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1시의 포장마차에는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작은 우주가 있었다
내가 가게 된 경기도 외곽의 물류 공장은 드라이아이스를 생산하고 납품하는 곳이었다. 일급이 거의 13만 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꽤 높은 일급이었다.
그리고 '꽤 높은 일급'은 그에 합당한 강도 높은 노동력을 요구한다.
쉴 새 없이 만들어져 레일을 타고 쏟아져 내려오는 드라이아이스를 박스에 넣는 작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생산 속도와 포장 속도가 맞지 않으면 담기지 못한 드라이아이스들이 쌓이고 쌓여 레일 밑으로 떨어졌다.
그날 근무가 첫날이어도, 일이 능숙하든 능숙하지 않든 속도를 못 맞춘 작업자는 바로 그 현장의 애물단지가 된다.
분마다, 초마다 돈으로 환산되는 노동력의 가치를 증명하지 않으면 이전의 어떤 삶을 살아왔건 그 누구든 이 현장의 쓸모없는 부품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제대로 된 교육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급하게 넣어진 '나'라는 미숙한 부품이 잘 굴러가게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다.
드라이아이스를 만드는 기계는 인간들의 뼈와 근육의 고통과는 무관하게,
정확하고 일정한 속도로 스틸 라인으로
무심히 실어 보냈다.
어떠한 의지도 감정도 없는, 이다지도 유능한
'현장의 전능한 기계'라니.
오차 하나 없이 일정하고 반복적이며
정확하게 생산된 제품들을 바라보는-
오차 범위가 큰 인간들의 노동력이 필요한
기계와 인간의 협동 작업.
숙련된 노동자들은 냉동고와 같은 온도임에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숨이 차올라 있었고, 얼어 붇을 것 같은 손끝의 약력으로 드라이아이스를 요령껏 들어 올려 '기계처럼' 포장 박스에 담아야 했다.
'진짜 기계'와 '기계처럼' 일해야 하는 두 개의 이질적인 물상이 협력해야 가치를 높일 수 있는 세상.
30년이 넘게 살면서 내가 경험한 인생의 대부분의 '일'이나 '작업'은 책상과 컴퓨터 앞 키보드와 마우스를 쉴 새 없이 두드리는 것들이었다. 내가 오랜 시간 동안 해온 '디자인'이란 일도 다양한 프로그램을 활용하는, 전자기기와 프로그램과 인간이 협동하는 일이었으나 본질적인 느낌이 달랐다. 난생처음 경험해 보는 일이자 좀 더 먹고사는 삶의 기저를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는 '날것의 일'이었다.
그리고 '날것의 일'에 익숙하지 않은 아직 '기계처럼' 움직이지 못하는 부품이자 '나'라는 인간은 큰 육체적 고통을 감당하는 것이 한계처럼 느껴졌다. 3M 방한 장갑을 껴도 손 마디마디가 아리는 냉기는 손톱이 깨질 듯한 아픔이었다. 드라이아이스가 빈틈 없이 담긴 박스를 들어 올려 팔레트에 적재하고 옮기는 과정에서, 요령 없는 내 근육과 뼈는 여기저기 부딪히고 접질리며 상처를 내고 있었다.
몸이 힘들면 정신이 편안해질 거라 생각했지만, 극심한 육체적 피로와 고통에서 오는 심적인 무너짐 또한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8시간을 어떻게 버텼을까.
중간중간 수도 없이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땀이 머리에서 미간까지 흘러내릴 때마다 참고 있던 울음의 일부가 같이 흘러갔다.
그리고 우는 게 아닌 냉기 때문에 콧물이 흐르는 척 콧김을 큽-하고 들이마셨다.
그래도 어떻게든 다른 세상으로 숨어 버텨보겠다고 온 건데 오늘 하루만이라도 버텨보자.
그런 생각으로 20시간 같은 8시간을 버텼다.
퇴근 셔틀버스의 가장 뒷자리 구석에 앉아 패딩 모자로 온 얼굴을 가렸다.
추운 냉기의 건조함과 온몸의 땀으로 범벅된 얼굴은 다 망가져 있었다.
