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을 쪼개는 소리와 함께 둔탁한 메아리가 성안에 울려 퍼졌다. 돌이 나무판 위를 구르며 내는 거친 마찰음, 그 위로 땀방울이 툭툭 떨어져 부서지듯 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바람에 흩날리는 벚꽃잎에 실려 수현의 귓가로 스며들었다.
“영차, 영차!”
“아, 이 사람아! 이리로 보내라니까, 이리로.”
야마토의 말 사이로 간간히 섞여 들려오는 조선말. 그 몇 마디 낯익은 소리에 수현의 눈앞에는 고향의 봄이 겹쳐졌다. 마당 가득 흩날리던 벚꽃잎이 오얏꽃으로 변하며, 기억 속 어느 봄날을 살며시 흔들어 깨웠다. 순간, 그리움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수현은 구마모토성의 작은 별관 쪽마루에 걸터앉아 있었다. 따뜻한 봄 햇볕이 바람을 타고 얼굴에 내려앉았다. 방 안에서는 명이의 낭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분명 명이의 목소리인데, 그가 하는 말은 낯선 야마토의 문자였다.
“백성을 다스리는 이는 늘 스스로 돌이켜 바르게 세워야 합니다.”
타케시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명이의 말이 잔잔히 이어졌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가 이런 말을 했지요.
‘옥을 시험하려면 사흘은 불에 달궈야 하고, 사람의 재능을 알아보려면 칠 년은 기다려야 한다(시옥요소삼일만 변재수대칠녀기, 試玉要燒三日滿 辨材須待七年期).’
아무리 빼어난 옥이라도 갈고 닦지 않으면 제 빛을 드러낼 수 없듯, 학문이 깊어야 올바른 신하와 아첨하는 자를 가릴 수 있습니다.”
잠시 숨을 고르듯 말이 멈추더니, 다시 봄바람을 타고 명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시경』에도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언자무죄 문자족계(言者無罪 聞者足戒).’
말한 이는 죄가 없고, 듣는 이는 그것을 경계로 삼아야 한다는 뜻이지요. 지금 도련님께서 두려움이 없는 것은 높은 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높이는 권세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깨끗한 처신과 바른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니 언제나 몸가짐을 맑게 하고, 학문으로 스스로를 다스려야 합니다.”
그 말소리가 봄 햇살과 함께 수현의 가슴에 스며들었다. 수현은 명이의 청아한 목소리와 올곧은 지성이 좋았다. 그래서 그의 말을 하나하나 되뇌며 가슴 깊이 새겼다.
잠시 후, 낮게 깔린 타케시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무사다. 검을 휘두를 때보다 즐거운 순간은 없지. 검을 겨루며 충신을 알아보는 것이 법을 익히는 일이다.
그대의 말투를 듣고 있으면 꼭 우리 아버지를 대하는 것 같아. 말투며 글의 취향, 정치적 안목, 그리고 무엇보다 부처님을 향한 그 불심까지...
그대는 마치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은 혈육 같다고나 할까.”
그 말에는 부러움과 장난기가 동시에 섞여 있었다. 명이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법구경에 ‘깨달으면 부처가 된다’하였지요. 그 말은 이 야마토 땅에서도 그대와 나의 구별이 사라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어찌 내 마음이 흔들리지 않겠습니까.”
그 순간, 타케시가 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장난스럽게 외쳤다.
“그대는 머리가 너무 좋아! 위험할 정도로!”
그리고는 쪽마루에 앉아 있던 수현을 향해 환하게 웃었다. 마침 그때, 기요마사의 가신이 마당으로 들어서며 명이와 타케시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가토 님이 찾으십니다.”
명이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방을 나섰다. 문을 나서기 전, 그는 잠시 뒤돌아 수현을 바라보았다. 수현은 기다리겠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명이가 본관 성곽 쪽으로 향하자, 수현도 따라 일어섰다. 본관 앞에서 그를 기다리려는 참이었다. 그때 타케시가 옆에 있던 하인을 불렀다.
“명이 스승 일 끝나면 이리로 모셔 와라. 일행이 기다린다고 전해.”
말을 마치며 그는 슬쩍 눈짓으로 수현을 가리켰다.
하인은 허리를 숙이며 대답한 뒤, 본관 쪽으로 달려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타케시가 수현 곁으로 다가와 나란히 앉았다.
툇마루 아래로 봄바람이 스치며 벚꽃잎이 흩날렸다. 마당 가득 번진 분홍빛이 바람결에 나풀거리다, 꽃잎 하나가 수현의 머리카락 위에 내려앉았다. 그녀는 습관처럼 손을 들어 머리를 쓸어내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타케시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가만히 있어 봐.”
그가 손끝으로 꽃잎을 털어내다, 문득 수현의 손목을 잡았다.
“너, 요즘 검도 배우지?”
