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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볼드저널 Mar 21. 2018

1987~2018, 대중문화 속 아빠의 초상

words 박정선 illust 주다운 


아버지가 한동안 꽤 심하게 아팠다 한다. 아들 J는 그 얘기를 아내가 어머니와 통화한 후에야 안다. 아버지는 자신이 아픈 걸 얘기하지 말라고 했단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그 둘이 없다면 아마도 아버지가 병원에 한참을 누워 있은 후에야 J는 알았을 것이다. 참으로 아버지와 아들다운 일이다. 

돌이켜보면 그들은 한 번도 서로에게 살가웠던 적이 없다. 아니 그들은 ‘살가움’ 같은 것은 부자지간에 있어서는 안 되는 무척 어색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일흔과 마흔의 경상도 남정네들이었다. 

일흔을 앞둔 아버지는 꽤나 가부장의 화신 같은 존재였다. 그 가부장은 〈전원일기〉의 최불암 같은 유연한 가부장도, 〈사랑이 뭐길래〉 의 이순재 같은 엄격하지만 올곧기만 한 가부장도 아니었다. 오히려 〈국제시장〉의 황정민이 보여주는 가부장이었다. 

자신은 모든 것을 희생했지만, 그 희생 속에서 어느새 가족과는 멀어져버린 괴팍한 가부장, 해서 다시 서로에게 살가워지기엔 조금 늦어버린 가부장.



1987년의 아버지들 | 경제 부양자 


그 시절 아버지들을 키운 건 팔 할이 ‘술’이었다. 시대적 아픔 같은 게 음주의 배경은 아니었다. 그냥 술이 좋았을 뿐이다. 다들 그랬다. 시골에서는 그래도 살 만했는데, 도시로 와서는 손대는 일마다 번번이 되지를 않았다. 그때 그 골목길은 해 질 녘이면 그들만의 ‘슈스케’였다. 골목길 초입에서부터 이미 거나한 노랫소리가 들려오면 아이들은 부러 잠든 척했다. 그래도 아랑곳없이 들어와서는 치킨을 저 멀리에 던져놓고, 술과 담배 내음이 섞인 까칠한 수염으로 볼을 부벼대면 아이들은 그제야 못 이기는 척 일어나 앉아 치킨을 물어뜯었다. 그때의 치킨은 말로는 건네지 못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육화된 그 무엇이었다. 


그 시절의 아버지들은 그렇게 어딘가 〈한 지붕 세 가족〉의 순돌이 아빠 임현식, 〈응답하라 1988〉의 성동일 같았다. 단칸방 셋집살이가 아닌 2층 양옥집의 주인이어도 그들은 어딘가 아버지로서 허술했다. 하나, 가진 게 없음에도 한없이 강인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어려운 시절을 지나오며 자식과 가족을 건사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 〈보통 사람〉의 손현주처럼 아버지에게 가족은 이념이나 사상보다 앞서는 것이었다. 조국 민주화 따위는 장애가 있는 아들의 다리 수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않았을까.  


〈국제시장〉의 황정민처럼 그들은 모두 ‘아버지가 없는 아버지’ 세대였다. 스스로 아버지가 되어야 했기에 그들은 아버지가 되는 것이 서툴렀다. 그들은 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야 했고, 일찍 살아남아야 했고, 하여 아이들에게 아버지가 되어주는 것이 ‘돈을 벌어다 주는 것’인지 알았다. 자신들에게는 그 ‘돈’을 제대로 벌어다 주는 아버지가 없었기에 더욱. 


 

1997년의 아버지들 | IMF의 기억 


그해 J는 대학에 들어가며 서울로 향했다. 아버지는 호기롭게 말했다. “마, 씰데없이 알바 같은 거 하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해서 장학금이나 받아라. 어이?” 하지만 그 호기는 그해 겨울을 넘기지 못했다. IMF라는 놈이 그렇게 만들었다. 입대 후 복학을 앞둔 J에게 아버지는 말했다. “다른 집 애들은 과외하고 알바해서 잘만 등록금도 내고 용돈도 쓴다더만….” 


“느그 아부지 뭐 하시노?”라는 질문에 아이들의 말문이 막혀가던 시절이었다. “건달입니더”라고 말할 수 있으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백수입니더”라고는 말할 수 없으니. ‘건달’은 차라리 직업처럼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1996년에 나온 소설 《아버지》(김정현 저)는 그제야 자신들을 돌아보기 시작한 아버지들의 회고록 혹은 그들이 쌓아온 신화 같은 것이었다. 

자신은 최선을 다했다 생각했으나, 그 최선 속에서 가족에게 오해받고, 가족으로부터 소외받은 아버지들이 이제야 가족을 돌아보려 할 때 IMF는 그렇게 그들을 다시 원점으로 돌려놓았다.  


