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미서는 평소보다 빠른 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아무리 서둘러도 출근길 전차는 늘 붐볐다. 플랫폼 앞줄에 서지 못하면 인파에 밀려 몸을 가누기조차 어려웠다. 그걸 알기에 발걸음은 저절로 더 빨라졌다.
봄이라 부르기엔 새벽 공기가 아직 차가웠다. 얼굴을 스치는 바람에는 겨울의 기운이 미쳐 가시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미서는 가디건을 여미며 걷다가 가방 속에서 울리는 진동음에 걸음을 멈췄다.
‘동민이 어머니.’
동민이는 작년 가을, 한국에서 전학 온 아이였다. 어제부터 무단결석이라 마음에 걸리던 참이었다. 미서는 망설이지 않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선생님... 이른 시간에 죄송해요.”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이미 울음에 잠겨 있었다.
“혹시 동민이한테서 연락... 있었을까요? 어젯밤 집에 안 들어왔어요.”
가슴이 순간 내려앉았다. 무단결석만으로도 신경이 쓰이던 차였다. 외박이라는 말에, 교장이 늘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중학생의 무단 외박은 곧 사고다.’
미서는 숨을 고르고 물었다.
“어제 집을 나설 때는... 학교 간다고 나갔나요?”
“네, 학교 간다고요.”
“그래요...”
학교에는 오지 않았다는 말을 끝내 꺼내지 못했다. 대신 화제를 돌렸다.
“혹시 친구들 연락처는 알고 계세요?”
“친구요? 일본 친구들 연락처는 모르는데요...”
잠시 뜸을 들이던 어머니가 다시 말했다.
“대신 한국 교회에 같이 다니는 또래 아이들이 몇 명 있어요. 가끔 야구장에도 같이 가고요. 그 아이들 번호는 알고 있는데... 보내드릴까요?”
“네, 제 휴대폰으로 보내주세요.”
미서는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를 유지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별일 아닐 수도 있어요. 학교에 도착하면 담임 선생님과 바로 상의해서 다시 연락드릴게요.”
전화를 끊은 뒤에도 미서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막 스며들기 시작한 봄빛 아래, 도로 위로는 여전히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역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춘 그녀는 큰길로 나섰다. 손을 들어 택시를 세우는 동안에도 길 위의 풍경은 좀처럼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불안은 가슴 깊은 곳에서 천천히 번져 올라왔다. 미서는 택시 안에서 곧장 담임 다나카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학교로 가는 중인데요. 상의드릴 일이 있어요.”
짧은 통화를 마칠 즈음, 택시는 교문을 지나 학교 건물 앞에 멈췄다. 교무실 앞에서 서성이고 있던 동민이의 담임, 다나카가 미서를 보자 급히 다가왔다. 미서는 동민이 어머니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전했고, 이어 어머니가 보내온 교회 친구들의 연락처를 꺼내 교무실에서 차례로 전화를 걸었다.
“혹시 동민이한테서 연락이나 문자 받은 적 있니?”
돌아오는 대답은 모두 비슷했다. 요즘 동민이는 교회에도 잘 나오지 않았고, 본 지 꽤 되었다는 말뿐이었다.
경찰에 신고를 해야 하나,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부터 확인해야 하나.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엉켜 갔다. 미서가 다나카를 바라보자, 그녀 역시 무언가를 결심한 듯 먼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교장 선생님께 보고해야 할 것 같아요.”
미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교무회의실 중앙에는 교장과 교감, 학년주임이 자리하고 있었고, 그 둘레로 다른 반 담임들이 원을 그리듯 앉아 있었다. 미서와 다나카가 문을 열고 들어가 빈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이 의자에 완전히 몸을 맡기기도 전에 교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다나카 선생, 상황을 말해 보세요.”
교장의 손가락이 책상 위를 두드리고 있었다. 다나카는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제 동민이가 무단결석을 했습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교장이 끼어들었다.
