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불신의 시대

by 릿다


영서는 소파에 길게 누운 채 리모컨을 이리저리 눌렀다. 채널은 바뀌었지만 화면은 다 비슷했다. 떠들썩한 예능, 끝없이 반복되는 홈쇼핑 멘트, 이미 본 드라마의 재방송. 시선은 어디 장면에도 오래 머물지 못했다. 목적 없이 움직이는 건 손가락뿐이었다.

지지직—

스피커에서 갑작스러운 잡음이 튀더니 낮고 건조한 남자의 목소리가 거실을 채웠다. 아파트 관리실의 안내 방송이었다.

“○○시 저수지 수도 배관 공사 중 사고가 발생해, 당분간 수도 공급이 어렵습니다.
비상용 물을 욕조에 받아 두시고...”

‘사고’

그 단어에 영서의 손이 멈췄다. 리모컨 위에 얹힌 손가락이 그대로 굳었다. 방송은 계속됐지만 더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고라는 말 뒤에 붙을 문장들은 늘 같았다.

‘당분간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입주민 여러분의 양해와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그 문장들이 불러올 풍경을 영서는 이미 여러 번 겪어 알고 있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상체를 일으켜 인터폰으로 손을 뻗었다. 관리실 번호를 누르자 신호음이 세 번 울리기도 전에 연결됐다. 너무 빠른 연결에 오히려 불안이 스쳤다.

“저희도 방금 연락받았어요. 한... 일주일 정도 수도 공급이 어렵다네요.”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낮았고, 말끝이 희미하게 흐려졌다.

“정확한 건 아직 없고요. 그래도 우리 아파트는 물탱크가 있어서, 받아 둔 물을 아껴 쓰면서 버텨야 할 것 같아요.”


영서는 보이지 않는 상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말을 고르다 입을 열었다.

“그럼 사우나는 바로 정지해야겠네요.”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이내 대답이 돌아왔다.

“네. 지금 계신 분들 나가시면 바로 닫을 것 같고요. 곧 안내 방송도 나갈 겁니다.”

“몇 시까지 사우나 하나요?”

“두세 시간 후쯤이요. 방금 방송이 나갔으니, 생각보다 탱크 물이 훨씬 빨리 빠질 거예요.”


그 말에 영서의 시선이 욕실 쪽으로 향했다. 텅 빈 욕조가 떠올랐다. 영서는 잠시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방송 나갔으니... 다들 좀 아껴 쓰지 않을까요?”

수화기 너머에서 짧은 웃음이 섞인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다 사모님 같지는 않으시니까요.”


전화를 끊자마자 영서는 벌떡 일어섰다. 소파에 남아 있던 체온이 금세 식었다. 맨발로 세탁실로 가 빨래 바구니를 통째로 들어 세탁기 안에 쏟아 넣었다. 흰 수건과 아이들 체육복, 남편의 셔츠가 한꺼번에 뒤엉켰다.

빨래를 가릴 겨를도 없이 세제와 유연제를 눈대중으로 붓고 버튼을 눌렀다. 물이 차오르는 소리를 확인하듯 잠시 서 있다가 등을 돌렸다.


그리고 몇 달 동안 한 번도 가지 않았던 아파트 사우나로 향했다. 외출용 가방 대신 작은 비닐 가방에 때 타월을 챙겨 넣었다. 평소라면 귀찮아서 손도 대지 않았을 물건이었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이미 몇 사람이 타고 있었다. 층수 버튼을 누르는 손길이 평소보다 빠르고 거칠었다. 서로의 시선은 거울 속에서 잠깐 스쳤다가 곧바로 피했다.

오후의 아파트 사우나는 늘 한산했다. 그 시간엔 대개 노인 몇 명만 앉아 있곤 했다. 온탕 옆에서 조용히 등을 밀거나,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멍하니 몸을 씻는 얼굴들. 영서는 그런 풍경을 떠올리며 문을 열었다. 하지만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신발장은 물론 입구 바닥까지 벗어 놓은 신발로 가득 차 있었다. 슬리퍼와 운동화, 구두가 뒤섞여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주인의 얼굴을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어지러웠다. 발을 디딜 틈이 없어 한 발을 든 채 잠시 멈췄다가, 겨우 안으로 들어섰다.


