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게 완벽했던 LA 여행이었지만, 프로포즈는 글쎄?
연애를 시작하고 사계절이 지나갈 즈음 남편은 미국으로 여행을 가자고 제안했다. LA에서 유학을 했던 남편은 함께 추억여행을 떠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아마도 의미 있는 곳에서 프로포즈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전에도 해외여행은 몇 번이나 다녀왔지만 한 번에 몇 백만 원을 쓰면서 하는 여행은 처음이었다. 남편과의 결혼을 결심하지 않은 상황에서 나에게는 조금 부담스러운 여행이었다. 남편은 연애 기간 동안 넌지시 결혼에 대한 확고한 의사를 내비쳐왔다. 그래서인지 이번 여행이 우리에게 결혼에 대한 약속을 하는 계기가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 역시도 남편과의 자연스러운 만남이 결혼까지 이어질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고 길게 고민하지 않고 우리는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따뜻한 5월의 봄날 우리는 LA로 떠났다. 상하이를 경유하는 중국 항공사를 이용했는데 비행기 모드의 핸드폰 사용도 금지하는 엄격한 항공사였다. 이코노미 석을 타고 장거리 비행을 한다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다. 지루하고 몸도 뻐근하고 답답한 시간의 연속이다. 장거리 비행은 사람을 피곤하고 예민하게 만든다. 그런데 나는 LA에 도착하는 순간 이 남자와 결혼을 꼭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유하는 시간을 포함해 16시간의 비행시간 내내 나는 남편에게 거의 누워있었고 남편은 불편한 내색도 없이 내가 불편하진 않은 지 계속해서 나를 챙겨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결혼 전에 꼭 여행을 해보는 것을 추천한다. 나 역시도 결혼 전에 다녀온 LA 여행이 결혼 결심을 굳히는 데 도움이 되었다. 여행을 하게 되면 몸이 고돼고 피곤한데 그때 자기도 모르게 본성이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LA 여행 내내 남편은 나와 함께하는 여행이 즐거워 보였고 피곤할 법도 한데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LA까지 가는 오랜 시간의 비행을 힘들어하는 나를 살뜰히 챙겨주는 모습에 진심으로 감동했고 이런 남자와 평생을 같이 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LA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남편이 조금 예민해졌다. 갑자기 말이 없어지고 생각이 많아진 모습에 나도 모르게 눈치가 보였다. 나중에 물어보니 렌트하는 것부터 이후의 여행 동선을 생각하느라 그랬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여행을 가기 전에 결혼에 대한 생각을 한 번 다잡고 가서인지 여행 내내 남편과의 미래에 대해 그려봤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나도 모르게 사소한 행동까지 치밀하게 지켜봤을 것이다. 나는 까다로운 여자는 아니지만 결혼은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일이 아닌가. 결혼을 잘하고 싶었고 여행 내내 지켜본 이 남자는 내 기준에서는 흠잡을 곳이 없었다.
우리에게 LA 여행은 큰 의미가 있는 여행이었다. 연애할 때 남편은 세심하고 다정한 사람이었지만 남자다운 면은 거의 본 적이 없었다. 데이트할 때도 리드하기보다는 뭐든 함께 상의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는 남편이 하자는 대로 따라가는 여행이라 그런지 새로웠고 남편의 또 다른 매력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행 내내 남편의 유학시절에 대한 얘기를 들을 수 있어 좋았다. 얘기를 들으며 곳곳에서 남편의 유학시절이 어땠을지 상상해보는 것이 재미있었고 남편을 더욱 깊이 알게 되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남편이 자주 가던 커피빈에 앉아 남편의 얘기를 들으며 남편의 유학시절로 따라 들어갔다.
"근데 LA는 차가 없으면 돌아다니기 힘들겠다. 학교는 어떻게 다녔어?"
"애들이 다 집에 돈이 많으니까 다들 차 타고 다니는데 나는 혼자 자전거 타고 다녔지."
"혼자 자전거 타고 다니는 거 기죽지 않았어?"
"왜? 어차피 걔들은 다 BMW 그런 거 타는데 난 어차피 그런 차 못 사. 그냥 자전거 타고 다녀도 괜찮았는데?"
남편의 이런 점이 마음에 든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절대 기죽지 않는다. 힘들고 외로운 유학생활도 남편답게 잘 이겨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남편이 멋져 보였다.
