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비 Aug 21. 2024

친정엄마의 자리

의지하지 않는 딸과 엄마 노릇하고 싶은 엄마


"아이를 낳고 보니 우리 엄마를 이해하겠어"


육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빠짐없이 등장하는 말이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아닌데....' 라며 내 이야기를 시작하곤 한다. 아이를 낳고 보니 엄마가 더 이해되지 않는다. 엄마와 나는 아이를 키우는 상황이 많이 다르기에 받아들이는 일 또한 다를 수 있다. 나는 일을 하지 않고 아이를 우선으로 생각하며 키운다. 육아참여도가 높은 남편도 있다. 그래서인지 육아가 힘들게만 느껴지지 않는다. 내게 육아는 행복하고 즐거운 일이다.


엄마는 상황이 나와는 달랐고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내가 엄마에게 힘들기만 한 아이였을까. 엄마는 나를 키우며 행복하고 즐거웠던 순간은 다 잊은 걸까. 나를 키우는 일이 힘들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엄마를 힘들게 하는 존재로 느껴진다.


"너도 너랑 똑같은 딸 낳아 키워봐!"


어릴 때부터 자주 들었던 말이다. 아무도 엄마를 도와주지 않았고 아빠는 있으나마 나한 존재였으며 나는 유별난 아이였다는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다. 기질적으로 엄마와 반대였던 나는 엄마를 무척 힘들게 했다. 어릴 때는 엄마를 힘들게 만드는 나 자신이 싫었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 보니 기질적으로 나와 다른 아이도 예쁘게 보였다. 엄마는 왜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지 않았을까.


"우리 때는 어른들이 이렇게 저렇게 하는 거라고 하면 그런가 보다 하고 다 키웠어!"


엄마의 육아 조언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아 타박을 듣기도 했다. 엄마는 내게 많은 것을 주고 싶어 하고 엄마가 주고자 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응원과 지지, 격려를 원하는데 엄마는 걱정과 염려, 잔소리를 준다.


성인이 되기 전에는 엄마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다. 반면 엄마의 통제와 간섭을 거부해 반항을 하기도 했다. 엄마와는 늘 부딪히는 지점이 있었으나 대체로 엄마의 뜻에 따랐다. 사춘기 시절 삶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았다. 어차피 엄마가 다 정해주고 해결해 줄 텐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랬다. 사소한 것부터 삶의 방향까지 크고 작은 것들은 대부분 엄마가 정해주었다. 엄마는 내게 좋은 길잡이가 되어주었고 엄마를 통해 세상을 보던 때가 있었다.


대학 입시를 앞두고 수시 원서를 넣으러 갈 때였다. 고등학교 때 막연히 나중에 고아원을 차리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깊이 생각한 것은 아니었으나 당시에는 나름대로 숙고한 꿈이었다. 사회복지과에 원서를 넣겠다고 했을 때 엄마는 밥벌이를 못한다며 반대했다. 대학 원서를 접수하기 전 엄마는 경쟁률, 전망 등을 고려해 국제통상학과에 지원하라고 권유했고 지원서를 작성해 제출했다. 결국 엄마의 뜻대로 대학에 입학했다.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지만 내가 원하는 대로 선택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학교는 친정이 있는 전주 근교에 있었고 나는 집에서 스쿨버스를 타고 통학했다. 신입생 때는 친구들과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열심히 놀았다. 성인이 되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보고 싶었다. 그때도 엄마의 그림자는 여전히 내게 드리워져 있었다. 놀다가도 자정이 가까워질 때면 마음이 급해졌다. 막차 시간이 다가오면 전화에 불이 났기 때문이다. 반항이랍시고 친구집에서 자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받지 않았다. 엄마는 부리나케 학교 앞으로 나를 데리러 왔다. 엄마 사전에 외박은 없었다. 성인이 되었지만 엄마의 울타리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세상 밖으로 나가려는 딸과 험한 세상 속에서 딸을 지키려는 엄마의 창과 방패, 싸움의 시작이었다.


엄마의 지나친 보호와 간섭이 싫었다. 엄마의 통제를 벗어나고 싶었다. 그때는 막연히 집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마음속에 조용히 품었다. 그러다 어학연수를 가겠다는 핑계를 대고 필리핀으로 호주로 1년 동안 집을 떠났다. 엄마는 내키지 않아 했지만 공부를 핑계 삼았으니 어쩔 수 없이 보내주었다. 집을 떠나 있던 시간은 내게 많은 변화를 주었다. 더 큰 세상을 알게 되었고 엄마로부터 물리적으로 독립할 힘을 기르게 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꼬박 두 달을 열심히 공부했고 편입에 성공했다. 엄마로부터 물리적으로 완전히 독립하게 된 것이다. 독립해서 살다 보니 조금씩 나만의 생각과 꿈을 키웠고 더 이상 엄마에게 의지하지 않게 되었다. 내 삶은 내가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것이라는 자신감이 생겼고 그때부터 엄마의 조언은 듣지 않았다.


