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나가야(長屋)의 명이

by 릿다


새벽 네 시.

아직 어둠이 완전히 걷히지 않았다. 하루의 문이 열리듯, 조선인 집단촌 ‘나가야(長屋)’의 아침이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다.


좁은 방 안에서는 성으로 일을 나가기 전, 사람들이 서둘러 아침을 먹고 있었다. 안상궁이 정성껏 끓인 된장국 냄새가 방 안 가득 퍼졌다. 수현과 순이는 작은 그릇을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사람들 앞에 국을 내려놓았다.

돌이 아범이 국을 한 숟갈 뜨더니 감탄조로 말했다.
“역시 된장은 우리 조선 된장이지. 짭조름하고 구수한 게 제맛이야. 왜놈들 된장은 달짝지근해서 속이 니글거려 못 먹겠더라니까.”


사람들이 일제히 맞장구를 치자, 옹기쟁이 칠곡이가 웃으며 거들었다.
“안상궁마마 음식 솜씨 덕에 저희 같은 천한 것들이 호강을 하는 겁니다.”


그 말에 안상궁의 얼굴이 단숨에 굳어졌다.
“세손 마마 앞이다. 그리고 이 나가야에는 천한 자란 없다고, 세손 마마께서 하신 말씀 잊었느냐.”

단호한 목소리에 방 안의 사람들이 목을 움츠렸다. 숟가락을 움직이던 손이 멈추고, 서로의 눈빛만 오갔다. 반상의 구별이 몸에 밴 조선 사람들이었다. 안상궁의 말을 어디까지 마음에 새겨야 할지, 모두가 잠시 숨을 죽였다.


정적을 깨듯, 대장장이 억쇠 할아범이 입을 열었다.
“올봄에는 사쯔마 섬에서 종자를 구해 고구마를 좀 심어볼까 합니다. 고구마는 말려두면 겨울 양식으로 두고두고 쓸 수 있으니 말입니다.”


도공 재복이도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
“맞습니다. 옥수수도 같이 심어두면 겨울나기가 한결 수월할 겁니다.”

양식 이야기 덕분에 잠시나마 사람들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스쳤다. 그러나 그 기색도 오래가진 않았다. 오늘도 새벽이 밝자마자, 그들은 옛 구마모토성으로 끌려가 성벽에 쓸 돌을 나르고, 재건 공사에 동원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억눌린 불만이 여기저기서 새어 나왔다.
“우린 본래 도공들인데, 어째서 집 짓는 일을 시키는 건지 알 수가 없소.”
“그러게 말이오. 대장장이가 팔자에도 없는 목수질이라니, 원통할 노릇이지.”

또 다른 이가 고개를 숙이며 낮게 중얼거렸다.
“게다가 우리가 구운 질그릇이며, 대장간에서 만든 칼과 쟁기까지 성에서 강탈하듯 헐값에 빼앗아 가지 않소? 이래서야 올겨울을 어찌 날 수 있겠소.

조선 땅에서도 살기는 고되었지만, 그래도 거긴 내 나라요, 내 땅이라 마음은 편했는데... 여기는 몸도 마음도 고달프니, 서글플 따름이오.”

그 말에 방 안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떨구었다. 야마토 땅에 강제로 끌려와, 말 한마디라도 허투루 했다간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삶이었다. 그들의 어깨는 늘 저절로 움츠러들었고, 길에서 무사나 왜 나라 병사만 마주쳐도 자라처럼 목을 움츠리고 숨기 바빴다.


전답이 없는 이곳에서 벼농사를 지을 수도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몰래 쇠붙이를 빼돌리거나, 가마에서 흠이 생긴 그릇을 은밀히 내다 팔아 먹을거리와 바꾸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주변의 눈치를 보며 거친 땅을 일궜다. 야생의 계간지 같은 척박한 밭에서 고구마와 감자, 옥수수를 심었다. 거친 흙 속에서도 뿌리내릴 수 있는 곡식에, 그들의 생명이 매달려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명이의 가슴은 저릿하게 저려왔다. 그러나 그는 애써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은 생각이오. 올봄에는 그렇게 해 봅시다.”


그의 한마디는 짧았지만, 사람들에게는 하루를 버티게 하는 작은 등불이었다. 이날도 그들은 거친 보리밥으로 허기를 달랜 뒤, 무거운 몸을 일으켜 옛 구마모토성으로 향했다.

