깁스하고 떠난 40일간의 산티아고 순례
루르드의 둘째 날 아침이 밝아왔다. 낮에 만난 베드버그를 보고 밤새도록 내 스스로 만들어낸 상상의 벌레들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잤더니 온몸이 쑤시는 것 같았다.
이것저것 도움을 주신 한국인 수녀님이 오전 8시 50분에 성지에서 한국 순례팀을 만나기로 하셨다면서 그때 같이 만나자고 하신 것도 있고 해서 일찍부터 잠자리를 정리하고 숙소를 나섰다. 또 비가 내렸다.
성지에 들어설 때부터 익숙한 한국말이 들리기 시작했다. 색색의 우비를 입은 한국 어르신들이 성지 순례자 안내소 쪽으로 모여들고 있었는데 그 끝에 수녀님이 서 계셨다.
인사를 드렸더니 "아이고~ 생각했던 것보다 심하네~ 이러고 여기까진 어떻게 왔데?!~ 비 오는데 괜찮아요?! 붕대 다 젖겠네. 내가 내일 깁스 위에 신을 수 있는 방수신발 가져다줄게~ 우선 지금은 여기 사람들이랑 같이 따라와요~"하셨다. 다른 한국분들께도 "내가 얘기한 그 한국에서 온 이~ 순례길 간다고 왔는데 발이 다쳐가지고 잠깐 쉬러 왔대요. 근데 발이 이래가지고~"라고 말씀하시면서 안내소 쪽으로 사라지셨다. 수녀님은 루르드에 거주하시면서 한국인 순례객들을 위해 가이드처럼 안내 봉사를 하고 계신 것 같았다.
얼굴이나 보자고 하시는 줄 알고 인사드리러 갔다가 얼떨결에 단체의 일행이 되어 따라다니게 되었다. 여행사를 통해 부부동반으로 산티아고 순례 여행을 오신 분들로 모두 서른 명 정도였다. 어르신들은 나를 보자 다들 한 마디씩 하셨다. "아이고... 발이 저래서 어떻게?!" "어쩌다 그랬어요?" "혼자 왔어요?" "그래서 산티아고 걷겠어요?!" "쯧쯧쯧" "하하하" 다들 걱정스러운 마음에 하신 말들이겠지만 잠을 설쳐서 한껏 예민해져 있는 나에겐 그런 눈빛과 말투들이 상처로 다가왔다. 입을 꾹 다물고 안내소 옆쪽에 난 문으로 사람들을 따라 들어갔다.
내부에는 베르나데트에게 나타난 성모님의 이야기가 그림으로 표현되어 쭉 걸려있었다. 수녀님은 이미 설명을 시작하고 계셨다. 다른 순례객들에게 방해가 될까봐 뒤쪽에 있는 성모상 옆에 걸터앉아 멀리 들려오는 수녀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가난하고 몸도 약하고 학교도 제대로 못 다녀서 글자도 몰랐던 14살 소녀에게 성모님이 나타나신 거예요. 가장 작고 보잘것없는 베르나데트에게만 자신의 모습을 허락하신..."
프랑스의 작은 시골마을 루르드에서 방앗간 집 육 남매 중 첫째로 태어난 베르나데트는 어렸을 때부터 콜레라, 천식, 결핵 등을 앓으며 몸이 약했다고 한다. 가정 형편도 넉넉하지 못해서 문맹이었으며 버려진 감옥에서 가족들과 함께 생활하기도 했다. 14살의 베르나데트는 땔감을 주으러 나갔다가 가브(Gave) 강가의 마사비엘(Massabielle)동굴에서 처음 성모님을 만나게 된다. 소녀가 '한 줄기 바람 같은 소리를 듣고' 뒤돌아서자 '부드러운 빛' 속에 '흰 옷을 입은 아름다운 여인'이 다정하게 손을 벌렸다고 한다.
