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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르드 성지'의 거룩한주일과 기도소리

깁스하고 떠난 40일간의 산티아고 순례

루르드의 3일 차 아침이자 집 떠난 지 꼭 일주일째 되는 날. 그사이 너무 많은 일들이 있어서인지 더 오랜 시간이 지난 것만 같았다. 아침 7시 반부터 동굴에서 한국어 미사가 있다고해 서둘러 나왔다. 한국 단체 순례객들과 함께 인솔 신부님이 오셔서 가능한 일이었다. 프랑스 루르드 성지에서 그것도 성모님과 베르나데트 성인이 만났다는 바로 그 동굴에서 한국어로 주일미사를 드린다는 것은 당연히 계획에도 없었고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일주일 동안 잘 버틴 것에 대한 선물을 받는 기분이었다.  


| 새벽, 한국어 미사 @ 성모님 발현 동굴  

성모님 발현 동굴에서 한국어 미사

새벽의 차가운 공기와 지저귀는 새소리 사이로 한국어가 분명하게 들려왔다. 한국을 떠나 처음 맞는 주일에 음악처럼 마음으로 이해해야 하는 프랑스어 미사가 아니라 또렷하게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이 마련되어 감사했다. 부활을 2주 앞둔 사순 제5주일 미사였다. 그러고 보면 지난 일주일은 참 파란만장했지만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 죽음을 묵상하는 사순시기에 딱 맞는 순례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래도 힘이 났다.


루르드 성모 발현 동굴

"평화를 빕니다" 어제 기적 같은 침수를 함께했던 팀과 평화의 인사를 나누었다. 마음이 꽉 채워지는 것 같았다. 미사가 끝난 후에 수녀님과 한국 어르신 순례팀은 앞다투어 지난밤 내 발의 안부를 챙겨주셨다. 나는 어젯밤엔 방 안에서 오른쪽 신발도 신어봤다고 자랑을 했고 아주머니는 깁스가 다시 잘 되어있는지 확인해주셨다. 이제 조금만 더 하고 풀어도 되겠다고 하셨고 나는 지금 당장 풀어도 될 것 같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루르드 동굴 안에 여전히 흐르는 샘물

수녀님의 깨알정보 덕분에 동굴 왼쪽 앞부분 바닥에 표시되어 있는 베르나데트 성녀가 성모님을 처음 만났다는 곳도 확인할 수 있었고 동굴 안 쪽까지 들어가 볼 수 있었다. 동굴 안쪽 돌들은 사람들이 기도를 하며 하도 만져서 그런지 반들반들 빛이 났고 샘물 근처에는 색색의 꽃들과 기도를 담은 쪽지들이 수북하게 쌓여있었다. 한 걸음씩 천천히 동굴을 돌며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진지함과 간절함이 느껴졌다. 


오후 5시에는 '성 비오 10세 성당'에서 성체강복 예식이 있다고 해서 순례팀과는 오후에 다시 만나기로 했다. 루르드 성지 안에만 30여 개의 크고 작은 성당이 있다고 하는데 미리 위치도 봐 둘 겸 해서 성당을 찾아가 봤다. 


| 성체강복 예식 @ 성 비오 10세 대성당

성 비오 10세 성당 입구

'성 비오 10세 성당'은 어제 한국 수녀님과 처음 만났던 곳 근처였다. 성지 출입문 쪽에 순례자 사무소를 지나면 왼편으로는 화려한 대성당들이 보이고 그 맞은편에는 큰 성모 마리아상이 있다. 성모상 뒤편으로는 초록 잔디밭이 펼쳐져있는데 오른쪽에 푯말과 함께 스포츠 경기장 입구처럼 보이는 문이 잔디밭 밑으로 나있다. 이곳이 바로 루르드 성모 발현 100주년을 기념해 1958년 3월 25일 봉헌된 '성 비오 10세 대성당(Underground Basilica of St. Pius X)'이다. 

