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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비눈 Sep 17. 2021

그는 더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첫사랑을 만난다면(8_소설)

그 후 집에 가는 지하철 안에서 대화를 나눴으나 정신이 다른 곳에 가 있었기에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내 머릿속은 온통 '이 마음의 충돌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언제부터 그에게 빠진 것인가, 알게 된 지 이틀밖에 안됐는데 이런 강렬한 끌림의 원인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지하철에서 내린 후 집으로 향하는 데 그가 말했다.

“데려다줘도 돼?”

“혼자 갈 수 있는데…. 응 고마워.”    



우리는 말없이 집까지 걸었다.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진 않았지만 머릿속은 그 언제보다 복잡했다. 10분 정도 걸으니 주택과 원룸 건물이 즐비한 골목이 나왔다.     


“나 여기 살아. 데려다줘서 고마워.”     


내 말에 그가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내 눈을 바라보고 말했다. 자신감 넘치는 그 답지 않게 떨리는 목소리였다.




“여름아, 나 네가 많이 좋아. 버스정류장에서 만난 순간 첫눈에 반했어. 너무 성급한 거 아는데 말하지 않으면 내가 버티지 못할 것 같아서. 어떤 관계를 요구하는 건 아냐. 그냥 내 마음을 전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그 말에 적잖이 놀랐다. 나 역시 그에게 강렬한 끌림을 느끼고 있었으나 그는 나보다 더 빠른 속도로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남자 친구에게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한 강렬한 감정이 요동쳤다. 선우 오빠에겐 고마움과 따스함을 느낄 수 있었지만 이렇게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갈 것 같고 온 몸의 감각 세포가 반응하는 느낌은 처음이었다.




         

길거리의 대화소리는 묵음 처리됐고 작은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는 우릴 위한 배경음악이 되었다. 시간이 멈추고 우리만 숨 쉬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마치 시공간이 우리를 중심으로 도는 듯했다.



          

그는 내가 처음이라고 말했다. 그전엔 이런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처음 만난 버스정류장에서 첫눈에 반했고 이틀간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정들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사실 남자의 고백이 처음은 아니었다. 대학을 입학하자마자 지금 남자 친구와 만났고 그 이후에도 5번이 넘는 고백을 받았다. 하지만 남자 친구와 의리를 지키고 싶었고 고백한 이들에게 끌리지도 않았기에 고민 없이 거절했다.          




그런 내가 이번만큼은, 겨우 이틀 만난 사람에게 이다지도 흔들리고 있었다.          

아무리 흔들렸다고 해도 고백받은 그 순간엔 반드시 남자 친구가 있다고 이야기해야 했다. 그러나 내면의 도덕성에 금이 가는 것을 느끼며 그에게 말했다.     




“… 시간이 필요해.” 그리고 도망치듯 자취방으로 들어왔다.               




집으로 돌아와 신발을 벗으니 침대가 보였다. 노란빛 이불을 보니 긴장하여 움츠러들었던 마음이 안정을 되찾았다. 들어가자마자 옷도 갈아입지 않고 침대의 푹신함에 몸을 맡겼다.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술에 취한 듯 몽롱했다.          




그때 문자 알림이 울렸다. 

‘잘 들어갔지? 천천히 대답해도 돼. 편히 쉬어.’ 



그였다. 번호를 교환하진 않았는데 어떻게 문자했을까, 다른 아르바이트생에게 물어본 것일까,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더 이상 문자를 이어가는 건 위험할 것 같아서 간결하게 답장을 보냈다.


‘응. 고마워.’ 



그의 문자 아래에 남자 친구의 문자가 보였다. 그와 대화한다고 남자 친구의 연락을 확인하지 못한 것이다. 남자 친구의 문자는 다정했다.



‘오늘 연극 봤어? 어땠는지 궁금하다. 너 무서운 거 잘 못 보는 데 물 쏟은 거 아냐? 오빠가 같이 가줬어야 했는데 미안. 취업준비 때문에 학점이 꼭 필요해서. 이해해줘서 고마워.’
‘자니? 연락이 없네. 좋은 꿈 꿔 여름아.’      



남자 친구는 내가 오늘 어떤 일을 겪었는지, 내 감정이 어땠는지 꿈에도 모를 것이다.      