“그걸 왜 이제야 보고하는 겁니까?”
“출석부에는 모두 기록했습니다. 평소에도 지각과 결석이 잦아 큰 문제는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다나카는 잠시 말을 고른 뒤 낮게 덧붙였다.
“하지만 어제부터 집에 들어가지 않았고, 오늘 아침까지도 연락이 없어 이렇게 보고를 드리는 겁니다.”
교장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왜 유독 다나카 선생 반에서만 이런 일이 생기는 겁니까? 아이들 관리를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겁니까. 담임이면 기본적인 상황 파악은 하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말이 이어질수록 다나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래서 제가 외국인 학생은 맡지 않겠다고 말씀드렸잖아요.”
다나카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이들 대부분이 기본적인 일본어도 배우지 않은 채 편입해 학교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녀는 말을 이었다.
“아이들만 난처한 게 아닙니다. 담임을 맡게 되는 제 입장은 생각해 보신 적 있으세요. 말이 통해야 지시도 하고, 고충도 들어줄 수 있죠. 무슨 말을 해도 고개만 갸웃하고...”
잠시 숨을 고른 뒤, 다나카는 더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일상 언어야 그렇다 치더라도, 학습 언어조차 안 돼 수업 시간마다 책상에 엎드려 자는 아이 때문에 다른 선생님들이 얼마나 제게 불만을 쏟아내는지 아세요?”
목소리가 점점 거칠어졌다.
“이런 문제가 어제오늘 일도 아니라는 걸 다 아시면서 억지로 맡기시고는... 이제 와서 제게 책임을 묻다니요. 정말 속상합니다.”
회의실 안에서 누구도 바로 말을 잇지 못했다. 교장은 길게 한숨을 내쉰 뒤, 손에 들고 있던 볼펜을 책상 위에 탁 내려놓았다. 짧은소리가 회의실 안에 또렷이 울렸다. 그의 시선이 미서에게로 옮겨졌다.
“이 선생, 동민 군 요즘 무슨 일 있었어요?”
“...학교 차원에서 문제로 보고된 일은 없었습니다.”
“없었다고요?”
교장의 목소리가 한층 높아졌다.
“한국 학생들이 문제없이 학교생활을 하도록 지도하는 게 이 선생이 하는 일 아닌가요? 무단결석에 무단 외박까지 했는데, 문제로 보고된 게 없었다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미서는 숨을 한 번 삼킨 뒤,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동민이는 반 친구들과 사소한 마찰이 잦았습니다. 다만 징계나 지도 보고로 이어질 만한 사안은 없었습니다. 학습 언어가 부족해 수업 이해에 어려움이 있어, 학교 방침에 따라 오후에는 별도의 교실에서 개별 지도를 진행했습니다.”
“그럼 친구들과의 마찰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말인가요?”
교장은 쉼 없이 말을 몰아붙였다.
“수업이 어렵다고 해서 학교에 나오지는 않는 건 아니라는 거죠? 그런데 아이는 무단결석에 무단 외박을 했고,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 말입니까?”
미서는 마른침을 삼킨 뒤 고개를 숙였다. 교장은 다나카와 미서를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 당장 동민이 집부터 가 보세요. 추측 말고, 푸념 말고.”
그는 단호하게 말을 맺었다.
“정확한 상황을 확인해서 다시 보고하세요.”
교무실 문이 쾅 닫혔고, 교장의 발소리가 복도를 따라 멀어져 갔다.
다카라즈카에서 한큐 전철을 타고 일곱 정거장을 가면 니시노미야에 닿는다. 역을 나와 남쪽으로 오 분쯤 걸으면 조용한 주택가가 나온다. 낮은 담장과 단정한 집들이 이어진 거리였다. 초인종을 누르자 동민이 어머니가 문을 열었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듯 눈이 붉게 충혈돼 있었다.
“동민이 아버지는...”
그녀는 말을 멈췄다가 힘없이 이었다.
