깁스하고 떠난 40일간의 산티아고 순례
누군가 그랬다. 순례길을 걷고 가장 크게 변화된 건 장소든 사람이든 모든 것에 덜 집착하게 된 것이라고. 수많은 마을들을 지나고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면서 만남이 우연이듯 헤어짐 또한 늘 우연히 일어나며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배우게 되는가 보다. 그래서 더욱 지금 내가 내딛고 있는 이 발걸음과 이 순간에 집중하며 현재를 살아가는 법을 실천하게 되는 곳이 순례길 아닐까.
이틀이었지만 바욘과는 정이 담뿍 들었다. 생각해보면 누군가 나에게 상처 주려고 일부러 덤벼든 것도 아니었는데 가슴속에 이런저런 상처들을 품어 안고는 파리라는 대도시를 거쳐 이곳까지 왔었다. 아기자기한 마을의 분위기와 무지개와 길 위에서 만났던 사람들이 내 단단한 마음에 조금씩 파장을 일으켜주었다. 물론 힘들고 두려울 때가 있었지만 떠나는 이 시점에는 좋은 것들만 기억이 났다. 그저 아쉬웠다.
바욘의 사랑스러운 아침 풍경을 마음에 꾹꾹 눌러 담고 숙소를 나섰다. 도시 간의 이동은 늘 힘들고 겁이 나지만 그래도 갈 곳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면서 말이다. 역으로 가기 전 동네 성당을 들러 감사인사를 드렸다. 설렘과 두려움이 묘하게 섞였다. 그래도 파리에서 바욘으로 올 때와 비교하면 두려움보다는 설렘이 더 커졌다.
루르드까지는 일반열차로 1시간 반 정도를 달려야 했다. 프랑스의 일반열차는 칸도 좁고 청결하지 못해서 타기가 좀 힘들었지만 창밖의 풍경들이 변하는 것을 넋을 놓고 보다 보면 금세 목적지에 도착한다.
바욘 역을 떠나면서 또 한 번 아두르강(Adour R.)을 지났는데 멀리서 숙소 앞에 있던 셍떼스쁘히다리(Pont Saint-Esprit)가 보였다. 갸브 드 뽀 강(La Gave de Pau)을 따라 푸요(Puyoo)를 지나며 끝없이 펼쳐지는 이름 모를 노란 꽃밭이 너무 아름다웠다. 포(Pau) 지역을 지나면서는 피레네의 눈 덮인 산 봉우리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힘차게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끝나갈 때쯤 루르드 역에 도착했다.
하늘은 맑았고 햇볕이 따가웠지만 선선한 바람이 적당히 불어 루르드는 딱 내가 좋아하는 날씨로 나를 반겨주었다. 구글맵을 켜고 야자수가 있는 모퉁이를 돌아 천천히 숙소를 향해 걸어 내려갔다. 인도가 사람 하나 지나갈 정도로 좁았다. 등산스틱에 의지해 깁스를 하고 천천히 걷는 나는 뒷사람에게 계속 미안해야 했고 주기적으로 멈춰서서 사람이 오는지 체크하고 앞서보내야했다.
뒤쪽에서 또 소리가 나서 돌아보니 아저씨 둘이 내 발을 가리키며 말을 걸었다. "너도 치유의 기적을 위해 여기 왔구나? 어디서 왔니? 다리는 어쩌다 그랬고?" 질문세례를 퍼붓더니 "잘 왔어! 너에게도 기적이 일어날 거야~ 이곳은 그런 곳이니까! 여기서 나갈 때는 깁스 없이 나가게 될 거야! 행운을 빌어"라고 말하며 앞질러 갔다.
