 메모를 했다.
아를에서 님까지는 일반열차로 가기 때문에 자리가 정해져 있지 않아서 우리는 기차에서도 나란히 앉아 쉬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 보는 40대 후반의 말레이시아계 미국인 사진작가 그녀와 이렇게 말이 잘 통하다니 신기했다. 우리는 아를에서의 의도치 않았던 묵언수행 후 오랜만에 이렇게 실컷 이야기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SNS 친구까지 맺고 웃고 떠드는 사이에 기차는 '님(Nimes)'에 도착했다.
환승시간은 30분, 바르셀로나로 가는 기차 '2B' 플랫폼은 바로 옆 승강장이었다. 의자에 배낭을 올려놓고 기다리는데 그녀가 확인차 물어보겠다면서 지나가는 프랑스 사람에게 불어로 묻기 시작했다. 그녀는 불어로 간단한 회화 정도는 할 줄 안다고 했었다. 그런데 그녀의 표정이 굳어지더니 '이곳이 아닌 것 같다'며 건너편 승강장으로 가야 한단다.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서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건너편 승강장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그녀는 또 '여기가 아닌 것 같다'고 했다. 출발 10분 전이었다.
리옹이 악몽이 생각났다. 나는 서둘러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가서 표를 보여주고 플랫폼이 어딘지 물었다. 그 직원은 원래 우리가 서있던 곳을 가리켰다. 따라오라며 조금 전에 타고 내려왔던 엘리베이터 앞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우리가 플랫폼에 도착하자마자 렌페가 도착했다. 우리는 안도의 숨을 쉴 새도 없이 작별인사를 해야 했다. 바르셀로나까지 가는 렌페는 예약할 때부터 자리가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바르셀로나에 도착해서 보자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각자의 자리를 찾아 렌페에 올라탔다. 자리를 찾아 앉기도 전에 기차는 출발했다.
또 한 번의 아찔한 기차 에피소드를 남기고 기차는 '님'을 빠져나가 몽펠리에를 향했다. '님'은 '별'이라는 소설로 알려진 알퐁스 도테의 고향이고 로마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의해 건설된 도시로 아를 못지않게 로마 유적들이 많다. 렌페로 스페인까지는 '님-몽펠리에-세트-베지에' 프랑스 남부 해안을 따라 쭉 지나는데 기차 안에서 보는 풍경들 조차 너무 아름다웠다.
해안을 따라가던 풍경이 조금씩 변해가고 멀리 피레네 산맥의 만년설이 보이기 시작하면 국경이 가까워졌다는 신호였다. 프랑스 남서쪽 바욘과 순례길 출발점 '생장 피에 드 포르(Saint jean pied de port)'부터 남동쪽의 이곳까지 이어지는 피레네 산맥은 위로는 프랑스, 아래로는 스페인의 국경 역할을 동시에 하고 있었다.
아를에서 사 온 샐러드와 음료수, 간식들을 먹으며 창밖의 변해가는 모습들을 구경하다 보면 어느새 크고 작은 언덕들이 많은 스페인으로 넘어온다. 국경을 넘을 때에도 별도의 출입국심사 같은 건 없었다. '유럽연합'이라는 말이 실감 났다.
예정대로 4시 반에 '바르셀로나 산츠(Barcelona Sants)'역에 도착, 숙소까지는 버스를 타고 30분 정도를 더 가야 했다. 파리의 몽파르나스역, 우리나라 서울역처럼 여러 기차와 버스들이 오가는 곳이라 그런지 기차 내리는 곳부터 사람들이 엄청났다. 못 알아듣는 건 마찬가지일 텐데도 프랑스에서 보낸 한 달 동안 불어를 듣는 데에 익숙해졌는지 마구잡이로 들려오는 스페인어가 영 어색하고 나를 더욱 긴장되게 만들었다. 사진작가 그녀가 혹시 있을까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봤지만 그녀를 다시 만날 수는 없었다. 파리 이후 오랜만에 만나는 대도시에 겁이 나긴 했지만 우선은 무사히 숙소를 찾아내는 미션에 집중하기로 했다.