LA로 떠나기 전에 왠지 미국에서 프로포즈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었다. 만난 지 1년 가까이 되어가던 중이었고 결혼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얘기를 해왔던 터라 자연스럽게 여행 중에 프로포즈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여행을 시작한 지 며칠이 지나고 말리부 비치에서 1박을 하기로 한 날이었다. 연애는 쑥맥인 남편이 티를 안 낼 리 가 없다. 일 때문에 내 핸드폰만 로밍을 했었는데 남편이 핸드폰을 쓸 일이 있다며 빌리자고 했다.
"식당 예약해야 되는데... 핸드폰 좀 빌려줘"
"어디 갈 건데?"
"말리부 비치에 있는 스시 레스토랑인데 바다도 보이고 분위기도 좋대."
"이름이 뭔데?"
"노부"
검색해보니 1인 20만 원 정도 하는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미국 물가가 아무리 비싸다고 해도 하루 식사값으로 40만 원은 너무 비싼 거 아닌가. 더구나 남편은 합리적인 소비를 지향하는 사람이었다. 이미 남편의 계획을 눈치챘지만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우리는 일정대로 말리부 비치를 향해 해안도로를 따라갔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 날이라고 해안도로에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있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남편이 예약한 식당은 뷰 맛집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안개가 깔려 길도 제대로 보이지않는 도로를 보자마자 남편은 말수가 줄었고 점점 표정이 굳어졌다. 하늘도 무심하지 이런 날 안개라니! 남편의 프로포즈 계획은 순탄치 않아 보였다. 계속 모른 척하기도 힘들고 안개 때문에 뷰도 안 보이는 레스토랑에서 비싼 값을 지불하기가 아까워 나는 예약을 취소하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남편도 수긍이 되었는지 예약했던 레스토랑을 취소했고 다시 적당한 금액대의 레스토랑에 예약을 했다.
새로 예약한 레스토랑도 너무 좋은 곳이었다. 그런데 프로포즈 계획이 꼬여버려서인지 남편은 풀이 죽어있었다. 맛있게 식사를 하고 남편이 프로포즈를 하기만을 내심 기다리고 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전혀 소식이 없었다. 그래서 '오늘이 아닌가 보다'라고 생각하고 와인을 많이 마셔버렸다. 리조트로 돌아올 때쯤 나는 이미 취해서 오자마다 뻗어버렸고 남편은 나를 흔들어깨웠다.
"잠깐 일어나 봐. 씻고 자."
씻고 나와 다시 자려고 했는데 남편이 와인을 한 잔 더 하자고 했다.
'에이 설마 레스토랑에서 안 하고 지금 프로포즈를 한다고?'
설마 했던 예상처럼 남편은 프로포즈 분위기를 잡았다. 갑자기 "Marry me" 노래를 틀어달라고 했고 노래를 틀으면서도 나는 지금이 아니길 바랬다. 우리는 편한 츄리닝을 입고 있었고 화장도 다 지운 상태로 껌껌한 테라스에 핸드폰 조명을 켜고 앉았다. 이미 벌써 눈치챘는데 모르는 척하기도 힘들고 그냥 기다려보기로 했다.
"Marry me"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남편은 한참을 뜸들이다 말을 꺼냈다.
"같이 가."
로맨틱한 분위기도 멋들어진 말도 없었지만 이미 이 남자와 결혼하기로 여행 시작부터 마음을 먹었었다. 남편은 "같이 가"라는 주어도 목적어도 없는 투박한 말로 프로포즈를 하며 반지를 건네주었다. 이미 내 대답은 "예스"였고 그 때까지만해도 그다지 감동적이거나 특별한 프로포즈는 아니었다. 둘 다 어색해하고 있는데 남편이 반지 안 쪽을 살펴보라고 했고 반지 안을 보니 날짜가 새겨져 있었다.
YJ ♥ IT 2017. 5. 2.
반지 안에 새겨진 날짜는 프로포즈 당일이었다. 한국에서부터 이 날을 준비했을 남편이 귀엽기도 하고 고맙기도 해서 갑자기 살짝 눈물이 났다. 눈물이 왈칵 쏟아진 게 아니라 아주 살짝 난건데도 남편은 내가 눈물을 보였다는 게 중요한 것 같다. 남편은 아직도 프로포즈가 성공적이었다고 믿는다. 나는 한 번 뿐인 프로포즈를 밍숭맹숭하게 끝내버린 것이 내심 서운한데 말이다. 그래도 프로포즈가 뭐 대수랴? 그 날의 프로포즈가 있었기에 우리는 결혼을 했고 결혼 2주년이 된 지금도 여전히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