말로는 고맙다고 했지만 속으로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여기에 더해 괜히 '놀리는 거야 뭐야'하는 안 좋은 마음까지 올라왔다. 며칠 동안 쉬면서 머물 곳을 찾으러 온 거지 치유니 기적이니 하는 것들은 사람들의 희망사항이 만들어낸 동화 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루르드는 프랑스 남부 피레네산맥 북쪽 기슭에 위치한 고도 400m의 마을이다. 가톨릭 교회가 공식 인정한 성모 발현지로 1858년 베르나데트(Marie-Bernarde Soubirous)라는 14세 소녀가 이 곳의 동굴에서 18차례 성모님을 목격했다고 전해진다. 그 동굴 위로 성당이 지어졌고 동굴에서 흘러나오는 샘물은 치유의 기적을 일으켜 전 세계의 병자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 베르나데트는 1933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인의 생가를 비롯해 그녀의 생애를 다룬 영화를 상영하는 곳, 박물관 등 루르드 곳곳에서 베르나데트 성녀의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 숙소 가는 길에 푸른 잔디와 동상이 눈에 띄어 발길을 멈추게 되었다. 당시의 사제관 건물 앞에 베르나데트가 묵주를 쥐고 있다. 어린 베르나데트는 성모님을 목격하고 사제를 찾아가 알렸지만 처음에는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고 한다.
사제관에서 몇 걸음 성지 방향으로 걸으면 왼편에 거대한 성당과 만나게 된다. 성모 발현지답게 성당 입구부터 성모상이 눈에 띈다. 1875년 지어진 성당(Eglise Paroissiale de Lourdes)에는 로마시대에 만들어졌다는 오래된 세례대(Baptismal basin)가 있었는데 베르나데트 성녀도 태어난 해인 1844년에 당시 Saint-Pierre 성당의 이 세례대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내부는 아쉽게도 공사 중이라 제대로 둘러볼 수 없었지만 우선 여러 개의 기둥들과 높은 천장이 규모로 나를 압도했고 멀리 제대 쪽에 성모상으로 보이는 무언가가 흰 천이 덮인 채 있어 눈에 띄었다. 왼편에서는 마르코 성경공부를 했던 성당에 있는 것과 비슷한 색감의 예수님 성화를 만났다. 마치 나를 기다리고 계셨던 것처럼 그리고 늘 그렇듯 웃는 얼굴로 잘 왔다고 해주시는 것 같았다.
루르드 어디서든 잘 보이는 곳에 위치한 오래된 요새와 성벽들은 이곳의 역사를 이야기해주는 듯 했다. 파란 하늘과 햇빛은 비타민D를 마구 만들어 주었지만 숙소로 가는 길은 내리막길도 많고 무엇보다 한참을 걷는데도 숙소가 나오지 않아서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점점 지쳐갔다. 지도에서는 분명 20분 거리라고 나왔는데 자주 멈췄다 와서 그런지 걸음이 느려서 그런지 거의 한 시간 가까이를 걷고 있었다.
중간에 앉을 곳도 마땅치 않아서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걸었더니 '와 이제 도저히 못 걷겠다. 바닥이라도 앉아야겠다'싶을 그때, '가난한 글라라 수도원'을 따라 모퉁이를 도니까 어젯밤 급하게 예약한 숙소가 바로 모습을 나타냈다. '살았다'를 외치고 들어갔지만 엄청난 '루르드 입성 신고식'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첫날 숙소는 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위치해 있었는데 성지와의 거리도 10분 정도로 가까워서 추천받았던 곳이다. 역에서는 생각보다 멀어 좀 고생했지만 그래도 파리에서 바욘 갈 때보다는 아주 매끄럽게 숙소까지 도착한 것이었다. 체크인 시간보다 좀 일찍 도착했는데도 바로 들어갈 수 있었고 리셉션 직원도 영어가 가능했으며 친절해서 만족스러웠다. 좀 낡고 방이 주차장 뷰인 게 실망스러웠지만 혼자 지내기에는 꽤 넓은 곳이라서 '잘 골랐다' 싶었다. 늘 그렇듯 방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내려놓고 신발도 벗지 않고 침대 위에 철퍼덕 누웠다.
