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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볼드저널 Mar 28. 2018

저녁 있는 삶을 위한 결단 : 모던파더 윤성현


editor 성정아 photo 이주연



윤성현은 어려서부터 ‘사는 건 외로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외로움을 견디기 위해 라디오를 틀어놓고 음악과 사연을 듣곤 했다. 참 운이 좋게도 음악 프로 라디오 PD가 되었지만, 비관론자에 가까운 말투로 애청자의 사연에 독설을 늘어놓았으며, 신청곡을 무시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심야식당〉의 윤이모를 사랑했다. 그는 세상의 어둡고 아픈 부분을 들여다보는 예민한 눈을 지니고 있었고, 조금 다른 방식의 위로를 전했다. 시간이 흐르고 서른 초반의 패기 넘치던 청년 PD도 이제 두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 그런 그에게 까칠한 윤이모의 모습은 희석된 듯 보였다. 그 변화의 원동력이 궁금했다. 

많은 3040 아버지들이 알고 있지만 실천하지 못하는 무엇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기를 기대했다. 


가족의 이야기가 여기저기 촘촘하게 쌓여 있는 부암동 집에서 아버지 윤성현을 만났다. 그는 인기 프로그램을 내려놓고 가족 중심의 삶으로 전환한 것은 어떤 깨달음에 의한 결단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저 주간 단위의 라디오국 일정보다 더 빠른 속도로 커나가는 아이들의 성장을 그냥 흘려보낼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 끝에 내 아버지의 시간을 만났다고 고백한다. 외동아들을 늘 곁에 두기 위해 그렇게 벗어나고 싶었던 이발사의 삶을 사셔야만 했던 아버지 말이다.



https://vimeo.com/253555640

 


Q. ‘신청곡 안 틀어드립니다’라는 부제가 붙은 《라디오 지옥》의 저자, 〈심야식당〉의 세상 까칠한 PD와 아버지라는 단어가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해요. 요즘은 까칠한 이미지의 방송인이 많아졌지만, 당시 윤성현 캐릭터는 아주 새로웠어요. 


벌써 10년 전이죠. 라디오 PD가 되어 3년쯤 되었을 때인데, 아주 의욕적이었어요. 심야 라디오 두 프로그램을 매일 진행하다 보니 하루 12시간 이상을 꼬박 일했어요. 제가 가장 예민한 시절에 들었던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 같은, 누군가의 기억에 평생 잊히지 않는 나만의 라디오 프로그램. 그런 걸 하나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유희열의 라디오 천국〉 같은 건 유희열이라는 완성된 사람의 조력자나 서포터로서 역할을 하지만, PD가 전면에 DJ로 나오는 〈심야식당〉은 기존에 없던 방식이었어요. 재미있고 새로운 걸 해보고 싶어서 DJ 윌슨이라는 가공의 캐릭터를 만들었지요. 까칠하고, 원만하지 못하고, 막말하고, 허세스럽고, 안하무인 같은 캐릭터를 등장시킨 거죠. 특히 심야 시간대 라디오 프로그램의 형식으로는 익숙하지 않았을 거예요. 


청취자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따뜻하게 어루만져주고, 친절하고 다정다감한 것이 고전적인 라디오의 미덕이었는데, 표현의 수위든 방식이든 모든 게 아주 달랐으니까요. 그 시간에 깨어 있어야만 하는 팍팍한 현실을 살아가는 애청자를 향한 애정이 있었어요. 그런 마음을 읽어주셔서 〈심야식당〉의 ‘윤이모’를 특히 좋아해 주신 것 같아요. 열정을 갖고 열심히 하다 보니 일을 너무 많이 했어요. 힘들기도 했고요. 



Q. 라디오를 사랑하게 된 이유로 ‘외로움’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누구나 외롭잖아요. 인간으로서 근원적인 고독 같은 거요. 그런데 저는 결혼하면서 없어졌어요. 아이까지 말할 필요도 없어요. 저한테 결혼은 외로움이 없어지는 계기였어요. 아내는 햇살 같은 사람이에요. 흔히 말하는 남자의 동굴 같은 거, 그럴 여지조차 주지 않는 따스한 사람이죠. 결혼 이후로는 외로움을 느낄 새가 없더라고요. 

혼자 있는 시간에도 내 인생은 혼자가 아니라는 대전제가 생긴 거죠. 숨을 곳도 없고, 숨고 싶지도 않고. 


