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살리고 환경을 위한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지만.
24년 연초 겨울, 하루는 물류 센터에서 일을 하며 문득 소름 끼치게 공허함과 무력함을 느꼈던 순간이 있었다. 쏟아져 나오는 물류 쓰레기와 폐기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고 끊임없이 '버려지고' 그 버려진 것들이 쌓여 '버려진 것들이 어떤 비명도 호소도 없이 무력하게 큰 산이 되어가는 장면'을 바라보면서였다.
그때의 나는 나 자신이 스스로 사회에 버려졌거나 사회에서 버려지기를 선택한 인간이라고 스스로를 자책하고 그런 자신에게 무력함을 느끼고 있었던 시기였다.
"아, 버려진 인간이 버려진 쓰레기를 보며 버려진 것들 덕분에 먹고 사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왜냐하면 나는 원래 '버려진 것'을 살리고 세상을 위해 내 재능을 쓸 수 있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다. 그런 생각과 신념을 기록했던 과거의 흔적이 바로 2018년 브런치에 발행했던 이 글이다.
https://brunch.co.kr/@bom-and-jin/1
동물과 생명을 살리고 자연환경과 사회에 좋은 영향을 주는 디자인을 하는, 그런 선한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이런 강하고 선한 영향력을 갖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품게 해준 것은 다름 아닌 나의 반려견 '봄'이었다.
21세가 되던 해 나는 1년의 재수 생활을 마무리하고 다행히 가고 싶었던 곳 중 하나였던 미술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리고 대학에 입학하던 해 3월, 16년간 나와 함께 동고동락한 반려견 봄이가 우리 가족의 품으로 온 소중한 한 해기도 했다.
나약한 생명을 보살피고 먹이고 키우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셨었고 오빠도 인턴이며 취업 준비 등으로 사회생활에 바쁜 시기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대학 생활을 막 시작한 내가 그나마 시간적 여유가 있어 학교생활을 병행하며 생후 한 달도 아닌 강아지를 보살피는 데 여념이 없었다.
한편으로는 그토록 배우고 싶었던 미술 대학을 재수까지 하며 입학해서 시간을 뺏긴다 생각했었을 수도 있었지만 봄이를 챙기는 그 시간이 단 한 번도 아깝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작은 생명을 보살피며 내가 디자이너로서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데 근본을 만들어준 것이, 나의 반려견 봄이었기 때문이다.
봄이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대학 졸업해서 좋은 기업에 취직해 훗날 '돈 많이 버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가 내 꿈의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야 내가 과거 10대 때 동경했던 디자이너와 예술가들의 그림자라도 흉내 낼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하지만 21세부터 내 머릿속 세상은 이 작은 생명체에 온 정신이 집중되어 있었기에 대학 과제도 대부분 '동물과 생명'에 관한 내 고민을 담아 만들기 시작했고 나의 재능이 버려지고 상처받은 동물과, 또는 동물이라는 생명체를 넘어 상처받은 사회 사각지대의 인간을 위해 쓰이고 싶다고 깨달아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내적인 디자이너로서의 정체성이 새겨졌음에도 대학을 졸업해 사회에 나가는 순간, 순수하고 본질적인 신념보다는 눈앞의 현실을 경험해야 하는 것이 인생이었다.
기업과 고객을 만족시키는 아름답고 실용적인 디자인을 빠른 속도로 쉴 새 없이 해나가며 내가 디자이너인지 포토샵 기술 노동자인지 헷갈릴 만큼 사회 초년생의 박봉 디자이너로 버텨나갔다. 매달 들어오는 월급이 최고의 성과였다. 언제쯤 내가 하고 싶은 디자인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한 결핍과 고민은 계속 해나갔었지만 단순히 내가 하고 싶은 디자인과 창작을 하기 위해선 창작자로서 겪어야만 하는 필수적인 과제-실패와 상실이 있다는 것은 전혀 모른 채 도전이라는 오만한 패기로 무턱대고 사업을 시작한 것이었다.
이전에 발행한 글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오만했던 나의 도전은 당연하게도 실패로 돌아왔고 그 결과는 참담했다. 돈도 잃고 사람도 잃고 자신을 믿는 마음도 잃어 그저 생계를 버티기 위해 경기도 외곽의 물류 공장에서 하루하루를 버텨 나가는 것이 전부인 시절이 꽤 오랜 시간 지속되었었다.
그리고 가장 스스로의 어둠에서 버티기만 했을 시절의 내가 쌓여 있는 물류 쓰레기를 보며 내가 정말 이루고자 하는 선한 디자이너, 창작자로서의 의미는 무엇이었나. 하고 공허함과 무력함으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 것이었다.
버려지는 것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곳에서 일하고 돈을 벌어 생계를 유지하면서 생명과 환경을 위한 브랜드를 만들겠노라 꿈꾸었던 시절을 생각했다. 어느 날 플라스틱과 비닐로 위가 잠식되어 폐사한 고래에 대한 기사를 보며 노 플라스틱 브랜드를 만들겠다고 꿈꾸었던 마음을 떠올렸다.
썩지도 않은 가장 저렴한 비닐에 담긴 상품을 난 몇 개나 포장해서 이 물류 센터 밖으로 내보냈을까 하면서도 오늘 연장 근무로 받을 추가 수당을 생각하며 흐뭇해하는 나 자신이 있다. 퇴근길에 뉴스에서 코끼리 개체 수 때문에 계획적 대량 학살을 자행한다는 어느 아프리카 국가의 뉴스를 보고 마음 아파하는 나의 모순됨을 본다.
인간은 다면적이고 모순적이다. 나 또한 인간이기에 모순과 오만으로 범벅된 한 인간일 뿐이다.
동시에 생명과 환경을 위한 브랜드를 만드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고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싶어 하는, 참으로 가식적인 인간이다.
나의 모든 것이 모순적이어서 공허했고 최근까지도 그 공허함과 무력함이 나를 짓눌렀다.
그 공허함과 무력함과 나의 오만과 모순성을 그대로 인정하고 부유하는 공허에서 벗어나게 된 계기는 어느 작가의 책을 읽고 나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