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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비눈 Oct 08. 2021

나 오늘 소개팅했어

첫사랑을 만난다면(15_소설)

다음 날인 토요일, 우리는 정말 친구처럼 문자를 주고받았다. 

서로의 진심은 숨긴 채 누구보다 편하고 친한 친구처럼 말이다.

    

‘여름아, 오늘 알바 가는 날이지? 날도 더운데 사장님이랑 같이 빙수 만들어 먹어. 같이 일하는 형이 인절미 빙수에 에스프레소 부어 먹으면 맛있대. 난 못 먹어봤지만.’

‘지난 주말에 일했던 거 생각 안 나? 평일이랑은 차원이 다르게 바쁘답니다. 한가한 평일 아르바이트생만 빙수 먹을 수 있네요. 시급 다르게 줘야 되는 거 아냐?’

‘대신 우린 대학교 안에 배달 가야 하잖아. 평일 알바도 고충이 있다고.ㅎㅎ’

‘배부른 소리 하네, 안유현. 난 이제 일하러 간다.’               



평일이 되어서도 나는 그의 잘 잤냐는 문자로 아침을 맞이했고 수업 시간, 식사 내내 일상을 공유했다.     

대화가 잘 통해서 어떤 이야기를 해도 죽이 척척 맞았다. 그와 연락하면 평범한 일상도 새롭고 활기차게 느껴졌다.


‘여름아, 저녁 먹었어? 난 일하러 카페 왔어.’

‘응. 난 오늘까지 제출인 과제가 2개야. 학과 독서실에서 밤새야 할 듯.’

‘나 지금 철학관 주변에 커피 배달 가는데, 네 것도 가져다줄까?’

‘오, 좋지.’     



15분쯤 지났을 때, 그가 철학관 앞이라며 연락이 왔다.




“와, 카페인 정말 필요했어! 근데 커피가 왜 이렇게 많아?” 그는 커피 8잔을 내게 쥐어주었다.

“동기 8명이라며. 같이 먹으라고.”



“우와, 고마워. 그럼 내가 돈 줄게. 얼마지?”

“돈은 됐고, 딱밤 어때? 지난번에 못 때린 게 좀 아쉬운데.” 그가 장난스럽게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았다.

“그건 안돼! 너 다시 카페 가야 되지? 잘 마실게 유현아!” 웃으며 학과 건물 안으로 도망가며 외쳤다. 


         






“와, 웬 커피야? 선우 선배가 준거야?” 동기 지수가 커피를 받아 들며 말했다.

“아니, 같이 알바하는 친구가 주변에 배달 오면서 가져다줬어.”


“고마운 분이네, 덕분에 과제할 맛 난다. 고맙다고 전해줘.” 

지수가 말할 때 혜지는 옆에서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혜지의 표정 없는 눈빛이 아직 정리하지 못했냐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후로도 유현이는 학교에 배달이 있는 날엔 우리 과 건물에 들러 커피를 주고 갔다. 그때마다 친구들은 자기도 카페 알바하면 커피를 공짜로 마실 수 있냐며 부러워했다. 








일주일쯤 지났을까. 혜지와 점심을 먹고 있는 데 유현이가 칼국수 사진을 보냈다.



‘짠, 맛있겠지? 벽화마을 간 날 내가 맛있다고 한 칼국수야. 주소 보낼 테니까 혜지씨나 남자 친구랑 같이 와서 먹어.’

‘그래. 오늘 저녁에 남자 친구랑 같이 가야겠다. 맛없으면 너 딱밤이야.’ 



유현이와 나는 우리의 관계를 친구로 규정짓기 위해 일부러 남자 친구 이야기를 종종 했다. 불편하고 어색하긴 했지만,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믿었다.



    

남자 친구와 칼국수를 먹은 뒤, 집으로 돌아와 유현이에게 문자를 했다.


‘유현아, 나 저녁에 남자 친구랑 칼국수 먹었어. 정말 맛있던데? 서문에 있는 다른 맛집도 추천해줘.’

‘칼국수 집 옆에 김치찌개 집 봤어? 거기도 저렴하고 맛있어.’

‘김치찌개 정말 좋아하는데! 고마워. 넌 저녁 먹었어?’

‘응. 나 오늘 소개팅했어. 그 사람이랑 밥 먹고 집 가는 길이야.’          



