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로서도, 무산계급의 노동자로서도 증명되지 못한 진짜 나의 '일'
조직과 사람들에게 속하고자 하는 소속감을 인간의 자아를 드높게 고취시켜 주기도, 끊임없이 좌절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그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존재가 되어 깊은 외로움과 고독과 마주했을 때야말로
사람은 자신의 '진짜 일'에 대한 탐구를 시작한다.
현대 사회에서 직업은 그 사람의 또 다른 신분증이자 인간과 인간이 서로를 견주어 비교해 평가하고 마침내 타인의 깊은 내면까지 정의 내리는 수단으로까지 이용된다. 2020년 오스카 감독상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에서도 이런 대사가 있지 않은가. "부자인데 착한 게 아니라, 부자니까 착한 거다."라고.
내 생각엔 부자니까 본질적으로 '착하다'라기보다는, 타인들이 대체적으로 인정하고 부유하다고 인식할 만한 사회적 직책과 직업을 갖고 있고 그에 따른 결과 중 돋보이는 것이 '경제적 부'라면 마음의 여유가 생기는 것은 사실이니 타인과 사회에 좀 더 너그럽고 친절한 태도가 좀 더 길게 유지되는 것이라고 본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선과 악을 같이 품고 있는 양면성의 존재이니 타고나길 착하거나 착하지 않다로 정의 내릴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 본연의 치졸하고 악랄한 악을 선보다 더 자주 마주치게 되면 인간이 본래 함께 갖고 있던 선에 대한 기대의 일말이 사라지기도 한다.
하루는 물류 센터에서 입고 전산 업무로 근무하던 중, 앞에 있던 50대 여성분이 바쁘지 않은 틈을 타 내게 알사탕 하나를 주며 '같은 처지의 사회적 계급이라는 확신'에서 오는 연민과 친근함으로 말을 걸어왔었다.
타인의 호의를 이렇게 표현하는 데는 당시 내가 단순히 '삐딱한' 마음을 갖고 있어서만도 아니었다.
사업 실패로 사람이 질려 하루 종일 타인과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그다지 신경 쓰는 사람이 없는 노동의 현장으로 왔으나, 어떤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든 인간이 모여 '군중'이 되는 곳이면 집단 이기주의가 생기기 마련이었다. 좁쌀만큼의 권력을 갖고 있으면 계급을 나누고 갑과 을이 형성되는 것은 사회적 인간의 본능인 건가 하고 덤덤히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내가 이 물류 현장에서 몇 년 전부터 일을 했는데.. 저쪽 작업반장이랑 관리자랑 내가 말도 트고 친해."
라든가 고인 물로 보이는 한마디로 현장 짬이 찬 사람들은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다니며 일이 서투르고 어수룩해 보이는 신입들에게 자신이 마치 현장 관리자라도 된다는 듯이 고압적인 태도로 교육하는 시늉을 내거나 욕을 하는 사람들도 다수였다.
그들은 "우리들이 더 능숙하게 노동을 하니 훨씬 힘든 상황을 다 감당하고 있다, 우리는 당일 출고 물량을 거의 전적으로 다 처리하고 있으며(당연히 말도 안 되는 주장이다) 당연히 짬이 찬 숙련된 노동자인 우리들은 '시발'을 아무렇지 않게 지껄여도 그건 욕이 아니라 당연한 권한이자 호기다."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들은 관리자도 작업반장도 아니었다. 똑같이 하루 일당 9만 원 남짓 받고 일하는 똑같은 일용직 노동자들이었다. 그러나 인간이란 것은 손톱의 티끌만큼이라도 좀 더 타인보다 나은 것을 갖고 있거나 위치에 있다고 스스로 판단하면 으례 계급을 나누며 약자에게 그 같잖은 '좁쌀만 한 권력'을 과시하고 싶은 것이다.
"효진 씨 엄청 열심히 하네, 일 잘하네. 손도 빠르고 성실하고. 내일도 근무해?"
"아니요, 내일은 제 개인 일이 있어서 근무는 쉬어요."