오랜 시간 아토피와 알레르기 체질을 갖고 있는 나는 극심한 피로로 신체 면역력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얼굴 피부는 화상 입은 사람 마냥 이마 부분이 붉게 달아오르고 각질이 벗겨져 진물이 나고 있었다. 그래도 첫날치고 어떻게든 굴러가려 했던 신입 애물단지를 안쓰럽게 쳐다보며 부품이 아닌 사람으로서 건네온 한 마디가 기억이 난다.
"오늘 첫날이라 힘들었을 텐데. 너무 수고했어요."
하지만 '먹고사는 것이 당장 급급한 이 세계의 사람들에게 너의 오늘 고통은 그다지 연민의 대상이 아니야.'라는 표정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지친 노동자들을 태운 셔틀버스는 그들이 잠들 수 있는 저마다의 정류장으로 데려다주었고, 나 또한 집에서 그나마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 근처에 내릴 수 있었다.
12월의 겨울, 그리고 새벽 1시.
눈이 내리고 있었다.
냉동고 같은 온도의 공장에서 8시간을 일하니, 오히려 밖의 온도가 따뜻하게 느껴졌다.
내리는 눈송이가 따뜻한 작은 솜뭉치처럼 보였다.
눈앞에 작은 포장마차가 보인다.
왼쪽 다리에 너무 힘을 주며 일했던 탓인지 걸을 때마다 왼쪽 무릎과 발바닥이 아려와 엇박자로 어기적 어기적 걸으며 포장마차로 향했다.
새벽 1시의 막차가 끊긴 역 앞 포장마차에는 나름 각자의 삶의 무게를 지니고 따뜻한 우동 한 그릇에 허기를 채우는 어느 두 사람이 먼저 와 있었다. 두꺼운 코트와 정장을 입은 회사원으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분과 나처럼 늦게까지 어딘가에서 일하고 왔을지도 모를 젊은 청년이 서로 멀찌감치 떨어져 뜨거운 우동과 국물을 후루룩후루룩 넘기고 있었다.
"저 우동 한 그릇 주세요."
얼굴이 엉망진창이라 패딩 모자를 벗을 수 없어 웅얼거리며 주문한 우동 한 그릇에 포장마차 주인분은 그저 인자하게 한번 미소를 짓는 것이 전부였다. 내게 어떤 질문도, 형식적인 정이 담긴 추임새도 없이 그저 우동 면발을 뜨거운 어묵 국물에 풀기 시작했다.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각자의 고단함을 안고 허기를 채우는 몇 명의 손님들. 그리고 그런 손님들에게 관심과 무관심의 경계에서 투박하게 우동을 만들어 주는 주인 이모님.
새벽의 조용하고 외로운 포장마차의 분위기는 오히려 편안했다. 하루 종일 공장의 기계음 소리와 지게차의 경적 소리, 무겁고 큰 박스들이 팔레트에 내려지고 부딪히는 소리로 머리가 어지러웠는데.
이 외로운 고요함 덕분에 나는 그제야 처음 경험한 육체적인 피로로 부정적인 자기 연민에서 빠져나와 무감정과 같은 중립의 정신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루 종일 지쳤던 다리를 쉴 수 있게 해준 빨간색의 동그란 플라스틱 의자.
추위를 녹이는 데 충분한 작고 낡은 난로.
어두 컴컴한 고요한 새벽 차도에서 간간이 지나가는 자동차의 짧은 엔진 소리.
포장마차의 비닐 장막 틈으로 들어오는 차가운 바람과
그 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공기의 엷은 쇤 소리.
이 어둠 속 가장 밝은 포장마차 백열등의 빛.
각자의 배고픔을 위로하는 같은 포장마차 안 두 명의 남자.
구석에 앉아 퉁퉁 부은 얼굴을 감추려 패딩 모자를 뒤집어쓴 한 여자.
이들에게 어떠한 연민의 물음도 없이 그저 조용히 우동을 만들어 주시는 주인아주머니.
우동 맛은 평범했다.
가장 평범하고 따뜻한 맛.
