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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비눈 Sep 23. 2021

우리 관계에 이름을 붙여야 했다.

첫사랑을 만난다면(10_소설)


“비밀 아지트니까 눈 감고 가야 해. 내 팔 잡고 천천히 걸으면 될 거야.” 나는 그의 말대로 그의 팔에 의지해서 걸었다. 쭉 뻗은 넓은 대로변인 걸 알지만 눈을 감은 채 걷는 건 몹시 두려웠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조심조심 한 발씩 내디뎠다. 따뜻한 바람이 머릿결을 스쳤고 우리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이제 계단이니까 천천히 갈게.” 

“정말 가까운 곳에 아지트가 있네? 어딘지 궁금하다. 우리 더 천천히 가자. 조금 무서워.” 

     



그의 옷깃을 잡은 채 계단을 올라가는 길은 매우 위태로웠다. 공포연극을 볼 때와 같이 내 심장은 강하게 뛰었다. 넘어질까 봐 두려운 감정과 그의 팔을 잡고 있다는 설렘 때문이었다. 물론 중간에 눈을 뜰 수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눈을 감으니 다른 감각들을 더 진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의 숨소리와 팔의 감촉, 내 심장 뛰는 소리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제 도착했어. 눈 떠도 돼!” 그가 크게 웃음 지으며 말했다. 

“어??!! 우리 카페잖아???”     

“응. 낮엔 직장이고 밤엔 아지트야. 들어와.”     




그는 세콤 세트를 해제하고 비밀번호를 눌러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늘 밝을 때만 근무했기에 불 꺼진 어두운 카페가 낯설었다. 카페는 2층이라 창문 너머로 옆 건물의 불빛만 보일뿐 거리의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마치 우리만 존재하는 기분이었다. 


    


“우리 여기 와도 돼? 사장님께서 아시면 놀라시지 않을까?”     

“괜찮아. 평일 알바생끼린 퇴근하고 자주 써. 사장님도 허락해 주셨고. 그런데 영업이 끝나서 불은 켜면 안 돼. 옆 건물 네온사인 덕에 어둡진 않을 거야.” 

털털한 성격의 사장님은 뒷정리만 잘하고 간다면 전혀 개의치 않으시는 듯했다.           




“그럼 너 여기서 영화 본 적 없겠네? 그가 스피커와 연동된 노트북을 가리키며 말했다. 

“정말? 와, 밤에 오니까 분위기 좋다! 아르바이트한 지 겨우 한 달 된 오빠가 나보다 더 잘 알다니!”





“어? 너 방금 오빠라고 했어? 너 처음에 만났을 땐 유현씨라고 했다가 반말 쓰자고 한 이후로 내 이름 안 부른 거 알아?”

“그랬나….” 

사실 오빠란 호칭으로 그를 부르고 싶지 않았다. 남자 친구인 선우 오빠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아 멋쩍게 웃고 있는데 그가 말을 이었다.



     

“사실, 나 빠른 년생이야. 2월에 태어났거든. 너랑 동갑이야.”

“뭐야, 왜 그걸 지금 이야기해!”

“그래도 내 친구들은 22살, 네 친구들은 21살인 거 알지? 엄연히 달라!” 그가 장난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다르긴 무슨! 그럼 겨울에 태어나서 메일 주소도 winter인 거야?”


“아니, 겨울을 좋아하거든. 매서운 바람에 손도 시리고 추웠는데 이상하게 봄이 되면 겨울을 따뜻하게 기억하게 돼. 겨울은 춥지만 포근한 느낌이야.”




“그렇구나. 근데 뒤에 88은 뭐야? 전화번호 뒷자리도 아니고.”


“눈사람 모양이야. 귀엽지? 아, 네가 보낸 사진 봤는데 너무 잘 나왔더라. 그래서 내가 인화해서 들고 왔어. 그날 찍은 풍경 사진도 몇 장 있어.” 그가 사진 더미를 내게 건넸다.     




“어. 이건 언제 찍었어?” 그가 건넨 사진에는 내 뒷모습이 찍힌 사진이 한 장 더 있었다.

“미안. 함부로 찍으면 안 되는 거 아는데 벽화를 보는 네 모습이 너무 예뻐서 나도 모르게 찍었어. 지우려 했는데 너랑 인연이 닿아서 주인을 찾게 됐네.” 



    

“괜찮아. 사진 잘 나왔네, 고마워. 아, 우리 어떤 영화 볼까?”

“난 로맨틱 코미디 좋아해. 너는?”

“나도 로코 좋아해. 그럼 ‘연애의 비밀’ 볼래?” 



로맨틱 코미디라고 검색해서 나온 영화 중 안 본 영화를 가리키며 말했다. 남녀 주인공이 밝게 웃으며 서로를 바라보는 포스터와 ‘사랑스러운 연인의 심장 떨리는 비밀’라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내가 영화를 다운로드하는 동안 그는 주방에서 직원용 맥주인 카프리 두 병을 들고 나왔다. 사장님은 장사는 즐거워야 잘된다며 알바를 하러 가면 꼭 맥주를 한 잔씩 주셨다. 그는 웃옷으로 카프리 병을 감싸 맥주 마개를 따며 의자에 앉았다.          




영화는 서로 탐색하며 사랑에 빠지는 남녀를 그리나 했더니 후반부로 갈수록 서로의 비밀이 드러나며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공포 스릴러로 장르가 변했다. 남자 주인공이 범죄를 저지른 걸 숨긴 채 연애하다 들키고 난 후 여자 주인공과 다투는 장면이 이어졌다. 맹렬한 추격씬과 격렬한 몸싸움을 하는 장면이 나올 때 그가 일어나며 말했다.     