아버지는 서울에 올라간 J에게 두어 번 편지를 보냈다. J는 답장을 하지 않았다. “인마, 답장을 해야 할 꺼 아이가, 답장을.” 아버지는 그렇게 두어 번 전화로 잔소리를 하더니, 그 뒤로 편지를 끊었다. 아버지와 아들이 살가워지는 건, 남북정상회담만큼이나 요원한 일이었다. 


 

2000년의 아버지들 | 딸바보 


지난한 시절을 지나 아버지들은 이제 가족과의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노력한다. 이제 그들은 가족 내에서 최고 서열이 아니다. 기존에는 아들과 아버지보다 더 서먹했던, 딸과 아버지의 관계는 ‘딸바보’들의 시대가 되었다. 그들은 가족에게서 한발 떨어져 있는 존재가 아니라, 가족 구성원들의 감정까지 신경 쓰고 조율하는 새로운 아버지가 되었다.  


〈또!오해영〉에서 아버지를 맡은 이한위가 그 예다. 실행력이 강한 아내의 등 뒤에서 가만히 딸을 염려하고 걱정하는 아빠. 그리고 딸 때문에 속상해하는 아내를 토닥여주는 남편. 권위 같은 건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가정 내의 감정 노동에도 뛰어드는 ‘아빠’라는 새로운 방식의 아빠. 


 

2012년의 아버지들 | 양극화 


IMF의 잔상이 흐려지고 세기말의 어수선함도 사라진 자리에는 신자유주의가 들어섰다. 아버지들의 삶은 어느새 양극화되었다. 고도성장의 끝자락에서 가장 성공한 아버지는 아마도 〈추적자〉와 〈황금의 제국〉의 박근형일 것이다. 내 식구는 누구나 챙기고, 내 식구에게 피해가 되는 이는 누구라도 내치는 따뜻하면서도 가혹한 ‘유사-대가족’의 족장.  


금수저를 넘어 다이아몬드 수저를 갖춘 이 아버지는 도덕성의 여부를 떠나 ‘그냥 내 아버지였으면 참 좋을 텐데…’라는 마음을 품게 하는 아버지였다. 21세기에 가부장의 힘은 돈이었고, 돈이 없는 아버지는 가부장의 모습을 내려놓아야 했다. 

딸을 잃은 흙수저 형사 아빠 손현주는 딸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걸어야 했고, 자신의 힘없는 아버지의 죽음을 맞이한 고수는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걸어야 했다. 양극화된 세상 속에서 돈 없는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둔 자식들의 삶은 그렇게 더 고단해져 있었다. 


 

2018년 | 아버지를 포기하는 세대 


아버지는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로 태어난 줄 알았는데… 마흔이 되어보니 그렇지 않다는 걸 J는 뒤늦게 깨달았다. 마흔이 다 되도록 아버지가 되지 못한 J는 어느새 자신도 본의 아니게 ‘아버지 되기를 포기한 세대’가 되어가는 게 아닌가 싶었다.  


〈쌈, 마이웨이〉의 안재홍은 말했다. “설희야… 너 데려다가 내가 원룸에서 신혼집 차려? 설희야, 나는 너한테 A급, 특급은 못 해도 그냥 중간만큼은 해주고 싶었어. 내가 작은 전세 하나는 구해놓고 시작하고 싶었어. 근데… 내가 6년을 뺑이쳐도… 그 중간이 힘들더라.” 2017년의 아버지들은 연인의 이름 대신 아기의 이름을 넣어 말한다. 


A급, 특급은 못 해도 그 중간만큼은 해주고 싶어.
근데… 그 중간이 힘들더라. 

언젠가는 ‘중간’이 될 수 있으리라 믿으며 달려온 아버지들, 하나 그 아버지들의 자식들은 이제 자신들이 아버지에게 받을 수 있었던 그 ‘중간’조차 못 해줄까 두려웠다. 해서 그들은 이제 ‘아버지’가 되기를 주저한다. 







우리에겐 이런 아버지가 있었다 

TV 드라마와 영화 속 역대 아버지 캐릭터가 보여주는 시대의 변화. 


<전원일기>  최불암  

1980년부터 2002년까지 22년을 이어온 농촌 드라마 〈전원일기〉. 극 중 최불암은 대가족을 이끌며 마을의 대소사를 처리하는 전통적 권위의 소유자였다. 도시에서라면 서로 남남이라고 할 관계들조차 농촌에서는 이웃의 문제였고, 아버지는 한 가정의 아버지가 아니라 한 마을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그는 고향을 등지고 도시로 향한 많은 이에게, 자신이 고향에 두고 온 아버지를 떠올리게 했다.  


