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을 만난다면(11_소설)
집에 와서 일기장을 펼쳤다. 그리고 내가 느끼는 감정을 쭉 써내려갔다.
나를 보고 진심으로 설레 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의 순수한 마음이 너무나 고맙다. 나의 한 마디에 밤새도록 생각하는 그에게 계속 끌린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나를 사랑하고 아껴주는 사람이 있다. 내가 뭐길래 그들은 이다지도 하찮은 나를 사랑에 빠진 예쁜 눈빛으로 바라봐 주는 걸까.
그다음 날인 월요일은 9월 1일, 개강날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동기들은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서로 안부를 물었다. 5kg 감량해서 분위기가 달라진 동기를 보며 감탄하고 곧 있을 학과 엠티를 기획했다.
원래 가장 활발하게 대화를 이끌어가는 나지만, 그날은 유현이 생각에 대화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내가 가만히 있자 혜지가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백여름, 어디 아파? 왜 이렇게 힘이 없어?”
“별 일 아냐.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
그때 유현이에게 문자가 왔다.
‘여름아, 수업은 어때? 난 듣고 싶던 교양 수강 신청 성공했어.’
그의 문자를 보고 반가움이 앞섰다. 물어보고 싶은 말이 많았다. 음료수를 들고 갔는지, 교양수업을 혼자 들어서 외롭진 않은지, 오늘 점심 식사로 어떤 걸 먹었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모든 악 중 가장 나쁜 것은 인간의 고통을 연장시키는 희망이라는 니체의 말이 떠올랐다. 그에게 희망을 줘서 그의 고통을 연장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을 꾹꾹 눌러 참고서 그에게 미적지근한 답장을 보냈다.
‘잘됐다. 축하해.’
남자 친구는 취업로 바빴지만 저녁 식사는 함께 할 때가 많았다. 저녁으로 김밥을 먹는 중 남자 친구가 애교 섞인 투정을 부렸다.
“오늘 공부가 잘 안 됐어. 집중도 안되고 문제도 다 틀리고. 여름이 네가 너무 아른거리고 보고 싶더라. 저녁까지 참느라 혼났어.”
“그래도 집중해야지. 얼른 저녁 먹고 나서 가서 공부해. 힘내!”
평소였으면 웃어넘겼겠지만 그날은 그러지 않았다. 그가 시험 준비가 잘 안되고 있다고 하면 부담감을 느꼈다. 이 관계를 계속 끊어내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이었다.
그가 취업에 성공해야 그를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누가 그렇게 시킨 것도 아니었지만 혼자 느끼는 책임감이었다. 남자 친구와 저녁을 먹은 뒤 그는 도서관으로 향했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와서 침대에 눕자 유현이 생각이 가득했다. 지금 일하고 있을 텐데 커피 마시러 가볼까? 사장님께 볼 일 있는 척 갈까? 그가 보고 싶어서 수십 가지 방안을 생각했지만 납득할 만한 방법이 없어서 그만뒀다. 그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그래선 안된다는 생각으로 욕구를 억누르며 시간을 보냈다.
다음 날, 늘 밝던 내가 이틀 연속 초점을 잃고 있으니 혜지가 걱정하며 물었다.
“야, 백여름 너 대체 왜 그래? 너 답지 않게. 무슨 일 있어? 이 언니한테 다 털어놔. 내가 해답을 알려줄 테니.”
“아냐, 일은 무슨. 그런 거 없어 혜지야.”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고 싶었지만 선우 오빠를 선망하는 혜지에게 다른 사람이 끌린다고 털어놓긴 어려웠다.
“그럼 기분 환기라도 하게 지하철 여행 가자. 우리 지난번에 가려다 못 간 75 해변 광장 어때?”
알겠다고 대답하자 혜지는 자기가 여행 계획을 다 세울 테니 따라만 오라며 소리쳤다.
다음 날, 수업이 끝난 오후 1시, 혜지와 함께 지상철을 탔다. 지상철에서 밖을 내려다보자 며칠 전 유현이와 함께 걸은 강변 산책로가 보였다. 유현이가 생각나서 조금 울적해지려 할 때마다 혜지는 내게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지상철 15개 정류장, 40분 정도를 달려서 우리는 75 해변 광장에 도착했다. 숲 속 데크 산책로에서 바라본 바다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우리는 데크 산책로 계단을 따라 바닷가로 내려와 큰 바위에 앉았다.
맑은 날씨와 파란 하늘, 흔들리는 숲 속 나뭇잎과 모나지 않은 조약돌, 햇빛에 찰랑이며 부서지는 파도.