    

‘문자를 늦게 봤네. 오늘 연극 재밌었어. 오빠도 좋은 꿈 꿔. :) ’     


남자 친구의 문자엔 늘 그렇듯 다정한 연인처럼, 설레는 여인처럼 거짓으로 가득한 답장을 했다. 나는 남자 친구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 그를 진짜 사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관계에서 느끼는 공허함을 사랑해라는 달콤한 말로 채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날 밤 답장엔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공허한 빈 공간이 다른 이의 생각으로 가득 찼기 때문이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일기장을 꺼내서 오늘 있었던 일을 적었다. 글을 적을수록 내가 그에게 많이 빠져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일기는 죄책감이 아닌 설렘으로 가득했다. 일기장 마지막 장에 그가 적어준 그의 메일 주소가 보였다.     


winter88@hun.net     


겨울이라니, 내 이름을 따서 summer란 아이디를 사용하는 나와 비슷했다. 그 메일 주소를 보니 처음 만난 날, 벽화마을에서 찍은 사진을 보내주기로 한 것이 생각났다. 무슨 말을 적어도 어색한 것 같아 내용은 없이 사진만 보내기로 했다.               




그에게 메일을 보낸 뒤, 맑은 정신으로 돌아오기 위해 샤워를 했다. 샤워를 하면서도 온통 안유현, 그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그의 고백에 뭐라고 답할 것인가. 내 안의 두 자아가 다시 싸우기 시작했다.     




한 자아는 내게 말했다. ‘정신 차려. 선우 오빠는 1년 반 동안 한결같이 널 사랑해준 사람이야. 게다가 취업 시험을 불과 3개월 앞두고 있다고. 남자 친구를 실망시키지 마.’     


그리고 다른 자아는 내게 말했다. ‘왜 다른 사람 생각 먼저 해? 네 생각 먼저 해. 네가 행복한 선택을 해야 해.’           



어지러웠다. 생각에 생각을 무는 고민과 뜨거운 물로 정신이 아득했다. 하지만 단 하나는 알 수 있었다. 일단 지금은 그의 고백을 거절해야 한다는 것.       

    

남자 친구와 관계를 정리하든 정리하지 않든, 일단 지금은 그의 마음을 받아줄 수 없다는 것. 비록 내 마음이 그를 향했다고 하더라도.          


머리를 지나치게 썼는지 샤워를 끝내고 나오자마자 무언가 툭 끊어지듯 잠들었다.  







다음날인 일요일 오전, 어제와는 사뭇 다른 기분으로 카페에 출근했다. 혹시 오늘도 그가 있을까? 그를 보면 어떻게 인사해야 할까? 설레는 마음과 불안한 마음이 공존했다. 오늘은 주말 아르바이트생끼리만 일한다는 사장님의 말에 아쉬움과 안도감이 섞인 한숨이 흘러나왔다.     



아르바이트하는 동안은 정신없이 바빠서 그에 대한 생각을 잠시 접을 수 있었다. 퇴근 시간을 20분 남겨두고 홀을 한 번 정비하고 있는데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 나는 곳을 바라보자 그가 두 손 가득 음료를 들고 있었다. 그는 나를 보고 씽긋 웃고선 바로 사장님이 계시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내 두 볼이 발그스름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사장님 좋아하시는 과일주스 사 왔어요. 형, 누나도 같이 먹어요.” 


그는 사장님과 다른 아르바이트생에게 음료를 나눠주었다. 우리 카페에 팔지 않는 메뉴라서 다들 반가워했다. 마지막으로 내게 와서 음료를 건네며 말했다.      


“너 딸기맛 좋아하는 거 같아서. 딸기 주스로 샀어.”     


그는 고맙다는 내 인사를 듣기도 전에 몸을 돌려 사장님께 인사한 후 가게를 나섰다.



“사장님, 수고 많으셔요! 내일 뵐게요!”         







퇴근한 후 그가 가게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그는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다 그에게 문자 했다.          


‘집에 갔어?’

‘응. 나 기다렸어?’

‘아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농담이야. 너 부담될까 봐. 얼굴은 보고 싶고 부담은 주기 싫었거든. 혹시 괜찮으면 만날래? 그쪽으로 갈게.’ 

그의 문자에 고민하는 내 머리와 달리 나의 입꼬리는 올라가고 손은 자동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 지하철 주위 산책로에서 기다릴게.’     






사진출처: 핀터레스트, 직접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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