“맥주 더 가져올게. 소리 다 들리니까 멈추지 말고 계속 봐.” 


무섭고 중요한 클라이맥스 장면이라 그의 말이 귀에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집중했다. 그때 어떤 검은 물체가 내 뒤에서 ‘왁!’ 소리를 지르며 내 어깨를 잡았다. 나는 너무 놀라서 비명을 지르며 의자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그가 아이같이 깔깔거리며 소리 내어 웃었다. 


    

“진짜 웃기다. 많이 놀랐어? 그저께는 공포 연극 잘 보는 척하더니 겁쟁이였네.” 그가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심장이 또다시 빠르게 뛰었다.     




우리는 잠시 투닥거리며 장난을 치다가 다시 영화를 보기 위해 나란히 앉았다. 영화를 재생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탁자 위에 있는 내 손등 위에 그가 자신의 손을 살포시 올려놓았다. 나는 그대로 얼어서 손을 뺄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손등을 바닥으로 돌려 그의 손을 잡을 수도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20분간 손이 포개진 채로 영화를 봤다. 손등이 포개진 이후로 나는 영화의 흐름을 전혀 따라가지 못했다. 그저 손가락 하나하나의 감각에만 집중하여 이 손을 잡을지 뺄지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손이 포개진 순간, 너무 설레고 행복했지만 동시에 죄책감도 강하게 들었다. 남자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손을 잡고 빼는 걸 선택하지 않고 그냥 이 순간에 머물고 싶었다. 우리 관계에 이름 붙이지 않고 그냥 행복한 이 순간을 즐기고 싶었다. 그러나 그와 내 마음을 확실하게 알게 된 이상, 우리의 관계에 이름을 붙여야 했다. 그의 고백을 받았지만 대답을 하지 않은 채 연인 간 할만한 대화와 행동을 이어갈 순 없었다.



          

그 생각을 하자 뜨겁게 뛰던 심장이 점점 차가워지는 게 느껴졌다. 나는 시험이 3개월 남은 남자 친구에게 상처를 줄 만큼 마음이 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현이와의 관계를 규정하지 않고 이 감정을 느끼고 싶은 내가 이기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에게 상처만 주면서 나만 행복해지고 싶어 하다니, 그래선 안돼. 남자 친구에게 헤어짐을 고할 수 없다면, 유현이가 더 이상 상처 받지 않게 말해야 해. 





         

영화가 끝날 즈음 유현이의 손 아래에 있는 내 손을 살며시 뺐다.    

      

“영화 재밌었지? 정말 생각하지도 못한 반전이였어.” 배우와 감독의 이름이 화면에 나오는 것을 보며 그가 말했다. 웃고 있는 그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나 할 말이 있어. 내가 많이 미울 거야. 사실은….”     

“무슨 말인데 그렇게 뜸을 들여? 불안하게…. 괜찮으니 말해봐.”  


   

숨을 한 번 고른 후 눈을 딱 감고 말했다.      

“마음을 받아줄 수 없어. 미안해.”     




20초 정도 정적이 흘렀다. 그는 나를 보고 있는 듯했지만 나는 바로 옆에 앉아있는 그를 바라볼 수 없었다. 그저 내 엄지 손가락으로 반대 엄지손톱을 꼼지락꼼지락 만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랬구나, 여름아. 무슨 말인지 알겠어.”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여전히 다정했다. 방금 전까지 자신과 즐겁게 대화를 나누면서 고백을 거절하는 나를 탓할 줄 알았다. 그러나 여전히 다정한 그를 보자 미안함과 안도감이 섞인 눈물이 흘렀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카페 구석진 곳으로 자리를 옮겨 눈물을 닦았다. 그러자 그가 조용히 일어나서 내게로 다가왔다.               




“울지 마. 난 네가 웃을 때 기분이 좋더라. 괜찮아. 난 정말 너에게 어떤 관계를 요구하려는 생각은 아니었는데. 아니 사실 그러면 좋지만 부담 주고 싶지 않았는데. 내가 너무 서둘렀나 봐. 미안해.” 




다정하게 말하며 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영화를 보려고 틀어놓은 노트북에선 영화 마지막 엔딩 크레딧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소리 덕분에 내가 훌쩍이는 소리가 작게 들려서 다행이었다. 그는 왜 거절했는지, 왜 만나자고 전화했는지, 왜 자신과 손을 잡았는지 묻지 않았다. 그저 내 곁을 묵묵히 지켜주었다.     




우리는 카페 뒷정리를 하고 문을 잠근 뒤 밖으로 나왔다. 밤 11시의 대학로는 여전히 사람들이 많았다. 그는 우리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말했다. 우리 집을 가려면 술집이 많은 골목을 지나야 했다. 그 골목을 지나는데 한 취객이 비틀거리며 쓰러질 듯 내게 다가오자 그는 나를 자신의 뒤에 세워 보호해주었다. 비참하고 속상할 그 상황 속에서도 나를 먼저 생각해주었다. 그런 그를 보니 그와 더 이상 관계를 지속할 수 없다는 사실이 괴로웠다.      




우리 집에 도착한 후 그가 말했다.

     

정말 괜찮아. 미안해하지 마. 그래도 우리 친구로는 계속 볼 수 있는 거지?” 


나는 또다시 울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함보다는 속상함의 눈물이었다.     






사진출처: 핀터레스트, 직접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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