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길이 부산포 마을을 덮치듯 번져 나갔다. 타는 살 냄새와 연기, 달아나는 사람들을 쫓는 창의 쇳소리가 뒤엉켜 공기를 찢었다.
바람은 비명과 흙먼지를 몰고 와, 무너진 담장과 쓰러진 말의 사체를 스쳤다.
임해군은 그 속에서 불타는 짐짝을 헤치고, 오래 간직해 온 작은 북을 꺼내 들었다. 붉게 그을린 북의 표면에는 재가 얇게 내려앉아 있었다. 손끝이 떨렸으나, 그의 목소리는 무너지지 않았다.
“이것을 아비라 여기고 가져가거라.”
피 묻은 손이 어린 아들의 손을 감싸 쥐었다. 그 북은 언젠가 세손이 첫 사냥을 나설 때 주라며, 선왕께서 친히 하사한 것이었다.
일곱 살 명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버지의 손끝에서 이별이 전해졌다.
사방에서 도망치는 백성들의 울음이 귀를 찢듯 들려왔다. 어린 가슴은 두려움과 불안에 떨렸으나, 명이는 울지 않았다. 두 손으로 불탄 북을 품에 안았다. 마치 그것이 아버지를 붙드는 마지막 끈이라도 되는 듯이.
임해군의 속은 바짝 타들어 갔다.
명이가 가야 할 길이 곧 죽음의 길임을 알면서도, 막을 힘이 없었다. 그의 뒤편에서 내금위장이 떨고 있는 아내를 바라보았다. 그 품에는 아직 세상의 잔혹함을 모르는 딸, 수현이 안겨 있었다.
그는 딸을 받아 안아 무릎을 굽히고,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겨우 열었다.
“수현아, 너는 세손 마마를 따라가거라. 마마 곁에서 잘 보필해야 한다. 저들이 궁녀는 데려갈 수 없다고 하였다.”
수현의 어미가 매달리듯 속삭였다.
“나리, 수현은 이제 겨우 여덟입니다. 어미 품에만 있던 아이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안 됩니다. 저 왜놈들이 얼마나 잔인한지 아시지 않습니까.”
내금위장은 붉어진 눈가를 감추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대답 대신 수현을 명이 뒤에 세웠다. 겁에 질린 아이는 아버지의 옷자락을 붙잡으려 했지만, 아비는 고개를 저었다.
결국, 그녀는 세손의 옷자락을 꼭 움켜쥐었다. 울음이 수현을 집어삼킬 듯 밀려왔으나, 옷자락 너머로 전해지는 세손의 떨림이 그 울음을 눌렀다. 수현은 눈물이 고인 얼굴로, 그 등 뒤로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임해군은 이를 악물었다.
돌아오지 못할 길임을 알면서도, 분통만 터질 뿐 막을 도리가 없었다. 불과 몇 시진 전, 가토와 그 가신들이 세손과 포로로 잡힌 기술자들을 인질로 끌고 가겠다고 통보했기 때문이다.
아무런 준비조차 할 시간이 없었다. 겨우 일곱 살의 세손을, 지켜줄 이 하나 없이 야만의 땅으로 떠나보내야 하다니- 그 참담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때 한 상궁이 앞으로 나섰다.
“저도 세손 마마를 따르겠습니다. 저는 마마의 먼 친척, 할머니뻘이니 저들도 저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안상궁의 말에 임해군의 굳게 얼어붙은 얼굴이 미세하게 누그러졌다. 그는 윗대 선왕의 총애를 입었던 일이 있음을 떠올리며, 그녀의 말이 허언이 아님을 스스로 확인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멀리서 가토 기요마사의 고함이 들려왔다.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자, 도공, 기술이 있는 자만 배에 태워라! 나머지는 모두 없애라!”
그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갑고 가차 없었다.
명령을 받은 가신 모리모토와 아이다가 바삐 움직였다. 울산왜성에서 끌려온 포로들과 부산 곳곳에서 잡혀 온 이들이 줄지어 세워졌다. 곧 왜병들이 뛰어다니며, 동래성과 부산포 일대에 불을 질렀다.
피비린내와 연기가 얽혀 밤공기를 뒤덮었다. 임해군은 분노로 치를 떨었다.
“약속과 다르지 않소! 도공과 기술자만 데려가고 인질은 풀어준다 하지 않았소! 그 약속의 징표로 내 아들을 데려간다 하지 않았소!”
가토의 눈빛이 번개처럼 그를 꿰뚫었다.
“조선 조정과의 협상만 없었다면, 당신도 이들과 함께 전리품으로 목이 잘렸을 것이오. 전리품 중 으뜸은 왕족의 머리지만, 당신 왕실의 거래로 아들의 목숨이 대신한 것이니- 천운에 감사하시오.”