이 '아름다운 부인'은 소녀에게 1858년 2월 11일부터 7월 16일까지 6개월여 동안 18차례나 나타났는데 첫 번째엔 묵주기도를 손수 알려주셨다고 하고, 두 번째 때는 성수를 뿌리며 '악마면 물러가고 하느님께로부터 왔다면 가까이 와달라'는 베르나데트의 말에 더 가까이 다가와주셨다고 한다. 세 번째 발현 때는 이름을 물어보는 소녀에게 15일간 이곳으로 와줄 것을 요청했다고 하며, 16번째 만남에서야 자신의 존재를 '원죄 없이 잉태(Immaculate Conception)'되신 성모님이라고 말씀해주셨다고 한다.
'임마쿨레 콘셉시옹'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해서 글자도 모르던 어린 소녀는 알 수 없는 말이었기에 교회가 베르나데트와 성모님의 만남을 인정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총 16번의 발현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었을 때도 있었지만 오직 베르나데트에게만 성모님이 모습을 나타나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처음에 그녀의 말을 믿지 않고 정신병자 취급을 했다. 하지만 발현 기간 동안 나타난 기적들과 베르나데트의 생생한 증언으로 교회는 1862년 1월 베르나데트에게 성모님이 발현한 것을 공식 인정했다.
성모님은 베르나데트에게 죄인들을 위해 기도할 것, 회개할 것, 이 곳에 성전을 지으라고 사제에게 전할 것 등을 요청하셨다고 하는데 이후 1866년에는 그녀가 참석한 가운데 '동굴 성당'이 봉헌되었으며 1876년에는 '원죄 없이 잉태된 성모 대성전'이 축성되었다. 베르나데트는 1866년 수녀원에 입회하여 기도와 은둔생활을 하다가 1879년 4월 16일, 35살의 나이에 사망하였다. 사후에도 100년 넘게 시신이 부패되지 않아 1913년부터는 사람들에게 공개되기 시작했으며 1933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성 되었다.
수녀님이 어찌나 생생하게 말씀해주시던지 이야기를 듣는데 두 볼에 눈물이 주르륵주르륵 흘렀다. 마침 기대어 앉아있던 곳이 베르나데트 성녀가 성모님을 올려다보는 석상 바로 옆이었는데 베르나데트와 같은 눈높이에서 성모님을 올려다보며 설명을 들으니 더욱 감정 이입이 됐다. '가장 작고 보잘것없어보이는 지금 나에게도 기적이 나타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수녀님은 엄청난 이야기들을 쏟아내신 후에 이제 '침수'하러 갈 시간이라며 예약해두었으니 빨리 가야 한다고 앞장서셨다. 나는 눈물을 훔치며 일어나서 쭈뼛쭈뼛 수녀님께 다가가 "저는 발이 이래서 물에는 못 들어갈 것 같아요"라고 말씀드렸다.
어젯밤 뒤척이면서 루르드에 대해 검색해보다가 물 안에 온몸을 담그는 침수라는 게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생생한 후기가 많았는데도 어떤건지 상상이 잘 안됐지만 물에 들어가려면 깁스를 풀러야 하고 압박붕대는 걸스카우트 이후로 매 본 적이 없으니 스스로 원상태로 만들 수 없을 테고 당황스러운 일을 또 하나 만들기는 싫었다.
그런데 수녀님은 단호하게 대답하셨다. "무슨 소리야, 이럴수록 더 침수해야지. 성모님이 그랬잖아~ 이 물을 마시고 이 물로 씻으라고! 침수하면 나을 거야! 자 같이 가자!" 난 또 얼떨결에 맨 뒤에서 무리를 따라 걷게 되었다. 어르신 순례단 인솔 여행사의 직원들이 걸음이 느린 나를 챙겨서 침수하는 곳까지 함께 걸어주었다.