유현이의 문자를 받고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했다. 답장을 해야 하는 데 손가락이 굳어서 움직이지 않았다. 친구 사이로 지내기로 했으니 그가 다른 여자를 만나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그 모습을 상상해본 적이 없어서 당황스러웠다. 왼쪽 가슴이 시큰거렸다. 문자였기에 나의 당혹감을 들키지 않아 다행이었다.          




‘소개팅은 어땠어?’

‘괜찮았어. 근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너랑 있을 땐 말이 술술 나오는데 그 사람이랑은 대화가 자꾸 끊기더라고. 그래서 대화 주제 찾느라 애썼어.’

‘긴장해서 그런 거 아냐? 첫 만남이니 어색하기도 할 거고.’

‘그런가. 내일은 같이 영화 보러 가기로 했어.’

‘영화 잘 알아보고 가. 지난번처럼 장르 착각하지 말고.’               


유현이에게 문자를 보내고 핸드폰을 이불 위로 툭 던졌다.


나 왜 이렇게 이기적이지. 선우 오빠랑 밥 먹고 왔으면서 유현이한테 서운할 게 뭐람. 정말 볼품없다, 백여름. 








친구로 지내는 시간이 흘러 10월 초, 가을 향이 제법 나는 때였다.


도서관에서 중간고사 공부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오후 9시, 그에게서 문자가 왔다. 

    

‘여름아, 같이 야시장 갈래?’



야시장을 가면 또다시 옛 기억이 되살아날 것 같아 싫다고 했더니 그는 다른 예쁜 사람과 갈 거라고 말했다. 소개팅 한 사람과 가는 거겠지? 내가 거절했으면서 왜 내가 울적한 건지.


          

유현이가 다가오지 않길 바랐지만 속으론 나만 바라보길 원했던 건가. 정말 최악이다. 타들어가는 마음을 맥주로 달래기로 하며 편의점으로 향했다.


          



편의점에 들러 블랑 한 캔을 잡은 채 멈칫했다. 평소 블랑 옆에 보이던 기네스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유현이도 없는데 기네스는 왜 찾는 건지 모를 일이지만 한참 둘러본 후 기네스 자리가 두 칸 위쪽으로 옮겨진 걸 발견했다.




울적한 기분으로 집에 와서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음악 영화를 다운로드하으려 노트북을 열었는데 메일이 한 통 와있었다. 


유현이었다.


        

‘저기요. 저랑 야시장 갈래요? 그쪽이랑 너무 가고 싶은데.’      




그 사람이 나였구나. 가슴 아래쪽부터 길고 깊은 숨을 몰아 쉬었다. 

안도감과 불안함이 섞인 한숨 내음이 주위를 빙빙 맴돌았다.




그때 문자가 왔다.     


‘자꾸 욕심이 나요.

남자 친구 있는 걸 알기 전엔 '벽이 높네 넘어야지' 이런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벽 끝이 안 보이는 기분이에요.

그런데도 자꾸 낑낑대며 기어올라가는 중인 거 같아요. 끝이 보이겠지 하면서.

올라가지 말자고 하루에 수십 번씩 마음을 다잡는데 몸이 자꾸 움직여요.

근데 그렇다고 남자 친구랑 헤어지길 바라는 건 아니에요. 그냥 맘 가는 대로 해요. 편한 대로.
나는 신경 쓰지 마요.’ 



아까보다 술이 더 고파졌다.




감당하기 버거운 감정의 소용돌이가 내 심장과 머리를 휘감았다. 

그가 여전히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건 기뻤지만 그의 고백을 예전처럼 설레며 받아들이긴 어려웠다. 



         

지난 한 달간 차분하게 우리의 관계를 돌이켜보았다. 유현이에 대한 마음은 날이 추워질수록 점점 커졌지만, 그보다 우리가 만나면 안 될 요소들의 몸집이 더 커졌다.



  

먼저, 일 년에 한 번밖에 없는 남자 친구의 시험이 이제 두 달 앞으로 다가왔다. 지금 남자 친구에게 상처를 주면 그의 인생에서 많은 걸 빼앗아 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 과 사람들의 시선도 신경 쓰였다. 선우 오빠와 나는 모두가 아는 커플이었고, 우리 과 사람들은 남녀 가리지 않고 선우 오빠를 좋아했다. 내가 그를 두고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졌다면, 환승 연애를 했다고 하면 과 사람들은 나에게 매정하게 등을 돌릴 것이다. 가장 믿었던 혜지조차 그런 표정을 지었으니 다른 동기들은 볼 것도 없었다.




그를 밀어내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다.


‘미안해, 유현아.’











사진출처: 핀터레스트

인스타그램 : @bombi_s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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