그는 냉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가신 모리모토가 병사들을 이끌고 인질들을 배로 몰아넣었다. 차갑게 굳은 아버지의 손이 자신을 놓는 순간, 명이는 작은 소북을 품에 꼭 껴안았다. 떨리는 발로 부산포에 정박한 왜군의 배로 향했다.
그의 눈에 마지막으로 비친 것은, 불길 속에 서 있는 아버지의 무력한 얼굴이었다. 눈물이 차올랐지만, 명이는 끝내 울지 않았다.
그때 한 여인이 울부짖으며 앞으로 나섰다.
“안 됩니다! 이 아이는 어미와 떨어지기 싫어 매달리다 여기까지 온 불쌍한 아이입니다! 저는 지금껏 나리들의 수발을 들어왔습니다. 글을 모르는 무식쟁이라 해서 이렇게 죽일 수는 없습니다. 살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모리모토의 부하가 여인의 배를 잔혹하게 걷어찼다. 이내 번뜩인 칼날이 허공을 그었고, 여인의 목이 꺾이며 피가 흩어졌다. 붉은 핏방울이 바닥을 타고 번졌다.
그 곁에서 어린 딸 순이가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울음조차 터뜨리지 못한 채, 꺽꺽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명이의 발걸음이 그 자리에서 멈췄다. 그는 곧 아이의 팔을 잡아 일으키며 또렷하게 말했다.
“이 아이는 내 일행이다.”
안상궁이 뒤에서 얼굴을 찡그리자, 명이는 짧게 눈길을 주며 물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안상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때, 왜병들이 잠시 멈칫한 틈을 타 가토가 헐떡이며 달려왔다. 그의 눈은 피로와 분노로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이순신의 배가 이쪽으로 향해 오고 있다! 마을에 어서 불을 지르고, 걷지 못하는 자와 여자, 아이들은 모두 죽여라! 죽은 자의 귀만 베어가라- 서둘러라!”
가토의 고함이 사방으로 메아리쳤다. 왜병들은 미친 듯 흩어져 죽어가는 자의 귀를 잘라내고, 식은 시신의 코와 귀를 도려 소금 통에 담았다. 짙은 피비린내와 타는 냄새가 부산포를 뒤덮었다.
한때 전장을 휩쓸던 맹장이었지만, 지금의 가토는 울산왜성에서 간신히 도망쳐 조선 수군에게 쫓기는 신세였다. 초조와 분노가 그를 옥죄자, 그는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모리모토가 명이 일행을 향해 외쳤다.
“어서 배에 올라가라! 빨리!”
그러나 길은 얼어붙어 있었다. 눈 위로 불길에 녹은 진흙이 질퍽거렸고, 사람들의 걸음은 더뎠다. 그 속에서 어린 명이는 발을 제대로 옮기지 못했고, 결국 작은 발의 혜(鞋)가 미끄러지며 바닥에 넘어졌다.
그 순간, 옹기장이 칠곡이가 재빨리 다가와 등을 내밀었다.
“길이 위험합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걸을 수 있다.”
명이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으나, 칠곡은 짧게 말했다.
“송구하옵니다.”
그리고는 주저하지 않고 명이를 번쩍 들어 올렸다.
눈발이 흩날리는 선창을 지나, 그는 세손을 안은 채 배 위로 뛰어올랐다. 뒤이어 종종걸음으로 따르는 수현의 눈앞에 참혹한 광경이 펼쳐졌다. 선창에 나뒹구는 시신들,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백성들, 그리고 멀어져만 가는 부모의 모습.
어린 가슴은 무너져 내렸고, 눈길은 불타는 마을에 붙들린 채 떨어지지 않았다.
“저것이 침략당한 자의 서러움이고, 아픔이다.”
아직 너무 어려 그 말을 입에 올리기조차 버거운 세손이었으나,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어두운 바다 위, 불타는 마을의 불빛이 점처럼 멀어져 갔다. 차가운 바닷바람이 몰아치자, 수현은 오금이 저려 무릎을 꿇고 배 바닥에 주저앉았다. 한겨울의 바다는 냉혹했다. 눈물조차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갑판 위의 사람들은 모두 세손을 향해 엎드려 흐느꼈다. 어린 명이는 그들의 울음 앞에서 그저 되뇌었다.
“미안하네... 미안하네.”
그 말은 스스로의 심장을 찌르는 칼날 같았다.
그는 떨고 있는 수현과 옆에서 웅크린 소녀 순이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잠시 뒤, 안상궁도 그 곁에 주저앉아 손으로 입을 막은 채 터져 나오는 울음을 삼켰다.
그 밤, 갑판 위는 끌려가는 조선인의 눈물과 한숨으로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