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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류 공장 한켠에서 다시 시작된 나의 청춘에게_1

삶의 가장 어두운 곳에서 나의 화양연화는 다시 시작된다

by 진 JIN


30대 중반이 훌쩍 넘은 나이까지 나를 지배했던 감정들은 이러했다.


공허함

적막함

외로움

좌절감

상실감

피로함

무기력함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이었을까.

30대 초반까지의 내 삶은 남들처럼 평범했지만 그렇다고 특출난 부분도, 특별한 삶을 살아오지도 않았다.

미대를 나와 디자인을 전공하고 사회에 나와 디자이너로 직장 생활을 했다.


하지만 그 생활에 나의 정체성은 없었다. 의미가 없었다.


의미가 무어라고.

'나'라는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의 '의미'를 찾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나'의 가치를 증명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나 또한 그런 사람이다.


거의 30대 전반에 걸친, 내 인생의 의미를 찾기 위한 실패와 상실을 기록하려면 좀 더 과거인 어린 시절의 나를 이야기해야 한다.


1997년 한국 외환위기 시절, 즉 IMF가 휘몰아친 자본 상실의 한복판에 우리 가족의 삶도 비켜갈 수 없었다. 당시 아빠가 하고 계셨던 사업이 큰 타격을 맞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가족 생계의 안전이 위협받을 정도의 어려움이었다.


'아버지는 평범하게 직장을 다니고 어머니는 집에서 자녀들을 돌보며 매일 저녁 온 식구가 함께 식사를 하고 어렵게 먹고사는 문제로 어린 자녀가 함께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가족의 풍경은 당시 한국의 많은 가족 구성원들에게 '비현실'이었다.


나의 부모님 역시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일을 하셨다. 두 명의 자녀가 아직 어리니 어떻게든 먹고사는 문제, 생계를 이어나가려면 두 어른은 자신들 중년의 삶을 처절한 생계의 현장으로 내몰아야만 했다.


10살이 채 되지 않은 어린아이가 부모님의 고생을 매일 지켜보며 가슴의 답답함을 느끼는 것, 집안 곳곳 느껴지는 낮지만 밀도 있게 촘촘히 깔려있는 뿌연 안개 같은 적막함을 안다는 것은 일찍이 또래에 비해 세상의 진실을 일찍 보게 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밝은 것보다는 어둠에 가깝다는 것도. 하지만 삶의 경험도 지혜도 없는 어린이는 그 어둠에 대한 통찰을 일찍이 얻을 리 없고 그저 본능적으로 인간 삶의 슬픔과 아픔을 '고통스럽게만' 느끼는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 고통은 한 어린이의 마음에 '나쁨'으로 정의되어 내면 깊이 저장하게 된다.


나는 당시 10대 초반의 어린이가 해야 할, 그리고 할법한 학교라는 곳에서의 사회 활동에 소극적이었다. 그 이유는 타고난 성격과 기질적인 것도 있었지만 또래 친구들과 어울려도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 느낌 - '나보다는 비교적 풍요롭고 안정적인 일상을 사는구나.'라고 확신하고 느끼게 되는 또래 친구들의 여유와 순수한 밝음. 그리고 그런 친구들을 바라보며 느끼는 소외감과 열등감, 외로움, 공허함이 나의 외로운 기질을 더 외롭게 했고 조숙하며 말이 없는 어린이로 보이게 했다.


일찍 어려움을 알면 조숙한 어린이가 된다지만 나는 내가 조숙한 어린이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현재의 내가 과거 어린 나의 감정을 회상하여 '어른의 사고를 곁들여' 표현하자면,


오히려 인간 생의 실패와 가난이라는 상황은 목숨과 안전을 위협하는 나쁘고 소름 끼치고 어둡고 무서운 것이라고. 그런 것들이 내가 어른이 되어 다시 맞닥뜨리게 된다면 절대적으로 무조건 피해야 하는 악마의 그림자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것은 조숙한 것이 아니다.


