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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비눈 Sep 30. 2021

어쩌다 '을'이 되길 자처했을까.

첫사랑을 만난다면(13_소설)

“자기가 너한테 고백했는데 차였대. 잊으려 했는데 잘 안된다며 네가 자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냐고 묻더라.”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는데?” 숨죽여 혜지의 대답을 기다렸다. 혜지가 길게 한숨을 쉬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오늘 여름이 남자 친구랑 거제도 여행 갔으니 잊으라고 했어. 더 이상 연락하지 말라고. 지난 학기에 네가 같이 일하는 사람이 싫다는데도 계속 집착한다고 했잖아. 그 사람인 줄 알고….”


지난 학기에 함께 일했던 주말 아르바이트생 중 한 명이 계속 고백해서 불편하다는 이야기를 혜지에게 한 것이 생각났다. 혜지가 지금은 일을 둔 그 사람과 유현이를 착각한 것이었다.

     

내가 입을 다물고 있자 혜지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근데 그 사람이 너 남자 친구 있냐고 되묻더라고.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을 보니 내가 실수한 거 같아서…. 혹시 며칠 전에 좋아졌다고 말한 사람이 이 사람이야?”     


“…응 맞아. 그 사람이야.”      


“난 너 힘들게 했던 그 사람인 줄 알고…. 정말 미안해.”     



혜지는 함부로 말해서 미안하다며 연신 사과했다. 그러나 그 뒤에 혜지가 말하는 내용은 들리지 않았다. 혜지가 원망스러웠지만 그것보다 유현이가 상처 받았을까 봐 걱정되었다.



일주일 간 숨겼던 내 거짓말을 알게 되었으니 얼마나 속상할까. 내가 사실을 고백했을 때 그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어떻게 말해야 덜 상처 받을까. 이 사실을 안 이상 유현이와 관계는 지속할 수 없겠지. 가슴에 무거운 돌덩이가 앉은 듯 숨쉬기가 버거웠다.               





내 표정을 본 선우 오빠가 걱정하며 말했다.

“여름아, 많이 걸어서 그런지 피곤해 보인다. 이제 집에 갈까?”  





        

집에 가는 고속버스 안에서 유현이에게 메일을 보냈다.

‘유현아, 할 말이 있는데 오늘 밤 11시에 볼래?’
‘그래, 여름아. 강변 산책로 앞 순정 마음 맥주집에서 보자.’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유현이에게 어떻게 말할지 수백 번도 넘게 되뇌었다. 그와의 관계를 너무 급하게 정리하게 되어 참담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모두가 더 상처 받기 전에 빨리 마무리 지을 수 있으니. 나를 위해서도 그를 위해서도 이게 맞는데 더 이상 보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암울해진다. 지금 내가 꿈을 꾸는 중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유현이를 만나러 가는 길은 오늘따라 너무 멀게 느껴졌다.

사실을 말하는 게 겁나기보다는 이 사람과 마주하는 게 마지막일지도 모른단 사실이 나를 더 슬프게 옭아맨다. 이 사람을 좋아하지만, 난 지금 당장 오빠를 떠날 수 없으니.


    

“아야.” 그와의 마지막 만남을 두려워하며 걷다가 전봇대에 부딪쳤다. 전봇대가 내게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는 가게 입구 옆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분명 혜지에게 다 들었을 텐데도 그는 밝은 표정으로 내게 인사했다.          



“왔소? 아까 저 앞에서 전봇대에 머리 박는 거 봤소. 정신을 어디 두고 다니는 것이오.”


“봤소? 부끄럽구려. 많이 기다렸소?”


“아니오. 나도 방금 왔소. 일주일 만에 보는구려. 올라갑시다.”


     

우리는 강변 산책로가 잘 보이는 2층에 앉았다.        

크림 생맥주 2잔과 감자튀김을 주문한 후, 그는 마치 오늘 아무 말도 듣지 않은 것처럼 밝게 이야기 했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 오늘 카페에 온 진상 손님 이야기….



크림 생맥주 한 잔을 비우고 두 번째 생맥주를 마실 때 내가 운을 뗐다.



“유현아, 나 할 말 있어. 너도 이제 알겠지만…. 내가 숨기는 게 많았거든. 이야기하면 너를 못 볼 것 같아서…. 그래도 듣고 싶은 거지?”


