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을 만난다면(9_소설)
나는 그에게 문자 한 뒤 카페에서 5분 거리에 있는 강변 산책로로 걸어갔다. 지상철 10개 정류장을 따라 길게 조성된 강변 산책로 개울가는 물이 깨끗해서 오리와 학을 볼 수 있었다. 자전거 타는 사람과 농구하는 사람들이 보였고 일요일이라 버스킹 공연을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나는 판소리와 가요를 섞은 퓨전 국악 공연을 하는 사람들 앞에 서서 그를 기다렸다. 일단 보고 싶어서 만나자고 하긴 했는데, 어젯밤 그의 고백으로 인해 어색한 사이가 될 것 같아 걱정이었다. 괜히 만나자고 했나. 내가 그의 고백을 받아줄 거라 기대하면 어떻게 하지. 어떤 표정으로 인사를 건네야 하지….
그때, 누군가 내 어깨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 번 두드렸다.
“똑똑, 거기 자리 있소?”
고개를 뒤로 돌리자 환하게 웃고 있는 그가 서있었다.
“말투가 그게 뭐야, 웃겨.” 어색할 줄 알았던 우려와 달리 우리는 밝게 웃으며 인사했다.
“내 말투가 뭐가 어떻단 말이오? 무엄하오.” 그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소? 미안하게 되었소.”
“이렇게 나를 다시 불러내다니, 무례하오. 이 더운 날씨에 아주 먼 길을 걸어왔소.”
“대신 내가 맥주를 사겠소. 그럼 용서할 수 있겠소?”
“흠. 좋소.” 그가 개구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웃으며 안부를 나눈 후 편의점에 들어가서 맥주를 한 캔씩 골라 계산대 위에 올려두었다.
“또 기네스를 먹소? 뭘 모르는 군. 맥주는 블랑이 최고요.”계산대 앞 셀프 코너에서 들고 나온 빨대를 캔 맥주 입구에 꽂으며 말을 이었다.
“벽화 마을에서 맥주 먹을 땐 말 못 했소만, 자고로 길맥은 빨대로 마셔야 하오. 100배 더 맛있소. 꿀팁을 특별히 알려주니 고마워하시오.”
“정말 대단한 꿀팁을 알려줘서 고맙소! 내 앞으로 늘 빨대 꽂아서 길맥 하리다.” 그가 대답했다.
“내일 드디어 개강이구려. 수강 신청은 무사히 끝냈소?” 블랑 맥주의 달콤한 맛을 음미하며 물었다.
“듣고 싶었던 교양 수업이 있는데 인기가 많은 수업이라 수강신청을 못했소. 내일 교수님께 부탁드리러 가야 하오. 그 수업은 혼자 듣는 수업인데 걱정이오.”
“그렇구려. 음료라도 한 캔 사서 가면 어떻겠소? 난 거의 모든 수업을 혜지와 같이 듣소. 어제 사진 보여준 그 친구 말이오.”
“내 은인 말이오? 고맙단 사례를 해야 하는데 말이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하시오.”
그의 짓궂은 표정에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지만 내 얼굴이 다시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우리는 2학기에 들을 전공 강의와 교양 강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걸었다.
산책을 하는 중 내가 맨홀 뚜껑을 피해서 걷는 걸 보고 그가 물었다.
“왜 하수구 구멍을 밟지 않소?”
“그걸 밟으면 귀신이 달라붙소. 소인이 8살 때부터 지켜오던 신념이오.”
“아니, 그럴 수가! 나는 지금까지 하수구를 늘 밟았소. 어쩌면 좋소! 너무 두렵소. 난 귀신이 싫소.” 그가 내 말에 동조하듯 오버하며 말했다.
“이건 비밀이오만…. 그리 말하니 내 특별히 알려주겠소. 이렇게 하면 되오.” 나는 검지와 중지 손가락을 겹쳐 그의 손목을 3대 때렸다.
“고맙소! 내 이 은혜 잊지 않겠소!”
언제부터 하수구 귀신을 알게 되었는지,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혼자 있을 때 실수로 밟으면 어떻게 대처하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하수구를 밟지 않으려다 교통사고가 날 뻔한 적이 있다는 말도 하였다. 다른 사람에겐 말하기 부끄러워 숨기던 이야기였다. 간혹 말을 하더라도 날 이해하지 못하고 이상하게 바라보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편안하게 나에게 동조하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지상철 3개 거리를 걸은 후, 벤치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앉았다가 돌아갑시다.”
“그럽시다. 굽 있는 샌들을 신어서 다리가 아팠겠소. 앞에서 버스킹 준비하는 것 같은데 노래 몇 곡 듣고 갑시다.”
우리가 앉으려는 벤치 주변에서 기타를 꺼내서 공연을 준비하는 남자 한 명이 보였다. 곧이어 그의 노래가 시작되었다.
“나 이 노래 정말 좋아하오! 여름 낭자와 함께 듣게 되니 참 좋소.” 귓속에는 익숙한 멜로디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네가 없는 거리에는 내가 할 일이 없어서
마냥 걷다 걷다 보면 추억을 가끔 마주치지
떠오르는 너의 모습 내 살아나는 그리움 한 번에
참 잊기 힘든 사람이란 걸 또 한 번 느껴지는 하루
성시경의 ‘거리에서’ 노래였다. 그때 문득 혜지가 내게 한 말이 떠올랐다.
“혜지가 이런 이야기를 했소. 야외에서 이성과 단둘이 노래를 듣는 건 위험한 일이라고.”
“무슨 뜻이오? 나 갑자기 얼굴이 뜨거워질 것 같소. 그런 농담도 할 줄 아시오?” 그가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대체 무슨 생각인 것이오. 보통 노래는 이어폰을 끼고 혼자 듣지 않소? 단둘이 야외에서 노래 듣는 건 흔치 않은 경험이고. 그래서 그 순간을 절대 잊지 못하기 때문에 위험하단 뜻이오. 앞으로 그 노래 들을 때면 늘 그 사람 생각이 난다고 하오. 믿거나 말거나지만.” 내가 그를 놀리는 듯 혀를 빼꼼 내밀며 말했다.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된 것 같소. 글쎄, 혜지씨 말이 맞는 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지금 이 순간을 잊지 못할 것 같소. 이 기억이 추억이 되진 않았으면 좋겠소.”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그의 눈을 피했지만, 그가 날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가족들과 함께 뛰어놀고 있는 어린아이 2명이 보였다. 버스킹 하는 분은 거리에서 노래를 마친 뒤 영어로 된 노래를 불렀다. 음은 익숙했지만 가수나 제목은 생각나지 않았다. 이 노래를 어디서 들었더라, 생각하며 맥주를 입에 가져다 대었다. 맥주는 그 새 식어 맛이 없었다.
“맥주도 식었는데 이제 돌아갈까?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네.” 해가 떠 있을 때 만났는데 벌써 하늘이 깜깜해졌다.
“그러게. 너랑 있으면 시간이 정말 빨리 가. 아니, 늦게 가는 것 같기도 하고. 우리 만난 지 3일 됐는데 3년은 된 것 같으니 말이야.”
그와 함께 다시 우리가 만난 곳으로 걸어갔다.
“여름아, 내 비밀 아지트 갈래? 이 근처야.”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진출처: 핀터레스트, 직접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