그러한 시간이 한 해 한 해 쌓이면서 요즘은 새로운 곳에 가도 재미가 없어요. 힙 플레이스에 가도, 몬트리올 재즈 페스티벌 같은 최고의 음악 축제 같은 곳에 가도 별로 재미가 없어요. ‘아내와 아이들이 같이 있으면 좋을 텐데’라는 생각이 먼저 들어요. 





Q. 아버지로서 삶은 어떻게 다른가요? 


저는 개인의 삶이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었어요. 지금도 그런 면이 있지만, 비관론자에 가깝기도 하고요. 세상의 슬프고 아픈 부분, 부조리한 면과 어두운 부분을 예민하게 캐치하는 편이죠. 아이들이 태어난다고 세상이 갑자기 파스텔 톤으로 바뀌고 그런 건 아니에요. (웃음) 하지만 아내와 함께하는 시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재미있었고, 아이와 함께하는 삶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다고 단언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사람이 하나의 모습으로만 머무를 수는 없잖아요. 무엇을 듣고 읽고 먹고 느끼느냐에 따라 인생은 변화할 수밖에 없는데, 아이는 그런 체험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삶을 통째로 전환시키는 커다란 사건이죠. 부모가 된다는 것은 내게 없던 자아가 획득되는 것, 새롭게 드러나는 일 같아요. 


여전히 세상은 슬프고 부조리하지만, 이 아이들은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에서 살게 해주고 싶다는 부모로서 열망이 있어요. 부모가 되는 제 개인의 변화도 있었지만, 시대의 변화도 있었잖아요. 누구도 지난 10년 동안 삶이 더 나아졌다고 단언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우리는 꽤 힘든 시간을 함께 버티고 견디고 있는 거예요. 


그것은 나 혼자 힘으로 할 수 없어요. 결국,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과 함께해야 하는 일이에요. 예전에는 "저건 틀렸어." 하고 쉽게 말했다면, 지금은 더 조심하게 돼요. 커다란 맥락에서 이면의 것을 한 번 더 생각해보게 되지요. 나의 울타리에만 선착하고 살았던 삶을 세상으로 시선을 확장하게 해준 것이 아이들인 것 같아요. 





Q. 가족 중심의 삶이 중요하다는 것은 알지만 행동으로 옮기는 건 쉽지 않아요. 많은 3040 아버지가 저녁이 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단호하게 인기 프로그램을 내려놓을 수 있었던 원동력이 궁금합니다. 


사실 특별히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아이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야겠다고 생각한 건 아이들이 너무 빨리 큰다는 사실을 자각하면서부터예요. 주간으로 일이 돌아가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하던 사람이라 그런지 시간에 대한 감각 같은 게 있어요. 이 시기를 내가 함께하지 못하면 지나가버리고 말겠다, 앞으로 밤 프로를 하지 말아야겠다, 일과 성취에 너무 매일 필요가 없겠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일정 시간을 확보할 수 있는 삶을 유지해야겠다... 생각했어요. 


편성부로 부서를 옮기고, 낮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아이들을 데려다주기 위해 자율 출퇴근제를 신청했어요. 아이들과 반드시 저녁을 먹는 생활을 지금도 유지하고 있어요. 저는 돌이킬 수 없는 시간에 대해 아주 민감하거든요. 처음에는 이 모든 것이 저의 성향이나 자각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때 자연스럽게 제 아버지가 떠오르더라고요. 축구공 차는 법부터 자전거 타는 거, 야구하는 거 다 아버지가 가르쳐주셨거든요. 아버지와 함께한 기억이 영화 필름 보듯 떠오르더라고요. 아, 내 아버지와의 시간이 내 안에 차곡차곡 쌓여 있구나! 마치 유산처럼.

 


Q.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나요? 


아버지는 해방 이후의 전형적인 삶을 경험하신 분이에요. 자식이 많은 집에서 태어나 자기가 원하는 삶을 생각해볼 겨를이 없으셨죠. 무척 어렵게 사셨어요.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열네 살 때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아주 어릴 때부터 일터에 나가야 했어요.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되게 한이 많았던 분이라고 하셨어요. 늘 술에 취해 있고, 아버지와 아들이 나눌 법한 대화를 제대로 나눠본 적이 없다가 너무 일찍 돌아가셨대요. 그 결핍 때문인지 내 아들에 대해서는 애착과 책임감이 아주 크셨던 것 같아요. 저는 외아들인데, 그것도 아버지의 뜻이었던 거예요. 형제 많은 집에서 치이며 살았던 자기처럼 자라게 하기 싫으셨던 거죠. 