“밤새 여기저기, 동민이가 갔을 만한 곳을 다 뒤져보다가... 방금 출근했어요.”
그 말을 듣고도 다나카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시선을 내리깔고 있다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일단 니시노미야 경찰서로 가서 실종 신고부터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 말이 떨어지자 동민이 어머니의 얼굴에서 핏기가 순식간에 가셨다.
“경찰서요?”
그녀가 되물었다.
“사고가 났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다나카가 급히 고개를 저으려는 순간, 미서가 옆에서 말을 보탰다.
“신고를 접수해 두는 게 더 안전해요. 만에 하나 작은 일이라도 생기면 바로 연락을 받을 수 있고요.”
동민이 어머니는 잠시 망설이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은 곧장 경찰서로 향했다. 사정을 설명하고 실종 신고서를 작성했다. 혹시 몰라 간사이 공항과 오사카항의 출국자 명단도 조회했지만, 동민이의 이름은 없었다. 경찰서를 나선 뒤로는 발로 찾는 수밖에 없었다.
“어디부터 돌아볼까요?”
미서의 말에 다나카가 손목시계를 흘끗 보았다.
“오후에 수업이 있어요.”
그녀는 미안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 선생님이 어머님을 모시고 이 일대를 좀 돌아봐 주세요. 결과는 꼭 알려주시고요.”
“네, 알겠습니다.”
다나카는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인 뒤 급히 지하철역 쪽으로 사라졌다.
미서와 동민이 어머니는 인근 지역 담당 경찰 한 명과 함께 인터넷 카페와 오락실을 돌았다. 사진을 내밀며 같은 질문을 되풀이했다.
“혹시 이 아이 본 적 있으세요?”
돌아오는 대답은 늘 같았다.
“본 적이 없습니다.”
아직 문을 열지 않은 가게의 셔터를 두드리기도 했다. 안쪽에서 짜증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오기도 했다. 그 때문인지 동행하던 경찰은 “연락 오면 바로 알려주겠다”는 말만 남긴 채 자전거를 타고 떠나 버렸다.
둘은 역 앞 쇼텐가이(상점가)로 향했다. 골목은 인적 없이 한산했고, 스치는 공기는 유난히 차가웠다. 상점마다 같은 말이 되풀이됐다.
“모릅니다.”
“본 적 없습니다.”
짧은 말들이 돌덩이처럼 가슴을 눌렀다. 편의점 유리창 앞을 지나던 미서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유리에 비친 두 사람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동민이 어머니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미서는 말없이 그 손을 감싸 쥐었다.
“아무 일 없을 거예요.”
미서는 천천히 말했다.
“웃으면서 돌아올 거예요. 조금만 기다려 봐요.”
동민이 어머니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미서를 바라보았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아이가 어디로 갔겠어요. 분명 무슨 사고가...”
말끝이 목에 걸린 듯,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미서는 낮게 되뇌었다.
“아무 일 없을 거예요. 정말 괜찮을 거예요.”
동민이 어머니는 눈물이 맺힌 눈으로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서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일단 집으로 돌아가셔서 기다리세요. 저는 학교로 돌아가 지금까지의 일을 교장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다시 연락드릴게요.”
동민이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렸다. 그녀의 뒷모습이 골목 끝으로 사라질 때까지, 미서는 한 자리에 서 있었다. 잠시 뒤 몸을 돌려 역 쪽으로 걸었다. 시선은 무심히 주변을 훑고 있었다.
그때였다.
역 앞 상점가의 편의점을 막 지나치던 순간, 건물과 건물 사이-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큼 좁고 어두운 골목에서 낯익은 그림자가 스쳤다.
미서는 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돌려 골목 안을 들여다보았다.
찬바람이 드나드는 어두운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동민이가 편의점 도시락을 먹고 있었다. 교복 넥타이는 풀려 있었고 머리는 흐트러진 채였다. 허겁지겁 밥을 삼키는 모습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리고 곧 안도감이 그 위로 밀려왔다.