"무슨 일하는데?"
내가 물류 알바를 하면서 느낀 점은-대부분의 상황에서 난 기질적으로 예민하고, 사람들의 숨겨진 감정이나 기분을 썩 잘 파악하기 때문에-"무슨 일하는데"와 같은 질문이 마냥 순수한 마음만으로만 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나는 내가 원래는 디자이너고 사업 실패와 망가지고 헤어진 인간관계로 이전의 조직 생활로 돌아가기 어려워 도망치듯 이곳에 왔고 처음엔 힘들었지만 나름 블루칼라 일이 적성에 맞아 지금은 잘 적응해 나가고 있고 현재는 다시 나만의 디자인 작업을 하고 싶어 생계형으로 이곳 알바를 하며 쉬는 날은 '개인 작업'을 한다.'라고 긴 사실과 서사를 이야기하는 것은 물류 아르바이트생이라는 계급, 같은 무산계급자들이라는-그렇기에 나름의 동질감에서 오는 가벼운 친밀감과 애정으로 다가오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득이 되지 않는다.
인생의 힘든 모서리에서 온 사람들이기에 같이 먹고사는 형편이나 현장 관리자들 뒷담화만 적당히 맞춰주는 것이 좋은 인성으로 평가받지, 굳이 내가 무슨 일을 준비한다거나 꿈이 있다거나라고 이야기를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깝게 보면서 은근히 깎아내렸기 때문이다.
"나이도 이제 30대가 훌쩍 넘었는데 공부를 한다고? 연애는 안 해? 그렇게 바쁘게만 살면 뭐가 남는다 그래. 그러다 그냥 훅 간다니깐?"
"아이고 너도 이번 생은 힘들게 사는구나. 이번 생은 그냥 적당히 살고 다음 생에 기대해 봐야지. 난 그렇게 생각해."
"이제 나이가 있어서 결혼도 좀 그렇겠네. 혼자 사는 것도 나쁘지 않지. 난 그렇게 혼자 사는 사람들이 부럽더라?"
그들 입장에서는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나 또한 먹고사는 문제를 단기직 노동으로 번 돈으로 해결을 하니 내가 그들보다 훨씬 잘난 것도 없는데. 뭔가 다른 것을 꿈꾸거나 목표가 있다고 하니 거부감이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고 저들의 말에 동조하여 나 스스로를 비관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자신의 처지가 힘들다고 타인의 목표와 미래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비관적이면서 그 깊이는 얕은 운명론자들만큼이나 득이 되지 않는 것도 없다.
그리고 기질적으로 예민하고 작은 것에도 비교적 상처를 잘 받는 나는 대놓고 '시발'이라고 욕하는 일진 놀이 인간들 보다 '챙겨주는 척하며 내 상황과 노력을 친절하고 상냥하게 비관하는 인간들'이 훨씬 싫었다. 전자와 같은 부류의 인간은 단순한 성격이기 때문에 본인 스스로의 과시욕만 채우면 될 뿐, 세밀하게 타인의 에너지에 관여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자와 같은 부류의 인간은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타인의 마음에 치졸하게 얕은 상처를 내, 누군가의 마음 속에 부정적인 에너지를 스며들게 한다.
나는 물류 센터 근무를 하며 다른 근무자들과 꽤 잘 지내고 싶었고 트러블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힘든 시기를 거치면서 사람에 대한 애정은 많이 사라졌고, 그저 나는 이곳에서 거의 혼자 방해받지 않고 '성실하고 재빠른 쓸모 있는 노동자' 그 이상 그 이하로 인식되고 싶지 않았고 그래야 일하기 편했다. 현장 관리자들도, 같은 근무자들도 그저 나를 일 열심히 하는 알바생. 인상 좋은 성실하고 편안한 알바생 그 이상 그 이하로 여기지 않았으면 했다.
