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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사는 현실 앞에 8만 원 컨버스는 이제 예쁘지 않아

by 진 JIN


물류 센터는 늘 사고에 쉽게 노출될 수 있는 환경이기 때문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안전에 유의하며' 일을 해야 하지만, 사실상 1분 1초가 바쁘게 돌아가는 육체노동의 환경에서 내 안전을 그렇게까지 신경 쓸만한 여유가 없다. 내 안전에도 신경을 쓰지 못하다 보니 함께 일하는 현장 내 다른 사람들의 안전은 더욱이 신경 쓰는 것이 어렵다. 물류 현장에서 가장 빈번하게, 크게 발생할 수 있는 사고는 '충돌 사고'다. 사람 간 충돌, 물류 이동 수단과 사람 간 충돌, 적재된 제품들의 무게로 인한 충돌 등 다양하다. 사방이 다 언제든지 사고가 날 수 있는 환경이다.


지게차는 내부로 온 물건들을 하차시키거나 지정된 위치에 옮겨가며 쉴 새 없이 움직인다. 물론 다급한 경적 소리를 내며 걷거나 뛰는 작업자들에게 충돌 위험을 알리지만 지게차 운전자와 일반 작업자 둘 중 한 명이라도 위험 신호를 놓치면 바로 큰 사고가 나는 것은 시간문제다.


이곳은 당일의 노동력이 1분 1초로 환산되고 그 대가로 다음 날 즉시 현금화되는 시장이기 때문에 그만큼 '먹고사는 것'의 좀 더 본질적인 기저가 깔려 있는 곳이다. 물류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 또한 대부분 한 푼이라도 아쉬워 이 힘든 현장에 출근하기 때문에 서로 간의 정서적인 대화나 깊은 인간관계를 꺼려 하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이런 부분이 물류 현장의 장점인 것도 사실이다.

디자이너로 직장 생활을 했을 때는 쓸데없는 친목 유지, 상사 및 동료 간 눈치, 팀 소속의 한 일원으로써 거짓으로나마 최선을 다해야 하는 '친밀도 높은 사람인 척하는 연기'가 필요했었다. 하지만 이곳은 눈치껏 필요한 훈련된 커뮤니케이션과 팀원으로서의 역량 강화 같은 것보다 한 마디로 '빠르게, 잘, 능숙하게 일하는 노동력'이 최우선 되는 곳이다.


하지만 그런 장점을 제외하면, 늘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사고 위험이 있는 곳이 유통의 가장 밑바닥인 이 물류 현장이다. 그리고 인간 생명의 존엄성보다 인간의 육체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생산성'의 가치가 훨씬 더 우위에 있는 곳이기도 하다. 당장 출고되어야 하는 물량이 급하게 쏟아질 때는 함께 일하는 작업자가 갑자기 복통을 호소하며 쓰러진다 한들, 큰 동정심이나 걱정이 동반된 인류애적 반응보다는 현장 관리자에게 '쓰러진 인간 부품'을 넘기고 남은 하루의 일당을 채우는 데 급급한 인간 군상을 흔하게 볼 수 있는 곳이다.

불필요한 인간관계를 강요하지 않는 대신, 이성과 감정을 갖고 있는 지성의 인간이 타인의 다급한 고통을 눈앞에 보고 무심히 지나쳐도 큰 비난 받지 않을 수 있는-'어쩔 수 없다'라는 변명이 가장 합리적일 수 있는, 정말 인간관계의 무가치를 일상 속 숨 쉬는 것처럼 받아들이게 되는 곳이기도 하다.