어린 나이에 이발소에서 일을 배우며 이발사 면허를 따셨는데, 너무 어릴 때 생활 전선에 나서서인지 그 일이 너무 싫으셨대요. 구멍가게도 하시고 장갑 공장 일도 하시고 중동 건설 현장도 다니시면서 직업을 여러 가지로 바꾸셨어요. 제가 여섯 살 때 중동에서 돌아오시고는 다시 이발소를 차리셨어요. 이발소가 가장 안정적으로 책임감 있게 가족을 지킬 방법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아버지에겐 그게 제일 중요했어요. 





Q. 아버지와의 시간에 대해 더 듣고 싶어요. 


이발소는 시간에 얽매이지는 않잖아요. 늘 가게 문을 열어놓지만, 항상 손님이 있는 건 아니니까요. 가게에 딸린 집에서 살면서 저는 늘 아버지와 함께 있었어요. 손님이 없을 때는 집 앞에서 공놀이하고 이발소 소파에 누워 TV도 보고 라디오도 듣고 만화책도 봤지요. 아버지가 일하는 공간에 온종일 있었어요.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최백호나 조용필 노래도 거기서 들었고요. 


제가 어릴 때 애어른이라는 소리도 많이 들었어요. 아버지가 손님들과 주고받는 대화들이 현실적인 삶에 대한 이야기들이었거든요. 아버지가 저를 앉혀놓고 충고하듯 조언을 들려주신 건 아니지만, 늘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아버지의 생각과 어른의 세계를 엿보았던 것 같아요. 좀 컸을 때는 가게 바닥도 쓸곤 했던 기억이 나요. 아버지는 주말에는 쉬고 싶으실 법도 한데 늘 저를 앞세우고 어디든 가셨어요. 근처 뒷산 약수터에 가든, 낚시터에 가든. 이발사의 삶은 나와 내 가족을 위한 아버지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해요. 



Q. 유년기 기억이 지금의 아빠 역할을 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나요? 


지금 아이들과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이 최우선이라는 선택을 하게 된 뿌리였다는 생각이 들어요.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저의 유년 시절을 함께 나눈 아버지의 시간 말이에요. 늘 곁에 계셨으니까, 그 시절 아버지가 제게 해주신 거니까. 제 아이들과도 이 소중하고 아까운 시간을 함께 보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함께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 같아요. 비단 부모 자식 얘기만은 아니에요. 추억이든 유산이든 그건 그다음 이야기인 것 같아요. 





Q. 아버지와 비교했을 때 윤성현표 아버지의 시간은 어떤 색깔일까요? 


파업 덕분에 아이들의 주 양육자가 되었어요. (웃음) 등원은 물론 하원도 제 담당이죠. 3시 반쯤 아이들을 데려오면 토스트를 굽거나 간식을 준비해주고, 텔레비전도 같이 봐요. 그래야 아이들이 무얼 좋아하는지 알 수 있으니까요. 다음엔 놀아요. 요즘은 집 안에서 ‘물건 숨기기’나 ‘역할놀이’를 주로 해요. 아내가 퇴근하면 저녁 준비를 같이하고 함께 저녁을 먹어요. 하루의 마감은 아이들 등을 긁어주는 거예요. 그래야 잠이 잘 온대요. 그러고 보면 저도 어머니가 팔을 간질이듯 긁어주시면 잠이 솔솔 왔어요. 


특별할 건 없어요. 그냥 일상에 의미를 만들면 돼요. 저희 첫째 아이 이름이 초하고, 둘째가 하녹인데, 초여름의 의미를 한자로 넣었어요. 아내와 6월에 만나 연인이 됐는데 둘 다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거든요. 초여름이 지닌 싱그러운 에너지를 좋아해요. 봄을 지나 여름으로 달려가는, 오히려 봄보다 더 청춘 같은. 


내가 아이들에게 남길 것이라곤 정말 이 시간밖에 없는 것이 분명해요. 아이들과 함께 있다가 종종 너무 행복하거나 감동을 받는 순간에는 ‘아이들도 나중에 이런 순간을 기억해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아요. 그런데 사실 그건 저의 기억이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의 기억을 가지고 가겠죠. 아빠가 그때 내 곁에, 아빠의 자리에 함께 있었구나. 저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가부장제에 반대하는 아빠, 일과 가정의 균형을 지키고자 하는 아빠, 남의 삶을 기웃대지 않는 아빠, 멋스러움을 아는 '모던 파더'들의 말과 얼굴을 모으는 미디어 <볼드저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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