물론 부당하게 시비를 걸어오는 사람에게는 마냥 참지 않고 '관리자한테 이 부당한 상황을 보고 하겠다.'라며 권력자를 이용하여 압박하는 방법으로 대응했다. 좁쌀만 한 권한도 권력이라며 계급 놀이하는 사람에게는 진짜 권력을 갖고 있는 것의 공포가 가장 잘 먹혔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람들은 같은 처지라고 생각하면 서로 의지하고 도움을 주며 상부상조할 것 같지만 그런 순수한 선한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사회적 약자들은 가진 것이 많은 권력자들을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악마로 여겨 늘 스스로를 불쌍한 현대 사회의 노동자라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회적 지위가 높으나 낮으나 인간의 본능과 본성의 악함은 동일하다. 같은 처지의 노동자들끼리도 갑과 을을 나누고 권력자 행세를 하며 약자가 좀 더 약한 약자에게 부당한 시비를 걸며 자위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어느 조직 사회에서나 비슷하구나라는 것을 이곳에서 일을 하며 알게 되었다.
"그냥 자격증 공부해요."
나의 긴 서사는 이 정도로 표현하는 게 적당한 것이었다.
"무슨 자격증?"
"컴퓨터 쪽으로 자격증 공부하고 있어요. 별거 없어요."
"으흠 그래. 열심히 사네."
"아유 뭘요, 여기 저보다 더 훨씬 열심히 사시는 분들이 대부분인걸요."
"그래, 수고해 효진 씨-."
하지만 2025년 2월 상하이로 가기 직전까지 나는 어느 조직이나 무리, 계급에도 속하지 않는 것이 편안하면서도 '내가 이젠 정말 사회에서, 사람들에게서 어떤 애정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구나'라는, 사람에 대한 기대도 애정도 더 이상 느끼지 못하고 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허무함과 공허함이 가득했었다. 그렇다고 그게 싫은 느낌은 아니었다. 공허하지만 내겐 꼭 필요한 시간이었으니까.
인간은 자유를 원하고 추구하는 지적 생명체라고 하지만, 그 어떤 생명체들 보다 소속감에서 오는 안정감을 놓지 못하고 이 안정감에서 높은 욕구를 충족시킨다. 개인의 자유와 더불어 합당하고 건강한 성격을 가진 '조직'내 일원으로써의 균형을 이루어야 인간은 사회적으로 더 나은 방향으로 잘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자유의 해방도, 소속되고 싶은 조직도 없었고 미지근한 고인 물에서 부유하는 이끼 같은 존재로서 나의 정체성을 인식했었다. 물류 일을 하기 전, 소속되어 있다고 놓지 못했던 것들-사업을 하며 알게 된 사람들이나 투자처와 기관들에 대한 환상이나 콩깍지는 벗겨진지 오래였고, 이 바닥이나 저 바닥이나 그냥 사람들이 존재하는 곳은 다 같은 이끼라고 생각했다. 더 깨끗한 척하는 이끼냐 그러는 척할 필요도 없는 이끼냐의 차이뿐이다. 오로지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나 혼자만의 공허함과 고독에서 오는 스스로에 대한 고민과 성찰과 진짜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는 외로움만이 내 정체성의 전부였다. 그리고 그 시간은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시간이기도 했다.
그러니 사람은 살면서 한 번 쯤은,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타인과 조직에 의존하지 않고 그런 것들에서 멀리 떨어져 나와 고독한 시간을 갖는 경험이 필요하다.
정말 혼자로서의 본질적인 나를 직면했을 때
'나의 진짜 일'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다.
당일 출고 물량만 잘 처리하면 인정받는, 명예나 교양 그리고 진실한 인간관계는 필요 없는 곳. 하지만 내가 이 날것의 현장에서 시간이 지나며 꽤나 잘 적응했었던 이유는 적어도 '그러는 척' 하는 사람들은 없어서였다.