유현이는 아름다운 바다를 보면 무슨 말을 할까. 어떤 표정을 지을까. 유현이 생각을 지우려고 선우 오빠와 함께 오는 상상을 하려 애썼으나 잘 안됐다. 내 표정이 바뀌는 걸 눈치챘는지 혜지는 말없이 내 등을 쓰다듬었다. 그 손길이 뭐든 이해해줄 테니 걱정 말고 털어놓으라는 말로 들렸다.
“혜지야, 사실은 나… 선우 오빠를 좋아하지 않아.”
“뭐? 너 선우 선배랑 잘 지내잖아. 아까도 선배가 너 커피 주려고 도서관에서 강의실로 온 거 아냐?” 혜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맞아. 멋진 사람이고 좋은 사람인 걸 알지만 처음부터 사랑은 아니었어. 학기 초에 분위기에 휩쓸려서….”
“그래. 입학하자마자 너무 빨리 사귀긴 했지.”
“응. 그리고 나…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
“언제 만난 건데? 오래됐어?” 혜지는 한참 침묵하다 내게 물었다.
“아니. 일주일도 안됐어. 그런데 너무 빠른 속도로 좋아져. 선우 오빠에 대한 죄책감과 그 사람에 대한 마음 때문에 어제 기운이 없었어. 그래도 바다 보니까 마음이 좀 트이네.”
“그렇구나. 근데 네가 그 사람이랑 연애하지 않고 죄책감을 느끼는 건 선우 선배에 대한 감정이 있어서 그런 거 아냐? 정말 좋아하지 않는다면 바로 헤어지잔 마음이 들었겠지. 만난 지 일 년이 넘어서 처음 느꼈던 설렘을 느끼지 못하는 거 아닐까? 권태기 같은 거.
넌 처음부터 좋아하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내가 옆에서 보기엔 너 좋아 보였거든. 그리고 선우 선배는 늘 네게 진심이었어. 다른 사람에게 설렘을 느낀다고 해도 그 설렘이 영원한 건 아냐. 그리고 선우 선배 같은 사람은 정말 없어."
"그건 그래. 내 마음을 나도 잘 모르겠어. 너무 어렵다." 고개를 떨구며 대답했다.
"여름아, 난 네가 후회하지 않는 선택을 했으면 좋겠어. 오늘 강의 시간에 니체의 사랑론 배운 거 생각나지? 근시의 남녀가 사랑하는 거라고. 사랑하는 남녀를 치료하기 위해선 약간 도수 높은 안경을 주면 낫는다고. 그 사람에 대한 마음은 네가 도수에 맞는 안경을 쓰면 해결될지도 몰라.
근데 내 의견을 너한테 계속 말하는 게 좋은 방법은 아닌 거 같아. 스피노자 말처럼 의견은 못질 같아서 두들기면 두들길수록 자꾸 안으로 들어갈 뿐이니까. 너무 놀라서 말을 너무 많이 했다. 네 일인데 너무 흥분해서 미안해 여름아.”
“아냐, 네 말이 맞아. 선우 오빠는 늘 부족한 나를 사랑해줬어. 그렇게 선한 사람은 또 없을 거야.”
“잠시 흔들린 걸 거야. 일주일이면 아직 그 사람에 대해서도 잘 모르잖아. 나도 남자 친구랑 권태기였는데 여행 다녀오니까 좀 나아지더라. 너도 여행 한 번 가보면 어때? 나 거제도 갔는데 되게 좋던데. 특히 바람의 언덕이 동화에 나오는 곳처럼 예쁘더라.”
“오빠 3달 뒤에 시험이라 갈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그래도 한 번 물어봐야겠어. 고마워 혜지야.”
우리는 말을 마치고 바닷가에서 일어났다.
혜지는 남자 친구와 저녁 약속이 있어서 혼자 지상철을 탔다. 돌아오는 길에 핸드폰으로 그와 나눈 문자들을 보았다.
그래, 혜지 말대로 이 사람을 정리하는 게 맞아. 선우 오빠가 얼마나 잘해주는데 흔들리다니. 요즘 공부한다고 데이트를 못해서 더 그럴 거야. 이렇게 가슴이 뜨거운 것만이 사랑은 아닐 거야.
선우 오빠랑 있으면 편안하고 나를 많이 배려해주잖아. 배려가 사랑인 거야.
순간의 달콤함에 흔들리지 말자, 백 여름.
사진출처: 핀터레스트, 직접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