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이스라엘 나자렛의 아침, '말씀이 사람이 되신 곳'

이스라엘, 치유의 기억

이스라엘 순례의 첫날, 몽롱한 몸을 이끌고 숙소 식당에 순례단 모두가 모였다. 올리브 절임, 생선 절임, 피타(pita) 빵, 생김도 맛도 아직은 어색한 음식들과 여러 종류의 빵, 커피, 익숙한 아침이 겹쳐졌다. 피곤해서인지 맛보다는 신기함과 호기심을 채우는데 만족하며 식사를 마쳤다. 그래도 배를 채우고 나니 나자렛의 아침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자렛(Nazareth)'은 이스라엘 갈릴리 지역으로 히브리어 어원에는 '새순', '지키다. 수호하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분지형태로 외부와 교류가 어려운 지리적 특성을 지닌다는데 숙소에서 바라본 나자렛의 아침풍경은 아이보리색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것이 소박하고 정겨운 시골 읍내의 느낌이었다.

이스라엘 나자렛의 아침

나자렛은 예수님이 서른 살 이후 공적인 활동을 시작하기 전까지 어린 시절, 청소년기를 보낸 곳이자, 'Mary's well(마리아의 우물)' 우리가 묵었던 숙소 이름처럼 어머니 마리아와 요셉의 고향이다. 마리아가 물을 길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우물가에는 그리스 정교회 성당이, 이곳과 5분 거리에는 가톨릭의 '주님 탄생 예고 성당(Basilica of the Annunciation)'이 위치해있다. '주님 탄생 예고(성모영보/수태고지) 성당'은 성모 마리아의 집터 위에 지어졌다고한다.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예수님을 잉태할 것을 예고한 장소로 추정되는 곳에 각 성당이 세워졌다. 주님 탄생 예고 성당 옆에는 목수였던 요셉의 작업실이 있던 곳과 그 위에 '요셉 성당(성가정성당)(Church of St. Joseph)'도 자리하고 있다.


첫 번째 숙소와는 스치듯 이별하며 이스라엘에서의 첫 미사를 드리기 위해 주님 탄생 예고 성당을 향해 걸었다. 이어폰으로 가이드님의 친절하고 세심한 설명을 들으며 꼬불꼬불 골목길을 일렬로 줄지어서 발걸음을 맞추었다. 폭이 좁은 옛 길을 걸을 때는 '어린 예수님도 이 어디쯤을 걸으셨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골목을 누비며 친구들과 뛰어다니는 예수님의 모습이 그려졌다. 출발한 지 얼마 안 되어 '주님 탄생 예고 성당'의 둥근 탑이 거대한 모습으로 가까워졌다.


#주님 탄생 예고 성당

주님 탄생 예고 성당

고고학 박물관처럼 생긴 성당 정문 꼭대기의 성모 마리아상을 보려면 고개를 목이 아플 정도로 젖혀야 했다. 이렇게 저렇게 카메라를 돌려보아도 전체 모습을 담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한 정면에는 열두 사도의 이름과 상징들이 새겨져 있다. 내부는 더욱 압도적이었다. 중앙 제대 위쪽 천창을 통해 나자렛의 아침햇살이 성전 전체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높은 천장부터 성전 중앙의 뻥 뚫린 공간 아래 동굴까지 육안으로도 한눈에 담기 어려웠다. 아침이라 그런지, 넓은 공간감 때문인지 사람이 꽤 있었는데도 고요함이 느껴지는 듯했다.   

주님탄생예고성당 성전 내부

성지에서의 미사는 늘 시간이 빠듯했다. 미사를 담당하는 순례단 친구들이 다시 바빠졌다. 나머지 순례단원들도 모두 제대 바로 앞 공간에 옹기종기 자리를 잡고 앉았다. 우리 순례단의 두 신부님이 제의를 갈아입고 나오셨고 미사가 시작되었다. 기타 반주 소리가 넓은 공간을 가득 메웠다. 우리 모두의 목소리가 더해져 울림이 점점 더 커져가며 마음까지 가득 채워지기 시작했다. 음정, 박자, 각자의 목소리가 삐죽빼죽 튀어나오던 성가 소리는 점차 다듬어져 화음을 이루기 시작했다. 