나는 온열 질환 아토피 때문에 늘 냉장 센터에서 근무를 했었는데 누구나 알만한 꽤 큰 대기업이 운영하는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안전화를 제공해 주지 않았었다. 안전화는 육중한 지게차 바퀴에 발이 찧여도 어느 정도 보호가 될 만큼 무겁고 딱딱했기 때문에 안전하지만 오래 신고 걸어 다니면 발바닥이 쩍쩍 갈라질 정도로 아팠다. 그래서인지 지게차와 가까운 위치에서 작업하는 작업자가 아닌 이상 개인 운동화를 신고 일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 안전보다 좀 더 편하고 빨리 움직일 수 있는 노동의 효율성이 더 중요한듯했다. 8시간 이상 육체노동을 해야 하니 그리고 그 노동으로 돈을 벌어야 하니 장시간의 육체적 피로와 고통을 당장 덜어줄 수 있는 선택이 중요하지 언제 일어날지 모를 사고가 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들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사고라는 것은 언제 일어날지 모르지만 일어나면 현장 사고로 인한 사망 사건까지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대게 모든 근무자들이 일을 하는 환경에서, 내가 오랜 시간 일해온 it 회사의 디자이너나 개발자나 기획자나 다른 사무직들은 근무 현장에서 '사고로 사망했다.'라는 소식을 듣거나 직접 보는 것이 정말 흔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물류 현장은 다르다. 쉽게 누가 어디서 다쳤고, 현장 근무 중 사고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빈번하다. 하지만 그 죽음을 슬프게 애도하는 이는 거의 없으며 사고의 위험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남은 일이나 마무리하자.'로 방관의 여유마저 느껴질 정도로 타인의 죽음은 그냥 별일 없는 뉴스다.



이처럼 현대사회의 가난한 인간에겐 당장의 급전을 해결하고 당장의 먹고사는 문제가 이렇게나 무서운 거다. 언제 일어날지 모르지만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죽음의 위험도 불사할 삶의 의지라니. 그리고 그런 의지는 타인의 죽음에도 무반응하게 만드는 대단한 이성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나라고 또 달랐겠는가. 나는 뭐 대단한 인간이라 대단한 인류애적 정신으로 타인과 스스로를 챙겼겠는가. 밑창을 깔아도 발뒤꿈치가 쩍쩍 갈라지는 안전화를 신느니 가볍고 쿠션감 좋은 개인 운동화를 신고 빠르고 더 많이 움직일 수 있는 내 노동 능력을 높이는 것을 늘 선택했다.


나 또한 개인 운동화를 신고 출근을 했었는데, 안타깝게도 평소 꽤나 아꼈던 컨버스 플랫폼 시리즈 운동화였다. 험하게 신고 버려도 되는 저렴한 운동화를 구매를 하든 좀 더 돈을 주고도 안전화를 구입했어야 했는데 물류 센터 현장 관리자들이나 작업자들이나 사소한 사고 정도는 그냥 넘어가는 것이 미덕인, 안전 불감증이 만연해 있는 환경이었기 때문에 나 또한 아무런 자각 없이 개인 운동화를 신고 다니며 일을 했다.


내게 작은 사고가 발생했던 날도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지역별로 분류된 박스와 물건들은 능숙한 작업자들의 손에 의해 차곡차곡 롤테이너에 꽉 차게 적재되어 있었고, 내 체중을 어깨와 팔에 온 힘을 다해 실어도 움직이기 어려울 무게의 롤테이너를 끌고 지역별 상차 입구로 이동하고 있었다. 오래되고 낡은 롤테이너는 바퀴 일부가 매끄럽게 잘 굴러가지 않았기 때문에 내 힘으로 제대로 된 방향으로 밀고 이동하기가 어려웠다. 요령 없이 잘못 힘을 줘 끌고 가기라도 하면 무게 중심을 잃고 내 쪽으로 물건들이 쏟아질 수 있기 때문에 큰 사고가 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예상할법한 사고를 피하려다 예상하지 못한 사고가 날 수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기 때문에, 난 결국 불안정한 무게중심에 오른쪽 뒤꿈치가 롤테이너 바닥 모서리에 낀 상태에서 발을 뺐고 그 과정에 뒤꿈치가 꽤 심하게 '파이게' 되었다. 날카로운 것에 찔리거나 찢어진 것이 아니라 무딘 쇠 모서리에 강하게 찍혀 발을 뺏기 때문에 살이 '파인' 것이다.