고통과 상실이 훗날 가져다줄 성숙과 성장을 알리 없는 10살의 어린이는 '고통이 인간 삶의 당연한 일부'라는 것을 부정적으로 차단해 버린, 텅 빈 껍데기 같은 외로움과 공허함을 먼저 알아버린 슬픈 아이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당시 어렸던 나는 이런 모든 것들을 '의미 없다'라고 규정지었던 것이다.



10평도 안 되는 집에서 네 식구가 먹고 자는 것은 의미가 없다.

저녁 늦게까지 혼자 집에 덩그러니 남아 물 조절을 못해
멀겋게 끓여 먹는 라면은 맛도 없고 의미도 없다.

소주 한 잔에 삶의 고단함을 삼키고 터벅터벅 귀가하는
아빠의 얇고 해진 베이지색 코르덴 잠바도 의미가 없다.

곱디고운 엄마의 얼굴에 그늘이 생기는 것은 의미가 없다.
어린 자녀들 안 보이게 한숨을 쉰다 한들, 좁은 방에서 어쩔 수 없이 들리는
엄마의 삼키는 울음과 한숨은 의미가 없다.

그것들을 보고 듣고 느끼는 내 마음은 답답하고 힘들다.
그리고 그런 내 마음을 힘들게 한 이 가난한 삶을 표현하는 모든 것들은 의미가 없다.

그러니 난 의미가 있는 것을 쫓고 살아야 하며 의미가 있는 인생을 사는 어른이 되어야겠다.



남들보다 좀 더 빨리 세상의 현실을 먼저 보게 되었지만 좀 더 사려 깊거나 따뜻하거나 조숙해진 건 아니었다. 말이 없고 무표정이 많아져서, 조숙해 보이는 아이였을 뿐.


8-10살부터 내 무의식에는 벌써 '의미 없음'과 '의미 있음'을 명확히 구별하고 언젠가의 내 삶은 내가 구분한 이등분에서 나온 '의미 있음'의 삶만을 살지 않으면 그것은 고통과 실패뿐이라고, 그것은 악마고 끊임없는 어둠이며 죽음과도 같은 것이라고 강박적인 감정이 내면 아주 저 깊은 곳까지 깔려있었다.


그렇게 10살의 어린이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나만의 편협한 '의미 있음'을 추구하며 어른이 되었다.

그리고 20년 전 처음 만나 두 번 다시 맞닥뜨리고 싶지 않았던 실패와 상실과 가난과 고난을 - 이번에는 '나의 의지'로 결국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30대 초반 세상에 의미 있는 디자이너가 되고자 다니던 직장을 관두고 사업을 시작했지만 실패와 좌절 속에서도 다시 도전하는 즉, 일련의 '시행착오'라는 과정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런 과정은 내가 겪고 싶지 않으니 외면하겠다고 선언하며 도전한 것들은 - 보기 좋게 '실패'라는 두 글자로 내 오만하고 나약한 마음에 크고 어두운, 오르지 못할 산처럼 나타나 무섭고 단호하게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내가 초래한 가난.

직장 생활을 하며 티끌같이 모아둔 적금이 한여름 37도의 땡볕에 달구어진 아스팔트 위 소프트콘 아이스크림 보다 빨리 사라졌다. 사라지고 다 사라져 통장에 찍힌 잔고는 지금 기억은 안 나지만 몇만 원은 있었을까 싶다.


그리고 사람에 대한 상실.

그 원인이 반은 나이기도 하고 나머지 반은 예상치도 못한 타인의 배신이었다.

처음 사업자 등록을 하고 7-8년간 주제는 같지만 다른 방식의 사업을 4-5개 도전했는데 그 과정에서 팀이 사라지고 그 후에 만난 동업자는 인간적인 배신으로 결국 갈라졌다.


