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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비 Aug 28. 2024

커다란 짐가방

오래된 불안의 원천


어릴 때 내 방은 옷방을 겸하고 있었다. 한쪽 벽은 옷장으로 채워졌고 침대와 책상이 놓인 방이었다. 중학생이었던 어느 날 우연히 옷장 안에 커다란 짐가방을 보게 되었다. 늘 그곳에 있던 가방이었는데 그날은 왠지 열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이라도 들고나가면 곧장 떠날 수 있는 그런 가방이었다. 짐가방 안에는 엄마의 옷가지와 속옷이 가득 차 있었다.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엄마가 우리를 두고 떠나려고 하는구나.


짐가방에 대해 엄마에게 차마 묻지 못했다. 그저 엄마가 떠나지 않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학교에 가면 하루종일 엄마의 짐가방만 생각했다. 학교가 끝나면 곧장 집으로 달려가 옷장 안에 짐가방부터 확인했다. 다행히 짐가방이 없어지거나 엄마가 떠나는 일은 없었다. 짐가방은 늘 그 자리에 있었다. 어느 날은 가득 차있고 또 어느 날은 비워져 있었다. 가방 안에 옷가지가 가득한 날은 밤새 기도했다.


'제발 엄마가 우리를 두고 떠나지 않게 해 주세요'  


가방이 비워져 있던 날에도 엄마가 언제 또 짐을 쌀지 몰라 매일 학교가 끝나면 집으로 뛰어왔다. 그렇게 1년이 지났고 언젠가부터 엄마는 더 이상 가방에 짐을 싸지 않았다. 짐가방을 확인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안심이 되었을 때부터 격동의 반항기가 시작됐다. 그때 나는 정말로 못된 딸이었다. 온갖 나쁜 말을 퍼부으며 엄마에게 상처를 줬다. 엄마는 "너 때문에 정말 많이 울었어 “라고 말한다. 인정한다. 그때 엄마와 나는 해야 할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삐뚤어진 마음을 엄마에게 못된 말을 쏟아내는 것으로 표현했다. 잘못된 방식이었다. 수치스럽고 죄스러운 기억이라 오래 부끄러웠다. 일반적인 상황이었어도 불안했을 사춘기에 엄마가 떠날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큰 스트레스였다. 엄마에게 그때 못된 말해서 미안했다 말해주고 싶지만 온전한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미안함도 전할 수 없다. 엄마는 깊은 감정의 대화는 원하지 않는다.


초등학교 때 엄마가 긴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그때 엄마는 냉장고 가득 반찬을 채워놓고 커다란 짐가방을 들고 서 있었다. 5천 원을 건네며 "엄마 다녀올 테니 필요한 거 있으면 사 먹어"라고 말하고는 길을 나섰다. 그때 엄마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그때 엄마가 집을 떠나는 거라고 생각했다. 엄마가 집을 나선 뒤 5천 원을 바라보며 멍하니 서서 한참을 울었던 기억도 여전히 생생하다. 엄마가 다시 돌아오고 나서 괜찮아졌나? 그런 기억은 나지 않는다. 성인이 되고 나서 그때의 일을 말했더니 엄마는 "그걸 기억해?"라며 아빠 때문에 열받아서 일주일 동안 여행을 다녀왔다고 말했다. 혼자서 동해를 다녀왔다나.


초등학교 고학년 때쯤 엄마와 아빠가 싸우는 날이 부쩍 많아졌다. 내게 아빠와 떨어져 살면 어떻겠냐고 물어봤던 즈음이었던 것 같다. 엄마는 이혼할 결심을 접고 잘 살아보려 노력했지만 잘 되지 않았나 보다. 엄마와 아빠는 우리가 잘 때 싸웠다. 나름 들키지 않으려는 노력이었다. 처음엔 조용한 목소리로 얘기를 나누듯 싸웠다. 아주 작은 소리도 나는 다 듣고 있었지만. 노력은 오래가지 못했고 큰 소리로 싸우는 날이 많았다. 아빠는 가끔 욱하면 물건을 집어던지기도 했다. 나는 대부분 방 안에서 모른 척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싸우는 소리는 천둥이 치는 것 같은 무시무시한 공포였다. 귀를 막아도 들려오는 소리에 눈물로 밤을 지새운 적이 많았다. 그때도 나는 기도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도밖에 없었다.


‘엄마, 아빠가 제발 그만 싸우게 해 주세요’


나의 불안은 아주 오래된 것이다. 엄마의 최선을 다한 희생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늘 불안했다. 세상 전부인 존재가 언제가 나를 떠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안고 살았을 어린 내가 가엽고 불쌍하다. 가끔 엄마가 살갑게 다가오면 거부감을 들 때가 있다. 나도 모르게 한걸음 멀어진다. 아마 오래된 불안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어쩌면 날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 졸이며 기도했던 많은 날들이 쌓이고 쌓여 자동적 반응이 생겨났을지도.


어릴 때 엄마는 늘 지쳐 보였다. 누가 건드리기라도 하면 툭 하고 쓰러질 것 같은 슬픈 얼굴이었다. 짐을 싸고 풀었을 엄마를 떠올리면 견딜 수 없을 만큼 슬프다. 견디기 힘든 세월을 어떻게 견뎠을까. 차마 우리를 버리지도 못한 엄마의 마음을 짐작조차 할 수가 없다. 수많은 날을 도망치고 싶었지만 꾹 참고 버텨내 준 엄마에게 떠나지 않고 지켜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이 글은 엄마에 대한 원망의 글이 아니다. 고마움이 크지만 아무도 모르게 간직해 온 아픔이 있다는 것을 글로 적으며 털어내고 싶었다. 엄마에게는 말할 수 없는 나만의 아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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