"저는 주님의 종,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입당 성가로 부른 "아멘"이라는 성가와, 함께 나누는 복음 말씀들이 모두 이 곳에서 시작됐고 여기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기분이 묘했다.


"여섯째 달에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 1. 26-31)"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루카 1. 34-38)"


순례단이 미사를 드리는 곳 아래 동굴 제대에는 라틴어로 "VERBUM CARO HIC FACTUM EST" 즉, "The Word was made flesh here; 이곳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라고 쓰여있었다. 

이곳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주님 탄생 예고 성당 동굴 제대

신부님도 짚어주셨다. '주님 탄생 예고 성당(Basilica of the Annunciation)'의 Annunciation(예고)은 뉴스, 정보를 전달하는 아나운서(announcer)처럼 알리다, 전하다의 뜻을 지닌다는 것. 이는 단순히 천사가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한 것이라기보다, 천사의 기쁜 소식과 마리아의 응답으로 '주님의 사랑과 은총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하셨다. 주님의 사랑이 말로 전해지고 여기에 자신을 내어 맡길 때 그 사랑과 은총은 '이미 시작'된다는 것,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확증되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이상한 순례길로 들렀던 프랑스 떼제가 떠올랐다. 바로 이 '예수님의 탄생 예고'장면을 묵상하며 '두려움'과 '순종', 마리아의 응답에 대해 수녀님과 이야기를 나누던 작은 다락방과 그 시간들이. 어쩌면 그곳부터 이곳 나자렛까지 순례가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자꾸 들었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이해되지 않는 일들 속에서도 이미 그분의 이끄심과 사랑은 시작되어 있다는 걸까.


신부님은 당장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어쩌면 두렵고 불안한 상황 속에서도 '이미 시작된 주님의 사랑'에 나를 맡길 때, 그분의 엄청난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또 내가 원하는 지향을 통해서도 그분은 사랑을 주시지만, 내가 모든 것을 다 맡겼을 때 더 큰 사랑을 주시지 않을까 덧붙이셨다. 우리의 삶, 지금 힘들고 지치게 하는 각자의 고민들도 마리아처럼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해보자고 하셨다. 그리고 다 함께 복음을 다시 한번 소리 내어 읽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하느님의 이끄심과 나의 선택으로 이루어져 가는 나의 삶 속에서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내고 있는 걸까. 나에게 전해지는 그분의 뜻은 무엇일까. 난 제대로 알아듣고 있는 걸까? 분명 입사할 때는 주님이 이끌어주신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내 욕심으로 돈과 명예만을 좇았던 걸까. 그래서 이렇게 또 힘든 걸까. 이미 정답을 알려주셨는데 난 드러나는 더 큰 표징을 계속 청하고 있는 것일까.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주님 탄생 예고 성당 내부

방송이라는 꿈만을 좇아왔던 20대가 지나고, 딱 원하던 그 자리는 아니었지만 그 언저리 어딘가에 자리 잡게 되기까지, 항상 느꼈던 불안과 한계, 공허함이 있었다. 알 수 없는 이끄심에 서른 넘어 처음으로 성서를 읽기 시작했고 손에 꼭 쥐고 있던 '방송'도 용기 내어 놓아 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노예살이를 하던 이집트를 떠나온 이스라엘 민족이 맞닥드린 것은 약속의 땅이 아니라 척박한 광야였듯, 나의 새로운 길도 팍팍했다. 만나와 메추리가 하늘에서 떨어지듯 종종 소소한 행복과 감사의 순간들이 있었지만 이집트로 돌아가자며 불평불만하던 이스라엘인들처럼 어둠에 휩싸일 때가 많았다. 그러는 동안 내 몸은 구조요청을 해왔고 나는 다시 한번 용기를 냈다. 대책도 없고 비빌 언덕도 없고 아무것도 없으면서 회사를 그만두고 계획한 산티아고. 깁스하고 출발했던 그 이상하고 아름다운 순례길은 인생의 축소판이었고 나는 죽음에서 다시 삶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말을 몸소 실천하며 또다시 퇴사를 고민하는 이 시간, 두려움과 혼란이 나를 삼켰다. "말씀하신 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대답 대신, 난 여전히 온몸에 힘을 빡 주고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한다는 강박으로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내 마음 어디에도 그분이 들어올 여유가 없었다.