초반 팀이 붕괴된 이유는 오롯이 내 탓이었다. 나는 당시 사업자 대표로서, 사업 아이디어를 제안한 디자이너이자 디렉터로서 형편없는 그릇을 갖고 있었다. 조직에 속해 함께 일하던 직장 동료였다가 이들을 이끌고 책임져야 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한때 같이 회사 욕을 하고 함께 야근하며 치킨과 맥주 한 잔에 서로 위안을 주고받는, 조직이 시키는 일을 하면서 일상을 함께 버텨나가는 단순한 동료 사이가 아니게 된 것이다.


이런 '현실적인 변화'의 인지도 없이 함께 사업을 하자 했다. 어리석었고 무모했다. 난 그들을 이끌지 못했다.

나는 그들에게 늘 '곧 잘될 거야, 좋은 아이디어잖아'식의 무책임한 태도로 내 비전을 함께 실현시키고자 했던 동료들에게 단단한 심지를 보여주지 못했다.

그리고 결국 팀이 깨졌다.


이후 사람에 대한 배신은 내가 타인을 책임질 만한 경험과 여건이 될 때까지 혼자 해보리라 하고 사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사람이었다. 팀이 사라지고 혼자가 되었고, 혼자가 되기를 선택하고 성장하기로 마음을 먹었건만.

10살의 내가 가졌던 의미 없음의 인생을 20년 후 스스로 초래하고 처음부터 다시 오롯이 혼자 시작해야 되는 순간이 오니, 끊임없는 자괴감과 외로움과 고독이 밀려왔다.




결국 내가 겪은 배신은 나 스스로가 혼자서 외로움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에,
동료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에게 또다시 의존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바닥까지 내려간 자존감.

내 나이 30대 초반에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무엇 하나 안정적으로 이룬 것이 없다. 조직과 사회가 주지 못하는 나의 정체성을 찾고자, 내 직업적 의미 있음을 찾기 위해 시작한 것들은 단단하지 못한 내 마음 위에 버티질 못했다. 그것들이 아무리 좋은 비전과 선한 방향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오히려 그렇기에 나약한 것 위에 오롯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외로움과 고독을 견디지 못했던 마음.

마음이 공허하고 외로움을 견딜 수 없어 방황할 땐, 누군가가 내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아주거나 손을 내밀어 줘도 마치 그들이 내 삶의 반쪽처럼 느껴지게 된다.

'아 다행이다. 혼자서 짊어지고 시작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난 외롭지 않겠구나.'

결국 스스로의 고독을 이기지 못하고 누군가와 함께 하고자 시작했던 일들은 그 이전의 실패보다 더 깊은 실패와 상처로 돌아왔다.


내게 남은 것이란

여전히 힘들게 일하시는 부모님께 무엇 하나 도움이 되지 못한, 못난 자식으로서의 나.

내가 의미 있게 무언가를 이루었다면 부모님은 더 이상 여생을 힘들게 살지 않으실 텐데.


주변의 의심과 비난 섞인 위로의 말.

'부모가 고생해서 공부시켜 그것도 미대에 갔으면 그에 상응하는, 사회가 요구하는 '일반적인' 삶을 살며 안정을 이루는 것이 나았을 텐데.'라는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구체적으로 들리는 것들. 허황된 사업이니 꿈이니 하는 것들로 살며 결과 없는 나에 대한 안타까움을 눈과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

비난과 위로의 경계에 있는 표현으로 나를 평가하는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타인들.


가장 소중했던 존재와의 이별.

그리고 내가 무엇에 홀린 듯이 투자금이니 정부 지원금이니 하며 여기저기 의미 있는 것들을 다시 손에 넣기 위해 빈 껍데기의 바쁜 일상을 보내던 어느 날, 16년을 나의 자식처럼 여기고 평생 사랑했던 반려견 봄이도 급성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봄이가 급성 림프암으로 집과 병원에서 혼자 고통스럽게 외롭게 나를 기다렸던 시간에도 나는 투자를 받거나 지원금 선정에 집착하며 다시 의미 있는 상태로 나를 되돌리는데 혈안이 되어있었다.