히고(지금의 구마모토시), 바닷가 외진 귀퉁이에 가토 기요마사는 조선인의 거처를 마련했다. 엉성한 목재를 이어 붙인 집들이 길게 늘어선 곳-


히고 사람들은 이곳을 ‘나가야(長屋)’라 불렀다. 그것이 야마토의 빈민촌을 뜻하는 말임을, 조선 사람들은 한참 뒤에야 알았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끌려온 조선 포로들에게 그곳은 유일한 안식처였다. 같은 말을 쓰고, 같은 음식을 나누며, 서로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은 작은 위안을 얻었다.

세손 명이는 본래 가토 기요마사의 성에서 인질로 지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완강히 청했다.
“저를 저들과 함께 지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 의지가 워낙 강경하여, 기요마사도 오랜 망설임 끝에 결국 허락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기요마사는 히데요시의 칠본장(七本槍)으로, 화려한 무장으로 이름이 높았으나 그 또한 고된 세월을 살아온 사내였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고, 먼 친척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문에서 자랐다. 천한 신분 탓에 글을 배울 기회가 없었던 히데요시는 천하를 손에 넣고도 문서 한 장 읽지 못하는 까막눈이었다. 그래서 늘 학문에 대한 열등감에 시달렸다.


그런 히데요시 밑에서 자란 기요마사는 유난히 학문이 뛰어난 이를 귀히 여겼다. 아직 주자학을 깊이 접한 적 없는 그의 눈에, 조선에서 성리학을 익힌 세손 명이는 낯설고도 특별한 소년이었다.

명이가 펼친 사서삼경과, 스스로 주석까지 달아 해석하는 『법구경』의 구절들은 기요마사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소년의 눈빛은 맑았고, 목소리에는 나이보다 성숙한 기품이 있었다.

기요마사는 처음엔 호기심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그러다 그 감정은 곧 감탄으로 바뀌었다. 그는 놀라움을 감추며, 묵묵히 명이를 지켜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기요마사는 외아들 타케시의 학문을 명이에게 맡기기로 했다. 그를 곁에 두고 더 지켜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명이도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곳에서 살아남으려면, 기요마사의 신임이 꼭 필요했다.

그날 이후, 그는 밤마다 희미한 촛불 아래에서 글을 읽고 외웠다. 예전에는 즐거움으로 파고들던 배움이었지만, 지금은 생존이었다. 오늘의 한 끼를 위해와 내일의 목숨을 위해 그는 글을 놓지 않았다.

붓끝에서 흘러나온 글씨는 누구나 인정할 만큼 단정했다. 그러나 그 힘 안에는, 누구도 알지 못하는 고독과 절박함의 숨겨져 있었다.




수현은 모래판 위에 남은 글자를 긴 막대기로 천천히 쓸어 지웠다. 손끝에 닿는 거친 모래의 감촉이 그녀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잠시 전, 명이가 적어둔 행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十年磨一劍,霜刃未曾試(십년마일검 상인미증시)-
십 년 동안 한 자루의 검을 갈았으나, 아직 그 서리 같은 칼날을 시험해 보지 못했다.

그 문장은 명이의 아버지, 임해군이 어린 아들에게 가르쳐준 시였다. 그날 임해군은 붓을 들고 말했다.

“이 구절은 당나라 시인 가도의 <검객>에 나오는 시다. 꿈을 이루려면 크고 멀리 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 작은 일에 급급하면 조급해지고, 멀리 내다보는 여유를 잃게 된다.

나무의 잔가지를 치는 데는 잠시의 칼날로도 충분하지만, 나무의 밑동을 자르려면 오랜 담금질이 필요하다. 그것이 곧 큰 뜻을 이룰 사람의 자세다.”


어린 명이는 그 자리에 서서 글씨를 한참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바닥으로 그 흔적을 지웠다. 그 시절, 그는 임해군의 뒤를 이을 세손이었다. 북쪽에는 오랑캐가, 동해 바다 너머에는 왜구가 호시탐탐 조선을 노렸다.

불안한 시대의 바람이 궁궐 안까지 스며들던 때, 임해군은 조급해지는 마음을 다스리고자 아들에게 이 구절을 새겨주었다.


그때의 기억이 명이의 가슴속에서 되살아났다.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더디더라도, 확실하고 단단한 걸음이라...’


수현은 생각에 잠긴 그를 바라보다가, 그의 마음이 어렴풋이 전해지는 듯했다. 인질로 끌려온 어린 군주가 마주했을 절망의 그림자가 명이의 얼굴에 스칠 때면, 수현의 가슴에도 찬 바람이 스며드는 듯했다.