성 비오 10세 대성당 내부, 멀리 제대가 보인다

2만 7천여 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을 정도의 규모여서 순례 시즌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이곳에서 매일 성체강복 예식과 국제 미사 등이 열린다고 한다. 축구장이나 야구장처럼 거대했는데 마치 노아의 방주 안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었다.   

프랑스 유명 건축가들이 공동으로 참여했다는 이 성당은 노출 콘크리트 양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인 물고기 모양으로 설계했다고 한다. 계단이 없어서 휠체어로도 성당 곳곳을 누빌 수 있어 보였지만 너무 넓어서 아래까지 내려가 한 바퀴 돌아볼 엄두는 나지 않아 오후를 기약하고 돌아 나왔다. 


| 루르드 쎄요(Sello_스탬프)

순례자 여권에 도장도 쿵!

성당 바로 옆 순례자 사무실에 들러 크레덴시알(순례자 여권)에 '루르드 스탬프-도장_(Sello_쎄요)'도 찍을 수 있었다. 순례자 상징인 조가비 안에 루르드 성모님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기부니가 좋아요오~!

바욘에 이어 두 번째 쎄요를 받아 들고 숙소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너무나 가벼웠다. 한국을 떠나오던 날, 발에 깁스를 하면서 마음으로는 이미 포기했던 것들이었다. 이제 겨우 도장 두 개였지만 마음은 꽉 찼다. 늦은 아침을 먹고 짐을 챙겨서 한국 수녀님이 예약해주신 성지 바로 옆의 'Beth Mariam 수녀원'으로 향했다. 


| 언덕 위 하얀 집, 수녀원으로 이사  

성지옆문 엘레베이터까지 있는 수녀원

'Beth Mariam 수녀원'은 성지 사제들의 의복을 관리하는 레바논 수녀님들이 사시는 곳인데 성지를 방문하는 봉사자나 순례객들을 위해 머물 수 있는 방들이 있었다. 마사비엘 동굴을 지나 침수처 앞에 있는 작은 다리를 건너면 푸른 잔디밭 너머로 수녀원이 바로 보였다. 성지 오른쪽 문에서 1초 거리(?!)여서 텔레토비 동산 같은 작은 언덕만 잘 오르면 되는 완벽한 곳이었다. 무엇보다 내부에 엘리베이터가 있다는 점이 마음에 쏙 들었다.  


내부는 수녀원답게(?!) 작고 소박했지만 아주 깔끔했다. 숙소를 옮기는 이유가 물론 금전적인 부분도 있었지만 '벌레' 안 나오는 청결한 곳을 찾기 위함도 있었으므로 아주 만족스러웠다. 방 번호가 신경 쓰이긴 했지만 다락방 느낌에 천창까지 나 있어서 '낭만 점수(?!)'로 극복이 가능해 보였다. 


불어에 가까운 영어를 하는 수녀님과 손짓 발짓 섞어가며 인사를 나누고 방을 배정받으면서 깁스에 대한 스토리를 공유드렸다. 발이 불편하니 아래층을 쓰면 좋은데 오후부터 단체 투숙객들이 예약되어 있어서 비는 곳이 없다고 하시는 것 같았다. 우선 이틀을 머물겠다고 말씀드리고 짐을 풀고 나니 모이기로 한 시간이 다 되었다.


| 윗 성당, 아랫 성당? 

  '로사리오 성당'은 또 어디죠?!

이 안에 숨겨진 3개의 성당을 찾아보세요

서둘러 '성 비오 10세 성당'으로 갔는데 갑자기 장소가 '로사리오 성당'으로 변경되었다고 했다. '거기가 어디더라?' 하며 사람들을 따라나섰다. 

성모 마리아가 베르나데트에게 13번째 나타났을 때 "사제들에게 전해 이곳에 성당을 짓게 하십시오"라고 말씀하신 것에 따라, 1862년 동굴 성당 착공을 시작으로 성당들이 지어졌다.

