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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비눈 Oct 05. 2021

도둑질 하지 말 걸 그랬어

첫사랑을 만난다면(14_소설)

“여기서 우리 집 가려면 15분 걸어야 하는데, 다리 안 아프겠어?”

“괜찮아. 게임하면서 갈까? 진실 게임 어때? 말 못 하면 꿀밤 맞는 거야.”


“그래. 그럼 내가 먼저 물어볼게. 여름이 넌 제일 후회되는 순간이 언제야?”     

“도둑질한 게 후회돼.”

“도둑질?” 예상하지 못했던 답변에 놀란 눈치였다.


     

“응. 9살 때 친구랑 다툰 뒤에 친구 크레파스를 훔쳤어. 단지 친구가 슬퍼했으면 좋겠다는 불순한 마음으로 말이야. 죄책감으로 힘들었는데 친구한테 도둑질했다는 걸 밝히고 사과할 용기가 없었어.”

     

“그 친구랑은 어떻게 됐어?”     


“친구는 크레파스가 사라진 줄도 몰랐어. 다툰 건 바로 화해했지만, 난 계속 죄책감에 힘들었어. 그렇다고 친구한테 도둑질했다는 걸 밝히고 사과할 용기는 없었고. 제일 친한 친구였는데, 그 친구를 점점 피하게 되더라. 어릴 적 했던 충동적인 행동이 아직도 가끔 생각나서 힘들어.”     


“그 친구랑 요즘 연락해?”


“아니, 연락처도 몰라. 이제 내가 질문할게. 유현이 넌 제일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야?”          




“나는 요즘이 제일 좋아. 22년간 느껴보지 못한 감정들을 많이 느꼈거든. 누군가 이렇게 좋아진 것도 처음이고, 이렇게 애탄 적도 처음이고. 내가 알던 내가 아닌 것 같아서 모든 게 다 신기해.”     

그 말을 듣고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내 표정이 굳는 걸 본 그는 말을 이었다.  


   

“아, 부담가지라고 하는 말은 아니고 그냥 좋다고.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난 정말 행복했거든. 그런 경험을 하게 해 준 너한테 고마운 마음뿐이야.”


“아냐, 부담 안 돼. 나도 좋은 시간들이었어, 고마워.”


          

“다행이네. 음 다음 질문은 말이야…. 지난 일주일 동안 내가 좋았던 적이 있어?” 

그는 고개를 떨구어 땅을 본 채로 물었다.



     

당연하다고. 언제부터 네가 좋아졌는 진 모르겠지만, 아주 자연스럽고 빠른 속도로 네가 좋아졌다고. 내 일주일은 온통 네 생각뿐이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는 늘 나에게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말했지만, 난 한 순간도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다. 오늘도 남자 친구가 있다는 것만 말했을 뿐, 그를 좋아한다는 내 감정은 말하지 못했다. 그러나 친구로 지내기로 한 뒤에 좋아한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꿀밤 맞을게.”

내가 웃으며 말하자 그는 조금 실망한 눈치였지만 금세 표정을 바꾸어 말했다.     


“오예, 꿀밤이지? 절대 안 봐줄 거야.” 그는 손가락 깍지를 껴서 손가락 관절을 풀었다. 두두둑 소리에 내가 표정을 찡그렸더니 그가 재밌다는 듯 웃었다.


     

“이리 와, 백여름. 이마 딱 대.” 엄지와 중지를 동그랗게 만든 뒤 입으로 휭휭 소리를 내며 그의 손가락이 내 이마에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반복했다.     

“으악, 빨리 때려. 이게 더 무서워.”




진지했던 마음은 어디로 가고, 그의 장난에 또다시 아이처럼 웃었다. 눈을 찔끔 감자 ‘딱’ 소리가 났다. 근데 아프지 않아서 눈을 떴다.


          

“이건 내 질문이 잘못됐네. 그니까 내가 맞을게.” 그가 자신의 이마에 딱밤을 놓은 것이다.     

“뭐야, 네 이마에 때린다고 너무 살살한 거 아냐? 빨개졌나 봐 봐. 벌겋게 되도록 이렇게 ‘빡’ 때려야지!”

내가 그의 이마에 딱밤을 놓고 도망가자 그가 뛰어오며 말했다.   



  

“백여름, 내가 딱밤 맞는다는 말 취소야. 얼른 이마 대!”     

