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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루르드 성지's 일상다반사

깁스하고 떠난 40일간의 산티아고 순례

새벽 동굴 미사부터 성체강복 예식, 촛불행렬까지 '거룩한 주일'을 보내고 루르드에서 '이상한 순례길' 8일 차 월요일을 맞았다. 지난 주말 만났던 사람들 덕분에 프랑스 떼제로 다음 목적지가 정해지는 듯 보였지만 떼제 쪽에서 컨펌 메일을 받기 전까지는 기차표도 섣부르게 예약할 수 없었다. 우선은 머물고 있는 수녀원에 하루 더 묵겠다고 말씀드렸다. 주말을 함께 보냈던 한국 단체순례팀은 오전부터 산티아고 프랑스길의 출발점인 생장으로 출발했고 난 다시 혼자가 되었다. 


| 수녀원 아침 풍경

수녀원 천창 풍경

알람 없이 천창으로 들어오는 은은한 햇빛에 눈을 떴다. 밤새 비가 무섭게 내렸다 그쳤다를 반복하더니 하늘은 푸른빛을 내보이고 있었다. 토도도독 여전히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졌지만 수녀원에서의 아침 식사시간이 7시 30분부터 9시 30분까지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몸을 일으켜 1층 식당으로 향했다. 딱 30분이 남아있었다. 

수녀원 식당과 조식

그래도 월요일 아침 9시에 일거리가 가득한 회사 책상이 아닌 프랑스 루르드의 어느 수녀원 식당에서 커피를 마신다는 건 호사스럽게 느껴졌다. 아침은 빵과 버터, 잼, 그리고 커피가 전부였다. 처음에는 너무 단출해서 당황했지만 점차 먹는 법을 익히고 나니까 세상 맛있고 만족스러웠다. 식당 피아노 위에는 눈 덮인 루르드 성지를 찍은 사진이 있었는데 겨울의 루르드도 언젠가 와볼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수녀원 테라스와 정원

아침을 다 먹고 방으로 다시 올라가면서 수녀원 이곳저곳을 둘러봤다. 2층의 넓은 야외 테라스 너머로는 성지가 또렷하게 보였는데 성지의 종소리는 물론이고 동굴에서 미사 드리는 소리, 성가 소리까지 잘 들릴 정도로 가까웠다. 작은 정원에는 수녀님들이 아기자기하게 심어놓은 갖가지 식물들이 자라나고 있었고 부활절을 앞두고 인형으로 꾸며놓은 작은 공간도 보였다. 


내 방은 계단을 하나 더 올라가 3층에 있었는데 수녀원 뒤쪽으로 루르드 역을 향하는 기찻길과 지금은 쓰지 않는 것 같은 작은 우물이 예스러움을 더했다. 소녀 베르나데트가 살던 그 시절 속으로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 루르드 샘물과 보통의 날들

아무리 새로고침 버튼을 많이 눌러도 오지 않는 떼제에서의 메일이 신경 쓰였지만 루르드의 4일 차는 나름 안정적인 느낌을 주었다. 아침을 먹고 빨래를 하고 성지에 샘물을 길러 갔다가 성지 곳곳을 돌아보며 산책을 하고 기도를 하거나 미사를 드리고 다시 물통에 물을 채우고의 반복이었다. 이 단순한 생활이 오히려 더 큰 안정감과 만족감을 주었다. 

로사리오성당 오른편에 위치한 식수대

루르드 성지 오른편으로 성모 발현 동굴 가기 전까지와 침수처 근처에 샘물을 마실수 있는 식수대가 쭉 마련되어 있다. 우물에서 물을 긷는 것은 아니고 둥근 손잡이를 꾹 누르면 물이 나오도록 장치가 되어있다.   