루르드 '침수(Going to the Baths)'는 샘물이 채워진 욕조 안에 들어가 몸을 담그는 특별한 예식이다. 성모님이 베르나데트에게 아홉 번째 나타나셨을 때 알려주신 샘에서 아직도 솟아나고 있다는 물에 들어가게 된다. 당시 성모님은 "가서 마시고 그곳에서 씻으라(Go and drink at the spring and wash yourself there!)"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처음에는 동굴 근처에 도축장이 있어서 물이 더러웠지만 베르나데트는 죄인들을 위해 보속(죄에 대한 대가를 치는 것)하는 의미로 성모님 말씀에 따랐다고 한다. 이후에는 치유의 기적을 일으킨다고 해서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 물을 마시고 이 물에 몸을 씻기 위해 루르드를 찾고 있다. 지금까지 접수된 치유사례만 7천여 건에 달하며 2018년 2월 기준으로 교황청에서 인정한 기적만해도 70여 건에 달한다고 한다.
5분 정도를 걸어서 마사비엘 동굴을 지나면 침수장이 나왔다. 놀이공원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것처럼 여러 개의 벤치에 지렁이 모양으로 쭉 앉아서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수녀님이 봉사자로 보이는 분에게 가서 예약했다고 말씀하시는 듯 보였고 바로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리로 남자와 여자가 분리되어 앉게 되었다.
아무래도 새치기하는 것 같아서 "괜찮아요 전 괜찮아요"하고 밖에서 보고만 있는데 수녀님이 나를 발견하시고는 라인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시면서 어르신 순례객들에게 "여기 누가 이거 할 줄 안다고 했죠?! 반깁스라 잘 묶어주기만 하면 될 것 같아요. 좀 도와줘요!" 하셨다. 그렇게 어떤 아주머니 옆에 나란히 앉아 순서를 기다리게 되었다. 괜히 긴장하고 있는데 안내 봉사자 할아버지가 다 함께 묵주기도를 바치자고 제안하셨고 각 나라의 언어로 기도가 이어졌다.
맨 앞줄이 되니 중후함이 느껴지던 그 봉사자 할아버지가 말을 건다. 자신을 아일랜드 사람이라고 소개하면서 친구들 중에 한국에 살았던 골롬반수도회 신부들이 한국자랑을 많이 한다고 하셨다. 항상 한국을 그리워하는 친구들을 보면 꼭 한 번 가보고 싶다고 하셨다. 마침 또 같은 본당에 그곳 수도회에서 공부하고 있는 친구가 있어서 더 신기하고 반가웠다. 한국 어머님들께도 어설프게 통역을 해드리며 수다를 떨고 나니 긴장이 좀 풀렸다.
한국어로 기도를 바치고 금방 순서가 다가왔다. 앞쪽에 커튼이 져쳐지면서 봉사자가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번호가 붙어있는 칸들이 또 여러 개 있었는데 그 앞 의자에서 한 번 더 기다렸다. 다시 긴장이 됐다. '지금이라도 나갈까'하는 마음이 드는데 순식간에 왼쪽에서 두 번째 커튼 안으로 들여보내 졌다.
양쪽에는 플라스틱 의자들이 세네 개씩 있고 그 위에는 사람들이 벗어둔 옷가지들이 걸려있었다. 파란색 앞치마를 한 봉사자들이 다가와 속옷까지 다 벗고 목욕 가운 같은 천 한장만 두르라고 안내를 해줬다. '속옷까지 전부 다?'에 멘붕이 왔고 도움을 주시기로 했던 한국 분이 옆 칸으로 배정을 받고 사라지셔서 2차 멘붕이 왔다.
내 발을 보더니 봉사자 아주머니 두 분이 나를 의자에 앉히고 김장 비닐 같은걸 가지고 와서 발 위에 감으려고 하셨다. 잘 못 알아 들었지만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나를 안심시키는 것 같았다. 너무 죄송하고 염치없었지만 불안한 마음에 "옆에 이걸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라고 계속 이야기했더니 봉사자가 그 한국 아주머니를 찾아 모셔왔다. 아주머니와 봉사자들은 무릎을 꿇고 내 앞에 앉으셔서 붕대를 풀고 바지까지 벗겨주셨다.