“응. 듣고 싶어 여름아. 하나도 숨김없이 다 말해줬으면 해.”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이야기를 나눴다.     

“사실 나 남자 친구 있어. 오늘 혜지한테 들었겠지만 말이야. 미리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 어떻게 된 거냐면….”



원래 계획대로면 그에게 왜 말하지 못했는지, 내 마음은 어떤지 다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무슨 말을 했어야 하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맑고 밝은 이 사람을 더 이상 볼 수 없단 생각에 너무 슬퍼서 다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조금 시간이 흐른 후 그가 말했다.


“아까 혜지씨한테 듣고 많이 놀랐어. 근데 일 마치고 너 만날 때까지 3시간 동안 산책로를 걸었는데, 걷다 보니 남자 친구가 있다는 걸 말하지 못한 네 마음도 이해가 되더라.


당황스러웠지만, 괜찮아. 내가 미안해. 내 감정에만 치우쳐서 널 힘들게 했나 봐. 이런 감정이 처음이라 서툰 점이 많았어.”          



그는 남자 친구가 누구인지, 언제부터 만났는지, 왜 지금까지 숨겼는지, 남자 친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묻지 않았다. 그저 괜찮다고 말해줄 뿐이었다.  



        



“나도 숨긴 게 있어. 나 사실 너 핸드폰 고장 안 난 거 첫날부터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어? 어떻게?”


“네가 메일에 웃을 때 ㅋㅋ가 아니라 ㅋㄱ로 칠 때가 많더라고. 핸드폰으로 치면 그렇게 오타 나곤 하잖아.”

    

“안다고 말하지 그랬어. 미안해.”     


“네가 날 밀어내려고 그런 거짓말을 한 것 같아서. 내가 핸드폰 고장 안 난 거 알고 있다고 하면 네가 진짜 날 떠날 것 같아서 두려웠어.”     



유현이는 다 알고 있었구나. 다 알고도 모르는 척하고, 궁금하고 원망스러울 텐데도 내 생각 먼저 하는구나.     

“그랬구나. 그런 생각하게 해서 미안해.”

  

“사과 들으려고 한 말은 아냐. 네가 용기 냈으니 나도 솔직히 이야기한 거야.



여름아, 네가 괜찮다면 그냥 친구로서만 옆에 있어도 될까? 나도 이런 내가 답답한데 그래도 그렇게라도 네 옆에 있고 싶어. 절대 선 넘을 일은 없을 거야. 걱정 말고 남자 친구랑 예쁘게 연애해.”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좋아하지만 선을 넘지 않겠다고 말하는, 관계에서 ‘을’이 되겠다고 자처하는 그의 모습에서 내 모습이 겹쳐 보였다.


남자 친구가 취업에 전념할 수 있게 곁을 지키며, 내 감정은 돌보지 않는 나와 유현이는 닮아 있었다.


우리는 어쩌다 '을'이 되길 자처했을까. 더 사랑해서도 아니었고 착해서도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목소리를 크게 내지 못하고 자신의 감정을 돌보지 못했을 뿐이었다.



자기는 신경 쓰지 말고 남자 친구와 연애하라는 그에게 사실은 너를 좋아한다고, 남자 친구는 책임감만 남아있는 사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솔직한 마음을 전부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뒷감당을 할 수 없어 입을 다물었다.      

남자 친구 시험 끝날 때까지 나를 기다려달라고 할 수도 없었고, 남자 친구와 당장 헤어지겠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나는 그럴만한 위인이 아니었다. 차라리 유현이가 내가 남자 친구를 사랑한다고 믿고 마음을 접는 편이 나았다.





                   

남은 맥주를 마시고 우리는 가게에서 나왔다.

“이제 집에 갑시다! 우리 친구끼리 더치페이합시다!” 장난스러운 그의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여름 낭자가 웃으니 기분이 좋구려. 늘 웃는 날이 많았으면 좋겠소.”

“벌써 새벽 2시구려. 오늘은 내가 집에 데려다주겠소.”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오! 이 시간에 혼자 집에 돌아가게 할 순 없소. 위험하오.”

“괜찮소. 나 이래 봬도 힘이 장사요.”



 그건 맞다며 웃는 그의 어깨를 장난스럽게 때리며 걸었다. 그가 우리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재차 말했지만, 내가 택시를 탈 테니 걱정 말라고, 바래다주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사진출처: 핀터레스트

인스타그램 : @bombi_s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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