루르드 샘물을 받을 수 있는 식수대

식수대는 오픈된 장소에 위치해있어서 성지 문이 열려있으면 언제든 들어와서 물을 마시고 떠갈 수 있다. 본격적인 시즌이 시작되고 사람들이 많아지면 작은 물통 하나 채우기도 눈치가 보일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줄을 선다. 그런 와중에 어떤 이들은 온 가족이 약수통 같은 큰 통을 하나씩 들고 서서 물을 꽉꽉 채워간다. 눈치보다는 치유의 기적을 믿고 바라는 간절함이 크기 때문인 것 같다. 


| 루르드 성지 공식 일정

여기서 잠깐! 루르드 성지 공식일정들의 시간과 장소를 정리해본다. 매일 동굴 미사와 침수, 성체강복 예식과 야간 묵주기도 촛불행렬이 진행되는데 시즌이 시작되면 오전 10시에 성 비오 10세 성당에서 국제 미사도 열린다.

새벽 6시> 동굴 미사 @성모 발현 동굴
오전 9시- 11시> 오전 침수 @침수처 
오후 2시 30분-4시> 오후 침수 @침수처 
오후 5시> 성체강복 예식 @ 성비오10세 성당
밤 9시> 묵주기도 촛불행렬 @성모 발현 동굴

성지 곳곳 성당에서 미사도 여러 대 진행되는데 모든 일정의 시간과 장소는 시즌일 때와 아닐 때, 날씨 등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니 루르드 성지 안 순례자 사무소에 들러서 꼭 일정과 시간을 미리 확인하는 것이 안전하다. 


| 윗 성당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 대성당' 미사

윗성당  입구와 미사 전후의 모습

밥도 먹고 빨래도 하고 물도 마시고 나면 조용히 기도를 하거나 미사를 드릴 수 있는 곳을 찾는 게 일과였다. 마사비엘 동굴, 동굴 성당, 윗 성당, 아랫 성당, 눈에 띄는 성당만도 네다섯 개 되니 항상 어디선가는 미사가 진행 중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윗 성당'으로 불리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 대성당'에서 가장 많이 미사를 드린 것 같다. 고딕 양식으로 지어져서 그런지 명동성당도 생각나고 여러 성당들 중 가장 친숙하게 느껴졌다.   


성모님께 봉헌된 성당이라 그런지 화려한 성당 내부와 달리 예수님의 십자가는 오른쪽 한편에 마련되어 있었다. 프랑스어로 진행되는 미사에서 강론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확실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 몇 가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평화의 인사'다. '평화를 빕니다' 이 때는 언어와 국적과 인종과 나이를 떠나서 활짝 웃는 표정으로 모두가 서로에게 진심을 담아 평화를 빌어주었다. 

높은 천장과 샹들리에가 인상적인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 대성당(Basilica of the Immaculate Conception)'은 '무염시태(無染始胎) 성당'이라고도 하며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다. 1866년부터 짓기 시작해서 1876년 7월 봉헌되었다. 마사비엘 동굴로부터 20m 높이의 절벽에 지어졌으며 가장 위에 있다고 해서 '윗 성당'이라고 불린다. 종탑 높이만 70m라고 한다. 내부에는 성모님께 봉헌된 15개의 경당이 있으며 성모 마리아의 일생과 루르드의 성모 발현 이야기를 담고 있는 스테인드글라스화가 창에 새겨져 있다. 
동굴 성당과 윗 성당 입구

아직 헷갈리는 분들이 있을 것 같다. 성모님이 발현하신 마사비엘 동굴 위에 처음으로 '동굴 성당'이 지어졌고 그 위에 이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 대성당'이, 이후 몰려드는 순례객을 수용하기 위해 '동굴 성당' 아래쪽에 '로사리오 성당'이 지어졌다. 


그래서 현재 로사리오 성당 위에 동굴 성당, 동굴 성당 위에 무염시태 성당이 있고, 1층 위치에 있는 로사리오 성당에서 나와 오른쪽 뒤편으로 걸어가면 마사비엘 동굴이 보인다. 영상에서 보면 아래쪽 문이 '동굴 성당'으로 들어가는 문, 그 위쪽 문이 윗 성당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 대성당'입구다.  


| '동굴 성당'엔 동굴이 없다?!