그런데 바로 정면에 천으로 된 하얀 커튼이 바람도 안 부는데 조금씩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몸을 일으켜 다가가 보니 수십 마리의 벌레들이 매달려 춤을 추고 있었다. '오 마이 갓...'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순례길의 천적, 베드버그인가?!' 우선 내려놓았던 물건들을 재빠르게 식탁 위에 올리고 한국에서 준비해 간 비오킬(살충제 스프레이)을 미친 듯이 뿌렸다. 벌레들이 괴로운 듯 버티다 바닥으로 떨어졌다.
베드버그(Bedbug)는 '빈대'로 가축이나 사람의 피를 빨아먹고 산다. 평소에는 갈색에 길이가 1cm도 되지 않다가 배를 채우면 붉은빛을 띠고 커진다. 산티아고 순례자들 뿐 아니라 유럽여행을 계획하는 많은 사람들이 집시나 소매치기보다도 두려워하는 존재가 아닐까 싶다. 특히 순례자들은 가축이 많은 시골 마을들을 주로 지나는데 이런 곳의 풀밭이나, 알베르게의 침대나 천 이불 등에 묻어 물릴 수 있다.
물려도 반응이 바로 나타나지 않고 잠복기가 있어서 어디에서 물렸는지 정확하게 확인이 어렵고 수십 군데가 발진으로 부풀어올라 심한 사람들은 약을 먹고 병원을 다녀와도 가라앉는데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일단 짐에 한 번 옮겨 붙으면 물건을 버리거나 배낭까지 통째로 빨아야 없앨 수 있을 정도로 박멸이 어렵다.
한국에서도 순례길 다녀온 친구들이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것 1위로 '베드버그'를 말해서 두려움이 아주 컸는데 그 무시무시한 베드버그 체험기가 내 일이 될 줄이야. 폭풍 검색으로 사진을 찾아서 비교해보는데 베드버그가 맞는 것 같았다. 프런트로 내려가서 직원에게 "내 방 커튼에 벌레가 있다. 베드 버그 같다." 하며 사진을 보여주었다. 주인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나왔다. 같이 올라가 보자고 해서 방으로 돌아왔다.
거의 한 통을 다 쏟아부었더니 방에서 살충제 냄새가 진동을 했다. 아저씨는 커튼을 보더니 "정말이네?! 근데 이게 베드 버그는 아니야 안심해. 날이 따뜻해지니까 벌레들이 나오기 시작하나 봐. 시즌이 시작되는 거지."라고 나를 안심시키며 이야기했다.
'정말이네?!... 시즌이 시작됐다고?... 웃기네..' 속으로는 막 욕이 나왔지만 "베드 버그가 내 가방에 옮았으면 어떻게 하냐. 나 여기서 못 잔다. 너무 무섭다."라고 이야기했더니 아저씨는 미안하다면서 방을 바꿔주겠다고 했다. 새로 배정해줄 방에 직접 같이 가서 벌레가 있는지 확인시켜주면서 '전망 좋은 방'이라는 걸 강조했다. 물렸을지도 모르는데 전망이 무슨 소용인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커튼부터 먼저 살펴보고 꼼꼼하게 방 구석구석을 확인했다. 커튼도 매끈한 재질로 되어있고 벌레도 없었지만 그래도 뭔가 찜찜했다. 하지만 지금 다시 짐을 들고나가서 다른 곳을 찾아보기도 어려워 그냥 그 방에 머물기로 했다.
천으로 되어있는 침대 대신 베드 버그가 없을 것 같은 매끈한 나무의자에 앉아 넋을 놓고 쉬다가 뭐라도 먹어서 힘 좀 내야겠다고 밖으로 나왔다. 흐린 하늘에 또 비가 내렸다. 날씨가 내 마음을 따라가는 것 같았다. 아까 숙소에 오다가 봐 놓은 쌀국수집에 가서 뜨끈한 국물을 한 그릇 하면 그래도 마음이 풀릴 것 같았다.