안쪽은 이미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탕과 탈의실에는 여자들과 아이들이 빼곡했다. 평소라면 밤늦게나 마주쳤을 얼굴들까지 섞여 있었다. 학교에서 바로 온 아이들, 장을 보다 말고 뛰어온 여자들, 아직 화장도 지우지 못한 얼굴들까지. 각자의 사정은 달랐지만, 표정만큼은 묘하게 닮아 있었다.

아마 다들 조퇴를 하거나, 방송을 듣자마자 집을 나섰을 것이다. 머릿속에는 하나의 계산만 맴돌았을 터였다. 물이 언제 끊길지, 얼마나 남아 있을지, 누가 먼저 집 안에 물을 가득 받아 놓을지.

아이들은 학원에도 가지 않은 채 탕 옆에 쪼그리고 앉아 때를 밀고 있었다. 아직 때가 쌓일 나이도 아닌 아이들까지 어른 흉내를 내며 팔꿈치와 무릎을 문질렀다.

사우나 안의 공기는 수증기와 열기로 숨이 막힐 듯 탁했다. 뜨거운 김이 천장에서 낮게 내려앉아 사람들의 얼굴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 속으로 따뜻한 물이 밀려 들어오는 것 같았다.


영서는 뿌연 김 속을 더듬듯 조심스레 걸어가다가, 누군가 다리를 툭 건드리는 바람에 움찔하며 걸음을 멈췄다.

“802호 언니, 이쪽으로 와.”


고개를 돌리자 702호 미선이었다. 젖은 머리를 대충 틀어 올린 채, 자리를 사수하듯 놓여 있던 대야를 한 손으로 치워 주었다.

“아— 702호. 회사 안 갔어?”

“조퇴하고 왔지.”

미선이는 낮게 웃었다.

“저수지 수도 배관 공사하다가 다 망가졌대. 한동안 물 구경하기 힘들 거라잖아. 우리 동네 여자들 다들, 전화 받자마자 조퇴하고 집으로 갔어.”

미선의 말투에는 묘한 확신이 섞여 있었다.

“이삼일 참으면 공사 끝나지 않을까?”


영서의 말에 미선은 고개를 갸웃하며 등을 내밀었다.

“그럼 좋겠지. 근데 이런 사고는 생각보다 오래간다더라.”

미선이는 등을 더 내밀며 말했다.

“아무튼 언니, 나 등부터 좀 밀어봐.”

영서는 말없이 미선이 등을 벅벅 밀어주었다. 때 타월이 살에 닿을 때마다 하얀 때가 밀려 나왔다. 그때 또 다른 손이 영서의 등을 툭 쳤다. 영서는 놀라 돌아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어머, 401호 언니도 오셨어요?”

401호 진이 엄마였다. 그녀는 인사말보다 먼저 몸을 들이밀었다. 좁은 틈을 찾아 엉덩이를 밀어 넣자 영서는 그대로 옆으로 밀려났다. 타일 벽에 몸이 붙듯 기대어 균형을 잡았다. 차가운 타일의 감촉이 등으로 전해졌다. 그런 자세로 영서는 겨우 팔을 움직여 때 타월로 몸을 조급하게 밀었다.

때를 밀고 나서 한참을 기다린 끝에 샤워기 아래에 섰을 때, 영서는 얼굴을 찡그렸다. 물줄기가 평소보다 약했다. 위쪽에서 이미 물을 많이 써 버린 탓인지 수압은 힘을 잃고 있었다. 그녀는 서둘러 머리와 몸을 적셨다.

물기를 대충 털어낸 그녀들은 다시 탕으로 몰려갔다. 갓난아기부터 칠팔십 대 노인까지, 서로의 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을 만큼 빽빽했다. 엉덩이 하나 붙일 자리도 없었다. 누군가 자리를 차지하면 다른 누군가는 곧바로 밀려났다.

“언니, 탕은 포기해야겠다.”


702호 미선이의 말에 401호 진이 엄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도 아쉬워하지 않았다.

“802호, 702호. 사우나만 갔다가 얼른 나가자. 곧 폐쇄한대.”