 

어지럽고 단단한 내 마음에 순례단 모두가 힘껏 소리 내어 부르는 성가의 가사들이 들어와 박히기 시작했다. "주님과 함께하는 이 고요한 시간... 모든 것 아시는 주님께 감출 것 없네", "이해할 수 없을 때라도 감사하며 날마다 순종하며 주 따르오리다" 


성체성사 때는 또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는 눈물 바이러스가 순식간에 순례단 전체를 감쌌다. "지금 무얼 생각하고 있느냐. 지친 너의 맘을 내가 안다. 나는 너의 슬픔 하나까지도 기억하고 있단다. 내게 기대라." 눈물이 흘렀다. 성당의 우렁찬 종소리를 뚫고 우리의 성가 소리가 계속 퍼져나갔다. 미사가 끝났다. 여기저기 훌쩍이는 소리들만 잔향처럼 남았다. 

성당 앞, 전 세계의 성모 마리아

고개를 들어 뒤를 보니 어느새 성전이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다른 순례팀에게 재빨리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성전 안팎을 돌아볼 수 있는 짧은 시간이 허락되고 내부 동굴 제대와 성전 주변도 찬찬히 둘러보았다. 성모님 집터라 그런지 성전 밖 회랑에는 전 세계의 언어와 모습들로 표현된 성모님 성화가 걸려 있었다. 한복을 곱게 입은 성모님과 아기 예수님의 모습도 반갑게 눈에 띄었다. 

예수님 시대의 나자렛을 느낄 수 있는 곳

'주님 탄생 예고 성당' 옆 '성요셉 성당'에 들렀다. 이 두 성당 밑부분에는 예수님 시절의 나자렛의 모습이 연상되는 옛 지형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깔끔하게 지어진 새것 느낌의 건물들 보다도 이렇게 군데군데 보이는 오래된 암석들이 더 좋았다. 예수님과 마리아, 요셉 가족이 여기 어딘가를 걷고 쉬고 머물렀을까. 목수 요셉의 작업실이 있었다는 성가정성당은 소박하고 아름다워서 그 이름과 꼭 어울리는 느낌이었다. 


#성요셉 성당[성가정성당]

성전에서는 미사가 진행 중이어서 우리는 조용히 지하로 내려갔다. 유적 발굴 현장처럼 아주 오래 전의 지형들이 그대로 드러나있었다. 옛 흔적이 느껴지는 곳이면 사람들의 소원들이 담겨있을 무수한 쪽지들이 쌓여 있었다. 곳곳에 요셉 성인과 관련된 스테인드글라스 성화들이 있었다. 한쪽 제대에는 라틴어로 "HIC ERAT SUBDITUS ILLIS" 쓰여있었다. 영어로 번역하면 "here he became obedient to them"인데 "예수님은 이곳에서 부모님께 순종하며 살아갔다" 정도가 될까. 루카복음의 한 구절처럼 말이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루카 2.51)"


이곳 나자렛 어딘가에서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루카 2.40)" 그리고,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루카 2.52)"


예수님도 요셉 성인에게 직접 목수일을 배웠을까. 평범한 사람들보다 배우는 속도가 빨랐을까. 자라면서 점차 인성보다 신성을 선명하게 느꼈을까. 그런 예수님을 보면서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와의 만남을 점점 선명하게 이해하게 됐을까. 어쩌면 우리 인생 일대의 선택이라는 것들도 완벽하고 분명하게 모든 것을 파악한 뒤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직관적인 내 선택을 삶으로 살아내는 것이 아닐까.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48-51)"


깁스하고 떠난 40일간의 산티아고 순례 기록 '이상한 순례길' 이후 지난가을에 떠났던 이스라엘 순례기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왔던 그 장소에서의 엄청난 시간들을 어쭙잖은 단어의 조합들로 정리하는데 매 순간 한계를 느낍니다. 제가 이런 것들을 정리할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도 잘 모르겠고요. 조심스러운 부분들이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어 기도하는 마음으로 적어봅니다. 종교적인, 역사적인 정보들보다 '지금, 여기' 삶의 고민들을 정면으로 바라보려 애썼던 시간들을 함께 나누고 싶어요. '이스라엘 랜선 여행, 랜선 순례' 계속 같이 걸어 주실 거죠?! 좋아요와 구독은 힘이 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스라엘? 예루살렘? 나자렛!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