느닷없는 물음에 수현은 놀라 손을 빼려 했다. 그러나 타케시는 놓지 않았다. 그는 손목을 살짝 눌러보며 말했다.
“오른손 근육이 단단해. 목검을 쥐면 이렇게 되거든.”
수현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숨기고 있던 일을 들킨 듯,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무, 무슨 말씀이세요. 요즘 밭을 갈아서 그렇습니다. 고구마 심을 준비를 하느라...”
타케시는 입꼬리를 슬며시 올리며 짖궂게 말했다.
“내게 검도를 배우면 고구마 종자쯤은 구해 줄 수 있는데. 한 달에 한두 번 자세만 봐 줄게. 그렇게만 해도 실력이 금세 늘 거야.”
수현은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그건 제가 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세손께 여쭈어보아야 합니다.”
“어련하겠어.”
타케시는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웃었다.
그때, 명이가 마당으로 들어섰다. 수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명이와 걸으며 검을 배우지 않을 수 없었던 지난날의 사정을 떠올렸다.
“유약이 조금 벗겨졌을 뿐이에요. 더 이상은 값을 내릴 수 없어요.”
수현이 차 다기를 도로 바구니에 넣었다. 사내가 비웃듯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가야 계집들이 배짱이 아주 좋구나. 그릇을 몰래 빼돌려 팔아먹으면서 흥정까지 하다니.”
그는 게다를 신은 발로 수현의 옷자락을 밟았다. 놀란 순이가 서둘러 수현의 손에서 다기를 받아 그에게 내밀었다.
“그럼, 그 돈만 주시고 가져가세요.”
사내는 순이의 손에서 다기를 낚아채더니, 돈도 주지 않고 돌아서려 했다.
“돈은...”
순이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순간, 사내가 돌아서더니 순이의 머리채를 거칠게 움켜잡았다.
“이것들이 혼이 나야 정신을 차리지! 어디서 나가야 상것들이 조우카마치 사람들에게 돈을 뜯어내려 들어!”
수현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그의 손을 거칠게 빼냈다.
“모래와 돌을 걸러 흙을 빚고, 가마 앞에서 며칠 밤을 새워야 겨우 그릇 하나를 구워냅니다. 이 다기는 빼돌린 것이 아니라 성에서 거두고 남은 것입니다, 우리는 떳떳하니, 성으로 가서 성주님 앞에서 말씀드리죠.”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내의 손이 날아왔다.
“짝!”
수현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짝!”
수현의 손도 번개처럼 날아가 사내의 뺨을 후려쳤다. 키가 훨씬 큰 사내의 얼굴에 닿기 위해, 그녀는 거의 뛰어오르듯 몸을 날렸다.
분노한 사내가 그녀의 머리채를 움켜잡아 땅으로 내리꽂았다. 허공을 가르며 주먹이 들려올랐다. 그 순간 순이의 찢어지는 비명이 터졌다.
거의 동시에 누군가의 잽싼 손이 사내의 팔을 뒤로 꺾고, 한 발로 그의 목덜미를 눌렀다.
명이였다.
하얗게 질린 사내는 버둥거렸다. 옆에 있던 일행이 다급히 달려와 속삭였다.
“저자는 타케시 도련님의 스승이라는 자야. 기요마사님이 데리고 있는 왕족이라네. 잘못 건드렸다간 할복을 당할 수도 있어.”
그 말을 들은 사내는 이를 악물고 일어섰다. 옷깃을 털고는 분통을 터트리며 일행과 함께 저잣거리를 빠져나갔다.
모양새가 엉망이 된 수현을, 명이는 조용히 일으켜 세웠다.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옷매무새를 고르고, 흐트러진 머리칼을 매만져 주었다.
수현은 울지 않았다.
맞은 뺨이 부어올라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그저 평소처럼 순이와 함께 명이의 뒤를 따라 나가야로 돌아왔다.
그날 밤, 모두가 잠든 뒤 수현은 이불을 뒤집어쓴 채 울었다. 옆으로 돌아누운 순이는 모른 척해 주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든 줄 알았던 순이가 벌떡 일어났다.
“수현이에게 밖으로 나오라 전해 다오.”
명이의 목소리였다.
수현은 이불을 젖히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얼굴 괜찮아?”
순이는 조심스럽게 부은 뺨과 눈가를 만져보며 말했다.
“밖이 어두워 잘 보이지 않을 거예요.”
밖에는 명이가 서 있었다. 손에는 목검이 들려 있었다.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 자신의 몸 하나쯤은 스스로 지킬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낮에는 나가야 일로 바쁘니, 밤에 틈나는 대로 검을 익혀보는 게 어떻겠느냐.”
수현은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굽이진 돌계단을 내려와 성을 나섰다. 성곽을 감싸 흐르는 강 위로 길게 드리워진 나무다리를 건널 때, 생각에 잠긴 명이를 바라보던 수현이 주저하듯 물었다.