오늘따라 방 한쪽의 화톳불은 이월의 매서운 바람을 막아내지 못하는지 등이 시렸다. 봄이라 하기엔 아직 이른 계절, 찬 기운이 방 안 가득 감돌았다.






해가 기울 무렵, 나가야 사람들은 구마모토성에서 돌아와 배당된 그릇 빚기와 대장간 일로 분주히 움직였다.


수현과 순이가 새끼줄에 갓 헹군 옷을 널고 있는데, 방을 나선 명이가 가마터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세손 마마께서 가마터를 보러 가시나 봐요.”
순이가 낮게 속삭였다. 수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눈으로 쫓았다.

그때, 가마터 쪽에서 돌이 아범이 헐레벌떡 달려와 명이 앞에 엎어지듯 무릎을 꿇었다. 숨을 고르기도 전에 그의 떨리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세손마마, 우리 돌이 놈이 나가야를 나간 것 같습니다. 며칠 전부터 방에만 틀어박혀 끙끙대기에 어디 아픈 줄 알았는데, 지금 들여다보니 방에 없습니다요.”


돌이는 아버지와 함께 끌려와 도공 일을 거들던 젊은이였다. 그는 늘 입버릇처럼 말했다.

“왜놈을 죽여서라도 헤엄쳐 조선으로 돌아갈 것이구먼.”


그 말이 떠오르자, 명이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기요마사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돌이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명이는 숨을 깊게 들이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선 가마터에 가서 기다리시게.”

그는 대장간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수현을 돌아보았다. 수현은 그 시선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순이야, 미안하지만 이건 좀 부탁해.”

순이도 놀라서 몸을 비켜 주며 말했다.
“걱정 마시고, 어서 가보세요.”

수현은 빨래 바구니를 순이에게 맡기고 명이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의 발걸음이 저녁 어둠 속에 짙게 드리워졌다. 서로의 그림자가 불안하게 흔들리며 겹쳐졌다.

대장간 안은 불길이 타오르며 일렁거렸다. 억쇠 할아범은 둔무질을 멈추고, 안으로 들어서는 명이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읽은 듯, 급히 다가왔다.


명이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돌이가... 나가야를 나간 것 같습니다.”


순간, 억쇠 할아범의 얼굴이 굳더니 허공으로 주먹을 내질렀다.
“이놈, 왜나라 말도 제대로 못 하는 게 어디로 달아날 수 있다고 여길 나간 것이여! 내가 그렇게 타일렀는데도 기어이... 사무라이에게 걸리면 벌통에 쏘이듯 칼을 맞을 텐데, 바보 같은 자식!”


분노와 안타까움이 뒤섞인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는 이내 대장간 문을 박차고 뛰쳐나가려 했으나, 명이가 그 팔을 붙잡았다.

“기다리시게.”


잠시 뒤, 안상궁과 도공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대장간 안이 술렁였다. 모두의 시선이 명이에게 쏠렸다. 그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모두 숨을 죽였다.


명이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칠곡이와 재복이는 나와 함께 저잣거리를 둘러보도록 하세.”

그때 수현이 한발 앞으로 나섰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명이는 몸을 돌리며 말했다.

“위험할 수 있다. 여기서 기다리거라.”

수현이 낮은 목소리로 그를 막았다.
“여자가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그 말에 명이의 눈빛이 잠시 흔들리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나가야 사람들은 함부로 밖을 나설 수 없었다. 그러나 명이만은 달랐다. 혹여 들키더라도, ‘도기에 대해 알아보러 나왔다’고 하면 의심을 피할 수 있었다. 그들은 몇 시진 동안 흩어져 저잣거리와 인근을 샅샅이 둘러보았다. 그러나 돌이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석양이 바다에 잠기자, 그들은 해안으로 향했다. 바닷가의 모래사장에 모인 사람들은 바다 끝으로 이어진 별빛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차가운 바닷바람이 얼굴을 스쳤고, 파도 소리가 가슴을 후벼팠다.

“그 녀석, 설령 헤엄치다 죽었더라도... 조선으로 가는 바닷길 위에서라면 행복했을 겁니다.”


재복이의 목소리가 파도에 섞여 흩어졌다. 칠곡이도 허공을 응시한 채 낮게 말했다.

“나도 밤마다 헤엄쳐 조선으로 가는 꿈을 꿉니다.”


그 말에 명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돌이 아범이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거네. 그만 돌아가세.”

사람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닷바람이 옷자락을 스치며 흩어졌다. 모래 위에 깊게 늘어진 그림자들이 별빛과 함께 흔들렸다. 그들은 그렇게, 별빛이 내려앉은 바닷길을 따라 조용히 걸었다.