동굴 성당 입구

1866년 루르드 성지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동굴 성당'은 이후에 세워진 여러 성당들에 비하면 100여 명이 들어갈 정도의 아담한 규모이지만 '마사비엘 동굴'과 함께 '루르드의 심장'으로 불린다. 로사리오 성당의 지붕이라 할 수 있는 천상모후의관 황금 십자가 뒤편에 작은 문으로 들어가면 된다. 입구에는 예수님께 받은 천국 열쇠를 쥐고 있는 베드로 사도의  동상이 있는데 발을 만지며 기도한 순례객들의 간절함만큼 색깔이 변해있었다. 

동굴 성당의 제대

동굴 성당은 성지 안의 성당들 중 가장 조용해서 갈 때마다 발걸음과 숨소리까지 조심스러운 곳이었다. 하지만 조용히 앉아 묵주기도를 하고 있으면 성모님이 정말 옆에서 함께 계시고 이야기를 들어주시는 것 같은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이곳에서 기도도 많이 하고 울기도 많이 했다. 중앙 제대는 성모님의 발현 장소 바로 위에 위치해있다고 하는데 24시간 내내 성체가 현시되어 있어서 조용하게 묵상하며 기도하기에 좋다. 

베르나데트성녀 경당

동굴 성당 입구의 베드로 동상 맞은편에 베르나데트 성녀를 위한 작은 경당이 있다. 성녀의 초상 아래에는 원래 성녀의 유해함같이 생긴 것이 모셔져 있었는데 내가 갔을 때에는 빈 유리상자만 남겨져있었다. 초상 뒤쪽과 경당 양 옆 벽에는 메시지가 적힌 석판들이 수없이 많이 붙어있었는데 성녀에게 감사하며 봉헌된 것 같았다. 


왼쪽 벽에 붙어있던 '발 모양이 조각된 석판'에 눈길이 갔다. 누군가 이곳에 와서 순례를 하고 발이 나았다는 감사의 표시로 봉헌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녀의 초상 맞은편에는 악마를 밟고 서 있는 대천사 동상이 경당 전체를 지켜주는 느낌이었다. 의자도 있어서 베르나데트 성녀 앞에서 한참을 묵상하다가 나오곤 했다. 


| 루르드 구석구석

로사리오 성당과 동굴 성당을 잇는 계단과 옆의 제대들

로사리오 성당 위 '동굴성당'과 '윗 성당'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사이에 있는 계단을 이용하는 방법과 로사리오 성당을 감싼 형태로 나있는 경사길을 오르는 방법이 있다. 경사길은 휠체어로도 진입할 수 있지만 오래 걸리고 계단은 빨리 갈 수 있지만 한 계단 한 계단 등산을 해야 했다. 기적의 샘물로 침수를 해서인지, 물을 마시고 발라서인지, 기분 탓인지, 시간이 지나서인지 모르겠지만 성지 안을 돌아보는 발걸음이 점점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4월 초의 프랑스 루르드는 많이 추웠다. 한낮에도 비가 오거나 바람이 심하게 불 때가 많았다. 그래도 잔디밭에는 데이지, 민들레가 피었고 간신히 버티고 있는 여린 초록잎들 사이로 꽃봉오리를 보기도 했다. 비바람을 맞으며 버티고 있는 모습에서 내 모습을 느끼곤 했다. 


우리 참새 정도로 프랑스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도 있었는데 부리는 노란색이고 몸통은 까맣고 크기는 종달새 정도였다. 이 새는 루르드에서는 어딜 가나 일행처럼 나타나서 친구 같기도 하고 힘이 되고 의지가 됐다. 