봄이는 지금 떠나면 안 된다.

보낼 수 없다.

그동안 여유가 없어서 해주고 싶었던 거 못해줬었는데.


일분이라도 더 곁에 있는 것이 중요했음에도 난 뭐에 홀린 사람처럼 소중한 존재가 떠나가는 시간에도 나는 그러고 살았다.


봄아, 너는 그때 무슨 생각을 했니. 어리석은 나를 보며 너는 그래도 한결같이 나를 믿고 사랑한다 했겠지.



돈도 없고

사람도 없고

믿을 사람도 없고

나조차도 스스로를 믿지 못한다.


16년을 함께 살아온 반려견의 죽음 앞에서도 무력했다.

부모님은 연세가 드셔도 아직 힘들게 일하시고

난 여전히 한 푼 보탬도 안 되는 자식이고

10살 때 내가 절대 되고 싶지 않은 의미 없는 인간이 되어버렸다.


보기 좋게 난 의미 있는 인간이 되어 부모님이 더 이상 가난하지 않게 여생을 보내셔야 되고

노견이 된 우리 봄이는 돈 걱정 없이 좋은 병원을 다니며 여유 있는 가족의 사랑을 받으며 20세를 채워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 반대로 이루어졌다.

내가 내린 의미 있음의 결론들이 무너져 내렸다.


나 스스로가 너무 싫다.

사람도 싫다.


다시 사회에 순응하며 일 잘하는 디자이너로, 조직의 일원으로, 회사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괜찮은 척 가면을 쓰고 사람들과 평범한 사회적 관계를 맺으며 일상을 보내기 어려울 지경까지 왔으니까.

눈을 감고 잠에 들면 다음 날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매일 했다.


그럼 죽어야 하나.

겁 많고 나약한 나는 안 아프게 죽을 방법을 궁리해 봤지만 그런 건 없었다.

그리고 지금 죽는다 한들 가여운 우리 부모님 마음에 평생 자식으로서 씻을 수 없는 상처만 남기는 거다.


모든 것이 우울하고 무기력하고 어디에도 나가고 싶지 않은데.

어디서부터 무엇을 다시 시작해야 될지도 모르겠는데.


정신과 치료를 받아볼까.

그러고 나서 우울증 약을 처방받아 버텨볼까.

근데 그러기엔 그럴 치료를 받을 돈도 여유도 없어서였는지 나를 치료하는 치료비조차 아깝다고 느껴졌다.


더 이상 나 자신을 어떤 사람이나 조직에 의존하는 것에 의지가 사라져 버렸다.

병원을 다니면, 약을 먹으면 그것에 또 의존해서 살아갈 것만 같았다.

나를 끊임없이 좌절로 몰아넣는 생각의 지옥에서 벗어나려면

생각을 하지 않고 몸이 힘든 곳으로 가야 한다.

그리고 바로 돈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부모님 손 안 빌리고 당장 편의점 빵과 삼각김밥이라도 사 먹을 수 있었으니까.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가서 목숨만 연명하자.

그렇게 살다 죽고 싶으면 그럼 그때 가서 죽음을 계획해 보던가.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아직은 무섭고 무력하니 일단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자.



이 부끄러운 나를 감출 수 있는 곳으로.

생각의 고리를 끊고 내 육체가 피로에 너덜너덜해져 사라진다면 사라질 수 있는 곳으로.


그렇게 해서 가게 된 곳이 경기도 외곽의 한 물류 센터이자 공장이었다.


포켓몬스터 지우와 피카츄의 모험도 고난과 역경을 딛고 나아감의 연속이었다.



다음 이야기는 [물류 공장 한켠에서 다시 시작된 나의 청춘에게_2]로 이어집니다. 물류 공장 한편에서 다시 시작된 나의 청춘에게_1 물류 공장 한편에서 다시 시작된 나의 청춘에게_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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