역사 밖으로 나왔는데 정류장도 한둘이 아니라 한참을 찾아 헤맸다. 운 좋게 버스를 타고 앉을 수도 있었다. 다만 퇴근시간대에 정류장을 지날수록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내 거대한 순례 배낭이 사람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떤 할머니가 스페인어로 내 가방과 나를 번갈아 손가락질하면서 뭐라 하셨는데 '가방 좀 치워라'나 '옆에 할아버지에게 자리를 양보해라'는 뜻 같았다. 하지만 내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더 많은 사람들이 위치를 바꿔야 했고 그냥 예의 없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선선한 날씨에도 진땀이 났다. 버스를 중간에 한번 환승하면 숙소 바로 앞에서 내릴 수 있었는데 그냥 좀 더 걷기로 하고 미리 내려서 걸었다.
수많은 차들, 바이크, 자전거, 관광객들, 퇴근길의 사람들, 거리는 지나치게 활기찼다. 모든 게 많고 크고 정신없이 느껴졌다. 고즈넉한 프로방스의 풍경들이 벌써부터 그리웠다. 회전 교차로 너머로 그 유명한 가우디의 건축물 파밀리아 성당도 보였지만 우선은 숙소를 찾아 마음의 안정을 취해야 했다.
호스트가 보내준 주소로 찾아가 요청대로 해당 호수의 벨을 누르고 기다리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응답이 없었다. 동네 주민들이 에어비앤비 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며 '집 주변에서 길을 물어보지 말 것'과 '주민이 물어보면 친구라고 답할 것' 또한 요청받아 누구에게 묻지도 못하고 대문 앞에서 서성였다. 누군가 건물 문을 열고 나오는 바람에 로비에서 엘리베이터 타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집 문 앞에서 또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안에서는 분명히 노랫소리와 인기척이 들려왔지만 반응이 없었다.
도착했다고 다시 한번 메시지를 보내고 '결국 문이 안 열리고 연락이 안되면 어떻게 해야 하나'에 대해 머릿속으로 수십 개의 계획들을 만들기 시작한 지 10분이 넘어서야 문이 열리고 앳되어 보이는 여자가 나왔다.
스페인 다른 지역에서 왔고 이 집에 장기 투숙 중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녀는 자신은 호스트가 아니고 영어도 잘 못하니 질문은 나중에 집주인에게 하라고 수줍게 이야기했다. 손짓과 표정, 단어들로 내가 머물 방과 화장실, 부엌 등 집을 소개해주었다. 집은 꽤 넓었는데 언뜻 봐도 방이 10개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그중 내 방은 출입문 바로 옆의 작은 방이었다. 내 방의 유일한 창문을 열면 복도 엘리베이터와 계단이 훤히 보였고 복도에서도 이곳을 훤히 볼 수 있었다. 방 안은 예약할 때 사진에서 본 것대로 아기자기하게 인테리어가 되어있었다. '에어비앤비 파이브 스타(별 다섯 개)'라는 표식이 있었지만 내 눈은 놀랍게도 그 방의 단점들을 짚어내기 시작했다. 우선 복도로 나있는 창문을 열 수 없다는 점, 병원 침대 같은 간이침대, 4개의 방 사람들이 함께 써야 하는 화장실, 장기투숙 중인 그녀가 내 옆방이라 춤추며 노래하는 소리를 끊임없이 들어야 한다는 점, 그리고 그녀가 노래를 정말 못한다는 점, 오랜만에 불평불만의 못난이 마음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하지만 이내 여섯 명이 함께 자던 떼제의 도미토리가 생각나면서 '그래도 내 몸을 뉘일 수 있는 독립된 방이 있고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할 수 있으니 괜찮다'는 마음이 들었다. 성호경을 긋고 이곳까지 무사히 올 수 있음에 먼저 감사를 드렸더니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짐을 풀고 샤워를 하고 한 시간 정도를 쉬었더니 슬슬 배가 고팠다. 저녁 먹을 곳을 검색해 보다가 뜻밖의 빨래방까지 발견하고 옷가지를 몇 개 싸서 숙소를 나섰다.