그때가 오후 4시. 애매한 시간 때문인지 분명 숙소에 들어갈 때는 문을 다 열었었는데 그사이 작은 슈퍼마켓까지 다 닫혀있어 루르드는 유령도시가 되어있었다. 거리 곳곳에는 나처럼 문 연 식당을 찾아다니는 관광객들만 눈에 띄었다. 성지 쪽으로 가면 그래도 '문연 곳이 있지 않을까'하는 마음에 거의 끝까지 가봤지만 헛수고였다.
숙소 맞은편에 유독 사람이 바글바글한 피자집이 있었는데 아침도 빵으로 때우고 그 이후에는 아무것도 못 먹은 터라 뭔가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싶어 지나쳤었다. 결국 '유일하게 장사하는 그 곳'을 찾아 다시 돌아왔다. 이탈리아 아저씨가 직접 만드는 피자집이라 뭔가 신뢰(?!)가 갔는데 주문과 동시에 토핑을 올리고 오븐에 구워줘서 뜨끈뜨끈한 피자를 맛볼 수 있었다. 좀 짜긴 했지만 따뜻한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게 감사했다.
배를 채우고 나니 그래도 좀 더 걸을 수 있을 것 같은 힘이 생긴 것 같았다. 성지나 가볍게 한 바퀴 돌아보고 숙소로 들어가기로 마음먹고 성지까지 10여분을 걸었다.
철문을 통과해 좀 더 걸으니 난생처음 보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성당이 보였다. 이건 무슨 디즈니 만화에 나오는 마법의 성처럼 웅장하고 화려했다. 성당을 마주 보고는 거대한 성모상이 보였고 성당 뒤편 산속에는 거대한 십자가가 보였다. 성당도 여러 개 겹쳐져 층마다 있는 것 같았다. 올라갈지 말지 잠시 망설여졌다. 성당까지 오르는 계단도 어마어마하게 많았기 때문이다.
입구 쪽 벤치에 잠시 앉아 숨을 고르고 용기를 내서 초록색 깁스와 함께 한 걸음씩 올라가기 시작했다. 등산을 하듯 땀과 비가 범벅이 되어서 성당 안에 들어갔다. 맨 뒤편 의자에 앉고 나니 더 화려한 내부의 모습에 입이 딱 벌어진 것도 잠시, 갑자기 또 폭풍눈물이 났다.
'제가 너무 욕심부려서 벌 받나 봐요. 하루도 정말 그냥 넘어가는 날이 없네요. 잘못했어요. 저 좀 도와주세요. 용서해 주세요. 저 그만 혼내세요. 저 좀 살려주세요. 힘들어 죽겠어요.'
그래도 이렇게 목놓아 울고 나면 마음은 항상 가벼워졌다. '그냥 한 바퀴' 돌 수 있는 규모의 성지가 아니었지만 그래도 잘 왔다고 신고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당시에는 루르드가 기적의 샘물로 유명한 줄도 모르고 가게에서 1.5리터짜리 물을 사서 방으로 들어갔다. 아무것도 모르고 온 루르드의 첫날밤이 저물고 있었다.
주인아저씨 말대로 방의 전망은 최고였으나 말벌 같은 게 계속 들어오는데 방충망이 없어서 발코니 겸 통 창문을 열고 밖을 보기가 부담스러웠다. 일찍 찾아온 밤엔 비가 와서 그런지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이 조용했다. 이따금씩 차만 한두 대 다녔다. 침대에 눕는 건 두려웠지만 긴팔 긴바지로 무장하고 누워서 잠을 청했다.
하지만 거의 한 숨도 잘 수가 없었다. 왠지 벌레가 이불 속을 기어 다니는 것 같고 침대 주위와 콘센트 구멍, 방구석구석 뿌려놓은 살충제가 벌레 대신 나를 잡을 지경이었다. 괴로운 밤이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