독립한 뒤로는 엄마에게 물어볼 일이 있어 묻기라도 하면 엄마는 풀이 죽은듯한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네가 알아서 잘하잖아. 이제 네가 나보다 머리가 커서 엄마가 도와줄 게 없어.”


그때부터였을까. 엄마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언젠가부터 뭐든 “니들이 알아서 해. 알아서 잘하잖아 “라며 한발 뒤로 물러선다. 엄마는 자신감이 없어졌고 나와 동생의 주도로 여러 가지 일들을 해결해 나갔다. 엄마는 점차 우리에게 크고 작은 일들을 의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엄마는 점점 자리를 잃어간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결혼을 한다고 했을 때 엄마는 조금 들떠 보였다. 빚을 내서라도 혼수를 해주고 싶다고 했고 나는 그렇게 말하는 엄마가 싫었다. 빚지고 하는 결혼은 하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엄마가 빚을 지고 시켜주는 결혼이라면 더더욱 싫었다. 남편과 나는 양가 도움 없이 결혼을 준비했고 엄마의 무리한 도움은 받지 않겠다고 거절했다. 그럼에도 엄마는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걸어 필요한 건 없는지 사돈댁에 챙겨야 할 건 없는지 물었고 나는 엄마의 관심을 귀찮아했다.


”다 필요 없어. 엄마는 신경 쓰지 마. 알아서 할게. “


엄마는 지치지도 않고 결혼준비하는 내내 내게 물었다.


"이불은 언제 사러 갈 거야? 엄마가 올라갈까?"

"엄마가 그릇세트는 사줘야지."


엄마는 친정엄마 노릇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함께 이불세트며 그릇이며 보러 다니고 딸의 결혼을 준비하고 싶었을 엄마를 생각하니 이제와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그릇이며 이불이며 다 사달라고 조르고 싶다.


엄마가 내 결혼으로 인해 부담을 느끼고 무리한 지출을 하지 않기를 원했다. 지독한 가난을 막 벗어났을 즈음이라 돈에 온 신경이 쓰였다. 엄마에게 금전적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엄마의 마음까지 헤아리기에는 내 마음이 아주 좁고 비루했던 시절이었다.


결혼하고 얼마 뒤 엄마는 지나가는 말로 "애기는 전주에서 낳을 거 아냐?"라고 물었다. 아기가 생기면 당연히 친정에서 낳을 줄 알았던 것이다. "아니. 서울에서 낳아야지" 나는 일말의 기대도 남기지 않고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엄마는 내게 아이가 생기면 또다시 친정엄마의 역할을 할 거라고 기대했던 것 같다. 주변의 많은 딸들이 그렇듯 아이가 태어나면 친정엄마에게 많이 의지한다. 내 주변, 엄마 주변의 많은 모녀사이가 그러했다. 엄마는 으레 당연하듯 출산하면 엄마에게 도와달라고 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번에도 친정엄마의 자리는 없었다. 나는 엄마의 도움 없이 남편과 둘이서 씩씩하게 육아를 해냈다.


"미용실 이모 알지? 딸이 아기 낳아서 서울에 봐주러 갔는데 아직도 못 내려오고 있어. 나보고 절대 아기 봐주지 말래. 돌아오는 거 하나 없다고"


"엄마 걱정하지 마. 엄마가 우리 집에 와서 애를 봐줄 일은 없어"


엄마에게 아이를 맡길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우리 아이는 우리 부부의 책임으로 키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엄마에게 더 이상 희생을 강요하고 싶지도 않다. 무엇보다 엄마가 친정엄마 노릇을 어디까지 하고 싶은 건지, 아이를 키워주고 싶은 건지 싫은 건지도 잘 모르겠다.

엄마 자신도 정리되지 않은 마음일 것이다.


엄마는 나와 동생을 키우며 자신을 잃었고 다 큰 자식들이 제 앞가림을 하고부터는 다시 엄마 자신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었다. 자식을 위해 평생을 희생하며 살아온 엄마는 엄마의 자리를 잃고 자신이 없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을까. 쓸쓸하고 막막했을 엄마를 떠올려본다. 명치가 콱 막힌 듯 저리고 가슴이 아프다.


이제는 엄마에게 친정엄마의 자리를 내어주려고 한다.  엄마가 원하는 친정엄마 노릇이 뭔지는 모른다. 그냥 내가 원하는 엄마의 도움을 마음 편히 요구해 본다. 가끔은 아이를 봐달라고 하기도 하고 반찬을 만들어달라고 조르기도 한다. 엄마가 흔쾌히 알겠다며 다 해준다며 좋아하는 모습이 어색하다. 어쩌면 엄마가 원하는 건 그저 내게 엄마가 필요하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직은 어색하고 삐걱대는 모녀사이지만 그래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마음 편히 받아먹는 엄마 밥은 맛이 참 좋다. 아이랑 놀아주는 엄마 얼굴도 참 보기 좋다. 지금 이 정도 거리에서 엄마노릇, 딸노릇하며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진다. 엄마는 지금 우리 사이 괜찮을까?




                    

이전 05화 K 장녀의 책임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