“맛있니?”
미서의 목소리에 동민이는 화들짝 놀라 도시락을 떨어뜨렸다. 미서는 말없이 허리를 숙여 도시락을 주웠다. 그리고 아이의 손목을 잡아 골목 밖으로 이끌었다. 아이는 저항하지 않았다.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 음료수를 하나 집어 들었다. 계산대 앞에서 돈과 함께 음료를 아이의 손에 쥐여 주며 말했다.
“이건 네가 계산해 볼래?”
동민이가 계산대 앞에 서 있는 동안, 미서는 밖으로 나와 전화를 걸었다.
“지금 동민이랑 같이 집으로 가는 중이에요.”
집 앞에는 어머니가 서성이고 있었다. 아들을 보자마자 달려와 가방을 받아 자신의 어깨에 걸치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밥은 먹었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아들의 손을 꼭 붙잡았다. 현관문이 열리자 아버지가 거실 한쪽에 서 있었다.
“지금까지 연락도 없이 어디 있었어!”
동민이 아버지가 목소리를 높였다. 동민이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말했다.
“그냥 좀 내버려 둬요.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한다고요.”
“뭐야? 부모 속을 이렇게 타들어 가게 해 놓고 그게 할 말이냐?”
“지금까지 제 일에 관심이나 있었어요?”
동민이는 고개를 들어 글썽해진 눈으로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뭐가 힘든지 물어본 적이나 있냐고요.”
아버지가
“이 녀석이—!”
하고 다가서자, 어머니가 급히 남편을 가로막았다.
“선생님도 계시잖아요. 제발 진정하세요.”
동민이는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려 방으로 달려가 문을 쾅 닫았다. 잠시의 정적 뒤, 아버지가 성난 걸음으로 방문을 열어젖혔다.
“이 와중에도 게임이냐?”
그는 방 안으로 들아가 컴퓨터 본체를 들어 올렸다.
“이게 아이를 다 망쳐 놓고 있어!”
쾅—
묵직한 소리가 집 안을 흔들었다. 베란다 쪽으로 내던져진 본체가 바닥에 부딪혀 산산이 흩어졌다.
동민이의 눈이 붉게 충혈되며 눈물이 떨어졌다. 그는 손등으로 눈물을 거칠게 훔치며 소리쳤다.
“게임이라도 해야 살지!”
숨을 몰아쉬며 말을 이었다.
“아빠가 그렇게 나를 걱정했다면, 내가 왜 학교를 안 갔는지, 왜 집에 안 들어왔는지— 그거부터 먼저 물어봤어야 하는 거 아니야?”
다시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동민이를 미서와 어머니가 간신히 붙잡아 거실로 데려왔다. 동민이는 교복을 벗어 거칠게 소파 위로 내던졌다.
그 순간 셔츠 위에 흩뿌려진 색색의 스프레이가 눈에 들어왔다. 가슴 한가운데에는 ‘바보(バカ)’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누가 그랬어!”
어머니가 울먹이며 동민이의 팔을 붙잡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버지가 소리쳤다.
“어제 학교 뒷산에서...”
동민이는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이었다.
“와다랑 그 패거리들이 가방을 뺏고, 던지고, 발로 차고... 스프레이로 옷에 낙서를 했어.”
거의 속삭이듯 덧붙였다.
“그리고 가방은 나뭇가지를 모아 불을 질러 태워 버렸어.”
순간, 누구도 숨을 내쉬지 못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사람은 아버지였다.
“이 새끼들...”
그는 이를 악문 채 휴대폰을 꽉 쥐고 담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치밀어 오른 분노에 말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아 고함만 몇 번 터뜨리다, 결국 전화를 미서에게 건넸다.
자초지종을 들은 다나카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떨려왔다.
“무엇보다 동민이가 많이 놀랐을 거예요. 오늘은 푹 쉬게 해 주세요.”