'동굴 성당'은 성모님이 발현하신 마사비엘 동굴 바로 위에 1866년 완공되었다. 그 위에 고딕 양식의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 대성당(Basilica of the Immaculate Conception)'이 1871년 완공되었고, 많아지는 순례자들을 감당하기 어려워 동굴 성당 아래쪽에 황금색 십자가 돔을 가진 신 비잔틴 양식의 '로사리오 대성당(Basilica of our Lady of the Rosary)'이 1901년 봉헌되었다.

가운데 동굴 성당을 중심으로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 대성당'이 '윗 성당', '로사리오 대성당'이 '아랫 성당'으로 불린다.    
로사리오 대성당 입구

화려한 색감이 돋보이는 로사리오 대성당(Basilica of our Lady of the Rosary)입구에는 작은 타일 조각들을 모자이크처럼 붙여서 가나의 혼인잔치 장면을 묘사해놓았다. 그 위 중앙에는 성모 마리아가 묵주를 들고 있는 조각이 시선을 압도한다. 그 위 양쪽으로는 예수님과 12제자의 모습이 보이는데 오른쪽 맨 끝에 뒷돈을 챙기는 유다의 모습까지 생생히 묘사되어있다. 

로사리오 대성당의 황금 돔

로사리오 대성당에서 돋보이는 부분 중 하나는 황금색 십자가와 돔이다. 이는 성모 마리아 천상모후의 왕관을 상징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돔 안쪽으로는 성모마리아가 황금 왕관을 쓰고 아기천사들과 함께 있는 모습이 작은 타일 조각 모자이크로 섬세하게 묘사되어있다. 동굴 성당과 윗 성당으로 수용하지 못한 순례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신자 석에는 기둥이 하나도 없는데 2,000여 명이 한꺼번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성체강복 예식에도 사람이 가득 찼다. '성체강복 예식'이라는 건 또 처음이었는데 사제가 성체에 강복을 하고 현시(나타내 보게 함)하여 성체조배 하고 기도할 수 있는 예식이었다. 


우연히 중앙통로 쪽으로 앉게 되었는데 바로 내 얼굴 앞까지 신부님이 오셔서 성체를 들어 올려 보여주셨다. 또 한 번 울컥하면서 '가장 작고 보잘것없는 소녀에게 모습을 드러내신...'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예식이 끝나고 눈물을 참느라 위를 올려다보는데 로사리오 성당 돔으로 햇빛 두 줄기가 핀 조명처럼 들어왔다.  꽂히는 빛줄기가 마음속에 남아있는 작은 어둠까지도 증발시키는 것 같았다. 

묵주기도 신비를 타일 모자이크로 묘사했다

미사 후에는 성당 내부를 천천히 돌아볼 수 있었다. “성모님이 항상 묵주를 들고 나타나셨다는 베르나데트 성인의 증언을 바탕으로 묵주기도의 신비(환희, 고통, 영광)들을 묵상할 수 있는 15개의 경당에 성화가 모자이크로 화려하게 장식되어있었다. 

화려한 파이프오르간 소리와 함께 기분 좋게 성당을 나서며 한국 순례팀과는 밤 9시 동굴 앞에서 시작하는 촛불행렬 때 마지막으로 만나기로 했다. 


| 똑같은 저녁과 달라진 풍경

인생 똠양꿍

'오늘 저녁은 뭐 먹지?' 고민할 필요도 없이 어제 먹었던 쌀국수집으로 저절로 발길이 향했다. 옛날 숙소와 가까운 곳이라서 지금 숙소와는 20분이 넘는 거리이고 갑자기 비가 쏟아져 번거롭기도 했지만 뜨끈한 국물이 끌리는 나는 영락없는 아시아인, 한국인이었다. 


빗속을 걸어서 똠 양 꿍과 공깃밥을 주문하며 앉았다. 주인아줌마 아저씨도 나를 기억하고 반가워해주셨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맛있냐고 물어보면 '내 소울푸드(soul food)'고 이틀 연속으로 오고 있다며 적극적으로 홍보했고 세 팀 정도가 더 들어와 만석이 되었다.  