'갑분변(갑자기 분위기 변기)'무엇?! 이 사진은 '루르드성지 화장실'이다. 그래도 유럽의 화장실들 중에서는 깔끔한 편이고 무료라는 메리트가 있지만 변기 뚜껑이 없어서 나에겐 너무 어렵고 신기했다. 변기 뚜껑이 있는 화장실을 찾아 헤맸지만 결국 못 찾았다;; 또 화장실 안에는 조명 대신 변기 바로 위에 천창이 있었는데 거미줄이 가득해서 일 보다가 벌레를 맞을 위험이 있어 보였다;; 결국 이용해보진 못했다;;

루르드 성지 입구에서 오늘의 한컷

가장 평화로운 월요이 지나가고 있었다. 물론 오후가 지나도록 떼제에서는 와도 좋다는 확인 메일을 받지 못했지만 하루를 온전히 느끼며 기도하고 묵상하고 산책하면서 너무 감사하고 행복했다. 오히려 다리 다치는 바람에 생각지도 못하게 루르드에 오게 되고 특별한 경험들을 하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까지도 들었다.


| 루르드 한 끼와 'Words of Peace'

오늘의 한 끼 '아시안 콤보'

프랑스에 와서는 거의 하루에 두 끼 정도만 먹었다. 숙소에서 늦은 아침을 먹고 남긴 빵을 냅킨에 싸와서 중간에 간식으로 먹으면 저녁 한 끼 정도만 사 먹어도 충분했다. 이날은 루르드에 와서 만난 내 영혼의 맛집, 쌀 국숫집 대신 다른 곳을 발굴해 보기로 하고 구글 검색을 통해 아시안푸드 레스토랑을 찾았다. 


주방 스태프들은 동남아시아 사람들로 보였고 주인은 이탈리아 아저씨였다. 손님은 단체로 온 중국인들이 많았다; 고기와 해산물을 동시에 먹고 싶어서 주문한 15번 '아시안 콤보' 메뉴는 대실패;; 고기는 갈비찜에 향신료 섞인 터키음식 같았고 누들은 무슨 맛인지 모르겠고 새우와 브로콜리가 맛있었다. 밥에 반찬 먹듯이 그래도 깨끗하게 먹었다. 기분 좀 내느라 음료수도 한잔 주문했는데 어쨌든 일용할 양식으로는 충분했다. 


1층에는 손님이 나밖에 없었는데 이탈리아 주인아저씨가 혼자라고 계속 말을 걸며 말동무를 해주었다. 퇴사한 얘기부터 깁스하고, 파리를 거쳐 이곳까지 와서 침수한 이야기까지 한참을 나누다 보니 그릇이 깨끗해졌다. 아저씨는 나가는 나에게 'Words of Peace'라고 적은 종이를 주셨다. 배와 영혼이 가득 차 행복했다.  


저녁을 먹고 숙소에 와서 다시 확인해보니 딱 하루 만에 떼제에서 답메일이 와있었다. 회사 입사지원서를 냈을 때 탈락했다는 소식을 전하는 메일처럼 "떼제에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로 시작하는 이 메일에는 "떼제가 17-29세까지의 청년들(young people)을 위한 곳이라서 30세 이상의 어른들(adults)은 일 년에 일주일밖에는 머물 수 없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나에게 '떼제는 원하는 만큼 머물 수 있으니 떼제에 쭉 있다가 한국을 가라'던 그 여행사 직원은 20대였던 것이 분명해졌고 나는 멘붕이 됐다. 내가 동안이라서(?!) 그렇게 이야기해줬던 것이라고 애써 믿기로 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야 했다. 결론은 '그래 일주일이 어디냐'였다. 루르드는 일종의 관광지처럼 되어있어서 체류비가 부담스러웠고 이건 프랑스 어디에서나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바로 메일을 보냈다. 현재 있는 수녀원 숙소에 내일까지 머물겠다고 해놓은 상태니까 수요일부터 일주일간 떼제에 있는 것이 가능한지 묻는 내용이었다. 또다시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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