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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비눈 Oct 15. 2021

눈에 담고 싶은데 시야가 흐릿해져서

첫사랑을 만난다면(18_소설)


‘ㅇㅇㅎ 친구입니다. 여자 친구랑 같이 휴학했어요.’     

돌아온 답에 마음이 철렁했다. 여자 친구라니, 유현이의 여자 친구라니.


     

그 댓글을 본 후, 불면증이 생기고 음식을 먹어도 소화가 되지 않아 먹는 양이 줄었다. 얼굴에 다크서클이 어둡게 드리우고 눈빛은 점점 생기를 잃어갔다. 동기들에겐 이제 3학년이니 공부해야 한다는 핑계로 식사 모임이나 학과 행사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별일 없다가도 유현이만 생각하면 눈물이 났다. 작년 여름, 나의 행동이 후회됐다. 남자 친구를 다치게 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너와 나를 아프게 했구나. 나도 네가 너무 좋았었는데. 너와 함께라면 모든 것이 다 좋았었는데 왜 네 곁으로 가지 못했을까.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적은 장문의 문자를 몇 번이나 썼다 지웠다.


          

문자 보내면 안 되는 거 아는데. 이제 내가 비켜야 할 차례라는 걸 아는데.     



내 사물함을 열면 네가 넣은 핫초코가 없어서. 한의원이 너의 자취방 아래라서. 네가 선물한 스트레칭 공책이 낡아서. 커피를 마시면 네가 그려준 도라에몽 그림이 생각나서. 너와 함께 걸었던 길을 걸어서. 내 다이어리에 네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늘 썼다 지웠던 문자를 그날은 뭔가에 이끌린 듯 전송 버튼을 눌렀다. 어쩐지 문자를 보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네가 진실을 알면서도 내게 마음을 표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처럼. 

         

‘잘 지내? 생각나서 연락했어. 불편하다면 미안해.’          



문자를 보내고 핸드폰을 이불 위로 던졌다가 다시 들었다가 뒤집어 놓았다가 열었다가 반복했다. 보내지 말 걸, 손가락을 원망했다. 이리저리 좁은 원룸을 돌아다니고 있는데 유현이에게 불편한 기색 없이 답장이 왔다. 



         

‘오랜만이네, 여름아. 안 불편해. 오히려 반갑지. 이번 주말에 만날래? 사실 할 말 있어서 한 번 연락해야지 싶었거든.’     



의외의 문자에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무슨 의미일까, 정답이 나오지 않을 걸 알면서 내 방 곳곳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대체 할 말이라는 게 뭘까.     



게다가 나를 싫어하지 않고 오히려 반겨주다니. 남자 친구 있는 걸 속이고 자신과 만나고, 결국 마지막까지 그의 마음을 밀어낸 나를 미워하지 않다니.               




그와 만나기로 한 토요일 오후 7시, 무릎까지 오는 하늘거리는 분홍빛 원피스를 입고 강변 산책로로 향했다. 그에게 여자 친구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 하는 1퍼센트의 가능성을 기대하며.          








강변 산책로엔 지난 여름에도 그랬듯, 버스킹하는 사람이 많았다.

흩날리는 벚꽃과 연인 간 사랑을 노래하는 음색이 내게 희망이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미안하다고, 다시 잘해보자고 그를 붙잡고 싶었다. 너도 기다렸으니 나도 기다릴 거라고.          





멀리서 그가 오는 게 보였다. 첫마디를 어떻게 꺼내야 하지, 고민하는 순간 유현이는 저 멀리서 손을 크게 흔들며 내 이름을 불렀다.     



“여름아!!”     


그는 잘 지냈는지, 어떻게 지냈는지 물어보았다. 떨어져 지낸 시간으로 인해 예전처럼 친근하게 느껴지진 않았지만. 다행히 어색하지 않았다.      



“너랑 이야기하니까 옛날 생각이 새록새록 나네.” 그가 추억에 잠긴 듯 말했다.

“난 내가 너한테 못되게 군 것만 떠올라.”


     

“아냐,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난 너한테 좋은 기억밖에 없는데? 그땐 내가 너무 내 감정만 생각했던 거 같아. 내가 버스 정류장에서 말만 걸지 않았어도 서로 힘든 일은 없었을 텐데, 그땐 다른 건 돌아볼 여유도 없을 정도로 너한테 빠져서 그게 안되더라. 헤어지고 나서도 혹시 네 얼굴 볼 수 있을까 싶어서 집 앞에 가보곤 했었어.”



“나도 네 생각 자주 났어. 내가 가는 한의원이 그 근처였잖아.” 밤이고 낮이고 네 생각만 했다고 말할 순 없어서 한의원 핑계를 댔다.     



“그랬구나. 그래도 조금 위안이 되네. 난 남자 친구한테 갔다는 생각에 혼자 남겨진 기분이었거든.”     

“….”     



“여름아, 나 네가 요즘 약대 건물 앞에 자주 온 거 알고 있었어. 동기들이 알려줬거든, 네가 자주 온다고.”     


“아…. 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리가 새하얘졌다. 여전히 좋아한다고 고백할까, 망설이는 찰나 유현이가 조금은 굳은 표정으로, 그러나 여전히 따뜻한 눈빛으로 말했다.



   

“사실 그래서 만나자고 했어. 여자 친구 있다는 거 알려주려고….  전공이 같아서 다음 달에 같이 캐나다에 있는 대학교로 교환학생 가기로 했어.” 


    

“아. 그랬구나. 축하해 유현아. 몸 조심히 잘 다녀와.”

 

담담하게 말하려 했으나 입술은 내 마음도 모른 채 떨렸고 손등 위론 눈물이 떨어졌다. 여자 친구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의 입으로 직접 듣는 건 괴롭고 외로운 일이었다. 지난 여름, 같은 상황을 겪은 그가 참 힘들었겠다는 생각을 했다. 

              




“응, 여름아. 너도 행복했으면 좋겠어. 졸업하면 거기서 자리를 잡을까 해. 그래서 오늘이 마지막으로 만나는 날일 것 같아.” 

    


그를 볼 수 없다는 말에 또다시 눈물이 맺혔다. 제발 울지 말자, 눈물아 떨어지지 말아 줘,라고 마음속으로 외쳤다. 눈물이 흐르지 않도록 고개를 뒤로 젖혔지만, 야속하게도 내 볼은 흥건히 젖어버렸다.          



그의 큰 손이 내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조금은 거친 손이 내 뺨을 스칠 때 눈물은 더욱 속도를 냈다.     



우는 나를 다독이며 “여전히 그대로네.”라고 말하는 너. 

웃음소리도, 우는 모습도 여전히 그대로라며. 머리가 많이 자랐다고 쓰다듬어 주는 너. 이렇게 따뜻한 너를 내가 어찌 잊을 수가 있을까.



           

너는 나를 완전히 잊었다고 말했다. 이제 내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만나는 동안 모든 걸 주어 후회도 남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와 달리 만나는 동안 많은 걸 숨기고 모든 걸 내어주지 못한 나는 미련이 가득했다.          




너는 여전히 예쁘게 미소 지었다. 항상 느끼던 거지만 예쁜 눈빛을 가졌다. 반년 간 상상만 하던 그 눈빛을 실제로 보게 되자 마음이 내려앉았다. 자기한테 정 떼라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들조차 너무 소중해서. 너의 말 한마디 동작 하나 남김없이 기억하고 싶어서. 모두 다 눈에 담고 싶은데 눈물이 차올라 시야가 흐릿해져서 화가 났다. 






사진출처: 핀터레스트, 직접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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