401호 진이 엄마의 말에 셋은 서로를 놓칠까 봐 어깨를 맞댄 채 우르르 사우나실로 들어갔다. 문을 여는 순간 뜨거운 열기가 얼굴을 덮쳤다. 숨을 들이마시려다 후끈한 공기가 목구멍 안으로 밀려들었다.


그곳 역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편백나무 벤치마다 사람들이 빼곡히 앉아 있었고 빈자리는 눈을 씻고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셋은 서서 눈치를 보다가 누군가가 일어나자마자 재빨리 그 자리를 차지했다.

옆에 앉은 여자의 출렁이는 가슴이 영서의 등에 닿았다. 땀에 젖은 살의 온기가 그대로 전해졌다. 비키고 싶었지만 비킬 곳이 없었다. 사람들의 체온과 습기가 영서의 몸에 들러붙었다.

“말이 일주일이지, 물이 언제 나올지 알겠어!”

어딘가에서 할머니의 쉰 목소리가 울렸다.
“시 저수지가 망가졌다잖아. 앞으로 한동안은 동네 목욕탕도 못 간다고 봐야 해.”


그 말은 사우나 안의 공기를 단번에 바꿔 놓았다. 순간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김 사이로 드러난 얼굴들이 하나같이 굳어졌다. 누군가는 눈을 내리깔았고, 누군가는 천장을 올려다봤다.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듯했다.

사우나 문을 열고 나오자 영서는 마치 지옥 탕을 빠져나온 사람처럼 힘이 풀려 다리가 후들거렸다. 공기는 가벼워졌지만 숨은 여전히 거칠었다. 온몸의 기운이 한꺼번에 빠져나간 듯했다.

“시원한 아메리카노 한잔하고 가자.”


401호 진이 엄마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말했다. 셋은 키즈카페 카운터 앞에 서서 아이스커피를 허겁지겁 들이켰다. 차가운 커피가 목으로 넘어가자 그제야 몸이 조금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702호 미선이가 영서를 힐끗 보며 물었다.

“언니, 이불 빨래 돌렸어?”


영서는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아니. 물 아껴 쓰라니까... 저수지 공사 끝나면 하려고.”

미선이가 고개를 저었다.

“언니, 저번에 강원도에서 물 없어서 난리 난 거 못 봤어? 말이 일주일이지, 이런 사고는 언제 고쳐질지 아무도 몰라. 그러니까 얼른 대청소하고 이불 빨래까지 다 끝내.”

미선의 말에 401호 진이 엄마도 기다렸다는 듯 맞장구를 쳤다.

“난 이미 돌려놓고 왔어.”

그 한마디가 영서를 더 조급하게 했다.

“절수 하라고 했잖아. 탱크 물 아껴 써야지.”

영서가 주저하며 말하자, 미선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언니 왜 이렇게 태평해.”

미선은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곧 이 일대 빨래방도 문 닫을 텐데, 어디 가서 빨래할 생각이야?”


영서는 대답 대신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먼저 갈게.”

두 사람은 빨대로 커피를 빨아들이며, 마치 어서 가 보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현관문을 여는 순간, 관리실 방송이 집 안을 가득 채우며 울려 퍼졌다. 문을 닫을 틈도 없이 공기가 먼저 바뀌었다.

“101동 물탱크 보유량 3/5, 102동… 109동 2/5. 물탱크 수위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습니다. 입주민 여러분께서는 절수에 적극 동참해 주시기 바랍니다.”

숫자가 귀에 박혔다. 3/5, 2/5.


방송은 차분하게 흘러나왔지만, 그 차분함이 오히려 영서를 더 조급하게 만들었다. 방송이 끝나기도 전에 영서의 머릿속에는 이미 다음 수치가 그려지고 있었다. 1/5, 그다음은 0.


굳이 급하지도 않은 이불 빨래를 할 필요가 있을까, 영서는 현관에 서서 잠시 스스로에게 물었다. 아직 물은 나온다. 세탁기도 오늘 한 번 돌렸다. 그런데도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영서는 욕실로 들어가 변기와 세면대를 닦고 욕조에 물을 가득 받아 두었다. 물이 차오르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이미 씻어 둔 그릇을 다시 꺼내 헹궜고, 걸레를 빨아 거실과 방을 한 번 더 닦았다. 바닥이 이미 반짝이고 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방 한쪽에 쌓아 둔 이불이 눈에 들어왔다. 영서는 힐끗힐끗 그것을 바라보다가 결국 하나씩 들어 올렸다. 모두 세탁기에 밀어 넣었다. 버튼을 누르는 손끝이 평소보다 빨랐다.