그렇게 8시간 동안 냉동고 안에서도 땀을 흘렸건만 몸에 열이 식으니 온몸을 찌르는 한기에 숟가락으로 떠먹는 국물은 내 몸을 녹이지 못했다.
두 손으로 우동 그릇을 들어 후루룩 국물을 들이켰다.
그리고 그 국물의 짠맛이 우동 국물인지 내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의 맛인지.
아마 우동 국물의 맛이라며 내 눈물을 외면했던 순간.
그리고 문득 아빠가 생각났다.
IMF 때문에 사업이 어려워지고 가정 생계를 위해 이런 일 저런 일-도시의 가난한 서민들이 생계를 위해 힘들게 할 수밖에 없는 일들을 하며 버텼던 아빠의 시절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 기억은 내게 '아빠의 얇고 해진 베이지색 코르덴 잠바'로 기억되던 시절이다.
그리고 새벽에 포장마차에서 간단히 허기를 채웠다는, '별거 없는 추억을 회상하듯' 무심히 던진 아빠의 말을 30 중반이 훌쩍 넘어서야 알게 되었다.
새벽 1시 인적이 끊긴 역 앞의 포장마차에서
우동을 먹는다는 것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나의 외로움을 먹는 것이다.
삶의 서글픔을 먹는 것이다.
지난 과거의 후회와 미련을 삼키는 것이다.
그럼에도 다시 살아야 하는 무게를
잠시 가라앉히는 위로를 먹는 것임을
37년을 살고서야 알게 되었다.
우동 한 그릇 덕분인지 몸 안은 덕분에 작은 온기를 되찾았다.
그래도 다리는 어기적 어기적 걸어가야 할 정도로 아프다.
걸어가야지.
집으로 가야지.
그리고 푹 자야지.
눈이 내린 인도는 엷은 살얼음이 되어 미끄럽기 때문에 다리에 더 힘을 주고 걸어가야 한다.
그리고 걸어가면서 생각한다.
푹 자고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인스턴트 아메리카노를 뜨겁게 타 먹어야지.
그리고 냉동실에 있는 식빵 한 조각을 토스터에 구워 딸기잼을 듬뿍 얹어 먹어야지.
그래도 내일 13만 원 일당으로 치킨 두 마리를 시켜야지.
부모님이랑 별것 없는 일상을 이야기하며 맥주 한 캔과 같이 먹어야지.
아, 우리 아빠는 치킨에도 맥주보다는 소주가 있어야 하니 참이슬 한 병과 엄마랑 내가 마실 캔 맥주 2개도 사야겠다.
분명 일하는 8시간 동안 순간순간 뛰쳐나가 어딘가 부딪히거나 떨어져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도 그 시간이 지나고 집으로 가는 길 포장마차의 한구석에서 나는 우동 한 그릇으로 다시 내일 아침에 따뜻한 인스턴트커피에 토스트를 먹을 생각을 했다.
당장 죽어야지 보다,
'그래도 버텼으니 내일을 또 살아야지'로 바뀐 삶의 태도가
내 늦은 청춘이 아직 끊나지 않았음을,
시작이 다시 올 수 있다는 것을 알리는 첫 신호였다.
그것이 삶의 2 막을 여는 새로운 시작의 신호임을 깨닫게 된 것은 조금 더 시간이 흐른 뒤지만.
새벽 1시의 포장마차에는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작은 우주가 있었다.
그날은 유독 춥고 어두운 밤이었고 별빛도 없었다.
이 도시의 하늘에서 빛나는 별을 보기 어려워진 건
오래된 사실이건만
내 마음과 처지가
빛 하나 없는 저 어두운 하늘과 같아 더 쓸쓸해,
원래 하늘에 빛나게 박혀있을 별이 보이지 않는
오래된 사실이 더 보기 싫었다.
달도 얇은 초승달이어서
그 어둠이 더욱 쓸쓸하게 느껴지는 밤이었지만
그랬기에 더욱 밝게 느껴진 포장마차에 걸린 백열등의 빛.
그 인공의 따뜻함이 왜 이렇게 위로가 되고 안쓰러웠을까.
하루를 견딘 이 육체의 중력을 거들어주는
작고 동그란 플라스틱 의자.
