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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볼드저널 Dec 13. 2016

다름을 선택할 용기

망원동 '카페부부' 권오현 박선영의 이야기 

권오현, 박선영 부부는 반지 하나만 나눠 끼고 부부가 됐다. 지어진 지 50여 년 된 작은 벽돌집을 저렴하게 얻어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 결혼식과 신혼집에 들어갈 돈을 아껴 카페를 차렸다. 평범하지 않은 출발에는 그만한 용기가 필요했다.


Editor 최혜진 Photo 이주연 Film 최소명


디자이너 권오현이 늦가을 오후 햇살이 비스듬히 비치는 카페 창가에앉아 “부잣집 아들이 재미 삼아 하는 카페라는 소문도 돌았어요”라며 허허 웃을 때 나는 뜨끔했다. 마당 딸린 커다란 단독주택을 카페로 개조해 운영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재력가일 거라고 넘겨짚은 편견을 들킨 것 같아서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다. 그가 “실은 결혼식과 신혼집에 들어갈 돈으로 카페를 차린 거예요”라고 덧붙였을 때는 깜짝 놀라 그를 다시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권오현·박선영 부부는 반지 하나만 나눠 끼고 부부가 됐다. 지은 지 50여 년 된 작은 벽돌집을 저렴하게 얻어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그렇게 아낀 돈으로 망원동에서 ‘카페 부부’를 차렸다. 평범하지 않은 출발에는 그만한 용기가 필요했다. 일가친지들이 아무리 요즘 사람이라고 해도 이건 아니라며 둘의 선택을 흔들었다. 휩쓸리지 않기 위해선 단단한 중심이 필요했다. 결혼 후에도 마찬가지였다.창업, 출산, 육아 등 새로운 변화를 하나씩 겪으며 좌충우돌할 때, 떨리고 두려울 때, 방향성을 잃을까 염려될 때 부부는 처음에 품은 삶의 기준을 꺼내본다. 같은 곳을 바라보고 같은 길을 걸어가는, 같은 행복의 정의를 가진 어떤 가족의 초상.


https://vimeo.com/192102846


많은 직장인이 ‘아, 다 때려치우고 카페 차리고 싶다’라는 로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와 아내 모두 디자이너로 근무하다 카페를 차렸지만, 단순히 로망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아내와 연애하던 시절 둘의 미래를 그려보는 대화를 많이 했어요. 흔히 가정이 생기고, 아이가 생기면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무작정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 함몰되는데요. 저는 평생 돈을 벌 수 있는 구조로 삶을 정비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일종의 평생 직업을 찾는 거죠. 디자이너라는 업은 생명력이 그리 길지 않다고 판단했어요. 저나 아내나 회사에 다니며 남에게 의뢰받는 일을 하는 것에 지쳐 있었거든요. 그런 지친 마음은 다른 회사에 간다고 채워지지 않을 것 같았어요. 우리의 생각과 가치관이 담긴 물건이나 서비스를 직접 생산해야 둘의 마음이 채워질 것 같았습니다. 결국, 자가 생산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어요. 우리 제품을 만들고, 우리만의 프로젝트를 가져보자 결심하고 카페를 내기로 한 것입니다.


왜 하필 카페였나요 
디자이너로 한창 활동하던 30대 초반에 저는 트렌드에 촉을 바짝 세우고 살았습니다. 유명한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며 유행을 따랐고, 화려한 동네인 청담동, 신사동 문화를 흡수했어요. 그러다 6년 차 무렵에 정신적으로 굉장히 힘든 시기가 찾아왔어요. 조금 더 공부해서 내실을 다지기로 결심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30대 중반의 늦은 나이에 유학생이 되었죠. 1년 6개월 정도 일본에서 공부하면서 디자인을 바라보는 제 시각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전까지 제가 해왔던 작업이 너무나 얄팍했고, 스토리가 결여되어 있었다는 걸 깨달은 거죠. 탄탄한 이야기에서 출발하는 디자인, 재활용, 리폼, 아날로그적인 삶에 눈을 뜨게 되었어요. 일본에서는 유학생 신분이었기 때문에 카페를 전전하며 일을 했고요. 그렇게 차차 다채로운 카페 문화와 커피 맛의 세계에 익숙해지다 보니 카페가 디자이너가 자기 업을 궁리하기 좋은 출발점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결혼식과 신혼집에 들어갈 돈을 카페에 투자하겠다고 했을 때 양가 어르신들 반응이 어땠을지 그려집니다
저는 고향이 강원도 동해이고, 아내는 부산 사람이에요. 지방 어르신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죠. 먼저 저희가 그리고 있는 미래에 대해 사업 설명회를 하듯 발표를 했습니다. 결혼식을 아예 안 한다는 게 아니고 먼저 카페를 차린 다음 그 공간에서 결혼식을 치르겠노라고 설명 드리며 설득했죠.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가 로망을 실현하는 게 아니고, 실제로 저희 두 사람의 미래를 준비하는 데 유용한 일을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어요. 결혼식이라는 하루의 행사가 우리의 미래를 마련해주지는 않으니까요.