저녁이 되자 영서는 청소에 지쳐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집 안은 명절 대청소를 한 것보다도 더 말끔했다. 먼지 한 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마음은 이상할 만큼 편하지 않았다.




다음 날 이른 아침, 또다시 관리실 방송이 울려 퍼졌다. 알람보다 먼저 울린 소리였다.

“101동... 109동 물탱크 보유량 1/5...”


이번에는 끝까지 듣지 않아도 되었다. 숫자가 더 줄었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출근 준비를 하던 남편이 세면대 앞에서 중얼거렸다.

“퇴근하고 집에서 샤워도 못 하겠네. 대중목욕탕 들렀다 와야겠다.”


영서는 수건을 개다 말고 대답했다.

“회사 근처로 가야 할 거예요. 우리 동네는 저수지 공사 때문에 물이 안 나온대요.”

“큰일이네. 밥도 사 먹어야 하나?”

“식당인들 장사하겠어요? 물이 안 나오는데...”


남편이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럼... 다른 지역에서 배달시켜야겠네.”

그 말은 영서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제는 아파트 물탱크뿐 아니라 동네의 물까지 계산해야 할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남편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영서는 서둘러 샤워를 하고 아이를 깨웠다.

“어제 갈아입었잖아... 또 벗어?"


투덜대는 아이의 말에 영서는 대답 대신 아이의 웃옷부터 다시 벗겼다. 아직 깨끗한 속옷까지 빨래 바구니에 넣고, 침대 시트를 걷어 내 커버까지 모조리 벗겨 갈았다.

아침부터 세탁물이 산처럼 쌓였다. 집 안에는 더 이상 빨 것도, 닦을 것도 남지 않았다. 구석구석 훑어가며 닦아 창틀까지 먼지 한 톨 없이 반짝였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 저수지 공사는 예정대로 마무리되었다. 영서네 아파트도 사흘간의 절수를 버텨 낸 끝에, 다시 수도꼭지를 틀기만 하면 물이 콸콸 쏟아지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불신의 후유증은 컸다. 관리비 고지서를 확인하던 중 휴대폰 문자 알림이 울렸다. 미선이었다.

‘수도 요금 폭탄 맞았어~!!!’


곧이어 702호 관리비 내역이 찍힌 화면이 도착했다. 수도요금이 평소의 몇 배에 달하는 숫자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영서도 서둘러 자기 집 관리비를 확인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만큼의 금액이 적혀 있었다.


영서는 숨을 길게 내쉰 뒤 휴대폰을 한 번 들여다보다가 액정을 껐다. 식탁 위의 관리비 고지서를 집어 들 던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두 손으로 종이를 움켜쥐고 구겨 버렸다. 한동안 그대로 쥐고 있다가, 손바닥으로 다시 펴 두 손으로 접어 싱크대 서랍 깊숙이 밀어 넣었다.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물은 다시 나오고 있었지만, 영서는 전처럼 수도를 무심코 틀지 못했다. 설거지를 하다 말고 물줄기를 줄였고, 샤워기 아래에 서 있다가도 몇 번이나 손잡이를 잠갔다. 세탁기를 돌리기 전에는 한참을 망설였다.


유치원에서 돌아온 아이는 세면대 앞에서 손을 내밀었다. 영서는 수도를 틀어 주다가, 물이 흐르자마자 반사적으로 손잡이를 돌려 줄였다. 아이의 손등 위로 끊어질 듯 가는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아이는 손을 씻다 말고 그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엄마, 왜 그래?”


영서는 그 말을 못 들은 척 수건으로 아이의 손을 닦아 주었다. 그 후로 한동안 아파트 사우나 같이 가자는 연락이 오면, 영서는 늘 같은 대답을 했다.

“몸살 기운이 있어서... 사우나 근처도 못 가.”


모두가 이상하게 여기는 변명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날 이후 좀처럼 낫지 않는 몸살을 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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