“기요마사님께서...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명이가 잠시 침묵하다가, 망설이듯 대답했다.
“성을 재건축하는 동안 교토의 절로 가라 하셨다. 불경과 학문을 익히며 반년쯤 머물라 시더구나. 곧 공부방이 열릴 텐데, 야마토 전역의 학자들과 귀족 자제들이 모인다 하셨다.”
“타케시 도련님도 함께 가십니까?”
명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 떠나야 할게야. 당장은 아니지만. 나가야가 걱정이구나.”
그 말을 듣고 수현도 고개를 끄덕였다. 명이가 없는 나가야를 떠올리자, 마음 한켠이 문득 서늘해졌다.
나가야로 돌아온 수현은 곧장 부엌으로 향했다. 나가야에는 따로 부엌이 없어, 사내들이 나무와 진흙을 엮어 우물가에 임시로 벽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을 얹었다. 그곳이 모두가 모여 밥을 먹고, 불을 지피는 부엌이 되었다.
부엌 근처의 방에서 안상궁과 수현, 그리고 순이가 함께 지냈다. 저녁이면 나가야 사람들은 모두 그곳에 모여 하루의 일을 나누고, 따스한 불빛 아래 밥을 함께 먹곤 했다.
이날 밤도, 명이는 낮에 성에서 기요마사를 만나 나누었던 이야기를 잔잔히 들려주었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니겠지요?”
억쇠 할아범이 깊은 주름 사이로 근심을 꺼내듯 말했다.
도공들의 시선이 일제히 명이에게로 향했다.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돌이 아범이 낮게 덧붙였다.
“야마토 놈들이 손해 볼 일을 할 리가 없어요.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듭니다.”
그러자 재복 아재가 짓궂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허허, 그 아키라는 아이는 돌이한테 손해 보는 짓을 서슴지 않습디다. 오늘도 말린 생선에다 직접 지은 옷까지 가져와 입히더이다. 이러다 이역만리 적의 땅에서 며느리 보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예끼, 이 사람아!”
돌이 아범이 꾸짖듯 외쳤지만, 얼굴에는 미묘한 웃음이 스쳤다.
요즘 돌이가 아키와 정을 붙여 가는 것이 못내 염려되면서도, 싫지만은 않은 듯했다.
그들의 웃음이 잦아들자, 명이가 고개를 들어 말했다.
“학문이 높다는 건, 그대들의 손기술이 귀한 것과 다르지 않네. 이 일은 내가 더 깊이 생각해 보고, 일이 진행되는 대로 다시 의논해 보세.”
그의 말에 밥을 먹던 사람들 사이로 소곤거림이 퍼졌다.
“맞습니다. 세손 마마의 학문 앞에 야마토 놈들이 고개를 숙일 때, 우리 가슴이 다 뻥 뚫리는 기분입니다.”
“그 거만한 애송이 성주 아들이 ‘스승님’이라 부를 때마다, 내가 다 뿌듯합디다요.”
그 말들에 명이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 순간 그는 더 이상 권위적인 지도자가 아니었다. 또래의 칭찬에 수줍어하는, 열네 살 소년의 얼굴이었다.
부엌 한켠에서 안상궁은 흐뭇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수현의 눈에는 오히려 안쓰러움이 스쳤다. 그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자리에 서 있는 것만 같았다.
부엌 구석 어둠 속에 앉은 수현의 눈에, 명이는 모습은 빛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 빛이 눈부실수록, 자신과의 거리는 멀게만 느껴졌다. 교토의 공부방, 귀족 자제들과 학자들이 모여 경연을 벌이는 자리- 그곳은 수현이 감히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세계였다.
그의 학문이 깊어질 기쁨보다, 수현의 마음은 그가 공부에 들일 물건과 돈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에 더 쓰였다.
그럼에도 수현은 바랐다. 그가 야마토의 귀족 자제들 속에서도 부족하거나 꺾이지 않기를, 어디서든 당당히 서 있기를.
수현은 문득 기억의 한쪽에서 왜로 향하던 배 위의 장면을 떠올렸다. 그날, 명이는 어린 새처럼 떨고 있다. 바들거리는 손을 품에 감춘 채, 무릎에 얼굴을 묻고 금세 울음이라도 터뜨릴 듯했다.
수현 또한 겁에 질려 있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의 손을 덥석 잡아 끌어안았다. 서로의 체온 속에서 팔딱거리던 두 가슴은 서서히 진정되었다.
그때 이후 배 안 어디에서든 수현은 명이의 손을 꼭 붙잡고 다녔다. 그 손을 잡고 있으면, 이역만리 낯선 적국의 땅에서도 살아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수현은 명이라는 빛 아래 드리워진 그림자가 되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