한국을 떠나오는 날 반깁스를 하고 6일 만에 처음으로 내 두 발을 온전히 볼 수 있었다. "오 그래도 붓기는 많이 가라앉은 것 같네요. 걱정하지 말고 우선 침수하고 나와서 기다려요. 다시 묶어줄게요." 봉사자들에게도 그렇고 한국 아주머니에게도 그렇고 같은 칸에 있는 순례객들에게도 번거롭고 거추장스럽게 피해만 끼치는 것 같아 너무 죄송했고 한편으로는 혼자 힘으로 옷도 제대로 벗지 못하는 내 모습에 자존심이 상했다.
이렇게 옷을 갈아입으면서부터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는데 그때마다 어느 나라 분인지도 모르겠는 봉사자들과, 한국 아주머니와, 순례객들 모두 천사 같은 미소와 표정으로 '괜찮다'고 답해주는 듯 했다.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면 안쪽에 있는 또 하나의 커튼이 젖혀지며 침수를 마친 사람이 나온다. 물이 차가운지 온몸을 떨면서도 눈빛에는 감사함과 놀람과 기쁨과 눈물이 뒤범벅되어 있었고 얼굴에는 생기가 흘러넘쳐 보였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커튼 안쪽에 있던 봉사자가 내 손을 잡아 안쪽으로 안내했다. 내 뒤로 다시 커튼이 닫혔다.
안 쪽 벽면은 돌로 되어 있어서 동굴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정면에는 성모상이 보이고 그 밑으로는 맑은 샘물이 돌로 된 욕조 안에 가득 차 있었다. 봉사자가 두 명 더 양쪽으로 서 있었고 나를 데리고 들어간 봉사자가 그들에게 내가 발이 불편하다고 알려주는 것 같았다. 봉사자들은 걱정과 따뜻함을 미소에 담아 보여주었다.
돌로 된 욕조 안쪽으로 계단이 두세 개 나있어서 한 걸음씩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었다. 물이 한 겨울 계곡물처럼 찼다. 몸까지 떨려오는데 준비됐으면 기도하라는 봉사자의 말이 들렸다. 성호경을 그으면서 나도 모르게 울음이 터졌다. 1박 2일 봉사를 마치고 바로 월요일에 40일 순례길을 떠나는 무모함, 결국 남 좋은 일 하다가 내 몸 하나 못 챙겼다는 죄책감, 사랑이 담긴 봉사가 아니라 인정받고 싶은 욕구에 잘해 보이려고 했던 마음들, 그 과정에서 생긴 나 자신을 비롯한 사람에 대한 실망과 원망, 화, 깁스를 하고 여기까지 온 욕심, 가족에 대한 미안함, 모든 감정들과 인천-상해-파리-바욘-비아리츠를 거쳐 이곳까지 온 시간들이 영화처럼 한 순간에 지나갔다.
엄마에게 모든 감정을 쏟아내고 매달려 떼쓰는 어린아이처럼 정말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어느새 봉사자들도 함께 울고 있었다. 기도를 마치고 성호경을 그으니 양쪽의 봉사자가 팔을 잡아주고 뒤쪽의 봉사자가 머리를 받쳐주며 뒤로 완전히 누워 차가운 샘물에 몸을 완전히 담갔다가 일으켰다. 눈물은 멈추지 않았지만 어느새 감사함과 안도감과 기쁨, 가슴 벅참이 느껴졌다.
물에서 나오면 봉사자들이 다시 천으로 몸을 감싸준다. "merci(감사합니다)"를 연신 외치며 커튼 밖으로 나오는데 봉사자들이 꼭 안아주었다. 다시 한번 울컥했다.
몸에 남은 물기들은 순식간에 말라서 들어가기 전 걱정했던 '몸에 물기 닦을 수건'은 필요하지 않았다. 옷을 갈아입고 의자에 앉으니 한국 아주머니가 붕대를 들고 기다리고 계셨다. 맨 발에 붕대를 감고 반깁스 석고를 대고 다시 한번 감으니 다시 새로 한 것 처럼 감쪽 같았다.
밖으로 나올 때까지 '감사합니다'와 'merci'를 수백 번은 외친 것 같다. 침수장을 나서는데 정말 이 세상 모든 것이 감사하게 느껴졌다. 온 세상이 아름다워 보였다. 아침 내내 흐리던 하늘도 파란 하늘로 바뀌어 있었다. 햇살이 따뜻하게 차가운 몸을 감쌌다.