그때였다.

검은 밤바다의 그림자 속에서, 스르르 흰 물체가 다가왔다. 낡은 기모노 차림의 아키였다. 아키는 구마모토성 공사장에서 잡일을 돕는 마에다의 딸이었기에 모두 아는 얼굴이었다. 그들은 순간, 아는 이를 만나 난처한 듯 고개를 돌려 그녀를 모른 척했다.


창백한 얼굴, 바람만 스쳐도 쓰러질 듯한 가냘픈 몸. 그녀는 그림자처럼 움직였고, 사람들은 늘 그녀의 존재를 잊곤 했다. 공사장 한켠에서 오니기리를 나누어 주거나, 물동이를 들어 나르는 일로 하루를 채우는 소녀였다.


그런 아키가 입을 열었다. 낯설지만 또렷한 목소리였다.
“저... 도리상 찾으시는 거지요?”

그들은 놀라 숨을 삼켰다. 순간, 공기가 얼어붙은 듯 정적이 흘렀다. 아키는 잠시 그들을 둘러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저를 따라오세요.”


재복이가 급히 물었다.
“돌이, 어디 있는지 아는 거요?”


아키는 조선말을 전부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돌이’라는 이름만큼은 알아들은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어디 있소? 만나게 해주시오.”
명이가 말했다.

아키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이고 앞서 걸었다. 그녀의 발자국을 따라, 명이와 수현 그리고 일행이 뒤를 따랐다.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을 몇 차례 꺾어 들어갔다. 작은 하천 위에 걸린 나무판 다리를 건너자, 허름한 목조 건물 한 채가 어둠 속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키가 대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희미한 등불이 켜져 있었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질 무렵, 그들은 방에 누워 있는 돌이의 모습을 보았다. 머리에는 흰 천이 칭칭 감겨 있었다.

“돌이야!”

재복이가 달려들 듯 외쳤다.

돌이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때, 벽에 붙어 서 있는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오이지처럼 말라붙은 얼굴의 중년 여인이었다. 아키의 어머니인 듯했다.

잠시 후, 옆방의 미닫이가 열리며 마에다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앉은 채로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해안가에 쓰러져 있는 걸 우리 아키가 발견해 데려왔소. 벼랑에서 떨어지며 머리를 다친 것 같았지만, 의원이 말하길 큰 탈은 없다 하더이다.

데려가시오.”


명이는 두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모으고, 세이자 자세로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칠곡이가 돌이를 업고 길을 나섰다. 어둠을 틈타 나가야로 돌아가는 길- 사람들의 발걸음에는 안도의 기운이 서려 있었다.


나가야 어귀에서 그들을 기다리던 돌이 아범은 아들을 끌어안고 울부짖듯 말했다.

“십 년 감수했다, 이놈아!”

그의 눈물이 비처럼 쏟아졌다.






그렇게 불안했던 나가야의 밤이 지나고, 새벽은 다시 사람들을 일터로 몰아냈다. 부엌일을 마친 수현은 잠시 짬을 내어 명이의 글공부를 도왔다. 그러던 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밖에는 순이와 함께 아키가 서 있었다.
낡은 기모노 차림이었으나, 옷매무새는 단정했다. 작고 창백한 얼굴, 옆으로 길게 그어진 눈매는 말없이 서 있는데도 잔잔한 미소를 띠는 듯했다.


“도리상에게 전해줄 게 있어요.”

아키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또렷했다.


수현은 그녀를 데리고 가마터로 향했다. 여전히 몸이 성치 않은 돌이는 아버지 곁에서 불을 지피고 있었다. 아키는 주저하지 않고 돌이에게 다가가 작은 보자기를 내밀었다.
“도리상, 몸은 좀 괜찮으세요? 상처에 바를 약을 가져왔어요.”


그녀는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돌이 옆에 앉았다. 보자기를 풀어 고래기름에 약초가루를 섞은 연고를 조심스레 그의 상처에 발랐다. 돌이는 얼굴이 붉어져 눈을 내리깔았지만, 그 손길을 뿌리치지 않았다.

아키는 남은 연고를 다시 싸서 돌이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리고 마치 오래전부터 그 일을 해온 사람처럼, 자연스레 돌이와 함께 가마에 불을 지폈다.


돌이 아범은 그 모습을 넋을 잃은 듯 바라보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아들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를 보고는 슬며시 고개를 돌려, 들고 있던 도끼로 다시 장작을 패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 아키는 나가야에서 그렇게 자신의 자리를 조금씩 만들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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