디자이너로 사회생활을 했을 때도 공허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오히려 적당히 괜찮아 보이는 벤처나 에이전시의 대표와 이사들은 더 잘나가는 기업의 임원으로 보이고 싶어 교양있는 척, 명예를 중요시하는 척하면서 "우리는 디자이너로서의 자부심을 갖고, 우리가 모 기업과 함께한 글로벌 프로젝트를 잘 마무리하면서.."라거나 스티브 잡스나 아마존의 베조스에 마치 빙의라도 된 것 마냥-그 대단한 ceo들이 지구 반대편의 작은 조직의 회장 놀이하는 인간에게 빙의를 허락해 줬을 리는 절대 만무하지만-직원들에게 억지의 존경을 호소할 때는 비웃음도 나지 않았었다. 실질적으로 내는 매출은 적으면서 법인으로 외제차를 뽑고 직원들의 월급은 바닥을 치면서 야근을 해도 어떻게든 공짜로 부려먹을 심보만 가득해 품위유지비 만큼은 진심이었던 그들의 가식은 적어도 물류 현장의 사람들에겐 없었다.
교양과 명예는 애초에 내가 경험한 두 조직 모두 없었고 있는 척해야 되는 곳인지, 있는 척할 필요조차 없는 곳인지 그 차이뿐이었으니.
물류 센터에서는 난 무산계급의 노동자였고 그것이 오랜 시간 내 사회적 신분이긴 했지만 딱히 자괴감이 들지는 않았다. 공허함과 외로움은 더 깊어갔지만 이 감정은 자괴감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 오히려 물류일에 적응해 나갈수록 나만이 할 수 있는, 내가 하고 싶은 디자인 작업물을 기획하고 다시 내 브랜드를 만들기 위한 시간을 확보해 나갈 수 있었다. 두 가지 일의 완벽한 분리였다. 왜냐하면 물류 일은 내 디자인 일에 전혀 간섭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게 할당된 8시간만 채우면 끝이었다. 회식이라는 사회적 관습의 연장도, 업무 야근도 없었다. 연장 근무가 있긴 했지만 그것은 자유였다. 물류 현장 내에서도 만연한 사람 간 서열 놀이도, 똑같이 어려운 형편에 먹고사는 것만 잘 해결하면 되지 인생에 꿈까지 있는 인간을 다른 종으로 여기고 비꼬는 것도 어느 사회 조직을 가나 비슷하기 때문에 적당히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고 나 자신을 낮추고 내 할 일만 열심히만 하면 썩 만족스러운 부분도 많았다.
어차피 기술을 갖고 디자이너의 자격을 갖추고 직장 생활을 했을 때도 난 직업적 정체성을 느끼지 못했다. 무산계급으로서나, 기술을 갖고 디자인을 하나 내겐 매한가지였다.
오히려 내가 이 디자인을 왜 하고 있어야 하나, 돈을 벌기 위해서는 하기 싫은 것도 해야 하는 당연한 것을 넘어 오히려 소액의 유료 플랫폼을 긁어와 대놓고 무지성으로 베끼라는 당시 회사의 대표의 지시를 따르는 상황에서 내게 직업적 정체성이 생길 리 만무했다.
30대 후반이 다 될 때까지 준비했던 사업과 인간관계들이 다 실패할 때까지 난 내게 소속된 조직에서, 그 조직으로부터 주어진 일에서 내 삶의 방향성과 정체성과 목표를 찾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난 더 허망함과 결핍에 허덕였다. 오히려 정말 '먹고사는' 생계의 의미로서만 존재하는 이 물류 현장에서 나는 내 일에 대한 본질을 찾게 되는 시간을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먹고사는 것 이외에 다른 가치를 찾는 사람을 배척하는 이곳 사람들 중에도 나와 비슷한-적어도 삶을 생계형 노동이 전부가 아닌, 그 이상의 것을 찾아 나서야 하는 생존을 넘어 사는 것 자체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도 만나게 되었다. 정말 극소수였지만 그 극소수의 사람들 덕분에 난 이 외로운 삶의 싸움에서 이겨나가는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그 만남의 시작은 두 아들을 둔 중년의 여성분이 내게 초코칩 쿠키 하나를 건네며 말을 건넸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다음 연재 글에서 이어가 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