주변의 반응에도 흔들리지 않고 둘의 선택을 관철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나요
조금 이기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저희의 삶을 저희 두 사람이 가장 행복할 방법으로 꾸려가고 싶었습니다. 그러기 위해 서로가 생각하는 행복의 정의, 삶의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고 살고 싶은지 등에 대해 충분히 토론했고요. 저희는 앞으로 지역 농가, 지역 원주민들과 상생하는 소상공인으로 커가고 싶다는 꿈이 있어요. 카페는 그 큰 프로젝트의 시작이자 준비 운동 같은 것이고요. 결혼식 대신 카페 공간을 만들 때 저희끼리는 이 일을 ‘프로젝트 부부’라고 불렀어요. 둘이 그려놓은 큰 프로젝트의 밑그림이 마음속에 기둥처럼 자리 잡고 있어요. 언제 최종 완성될지 모르겠지만, 저희끼리는 밑그림대로 하나씩 실행하는 중이에요.



첫째 혁주가 태어나던 순간에는 어떤 기분을 느끼셨는지 궁금합니다
사실 그때가 카페 오픈 직전이라 신경이 가장 예민해져 있을 시기였어요. 카페 오픈은 10월, 아이 출산은 11월에 예정되어 있었거든요. 10월 어느 날, 아내가 만삭의 몸이었지만 할 일이 워낙 많아서 재료를 사러 방산 시장에 나갔는데 울면서 전화가 온 거예요. 시장에서 양수가 터졌다고요. 피를 흘리면서 가게로 돌아온 아내를 데리고 급하게 산부인과로 갔죠. 첫 아이를 출산하는 것만으로 이미 긴장되고 떨리는데 그 아이가 9개월 만에 세상에 나오니 온갖 걱정이 들었고, 탄생 순간까지도 이렇게 극적이어서 저 역시 무서웠던 기억이 납니다. 아내와 함께 분만실에 들어가서 라마즈 호흡법을 같이 해주다가 제가 체내 산소 불균형으로 쓰러져버렸어요. (웃음) 정신을 차려보니 탯줄이 준비되어 있더라고요.


아버지라는 새로운 역할을 받아들이는 게 어렵진 않았나요
제 손으로 아이의 탯줄을 자르던 순간은 지금 다시 떠올려봐도 소름이 돋습니다. 정말 짜릿했어요. 이제 정말 시작이다, 새로운 삶이 펼쳐질 거란 생각을 했습니다. 그 짜릿함 뒤에 곧바로 책임감이 다가오더군요. 아이가 세상에 나온 뒤 초반에는 아주 혼란스러웠어요. ‘프로젝트 부부’에 아이라는 변수가 생긴 거니까요. 물론 예상하고 계산했던 변수지만 막상 육아를 해보니 모든 게 상상과 다르더라고요. 이제 와 돌이켜보니 생명을 계산한다는 발상 자체가 어리석었던 것 같아요. (웃음) 출산 후 아내가 아이 육아에 매여있어야 하니 ‘프로젝트 부부’ 실현을 위한 모든 일을 제가 할 수밖에 없었는데, 가끔은 그런 상황이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했어요. 하지만 아이 덕분에 더 열심히 뛰게 되었던 것 같아요. 이제는 저와 아내 둘만의 프로젝트가 아니구나, 부부에서 가족으로 프로젝트 규모가 커지는구나 생각하면서요.



조금 이기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저희의 삶을 저희가 가장 행복할 방법으로 꾸려가고 싶었습니다. 