한밤중에 술래잡기를 했다. 초등학생 이후로 이렇게 웃으며 뛰어다녔던 적이 있었나. 숨이 차도록 뛰어다니다 잡히지 않기 위해 낮은 돌담 위에 올라서자 그가 말했다.


          

“항복, 안 때릴게. 내려와.” 그가 가쁘게 숨 쉬며 말했다.

“정말이지? 알겠어. 그럼 다음 질문은 뭐야?”


          

“음, 만약 내일 죽는다면 지금 뭐하고 싶어?”

“이건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한데. 일단 떡볶이랑 맥주를 먹을 거야.”



“어디서 먹을 건데?”

“야외면 좋겠어. 지금 날씨 좋으니까.” 


          

정말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면 뭘 할까? 좋아하는 사람이랑 맥주 마시며 말없이 풍경을 감상하면 좋을 것 같았다. 그 모습을 상상하자 눈앞에 그려졌다. 산 중턱에 앉아있는 나와 어떤 사람의 뒷모습이 보였다. 상상 속의 그들은 어깨를 기댄 채 말없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때 그 사람이 얼굴을 돌렸다. 그는 바로 유현이었다.          


“어렵지 않네. 지금 할래? 피아노처럼 행복을 미루지 말고 말이야.” 유현이의 말에 머릿속으로 그리던 상상을 멈췄다.     

“어? 지금? 나 배부른데. 그리고 새벽이라 문 연 분식집도 없을걸.”



“편의점 있잖아. 친구니까 특별히 생에 마지막 떡볶이와 맥주는 내가 쏜다!” 그가 바로 옆에 있는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강변 산책로에서 먹을래? 마지막 날 풍경으로 괜찮겠어?” 양손에 떡볶이와 맥주를 든 채 그가 물었다.

“좋지! 농구장에서 먹자. 낮엔 농구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근처에 못 가봤거든.”



     

우리는 강변 산책로에 있는 간이 농구장 바닥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맥주를 꺼냈다.

“근데 빨대 꽂아 마시니까 정말 맛있더라. 완전 다른 맛이야.” 그가 맥주에 빨대를 꽂으며 말했다.

“그렇지? 같은 맥주라도 캔인지 병인지 유리잔에 먹는지에 따라 맛이 다 다르잖아. 난 캔에 빨대가 제일 좋아.”  



        

“내일이면 죽는데, 또 필요한 게 있으신지요?” 그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음악이 있으면 좋지요. 무슨 음악을 듣지? 진짜 마지막도 아닌데 괜히 노래 선택도 신중해지네.” 내가 핸드폰을 꺼내 음악을 찾으며 말했다.


잘 생각해 봐. 너 노래 찾는 동안 내가 좋아하는 노래 틀어 놓을게.” 그가 노란색 아이리버 엠피쓰리를 꺼냈다.



“뭐야, 너 아직 엠피쓰리 써? 고등학생 때 이후로 안 썼는데!”


“겨우 2년 전이구만 옛날인 척 하기는. 난 엠피쓰리가 좋더라고. 여기 60곡 넣을 수 있는데, 내가 좋아하는 노래만 순서대로 있는 게 너무 좋아.”


“사실 나도 자취방에 코원 pmp 있어. 수능 공부할 때 듣던 노래가 저장되어있어서 못 버리겠더라.” 



그가 준 이어폰 한쪽을 귀에 넣자 성시경의 ‘감동이었어’ 노래가 흘렀다.

          

그래 그랬었지 널 사랑하기에 세상은 나에게 커다란 감동이었어
그 순간을 잃는다면 내가 살아온 짧은 세월은 너무나 보잘것없어
되돌려 보려 해 너를 찾으려 해 너 없이 살아도 멀쩡히 숨은 쉬겠지만
후회와 그리움만으로는 견딜 수 없어 하루도 자신이 없어   
      



뒤이어 성시경의 ‘거리에서’가 나왔다.

막다른 길 다다라서 낯익은 벽 기대 보면
가로등 속 환히 비춰지는 고백하는 내가 보여
떠오르는 그때 모습 내 살아나는 설렘한 번에
참 잊기 힘든 순간이란 걸 또 한 번 느껴지는 하루     
     



“너 정말 성시경 좋아하는구나? 지난번에 강변 산책로 버스킹에서 들은 노래지?”

“응. 밖에서 단둘이 노래 들으면 위험하다는 혜지씨 말이 맞았어. 그 이후로 노래 들을 때마다 그때 생각나더라. 넌 노래 정했어?” 그가 멋쩍게 웃었다. 


              

“나는 김동률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 들을래. 혹시 네 엠피쓰리에 있어?”

