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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비눈 Oct 11. 2021

두 사람에게 나눠 흐르는 사랑도

첫사랑을 만난다면(16_소설)

다음 날, 학과 건물에서 동기들과 함께 중간고사 공부를 하고 있었다. 일주일 뒤에 시험이라 다들 박카스를 마시며 열심이었다. 



밤 9시쯤 되었을 때, 유현이한테 문자가 왔다.


‘여름아, 철학관이야? 핫초코 마실래?’     



친구로 머물자는 약속을 저버린 그가 미웠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애써 다잡아 잠잠해진 마음의 파도가 크게 울렁거리고 있었다.



그의 문자를 애써 모른 척하며 중간고사 공부에 집중했다. 


모르는 문제를 동기에게 물어보는데 혜지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여름아, 밖에 그분 아냐?”

“그분? 누구?” 


     

혜지의 말에 창문으로 밖을 내려다보니 유현이가 철학관 앞 벤치에 앉아있었다. 핸드폰을 보니 10시였다. 한 시간 동안 밖에서 기다린 것이다. 10월이라 낮엔 따뜻해도 밤엔 쌀쌀했는데 그는 반팔 차림으로 앉아있었다.          





나는 독서실 의자에 걸린 두꺼운 과잠바를 들고 밖으로 나섰다.     


“유현아! 너 여기서 뭐해?”

“아, 네가 문자를 안 읽은 것 같아서. 핫초코 주려고.”


“답장 없으면 그냥 가지...”

“그러게. 어쩌다 보니... 이거 먹어, 여름아. 식었으려나.” 



그가 건넨 핫초코를 받아 들었다. 핫초코 우유 거품 위에는 초코 드리즐로 그린 도라에몽이 웃고 있었다. 핫초코는 차갑게 식어있었고 그걸 건네주는 그의 손 끝은 빨갛게 얼어있었다.


     


“일교차가 심해서 밤엔 많이 추운데 왜 반팔을 입고 있어, 바보야. 일단 이거 입어. 난 긴팔 입어서 괜찮아.”

그는 사양했지만 결국 내 만류에 어쩔 수 없이 과잠바를 입었다.



“여름이 네가 따뜻하게 입어야 하는데 나한테 주면 어떻게 해.”

“괜찮아. 난 긴 팔 입고 있고 네가 준 핫초코 마시니까 안 추워.”

“안 식었어? 다행이다. 안 식게 손으로 계속 잡고 있었던 보람이 있네.” 그의 말에 차마 차가워졌다고 말할 수 없었다.



“응, 따뜻해 유현아. 집에 갈 거야?” 

“아니, 곧 중간고사잖아. 나도 과 독서실에 공부하러 가려고.”

“응, 같이 가자. 졸려서 운동 좀 해야겠어.”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그를 약대 건물까지 데려다 주기로 했다. 약대 건물 앞에 도착하니 헤어지기가 아쉬워 그 근처 벤치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눴다.



“핫초코 위에 도라에몽 그림 너무 잘 그렸던데? 난 초코 드리즐로 예쁘게 그리기 어렵던데.”

“다 노하우가 있지. 내가 알려줄게.” 



그는 가방을 열어 연필과 공책을 꺼냈다. 그가 도라에몽 그리는 걸 보여준 후 내가 따라 그리는 데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는 연필을 잡은 내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가볍게 포개었고, 나는 그의 손이 움직이는 대로 도라에몽 그림을 그렸다.


           


그때 뒤에서 ‘찰칵’ 소리가 들렸다. 


     


그의 과 동기가 우리 뒷모습을 사진 찍은 뒤 유현이의 이름을 부르며 놀리듯 휘파람을 불었다. 불편했지만 유현이의 동기였기 때문에 무슨 소리를 할 순 없어 그냥 넘어갔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그 동기가 페이스북에 우리의 사진과 함께 글을 올린 것이다.

‘우리 과대 연애한다!’           



“여름아, 미안해. 내가 여자랑 이야기하는 걸 처음 봐서 놀리려 그런 거 같아. 글 바로 내리라고 할게.”   


  

그가 페이스북에 올라온 사진과 글을 보여주며 재차 사과했다. 친구가 올린 사진을 보니 뒷모습이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댓글이 하나 달렸다. 

‘철학과네? 누구지? 내가 철학과 지인한테 물어보고 옴.’     


그가 내 과잠바를 입고 있었던 것이 문제였다. 학과 잠바에는 커다란 글씨로 ‘철학과’라고 적혀있었다.     

코끝이 찡하니 아찔했다. 





우리 과는 소수 학과라 인원이 적었기에 그 사람이 나라는 게 들통나는 건 시간문제였다. 


선우 오빠도 곧 알게 되겠지. 좋은 사람인데. 상처 받으면 안 되는데. 취업 준비에 영향 가면 안되는데. 



동시에 과 사람들이 나를 욕하고 등 돌릴 것이 상상되어 무서웠다. 취준생인 남자 친구를 두고 다른 남자와 밤에 함께 앉아있는 모습이라니.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딱 좋은 소재 아닌가.     



약대 건물 앞에 간 것도 나고 과잠을 빌려준 것도 나였다. 그런데도 유현이가 너무 미웠다.     



 그 순간 이 관계는 잘못됐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에게 페이스북에 올린 사진 빨리 내리라고 요청한 후, 철학관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두려움과 걱정으로 중간고사 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다.     

유현이를 좋아하는 마음보다 남자 친구가 상처 받고 과 동기들이 등 돌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다.     








페이스북 사건 후, 나는 유현이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유현이도 그걸 느꼈는지 문자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 사물함엔 매일 커피나 핫초코가 하나씩 들어있었다. 그에게서 문자는 없었지만 아마 유현이었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미안한 마음과 보고 싶은 마음이 불쑥 튀어나오긴 했지만, 옆에 있는 동기들 얼굴을 보며 그를 잊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남자 친구와 보내는 시간을 최대한 늘리고 하루에도 10번씩 사랑한다고 표현했다. 내 안에 남은 죄책감을 지워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죄책감은 옅어지지 않았고 유현이 생각은 점점 짙어졌다.




남자 친구와 있는 동안 유현이가 생각나고, 사물함 안의 음료를 볼 때면 남자 친구가 떠올랐다. 



두 사람에게 나눠 흐르는 사랑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보통 사람들은 한 사람만 열렬히 좋아하던데, 내가 뭔가 잘못된 건 아닐까. 평범한 보통의 연애를 할 순 없을까.







사진출처: 핀터레스트, 직접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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