잠시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
“지금 바로 교장 선생님께 보고하겠습니다. 내일 동민이 부모님과 동민이, 함께 학교에서 뵙겠다고 전해 주세요.”
수화기 너머로 ‘죄송합니다’라는 말이 몇 번이고 반복됐다. 그 말이 끊기며 통화도 함께 끝났다.
다음 날 아침, 교장실에는 와다와 그 일행, 그리고 아이들의 부모가 긴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었다.
학교 측의 사과와 학부모들의 고개 숙임은 엄숙했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이라는 약속도 그럴듯해 보였다. 학칙에 따른 조치가 차분한 어조로 설명됐다. 미서는 통역을 맡아 그 말을 하나하나 동민이 부모에게 전했다.
이야기를 듣던 동민이 아버지가 교장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 외에도, 이 아이들은 한 달 동안 별도의 교실에서 수업을 듣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앞으로 동민이와 마주칠 일이 없도록, 멀리 떨어진 반으로 옮겨 주시기 바랍니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교장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들을 불러 세웠다.
“와다군, 기시다군, 하시모토 군. 일어나세요.”
아이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교장은 한쪽 손을 들어 올렸다.
“선서.”
잠시 말을 고른 뒤, 또렷하게 말했다.
“나는 앞으로 절대 학교 급우를 이지메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마치 외운 문장을 읽듯 같은 목소리로 따라 했다.
그날 이후, 동민이 부모는 수시로 학교에 연락해 아이의 생활을 확인했고 미서에게도 종종 전화가 걸려 왔다. 그러나 아이들은 믿기 어려울 만큼 빠르게 그 일을 잊어 갔다.
동민이는 여전히 급우들과 다투고, 야구를 하고, 때로는 결석을 하며 그렇게 학교생활을 이어갔다.
학교는 어른들이 모르는 또 하나의 세계다. 그 시간과 공간 안에서 아이들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상처를 만들고, 또 견뎌 낸다.
아슬아슬한 시간 속에서 계절은 흘렀고, 어느새 가을이 저물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또 다른 문제가 고개를 들었다.
동민이는 중학교 3학년 봄학기에 일본으로 편입해 왔다. 한국에서의 성적도 좋지 않았고, 지금 다니는 학교에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진학할 수 있는 고등학교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고등학교 원서 접수를 앞둔 어느 날, 교무실은 분주했다. 미서는 다나카에게 다가가 목소리를 낮췄다.
“동민이는... 어디로 진학하고 싶어 하나요?”
다나카는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동민이 성적으로 갈 수 있는 학교가 없다는 것, 선생님도 아시잖아요?”
미서는 잠시 말이 막힌 듯하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영어 회화도 곧잘 하고, 집안 형편도 나쁘지 않으니 사립고등학교는 가능하지 않을까요?”
“학비 문제가 아니라 점수예요.”
다나카는 고개를 저었다.
“영어 회화는 좀 하죠. 하지만 입시에 중요한 건 성적 점수잖아요.”
그녀는 깊게 숨을 내쉰 뒤 말을 맺었다.
“현실적으로 선택지가 많지 않아요.”
원서 접수 마감일이 가까워질수록, 동민이 어머니는 초조함을 숨기지 못했다.
“중졸은 안 돼요. 절대 안 돼요.”
그녀는 마치 다짐하듯 말했다.
“아이를 그렇게 세상에 내보낼 수는 없어요.”
미서와 다나카는 간사이 전 지역을 뒤져 겨우 두세 곳의 원서를 접수할 수 있는 학교를 찾아냈다. 면접 날, 아버지는 회사에 연차를 내고 어머니와 함께 학교로 왔다.
“떨지 말고.”
미서가 말했다.
“연습한 대로만 하면 돼.”
미서는 복도 한쪽에서 면접 연습지를 펼쳤다. 동민이는 벽 쪽으로 물러서더니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급기야 손톱까지 입에 가져갔다. 미서는 재빨리 다가가 낮게 말했다.