한국을 떠난 후에 셀카 외에는 사진을 제대로 찍은 적이 없었는데 이 순간은 기억하고 싶어서 침수 후 성당 앞으로 갔을 때 사진을 남겼다. 울어서 얼굴은 퉁퉁 부었지만 개운한 표정이다.
수녀님과도 그제야 제대로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생겼다. 이제 침수를 했으니 다 나을 거라고 위로하시면서 샘물을 담아가서 샤워할 때도 바르고 계속 마시라고 하셨다. 또 벌레 나온 숙소 이야기도 들으시더니 성지와 가깝고 저렴하게 머물 수 있는 곳을 다시 찾아서 예약까지 해주셨다. 루르드에서 며칠 더 있어보기로 했다.
아침에 성지로 갈 때는 세상 우울함을 다 안고 갔다가 침수를 하고 나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성지를 나서게 됐다. 숙소에서 보이는 풍경도 그제야 아름답게 눈에 들어왔다. 숙소에는 오늘 밤까지 머물고 내일 체크아웃하겠다고 확실하게 이야기를 해놓고 어제 못 먹었던 쌀 국숫집이 문을 열었는지 확인하러 다시 한번 나가봤다.
쌀 국숫집도 영업을 하고 있었다. 자리도 딱 한자리 남아 있어서 테라스 자리에 앉아 쌀국수와 밥 한 공기를 주문했다. 하늘도 맑고 쌀국수 국물도 맑고 영혼과 배를 가득 채웠다. 세상 행복한 식사였다. 어느 것도 부러울 것 없이 그저 모든 게 다 감사했다. 이렇게 밥을 먹을 수 있음에. 오늘도 내일도 잘 곳이 있음에.
인생 쌀국수를 한 그릇 뚝딱하고 자리를 뜨려는데 어떤 아저씨가 "한국분이세요?!" 하시면서 말을 걸었다. 바욘 버스에서부터 내 깁스를 보셨다며 반가워하셨다. 은퇴하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러 오셨다고 했다. 부장님이 아니라 대표님 정도 되는 연차와 고과장이 허심탄회하게 이런저런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며 걸었다. 아저씨는 혹시나 해서 챙겨 왔다는 압박 붕대를 나중에 급할 때 쓰라며 나에게 챙겨주시곤 사라지셨다.
어느새 밤이 찾아왔고 숙소에 돌아와서 아주머니가 알려주신 대로 내손으로 깁스를 풀렀다 묶어 봤다. 가방 안에 있던 신발도 한번 꺼내봤다. 벌써 낡은 왼쪽 신발과 아직은 제대로 신지 못해서 '새 신'인 오른쪽 신발이 처음으로 한 화면 안에 들어왔다.
모든 게 감사하고 완벽하고 기적 같았다. 한국을 떠난 지 꼭 일주일이 되는 내일, 일요일 새벽에는 동굴에서 한국어 미사까지 있다고 해서 정말 신기하고 감사했다. 맛있게 먹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고민하던 모든 일이 해결된 기적같은 하루였다.
어쩌면 매일 일어나는 일상의 기적들을 내가 못 알아차리고 살았던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 일상의 기적들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됨에 또 한 번 감사하면서 잠을 청했다.
오후에는 한국인 순례객들을 인솔하는 여행사 직원들과 이야기하면서 루르드 다음 일정에 대한 힌트도 얻게 되었다. 여행사 직원들은 내 또래의 젊은 청년들이었는데 그중 한 명이 휴가를 프랑스로 왔다가 이곳 루르드부터 합류했다고 했다. 프랑스 떼제라는 곳에서 일주일을 지내고 오는 길이라는 그 친구는 내 사연을 듣더니 "그럼 떼제로 가세요!"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밖에도 '자전거로 프랑스길 가기', '한국 돌아가기' 등 여러 가지 의견이 있었는데 이 대화는 앞으로의 내 행보에 큰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