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을 만난다면(17_소설)
마음속에 두 사람이 섞여있는 시간을 보낸 지 2주쯤 되는 토요일, 유현이에게 연락이 왔다. 남자 친구 곁에 머무르기로 했지만, 여전히 마음은 유현이를 좇던 때였다.
‘여름아, 오늘 밤 9시에 지난번에 갔던 맥주집에서 볼 수 있을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 기다릴게.’
그의 문자에서 평소와 다른 기운이 느껴졌다. 가슴에 무거운 돌덩이가 내려앉은 듯 무거웠다.
그를 만나러 가기 1시간 전,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 내 형체가 일그러지며 빙글빙글 돌았다. 어지러웠다. 조금 일찍 나서서 강변 산책로를 걸으며 생각을 정돈해야지, 하고 집을 나섰다.
강변 산책로엔 운동하는 사람, 버스킹 하는 사람, 음악 듣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걷다 보면 머리가 개운해지겠지, 했지만 아무리 걸어도 머릿속은 여러 생각들로 엉켜있었다. 생각에 짓눌려 걷다 보니 유현이와 누워서 노래를 들었던 농구 코트가 보였다. 우리 둘만 있었던 그날과 달리, 많은 사람들이 농구를 하고 있었다. 함께 떡볶이를 먹으며 성시경 노래륻 듣던 그때를 떠올리니 울컥 눈물이 나왔다.
내 삶의 마지막 날을 유현이와 보내고 싶었으면서, 난 왜 이런 선택을 한 걸까. 난 왜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지 못할까. 난 왜 이리 겁이 많은 걸까.
한참을 서서 농구하는 이들을 지켜보다 핸드폰을 보니 9시 5분 전이었다.
순정 마음 스몰 비어집으로 들어서자 유현이가 앉아있었다.
“여름아, 여기야!” 울적했던 나와 달리 그는 밝게 웃으며 나를 불렀다.
“응,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그럼, 엄청 잘 지냈지. 중간고사도 그럭저럭 잘 쳤고. 넌 어때?”
시험 성적은 어떤지, 과제는 잘 마무리했는지 등 실없는 이야기를 한동안 주고받았다. 그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고 나 역시 캐묻지 않았다.
“여름아, 너 한의원 계속 다녀?”
“응. 최근엔 안 갔지만.”
그의 집 주변이라 그와 마주칠까 봐 한의원에 가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할 수 없었다.
“그렇구나. 걱정이네. 자, 이거 받아.” 그가 공책 한 권과 두툼한 종이봉투를 내밀며 말했다.
“이게 뭔데?”
“허리랑 목에 좋은 약. 그리고 비타민 몇 개도 같이 넣었어. 내가 교수님들께 물어보고 산 거니까 시중에 파는 것보다 좋을 거야. 그리고 공책엔 허리 아플 때 하면 좋은 운동 적어놓았어.”
그가 준 공책을 펼쳐보니 스트레칭 동작이 그려져 있었다. 얇은 공책 반을 채운 그의 서툰 그림과 삐뚤빼뚤한 글자들을 보니 또 마음 한편이 시큰거렸다.
“그림 귀엽다. 고마워. 근데 글씨가 초등학생 같은데?”
“뭐? 내 글씨의 진가를 못 알아보는구먼? 안목을 좀 더 키워야겠습니다, 백여름씨?”
2주 간 서로 많은 생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장난치며 수다를 떨었다. 내 눈시울은 조금씩 붉어졌지만 그는 여전히 맑게 웃고 있었다. 아마 나는 본능적으로 그 한 시간의 대화가 마지막임을 알았던 것 같다.
“이제 집에 가자, 여름아. 내가 데려다줄게.” 한 시간 뒤, 그가 일어났다.
조금 더 앉아있고 싶었지만, 이미 일어난 그를 따라 움직였다. 그때 가게 벽지에 적힌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끝날 것 같지 않던 매서운 겨울이 지나가면 그 겨울 기억도 나지않는다.
지난 사랑도 겨울같았으면. 겨울은 다시 추억하고 싶을까?
우리 집으로 가는 길, 학교 동문에서 그가 발길을 멈췄다.
“여름아, 나 사실할 말 있어.”
“응. 말해 유현아.”
유현이의 말을 듣기도 전에 심장이 계속 아려왔다. 내가 생각하는 그 말일까, 혹시 다른 말은 아닐까. 헛된 기대를 품고 그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그도 바로 말하기가 힘든지 한참 뜸을 들이다 윗입술을 뗐다.
“이제 우리 그만 보자. 정말 많이 좋아하지만 계속 만나는 건 내 만족이지 널 위한 건 아닌 것 같아. 내가 널 조금만 좋아했으면 계속 연락하겠지만, 난 많이. 아주 많이 좋아하니까 네 입장을 더 생각할 거야.”
“….” 그의 말에 머리가 새하얘졌다.
“혹시 딱 한 번만 안아 봐도 될까?”
“… 응.”