'La Bar'라고 하는 빨래방(Laundry Bar)을 찾았다.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처럼 빨래를 하는 사이에 간단하게 먹을거리들도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 크로와상, 샌드위치, 샐러드, 커피, 주스는 물론 생맥주와 칵테일까지 팔았다. 나처럼 관광객들 뿐 아니라 동네 주민들도 퇴근 후 빨래를 돌리며 간단하게 맥주와 샌드위치로 저녁을 해결하는 모습이었다.
2천여 년 전 고대 로마의 유적들 속에 있다가 이런 신문물을 만나니 더 신기했다. 한국을 떠나서 한 달 가까이 세탁기에 제대로 빨래를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가지고 갔던 빨랫비누가 반도 안남을 정도로 열심히 빨래를 했지만, 화장실 세면대와 욕조에서 손으로 빨아서 방 안에 너는 정도로는 뭔가 개운하지 않았는데 섬유유연제와 뽀송뽀송한 건조기까지 거칠 수 있게 되어 새삼 또 감사해졌다. 잠시라도 손빨래 지옥에서 벗어나 '내일 양말이, 속옷이 안 마르면 어떻게 하지?!' 하는 걱정을 안 해도 되니 더 감사했다.
빨래하는 사이 배고픔을 달래줄 요구르트와 빨래, 드라이까지 9.4 유로면 가격도 합리적이었다. 뽀송뽀송 기분 좋은 냄새가 나는 옷들을 챙겨 들고 미리 찾아둔 근처 한식당을 향했다.
수녀님이 만들어주신 엄마 손맛 루르드 된장찌개 이후에 툴루즈, 리옹을 거쳐, 떼제의 2주와 아를까지 오면서 채운 느끼함을 한 번에 달래줄 김치찌개와 맥주를 주문했다. 다친 발목 때문에 약을 먹느라 프랑스에 있는 한 달 동안 와인이나 맥주를 제대로 못 먹었는데 아를의 마지막 밤부터 용기를 내어 조금씩 즐겨보기로 했다.
뜨끈한 뚝배기에 매콤한 김치찌개와 흑미를 넣은 쌀밥, 친근한 밑반찬들이 나왔다. 기도를 하고 따뜻한 밥에 김치찌개를 한입 먹으니 '와, 고향의 맛, 그래 이거지'싶었다. 그동안 먹었던 치즈와 버터와 잼들이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여기에 시원한 맥주 한 모금이면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혼자 앉아 밥 한 그릇을 뚝딱하고 김치찌개에 남은 맥주를 먹고 있는데 주인아주머니가 말을 거셨다.
"한국에서 오셨어요?! 밥 좀 더 드릴까요?!"
한국에서 이민 온 지 오래되셨다는 주인 부부는 나의 '이상한 순례길'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으셨다. 그러는 동안 밥 한 공기가 나왔고 결국 김치찌개가 바닥을 보이고 밥 두 공기를 해치우며 식사가 마무리되었다. 배가 터질 것 같았지만 오랜만에 한국어로 대화도 하고 엄마손 김치찌개도 맛보고 나니 몸도 마음도 따뜻했다. 콧노래를 부르며 천천히 걸어서 숙소로 돌아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래 어떠한 상황에도 감사할 일은 생기지'라고 중얼거리면서 말이다.
아를에서의 마지막 날부터 떼제에서 만났던 '사랑합니다 그룹'의 마리아가 SNS로 연락을 해왔다. 그녀는 바르셀로나에서 나고 자랐으며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근처에 산다고 했었다. 우리는 바로셀로나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었는데 정확한 시간과 장소를 정하자는 것이었다. 내가 머무는 숙소가 그녀의 집과는 차로 10분 거리로 가깝고, 마침 '노동자의 날'에 맞춰 내가 바르셀로나에 머물게 되었으니 나의 일일 가이드가 되어주겠다는 것이었다. 그 예쁜 마음을 감사히 받기로 하고 우리는 5월 1일에 만날 정확한 시간과 장소를 정했다. 처음 와보는 이 나라, 이곳이 다시 가깝고 친근하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깁스하고 떠난 40일간의 순례 기록 <이상한 순례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향한 마지막 경유지 '스페인 바르셀로나'도 함께 걸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