아이의 탄생 후 무겁게 다가온 책임감이란 감정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였는지 궁금합니다

책임감 하면 보통 무섭잖아요. 그 무서움을 이겨내려고 노력했어요. 책임감이라는 감정을 이전에 제가 설정해놓은 삶의 방향성과 연결지으면서 어떻게든 꾸려가려고 했죠. 그렇게 하루하루 꾸려가면서 서서히 아빠가 되는 것 같아요. 둘째도 곧 출산을 앞두고 있는데 제 머릿속에 아버지로서의 정체성이 정확히 자리 잡고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항상 무엇을 선택하든 가족을 먼저 생각하게 돼요. 작은 물건 하나를 사더라도 제 것보다는 혁주 것, 혁주 엄마 것을 먼저 생각하는 모습을 볼 때 달라진 걸 느껴요. 혁주가 요즘 “내 꺼야”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는 시기인데요. 저도 제 것밖에 모르던 꼬마 시절이 있었거든요. 어느새 가족 것을 먼저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을 볼 때, ‘내가 아빠가 됐구나’ 하고 느껴요.


재활용, 리폼, 지속할 수 있는 아날로그적인 삶에 대한 관심을 육아에서는 어떻게 녹여내고 있는지요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신상품보다는 이야기가 있는 오래된 물건들을 좋아했어요. 길가에 버려진 테이블이나 의자를 주워 리폼하는데, 지금은 모든 과정을 아이와 함께해요. 고치고 닦으면서 대화할 수 있거든요. 단순히 “어, 아빠가 샀어.” 하고 끝나는 게 아니고 어느 장소에서 어떻게 발견해서 어떤 과정을 통해 집에 가져왔는지 사연을 자연스럽게 전해줄 수 있어요. 또 교육도 자연스럽게 됩니다. 물건을 쉽게 사고 버리는 게 아니라 고쳐 쓰고 필요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다는 걸 아이도 배워요. 저는 아버지가 자녀에게 무언가 남겨주는 것, 재산이나 물질을 말하는 게 아니라 정신적 유산을 전해주는 것에 관심이 많았어요. 저희 할아버지가 대목장이시고, 삼촌들은 두 분이 다 목수셨어요. 저도 초등학생 때 톱질을 배웠는데 당시 배운 톱질을 여태 써먹고 있어요. 버려진 물건을 주워오는 게 창피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죠. 하지만 처음의 주저함만 넘기면 손을 움직여서 닦고 조이고 고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답니다. 아이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그렇게 리폼할 때, 저는 유년기를 회복하는 느낌까지 느끼고 있어요.



망원동은 지속할 수 있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참 잘 어울리는 동네 같아요
이사 오기 전에 간단하게 조사를 했는데, 망원동이 1인 가구 밀도와 개인 창작 작업실 밀도가 전국에서 가장 높은 동네라고 하더라고요. 다양한 문화 콘텐츠를 가진 이웃들과 마을이라는 유대감을 공유하며 지내고 있어요. 아이 키우기에도 참 좋은 동네고요. 신선한 식자재를 살 수 있는 망원 시장이 가까운 것, 지하철역이 가까운 것, 산책할 수 있는 한강이 있는 것 등 장점이 많지만, 최고의 장점은 열린 마음으로 대화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동네라는 점입니다. 재빠르게 물건을 장바구니에 담아 매매만 하고 돌아오는 대형 마트와 달리 망원동의 시장이나 소상공인 상점에서는 이야기까지 얻어올 수 있어요. 예를 들어 카페 부부에서 파는 당근 주스 재료를 사기 위해 망원 시장 채소 가게에 가면 상인분께 원산지가 대관령인지 기장인지 제주도인지 물어볼 수 있고, 각 고장의 당근 맛이 어떻게 미묘하게 다른지 배울 수 있죠. 당근이라는 물건 하나만 얻는 게 아니라 당근에 대한 이야기까지 얻는 거예요. 혁주도 마찬가지입니다. 혁주가 좋아하는 흑임자 잼을 사러 갈 때, 혁주는 단순히 ‘산다’는 행위를 하러 나가는 게 아니라 잼 파는 아저씨를 ‘만나러’ 간다고 생각해요. 이런 유대감과 사람 사는 멋과 정서를 쌓아가는 것이 그 어떤 교육보다 아이의 내면을 풍요롭게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결혼식 대신 카페를 차리고 50년 된 주택을 고쳐서 살면서 아이와 함께 마을을 즐기는 현재까지, 부부의 삶이 하나의 궤적을 그리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결혼 후부터 지금까지 아주 자연스럽게 굴러온 기분이 들어요.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저와 아내의 마음속에 행복에 대한 나름의 정의가 내려져 있었고, 다행히 방향성과 가치관 공유가 잘 되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생애주기가 바뀌어 갈 때마다 고민스럽거나 혼란스러운 순간은 많았지만, 그것들이 나침반이 되어 대처하는 원칙을 세울 수 있었어요. 그러한 기준이 제 삶의 일관성과 결을 만들어주었고, 자연스럽게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이웃들과 만나 친구가 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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