“아니, 없어. 김동률 노래 잘 몰라. 네 인생 노래 한 번 들어보자.”  


   

그의 mp3에서 이어폰을 꺼내 내 핸드폰에 꽂았다.



     

“우리, 누워서 들을래?” 그가 이어폰을 빼며 말했다.

“어디서? 여기서?”

“응. 내일 죽는데 뭐 어때.” 그가 웃으며 농구장에 누웠다.



“그래도 길바닥에 눕는 건 좀…. 아냐, 그러지 뭐.” 마지막 날이라 생각하니 못해봤던 걸 다 해보고 싶었다. 늘 지나다니는 곳이었지만 새벽에 누워서 보는 짙은 하늘은 새로웠다.

     



농구 코트에 누우니 유난히 밝은 별 하나가 보였다.     

“유현아, 저 별 진짜 밝게 빛난다.”

“음, 너의 마지막 날 감성을 깨서 미안하지만, 인공위성이야.”

“뭐?? 이과 감성 뭐야. 낭만적이지 못하네.” 누워서 크게 웃었다.


     

낮에 사람들이 뛰어노는 곳에서 우리 둘만 누워있으니 마음이 간질간질했다.     

“그래, 별이라고 하면 뭐 어때. 우리 별 보면서 노래 듣자. 제목이 뭐라고 했지?”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자, 이어폰.”


     

조금 떨어져서 누워있었지만 이어폰을 나눠 껴야 해서 옆으로 다가갔다. 앉아서 이어폰을 낄 때는 가깝다고 느끼지 못했는데 누워 있으니 너무 가까웠다. 내 심장 소리가 그에게 들릴까 봐 가슴에 힘을 주어 참아보았지만 너무나 당연하게도, 심장은 계속 뛰었다. 심장 뛰는 소리를 감추기 위해 얼른 노래를 틀었다.  


             

그땐 사랑인 줄 몰랐었다며 가끔 내 소식을 들을 때마다
항상 미안했단 너의 그 말에 불쑥 나도 몰래 눈물이 흘러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 조금 멀리 돌아왔지만 기다려왔다고
널 기다리는 게 나에겐 제일 쉬운 일이라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고   
                 



그와 야외에 누워있는 게 어색했지만, 김동률의 편안한 음색을 들으니 기분이 한결 편안해졌다. 


    

“이제 갈까? 계속 밖에 있으니 조금 쌀쌀한 것 같기도 하고. 덕분에 내 인생 마지막 날을 즐겁게 보냈네. 고마워.”

“나도 재밌었어, 여름아.” 


    

우리는 일어나서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고 유현이의 집으로 걸었다. 음악 이야기를 하며 5분 간 걷다 익숙한 건물 앞에 도착했다.     



“여기가 우리 집이야. 잠시 들어와서 차라도 한 잔 주면 좋은데, 친구랑 같이 살아서.”

“여기가 네 집이라고? 나 여기 한의원 다니는데!”



그가 집이라고 말한 원룸은 내가 자주 가는 한의원 건물이었다.     

“너 어디 아픈데? 왜 한의원을 다녀?”

“자세가 잘못됐는지 목이랑 허리가 아파서 일주일에 한 번씩은 와.” 


    

내가 다니는 한의원 바로 위가 그의 집이라는 게 신기한 나와 달리, 그는 내가 아프다는 것이 더 신경 쓰이는 눈치였다.


     

“21살이 무슨 한의원을 그렇게 자주 다녀. 걱정이네.”

“괜찮아, 나 이제 갈게. 오늘 재밌었어.”



“응, 데려다줘서 고마워. 누가 집까지 바래다준 거 처음이야. 우리 지금처럼 편하게 지내자, 여름아.”

“그래, 나도 좋아.” 멀리서 오는 택시를 향해 손을 흔들며 말했다. 


    


내가 택시를 타자 그가 말했다.

“기사님, 제 친구 잘 부탁드립니다. 친구여, 조심히 가시게나!”

“고맙소! 푹 쉬시오 친구!” 그는 마지막까지 날 웃겨주었다. 










오늘은 이야기가 평소보다 2배 길어요.

글이 길어 읽는 데 불편하진 않으셨는 지 걱정입니다.

좀 길더라도 한 편 안에 담고 싶었어요..ㅎㅎ


가사를 클릭하면 유튜브 영상으로 연결됩니다!




사진출처: 핀터레스트, 직접 촬영

인스타그램 : @bombi_s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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