내 옆에는 호주에서 휴가 왔다는 회사원이 앉았다. 채식주의자라서 식당을 찾기 힘들었다는 그녀는 볶음 채소와 밥을 주문했다. 우리는 루르드가 처음이라는 점과 가톨릭 신자라는 점, 어제 했던 짜릿하고 신기했던(?!) 침수 경험을 서로 나누며 순식간에 SNS 친구까지 되었다. 계속해서 회사들이 한국이나 호주나 얼마나 별로인지와 내 벌레 나온 첫 숙소, 코리아 뷰티까지 주제를 바꿔가며 한참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늘 밤에 있다는 촛불행렬 정보까지 교환하고 다시 성지로 돌아오니 해가 지면서 또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새로운 보금자리인 수녀원 숙소로 가는 길에 보이는 성지의 풍경이 사뭇 색다르게 느껴졌다. 벌써부터 크고 작은 초들 이 봉헌되어 불을 밝히고 있었다. 


| 밤 9시, 촛불행렬

밤이 되니 쌀쌀해진 날씨와 상관없이 동굴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저마다 손에는 촛불을 들고 있었다. 의자는 금방 꽉 차고 그 뒤로도 수많은 사람들이 여러 겹 둘러쌌다. 명동성당의 성탄미사보다 더 붐볐다. 묵주기도가 시작되었다. 라틴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한국어까지 세계 각국의 언어로 기도가 이어졌다. 

하나의 기도를 전 세계의 사람들이 나눠서 이어간다는 것이 신기하고 뭉클했다.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각자 나라의 말로 이해했다는 성경의 어느 장면이 떠올랐다. 대형 초가 동굴을 시작으로 성지 주변을 크게 돌기 시작했고 그 수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하며 그 뒤를 따랐다. 

보이나요? 무수히 빛나던 별들

10시가 넘어 행렬과 기도가 끝나고 어느새 새까매진 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어둠 속을 밝히는 촛불처럼 반짝반짝 빛을 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는 휴대전화 불빛의 도움을 종종 받아야 했지만 어두운 만큼 별이 더 또렷하게 보여 하늘만 쳐다보며 걸었다. 운 좋게 비도 오지 않아서 천창으로 쏟아지는 별들을 세며 잠들 수 있었다. 


"루르드 다음은 정하셨어요?!" 새벽 미사를 마치고 다시 한번 나의 다음 일정이 대화 주제가 되었다. "침수하고 나니까 800km 걸을 수 있을 것 같아요"라는 나와 "그건 기분 탓"이라고 말하는 산티아고 전문가, "버스 타고라도 계획했던 800km 프랑스길은 완주하고 싶어요"라는 나와 "그렇게 관광하러 가는 건 의미가 없어요"라는 전문가의 대화가 핑퐁처럼 왔다 갔다 했다. 그분은 "차라리 자전거를 타고 가보는 건 어떠냐"라고 했지만 난 "두 발 자전거를 못 타요..."라고 대답했고 "그럼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가장 좋은 방법 같아요"라는 결론이 났다.


그때 옆에 있던 프랑스 떼제에서 휴가를 보내고 왔다는 또 다른 직원은 떼제로 가는 구체적인 교통편과 신청방법까지 친절하게 알려주며 "전 지금 상황에서는 여기가 베스트인 것 같아요. 저는 일주일 있었는데 2주 차에는 침묵 피정도 할 수 있대요. 그것까지 꼭 해보세요! 아예 여기 가서 한 달 푹 쉬다가 한국으로 가세요!"라고 했다. 프랑스 떼제공동체 이야기는 가톨릭 신자인 나에게는 '떼제 노래'로 '들어는 본 곳'이었고 먼저 산티아고를 걸었던 선배 순례자들도 걷기 전 들러보라고 추천해준 곳이었다.


수녀원으로 이사를 마치고 떼제공동체에 대해 이것저것 검색해보다가 '어차피 갈 데도 없고 걷지도 못하는데 한번 가볼까?' 하는 마음으로 홈페이지에서 신청 양식을 작성했다. 확인 메일이 와야 갈 수 있다고 해서 하루 종일 수시로 메일을 확인했지만 별 보며 잠드는 그 순간까지 답장은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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