<한 지붕 세 가족> 임현식  

1986~1994년. 도시의 골목 주택가를 배경으로 집주인 가족과 그집에 세 들어 사는 가족,그리고 그 골목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낸 서민 드라마. ‘순돌이 아빠’ 임현식은 도시에 새로이 발붙이기 위해 노력하는 소시민 아버지의 모습을 잘 보여줬다. 집주인과 형 동생처럼 지내지만, 역시나 세입자로서 느끼는 설움이나 정붙일 곳 없는 서울에서 가족을 꾸리며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어쩌면 그 시대 아버지들의 전형이었다. 고향을 떠난 〈전원일기〉의 아들들은 그렇게 순돌이 아빠가 되었다.  

 

<보통 사람> 손현주 

2017년 개봉한 영화. 1987년을 배경으로 소시민이던 강력계 형사 손현주가 국가 권력의 음모에 엮이면서 펼쳐지는 비극을 다룬다. 다리에 장애가 있는 아들을 위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옳지 않은 일을 하는 아버지. 권력의 부스러기는 달았지만 뒤늦은 후회 끝에 그 일을 바로잡으려다 오히려 국가에 의해 자신과 가족을 모두 잃는 아버지의 이야기. 엄혹한 시대에서 스스로의 신념과 가족을 함께 지키려 애써야 했던 아버지들의 또 다른 자화상이었다.  

  

<사랑이 뭐길래> 이순재

1991년 드라마. 전형적인 가부장적 가치관을 지닌 ‘대발이네 집’과 현대적이고 개방적인 문화를 지닌 ‘지은이네 집’이 서로 사돈 관계를 맺으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다뤘다. ‘대발이 아버지’ 이순재는 가부장적 가치관의 끝판왕 같은 존재이지만, 새로 들어온 며느리(하희라)와 사돈댁의 문화를 때로는 받아들이고, 새로운 가치관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후의 캐릭터는 3대가 모여 사는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으로 이어진다.  


<아버지> 박근형

1997년 작. 소설가 김정현의 동명 원작 소설 《아버지》를 영화화한 작품. 지방대 출신에 뒤늦은 고시 합격으로 이제야 사회적 안정을 찾은 50대의 중년 남성. 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것은 췌장암 말기의 시한부 인생이었다. 영화 속 한정수를 연기한 박근형의 모습은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 생각했지만, 어느새 가족 사이에서 ‘섬’으로 남은 중년 남성들의 슬픈 자화상이었다. 


<응답하라> 시리즈 성동일 

1988~1997년을 관통하는 〈응답하라〉시리즈의 아빠 성동일은 ‘가부장’의 틀에서 벗어났으나 여전히 가족 안에서 중심추가 되어주는 아버지다. 아내에게 권위를 위임할 줄 알고 자녀와는 친구처럼 티격태격하는 아버지. 하지만 중요한 순간에는 여지없이 아버지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내며 가족을 이끄는 아버지는 IMF 이후 다시 사회가 안정되며 생겨난 새로운 아버지상이었다. 


<추적자>, <황금의 제국> 박근형 

각각 2012년, 2013년에 방영한 드라마. 대기업의 총수, 회장님. 두 작품에서 연이어 회장님 모습을 연기한 박근형은 신자유주의 이후의 새로운 가부장이다. 돈이 곧 권력이고, 이를 통해 자신의 가부장성을 유지하는 아버지. 〈전원일기〉의 최불암이 농촌이라는 지역을 배경으로 적절한 규범과 권위로 질서를 도모한 전통적인 족장이었다면, 박근형의 회장님은 이익 관계를 바탕으로 한 도시의 새로운 족장이었다. 


<국제시장> 황정민 

2014년 개봉작. 흥남부두 철수부터 시작해 베트남전, 파독 광부 등 한국의 근현대사를 관통하며 살아온 한 아버지의 모습. 2018년의 그들은 보수 꼴통의 ‘가스통 할배’로 불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삶의 궤적을 살펴보면 그것은 ‘아버지 없는 세대’가 자신과 가족의 생존을 위해 할 수밖에 없었던 선택의 누적이었음을 마주하게 된다. 옳다고는 할 수 없는 선택들. 하지만 단지 조금 뒤늦게 태어났다는 이유로 조금은 더 풍요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아들들이 마냥 쉽게 재단하고 비난해서는 안 될 그 선택들의 퇴적층으로서의 아버지.  



가부장제에 반대하는 아빠, 일과 가정의 균형을 지키고자 하는 아빠, 남의 삶을 기웃대지 않는 아빠, 멋스러움을 아는 '모던 파더'들의 말과 얼굴을 모으는 미디어 <볼드저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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