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은 엄마의 필요에 의해 존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몇 년 전부터 K 장녀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했다. K는 Korea의 약자로 한국사회에서 장녀로 살아가는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한국사회에서 맏딸, 장녀가 어떤 의미이길래 이런 신조어가 생겨난 것일까.
흔히 딸을 엄마의 필요에 의해 존재하는 사람으로 지칭한다. 둘째를 임신했을 때 만나는 사람들마다 성별에 대해 물었다. "딸이에요"라고 말하면 "축하해. 엄마한테는 딸이 필요하지"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딸을 원했지만 필요해서 원한 것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딸을 엄마에게 필요한 존재로 생각하다니 씁쓸하다.
'맏딸은 살림밑천'이라는 말이 있다. 나 역시 엄마에게 들은 적이 있다. 그저 딸로 첫째로 태어났을 뿐인데 살림밑천으로 쓰여야 한다고 생각하니 딸에게 너무 가혹한 현실이다.
늘 집에 보탬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다. 돈을 많이 벌어 엄마 빚을 갚아주고 동생이 결혼할 때 금전적 도움을 주고 싶었다. 내 마음속 데드라인은 엄마 빚을 다 갚는 날, 동생이 결혼하는 날이라고 다짐했었다. 그 정도 도움을 주는 것이 맏딸로서의 역할이라고 여겼다. 누가 그러라고 시킨 것도 아닌데 스스로 그렇게 마음먹었다. 엄마가 경제적인 어려움을 이야기할 때마다 부담되었지만 꼭 해결해야 될 과제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책임감은 일을 열심히 하게 만들어주는 원동력이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익숙한 듯 K 장녀로 살아왔다.
20대 때는 열심히 일해도 보상이 따라오지 않았다. 학자금 대출을 받아 학교를 졸업했고 빚을 진 상태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서울에 집이 없어 월세방을 전전하며 학자금 대출과 생활비로 버는 돈은 고스란히 다 써버렸다. 해가 갈수록 돈을 모으기는커녕 빚만 늘어갔다. 점점 부담은 늘었고 시름은 깊어졌다.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려봐도 엄마 빚까지 감당하기에는 능력부족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잠들기 전 다음날 눈을 뜨기 싫다는 생각을 꽤 자주 했다. 그런 힘든 순간에도 엄마에게는 말하지 못했다. 늘 애써 괜찮은 척했고 나만큼이나 삶이 퍽퍽했던 엄마에게 다 괜찮을 거라고 말해줬다.
다행히 30대에 접어들며 형편이 많이 나아졌다. 비교적 이른 나이에 돈을 잘 벌게 되었고 빚도 갚을 수 있었다. 어느덧 여유가 생겼고 엄마에게 용돈을 보내줄 수 있게 되었다. 엄마는 그런 딸을 자랑스러워하고 뿌듯해했다. 금전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어 내 마음도 한결 편해졌고 보람과 기쁨도 느꼈다. 계속해서 돈도 잘 벌고 보탬이 되는 딸이었으면 좋았겠지만 일을 그만두고 아이를 낳으면서 더 이상 돈을 벌지 않는다. 아직 내 마음속 데드라인은 끝나지 않았다. 엄마는 이따금씩 경제적인 부분에 대한 걱정을 슬쩍 내비친다.
“올해 한 푼도 못 벌었어”
엄마가 내게 경제적 도움을 바라고 하는 말이 아닌 걸 안다. 알면서도 마음이 쪼그라들고 초조해진다. 당장이라도 나가 돈을 벌고싶은 마음이 든다. 엄마를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과 아직은 어린아이들을 돌봐야 한다는 생각이 충돌한다. 여전히 책임감은 나를 짓누르지만 애써 외면한다.
우연한 계기로 학교 심리상담센터에서 상담을 받은 적이 있다. 상담시간 대부분은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차지한다. 나의 주호소문제이기도 하지만 내게는 제일 어렵고 버거운 일이 엄마를 대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엄마를 사랑하지만 미운 마음, 고맙지만 원망스러운 마음이 든다. 엄마를 향한 양가적 마음이 하루에도 수십 번 바뀐다. 엄마는 상처가 많은 사람이고 그래서 가장 가까운 딸을 힘들게 한다. 오랜 시간 엄마와 나는 밀착된 관계로 지내왔고 엄마의 상처가 마치 내 것인 것처럼 살아왔다.
"엄마에게 힘들다는 말을 해본 적이 있으세요?"라는 질문에 그런 말을 하면 엄마가 무너져 내릴 것 같다고 대답했다. 힘들다는 말을 해야 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살았다. 엄마에게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에게도 힘든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유진님은 엄마의 마음까지 책임지려고 하시는 것 같아요”
내 대답에 상담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엄마의 마음까지 책임지려는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동안 엄마의 마음을 신경 쓰느라 내 마음은 챙기지 못했다는 생각에 하염없이 슬퍼졌다. 그날 이후로 엄마 마음은 엄마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엄마마음에 대한 책임을 내려놓고 나니 힘들다는 말도 조금은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내 마음을 털어놓는다고 엄마와의 관계가 좋아지는 건 아니다.
"넌 나한테 상처를 줘"
엄마의 무기다. 엄마는 내가 하는 말에 상처받았다고 말한다. 그저 힘들다고 말했을 뿐인데 엄마가 상처받은 시늉이라도 하면 나는 가만히 얼어붙는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엄마에게 또다시 상처를 줬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래도 엄마에게 힘들다고 용기 내어 말해본다. 모든 일에는 연습이 필요한 거니까. 조금의 후련함과 그보다는 더 큰 죄책감이 딸려오지만 그래도 계속해보려고 한다. 내가 힘들다는 말도 못 하고 속으로 삼킨다는 걸 엄마가 알게 된다면 엄마에게는 그 역시 슬픈 일일 테니까.
'그저 내게 그런 마음이 드는구나. 엄마는 엄마고 나는 나다. 엄마의 감정은 내 책임이 아니다'
엄마를 향한 부정적인 감정이 들 때마다 되뇌어본다. 사소한 생각의 변화가 엄마와 나의 밀착된 관계를 끊어낼 고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여전히 엄마에게 미안하고 엄마가 안쓰럽지만 엄마의 아픔과 상처는 엄마의 몫이다. 이제는 K 장녀로 살지 않으려고 한다. 그저 엄마의 딸로 살고싶다.
첫째 어린이집 방학과 방학 끝무렵에 걸린 몸살로 연재를 2주나 건너뛰었네요^^;; 부족한 글이지만 읽어주시는 분들께 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