“머리 만지지 마.”
아이를 보며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방금 젤 발라서 정리했잖아. 다 흐트러졌네.”
미서는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다시 눌러 정리해 주었다. 어머니는 옆에서 말없이 보온병을 꺼내 따뜻한 차를 따라 내밀었다.
“이거 마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덧붙였다.
“조금은... 괜찮아질 거야.”
잠시 뒤, 아버지가 다급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곧 네 차례야. 준비됐지?”
어머니는 면접장 입구까지 따라가 안으로 들어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 얼굴로 뽑으면...”
작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우리 동민이가 수석인데...”
미서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입술을 깨물어 간신히 눌렀다. 동민이가 면접장 안으로 들어간 뒤, 아버지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말했다.
“여기서 떨어지면... 어쩌지.”
말끝에 긴장과 애틋함이 함께 묻어 있었다. 미서는 그 마음을 건드리지 않으려는 듯,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한국 고등학교로 가는 방법도 있잖아요. 한국은 고등학교 진학이 이렇게까지 어렵지는 않으니까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어머니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
“무슨 말씀이세요.”
곧이어 아버지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외국에서 꼴찌를 해도 ‘조기 유학’이라는 스펙은 되잖아요. 그런데 왜 굳이 한국 삼류 고등학교로 갑니까.”
그는 말을 단호하게 잘랐다.
“그런 얘기는 아예 하지도 마세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미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럼... 학교에 기부라도 조금 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순간 아버지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런 방법이 있습니까?”
“학교에 한 번 알아봐 드릴까요?”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졸업식 날이었다.
삼월의 벚꽃은 아직 봉오리만 맺고 있었다. 바람 끝에는 겨울의 매서움이 남아 있었고, 봄이라 부르기에는 어울리지 않게 오리털 파카를 껴입고도 볼이 시릴 만큼 추운 날이었다.
간신히 출석 일수를 채운 동민이도 몸을 웅크린 채 졸업식에 참석했다. 학부모 석 앞줄에는 꽃다발을 든 부모들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미서는 얼마 전 합격 통지서를 받아 들고 환하게 웃던 동민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보결이었지만, 그래도 합격은 합격이었다.
졸업식이 끝나자 여학생들이 남학생들의 교복 단추를 받으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그 틈을 지나 미서는 동민이를 찾았다. 화장을 곱게 한 어머니가 아들의 팔을 꼭 끼고 서 있었다. 잠깐 스쳐 간 생각을 삼킨 채, 미서는 그들 곁으로 다가가 말했다.
“졸업 축하해.”
꽃다발을 건네며 웃자,
“감사합니다.”
동민이의 대답이 또렷하게 돌아왔다.
그 순간, 어머니가 아들의 팔을 더 꼭 붙잡으며 말했다.
“이제 정말 잘해야 해. 아빠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지?”
아버지는 옆에서 말없이 웃었다.
미서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시선을 거두었다. 많은 일이 있었지만, 졸업을 하고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된 지금, 동민이는 제법 의젓한 얼굴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잠시 후, 동민이 어머니가 말을 걸었다.
“선생님도 수고 많으셨어요. 같이 점심해요.”
미서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이 여기 마지막이라, 인사할 곳이 좀 있어요. 다음에 같이 해요.”
“어머나... 섭섭해서 어쩌죠.”
미서는 미소를 지으며 동민이를 바라봤다.
“동민아, 고등학교 가면 공부랑도 좀 친해져 보지.”
동민이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서가 돌아서 걸음을 옮기자, 뒤에서 동민이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돈으로 다니는 학교는 고등학교로 끝내고, 제발 대학은 네 실력으로 좀 가 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내 동민이가 낮게 중얼거렸다.
“자꾸 그러면 나 진짜 공부 안 한다.”
“알았어... 아무 말 안 할게.”
미서는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