그의 큰 손이 내 어깨와 등을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그의 온기에 눈물이 차올랐지만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눈물을 꾹꾹 삼켰다. 그는 지금 어떤 마음일까. 가까이 있는데도 그의 숨소리조차, 조금의 미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여기서부턴 혼자 갈게. 잘 가, 유현아.”
“그래. 고마웠어, 여름아. 조심히 가.”
상처만 준 내가 뭐가 고맙다는 건지….
우리는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집으로 가기 위해 발길을 돌렸다. 진짜 마지막이니까,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어서 서로를 바라보며 천천히 뒤로 한 발자국씩 움직였다.
그는 한참을 뒤로 걷다가 잠시 멈추더니 팔을 머리 위로 올려 좌우로 손을 흔들었다.
그러고는 뒤돌아서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그의 발걸음이 지금까지 마음고생했던 걸 훌훌 털어내는 듯 보였다.
저렇게 맑은 사람을 내가 힘들게 했다니, 지금이라도 헤어지게 돼서 다행이다,라고 마음에도 없는 생각을 했다.
첫 고백을 거절할 때, 남자 친구가 있다고 밝혔을 때, 그리고 오늘까지. 사귄 적은 없지만 우리는 여러 번 헤어졌다. 예전 헤어짐과 다르게 이번엔 그가 나를 밀어냈다. 그의 빠른 발걸음이 다시는 날 향하지 않겠다는 다짐 같았다.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풀썩 쓰러지듯 엎드렸다. 베개에 얼굴을 묻으니 그의 미소 짓는 얼굴과 따뜻한 온기가 떠올랐다. 몸이 으스스하니 추운 것 같아 이불을 뒤집어쓴 채 소리 죽여 울었다. 이불보가 흥건히 젖은 후에야 이제 정말 끝이구나, 실감이 났다.
마지막 인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 같아 핸드폰을 들었다.
‘마치 내일 볼 듯이 인사한 것 같네. 마지막까지 고마워. 웃으면서 행복하게 잘 지내, 유현아.’
‘나 때문에 고생 많았어. 지금도 너무 좋아하지만 내가 끼어든 만큼 비켜줄게. 그리고 고마워. 누굴 이렇게나 좋아할 수 있다는 걸 알게 해 줘서. 아프지 말고 잘 지내.’
그는 마지막까지도 예뻤다. 한결같이 다정하고 예의 바른 사람. 누가 뭐래도 나의 21살을 가득 채운, 나의 여름과 가을을 따듯하게 보듬어준 사람.
다음 해 2월 겨울, 나는 남자 친구와 헤어졌다. 선우 오빠가 최종 합격 소식을 들은 바로 다음 날이었다.
그만 만나자는 나의 말에, 선우 오빠는 내가 자신에게 마음이 떠난 걸 진작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자신에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면 안 되겠냐고 묻는 그의 말에 내가 고개를 젓자 그는 누군가 마음에 있냐고 물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니 그는 내 어깨를 토닥였다. 취업 공부한다고 많이 신경 써 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자기 곁을 지켜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선우 오빠가 모든 걸 눈치채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지만, 내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유현이. 유현이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그의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견딘 지 네 달, 남자 친구와 헤어졌지만 바로 연락할 순 없었다. 차갑게 밀어냈으면서 그에게 다시 손 내밀기가 두려웠다.
그는 여전히 따뜻한 눈빛으로 날 맞이해줄까. 아님 내가 그랬듯 차가운 손짓으로 날 밀어낼까.
선뜻 연락하기가 두려워 우연히 마주치길 기다렸다. 우연히 마주치면, 용기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와 만날 수 있도록 캠퍼스 안에선 늘 주위를 살피며 걸었고 점심 식사는 늘 약대 주변인 서문에서 먹었다. 한의원을 갈 때면 한의원 아래 카페에서 한참 앉아있곤 했다.
그러나 둘 다 아르바이트를 그만두었고, 학과 건물 거리도 멀었기에 그와 우연히 마주칠 일은 없었다.
겨울 방학이 지나고 22살 4월의 봄
하루에 서너번씩 약대 건물에 가면 마주칠 법도 한데, 왜 이렇게 안 보이는 거지. 그가 혹시 휴학을 한 건 아닐까.
그마저도 그에게 직접 연락할 용기가 없었던 나는, 여전히 겁쟁이였고 숨기 바빴던 나는, 학교 익명 커뮤니티에 가입했다. 한국대 학생만 가입해서 익명으로 정보를 나누는 곳이었다. 그곳에는 좋아하는 짝사랑 상대에 대해 물어보는 게시판도 있었다.
내가 이런 익명 커뮤니티를 이용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심호흡을 한 번 하고 글을 올렸다.
‘ 약학과 ㅇㅇㅎ 재학 중인가요? 혹시 여자 친구 있나요?’
여자 친구 여부는 혹시 몰라 덧붙였다.
그가 나인 걸 알아보진 않을까 마음 졸이며 댓글을 기다렸다. 몇 시간 뒤, 내 글에 댓글이 달렸다.
사진출처: 핀터레스트, 직접 촬영
인스타그램 : @bombi_s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