구석에 시린 발끝을 녹여주려 애쓰는 낡은 난로.
차가운 바람을 막아주는 포장마차의 두꺼운 비닐 장막.
그 틈 사이로 들어오는 엷은 쇤 바람은
이상하게 밉지가 않더라.
뜨거운 우동 국물이 데워지며 올라오는 수증기.
내 눈물인지 국물인지 모를 짠맛에
몸의 한기를 달랬던 우동 한 그릇.
4,500원의 그날 나의 하루를 위로해 준 처방약.
뒤늦게 생각난 아빠의 뒷모습.
얇고 해진 베이지색 코르덴 잠바를 입고
어묵 하나에 새벽 배고픔을 채웠을 아빠의 뒷모습.
살얼음이 낀 눈 쌓인 인도를 걸으며 집으로 돌아가던
12월 어느 날의 새벽에
'정말 죽을 거였으면 우동 한 그릇으로 배를 채울 의지도 없었을 테지.'라며
그러고 다시 어기적 어기적 걷는다.
내일 일어나면 따뜻한 아메리카와
토스트를 구워 먹을 생각에
배시시 웃는 내가
그치, 일단 푹 자고 일어나야
그렇게 또다시 살아야
시작이 있지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어느 날 밤.
내가 자초한 실패와 가난한 삶에는 의미가 있다.
경기도 외곽의 물류 공장에서 시작된
나의 청춘은 의미가 있다.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힘들고 지친 노동을 버틴
그 첫날의 8시간과
그 시간을 버티며 벌겋게 뒤집어진 내 얼굴과
왼쪽 무릎의 고통은 의미가 있다.
내 눈물 한 움큼과 함께 먹는
새벽 1시의 우동 한 그릇에는 의미가 있다.
새벽 역 앞 포장마차를 비추는 백열등의 빛과
동그란 빨간색의 플라스틱 의자와
작고 낡은 난로의 온기는 의미가 있다.
드라이아이스 공장은 이날이 첫 근무이자 마지막 근무였지만, 다행히 버틴 이 하루를 계기로 이후 1년이 넘게 여러 물류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내 꿈의 방향성을 찾고 고민하며 살아왔다. 고통스러운 육체노동은 시간이 흐를수록 요령이 생겼고 점차 생계형 노동에 투자하는 시간과 개인적 꿈에 투자하는 시간을 분리시켜 스스로를 극단적인 상태로 내모는 어두운 자기 연민에서 점차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날의 고된 노동과 우울과 죽음과 어두운 연민이라는 나를 잠식하기 직전의 내면의 고통이 새벽 포장마차의 우동 한 그릇으로 한순간 사라졌다기보다는-외로움과 우울한 감정은 인간 삶의 보편적인 감정이며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그럼에도 내일을 다시 살아볼 의지를 가져야겠다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추운 겨울날의 새벽 포장마차는 험난한 감정의 산행이라는 여정에서 만난 베이스캠프였고 4,500 원의 우동 한 그릇은 다시 산을 올라야 하는 고통을 덤덤히 받아들이기 위한 의지였던 것 같다.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먹고 쉬고 싶다는 것의 진짜 의미는 '다시 회복해서 살고 싶다'와 같은 것이니까.
가장 의미가 없다고 지나쳐왔던 것들로부터 난 다시 위로를 받고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세상의 '의미 있음'과 '의미 없음'을 구분 짓고 고통과 상실을 두려워하던 나는 삶의 모든 순간들이 의미 있음을, 오만하게도 하찮게 여겨 보려 하지 않고 지나쳐왔던 것들로부터 오히려 진짜 삶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
그리고 난 지금도 종종 물류 공장의 한켠에서 하루를 보내기도 하고 디자인 아르바이트도 병행하며 내 꿈을 다시 이루기 위한 과정을 살아가고 있다.
더 이상 어두운 자기 연민 없이도 물류 노동의 현장에서 일하는 의미를 발견한다.
팔레트에 박스를 요령 있게 적재하며 곧잘 웃기도 하면서.
[물류 공장 한켠에서 다시 시작된 나의 청춘에게_2]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