순간 엄청난 고통이 있었지만 출고 시간 내 이동을 해야 했기 때문에 스스로 그 고통을 오래 느낄만한 여유를 주지 않았다. 현장에서 일을 하다 보면 크고 작은 멍이 드는 건 일상이었기에 내 뒤꿈치가 느껴지는 고통에 비해 실제로 상처는 크지 않겠지라며 순간 넘긴 것이다. '그냥 까진 정도겠지'라고 생각하고 싶었던 것 같다.


상차 입구까지 다 간 후에야 오른쪽 컨버스 밑창이 '상당한 양의 축축한 무언가로 젖어가는 느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급하게 화장실로 가 오른쪽 신발을 벗으니 파인 뒤꿈치에서 흘러나온 피가 신발 안을 다 적실 정도로 상처가 꽤 깊었다. 양말은 바로 벗어 쓰레기통에 던져버렸고 두루마리 휴지를 둘둘 말아 두껍게 겹쳐 발꿈치에 댔다. 그렇게 15분 가까이 지혈을 했을까. 상처 부위에서 흘러나오는 피의 양이 조금 줄어든 느낌이었지만, 지혈제를 뿌리고 소독을 해야 할 판에 난 15분 이상을 넘기면 현장 관리자가 잔소리를 할 것이 더 신경이 쓰여 얼른 휴지로 둘둘 감은 발을 신발에 다시 쑤셔 넣고 작업 현장으로 나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얼마나 먹고사는 본능의 생계에 처절하게 굴복했으면 그렇게까지 뒤꿈치가 패였음에도 '다쳤다'라는 한 마디도 못했을까 싶다. 현장에서 다친 인력이 관리자들 눈에 달가울 리 없을 것이라 생각했고 혹여나 '당신 부주의로 인한 사고이니 당분간 쉬어라'거나 다음 날 근무 확정이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나에겐 더 큰일이었던 것이다.

난 내 노동력이 평이하고 예상 밖을 벗어나지 않는, 꾸준히 쓸만한 가치로 인식되길 바랐다. 그래서 내 스스로의 상처를 치료받고자 하는 당연한 권리조차도 스스로 외면한 사람이 되어있었던 것이다.

어떤 문제도 일으키지 않은 노동력을 우선순위 하는 물류 센터의 환경과 그 환경에서 일해야만 당장 내일 김밥 한 줄이라도 사 먹을 수 있는 가난한 일꾼의 비겁한 복종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그렇게 3시간 정도를 더 일했을까. 중간 쉬는 시간에 센터에서 제공하는 빵과 우유를 들고 건물 밖 간이 의자에 앉아 나사가 하나, 아니 여러 개 풀린 듯한 상태로 출입구로 드나드는 물류 트럭들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허기짐에도 빵 한입을 입에 안 대고 멍하니 앉아있었다. 처음 물류 일을 시작한 지 수개월이 지났으니 현장에서 오는 힘듦은 적응이 되어 있었고, 무리에서 튀지 않고 성실한 노동력을 유지해왔던 나는 어느 순간 스스로에 대한 연민도 느끼지 않게 되었다.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게 된 것은 나쁘지 않았다. 극단적인 생각을 하지 않고 꾸준히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먹고사는데 집중하게 되니까. 하지만 나라는 사람이 당연히 표현할 수 있는, 인간으로서 표현해야만 하는 상황에 대한 감정이나 사고도 무뎌진 것이 부작용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타인에 대한 호소가 귀찮았다.

그냥 혼자 참을만하면 참는 것이 편했고 어떤 상황에도 감정적 반응을 스스로 하지 않는 상태가 편안했다.

한때는 스스로의 열정에 대해 타인에게 피력하는 것이 좋았고 다양한 감정 상태로 고조되거나 그 고조된 상태에서 타인과 소통하고 그들에게 조언을 하고 또 조언을 얻는 것에 종종 희열을 느끼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에 더 이상 의미를 두지 않게 된 이후부터는 '당연하게 타인에게 호소해야 할 것'에 대해서도 더 이상 의지를 가지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쉬는 시간 20분 동안 난 새삼 물류 현장에서 '막 신고' 일했던 이 운동화를 처음 샀을 때가 생각났다. 난 이 컨버스 운동화를 좋아했다. 생활의 여유가 있었을 때도 신발을 자주 구매하지 않았는데 가끔 사게 되면 늘 컨버스였다. 키가 작아 적당한 높이의 통굽 밑창 디자인의 운동화를 좋아했었고 그런 디자인들 중 컨버스 신발들이 가장 나의 취향이었다. 8-9만 원 가량이었고 난 행여 일찍 신발이 닳거나 더러워질까 나름 아꼈던 운동화였는데.

어느 순간 심적 만족을 채워줬던 이 신발은 '발이 편안해서 물류 아르바이트하면서 신고 다니기 좋겠네. 돈도 없어 안전화 사기 아까웠는데 잘 됐어.'라며 순전히 나름의 기능화로 여기며 애초에 이 물건에 마음을 준 것과는 정 반대의 가치를 부여했다.

안전화도 아니면서 실용적이라는 이유로 그 이상의 의미를 두지 않게 된 것이다.


간식빵도 먹지 않고 미지근해져 가는 딸기우유 한 모금도 입에 안 대고 피로 얼룩덜룩 적진 컨버스 밑창을 발을 빼 큰 미동도 없이 바라보았다. 육중한 바퀴와 엔진 소리를 내며 드나드는 물류 트럭의 소리와, 크고 작은 경적과 거미줄로 덮힌 의자 옆 물류 쓰레기통에서 나는 메케한 냄새. 버려지고 낡은 두꺼운 종이 박스들과 비닐의 소리와 냄새들. 그리고 그 사이 간이 의자에 앉아 간식 빵과 미지근해진 딸기우유를 들고 망가진 운동화와 발을 어떤 감정도 없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나.


이전에는 소중했던 것이 소중해지지 않게 된 현실.

뒤꿈치가 파여서 피가 나고 순간 '악!'소리가 날 정도로 아팠어도 별로 누군가에게 알리고 싶지도 않고 그렇게 내 발을 방치해도 괜찮게 된 마음을 갖게 된 현실.


뒤꿈치 상처는 꽤 오랫동안 흉터가 남았고 잠시 동안 설렘과 연민을 다시 느끼게 해주었던 컨버스 운동화는 그 이후로도 일주일은 더 신고 결국 버리게 되었다. 며칠 뒤 운동화를 축축이 적신 핏자국은 검게 변색돼 그것이 원래부터 그 운동화의 밑창에 그려진 일그러진 패턴처럼 착색돼 있었다.

컨버스 운동화를 버린 이후에는 애초부터 소중하게 여길만한 마음이 들지 않을만한, 쉽게 사고 쉽게 버릴 수 있는 값싼 안전화를 사서 신고 다녔다. 물류 알바를 나가지 않을 때는 엄마한테는 사이즈가 커서 맞지 않아 신발장 구석에 방치해둔 운동화를 구겨 신고 다녔다. 당시 나는 경기도 용인 집과 물류 센터 이외에는 서울로 나가지도 않았고 친구들도, 지인들도 만나지 않는 생계형 히키코모리였기 때문에 새로운 운동화를 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내가 다시 제대로 된 마음으로 다시 살아야겠다고 느낄 때쯤, 상하이로 가기 위해 나를 위한 신발이 필요하게 되었을 때쯤, 나는 똑같은 모델의 컨버스 운동화를 구매했다. 시간이 지나도 가격 차이는 크게 없었다.


24년 4월 경의 어느 날 무심히 작별 인사를 했던 피 묻은 운동화와 똑같은 신발을 신고 25년 2월 상하이를 다녀왔다. 그리고 25년 9월의 지금도 똑같은 신발을 신고 카페의 한구석에서 이렇게 그날을 회고하며 글을 쓴다.


내 뒤꿈치 흉터는 이미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옅어졌고 신발은 새로 산지 반년이 지나도 깨끗하다. 피도 얼룩도 없이.

난 컨버스의 저 별 심벌을 좋아한다. 어딘가 가볍게 폴짝 뛰어갈 수 있는 가벼움과 설렘을 주는 느낌이 들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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