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을 만난다면(7_소설)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카페로 향했다. 나는 아메리카노를, 커피를 못 마시는 그는 아이스 초코를 주문했다. 카페 안에는 내가 좋아하는 바흐 음악이 흘렀다.
“유현씨, 너무 좋아해서 안 하는 거 있어요?”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좋아하는 데 왜 안 해요? 저는 좋아하는 건 무조건 해요.”
“저한테 피아노가 그래요. 피아노 연주를 좋아해서 어릴 적엔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었어요. 그런데 어른들을 보니 자신이 선택한 직장이면서도 출근하기 싫다, 일하기 싫다며 불평만 하는 거예요. 제가 좋아하는 피아노도 직업이 되면 싫어질까 봐 두려워서 고등학교 2학년 때 그만뒀어요. 이후로 취미로만 쳤는데, 이제 연주 안 한 지도 2년 가까이 되었네요. 자취방에 피아노가 없거든요.”
이 말을 하니 조금 슬퍼졌다. 내게 피아노는 늘 그런 존재이다.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이해되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바라보기에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이야기였는데 이 사람 앞에선 먼저 이야기하게 됐다.
피아노를 그만둘 때 부모님 설득하는 데 상당히 애를 먹었다. 전공할 거라고 10년 넘게 친 피아노가 싫어진 것도 아니고 싫어질까 봐 그만둔다니. 부모님은 끝내 내 편을 들어주시긴 했지만 지금도 여전히 피아노를 그만둔 걸 아쉬워하신다.
“여름씨 말 들으니 좋아서 안 한다는 게 무슨 말인 진 알 것 같아요. 너무 소중해서 변하는 게 두려운 거죠? 그래서 원래 상태 그대로 지키고 싶은 거고. 그런데 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하는 일을 계속하고 싶어요. 일이든 취미든 사람이든, 싫어질까 봐 무서워서 지금 좋아하지 못하는 건 좀 슬퍼요. 지금 즐기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아요.”
“네. 유현씨 말도 이해가 가요. 제겐 너무 어려운 문제예요. 아, 유현씨는 왜 약대 왔어요? 궁금해요.”
“이틀 연속 우연히 만난 귀한 인연이니 말해줘야겠죠?” 그가 웃으며 말했다.
그는 조금 뜸을 들이다 빨대로 음료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할머니께서 저를 키워주셨는데, 제가 고등학생 때 많이 편찮으셨어요. 혈액암이라 하더라고요. 처음엔 병명도 생소하고 너무 무서웠어요.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시고, 슈퍼마켓보다 병원이랑 약국을 자주 갈 정도였어요.
할머니께서 약 먹을 때 너무 고통스러워하셨는데 제가 옆에 있으면 한결 편하다고 하셨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약에 대해 검색했어요. 검색한 내용을 말씀드리니 대견하다며 좋아하셨어요. 그래서 약대를 왔어요.
할머니 이야기를 하면 다들 불편해하더라고요. 자신들이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미안해하고. 그게 싫어서 어제 말 안 했어요. 여름씨랑은 즐거운 이야기만 하고 싶어서.”
“그랬군요. 지금은 좀 어떠세요?”
“많이 괜찮아지셨어요. 고등학생 땐 같이 사니까 제가 병원도 같이 가드렸는데, 지금은 도와주시는 분이 계세요. 그래도 주말엔 되도록 할머니 댁에 가려고 해요.”
“이렇게 다정한 손자가 있으니, 할머니께서 든든하시겠어요.”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그가 조금은 무거워진 분위기를 깨며 말했다.
“우리 게임할래요? 어제 스무고개 재밌던데. 그냥 하면 재미없으니 이기는 사람 소원 들어주기 어때요?”
내가 동의하자 그는 내게 예능 프로그램에 나온 게임을 알려줬다. 비밀번호 4자리를 설정한 후, 스무고개를 통해서 그 비밀번호를 맞추는 게임이었다.
“일의 자리 숫자가 5 이상인가요?” 그가 먼저 질문했다.
“아니오. 일의 자리 숫자가 짝수인가요?”
“네. 저는 심리전을 해야겠어요. 사람은 눈을 보면 진심을 알 수 있대요. 그러니 제 눈을 똑바로 봐요. 모든 자리 숫자의 합이 10 이상인가요?”
그의 말에 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이틀 내내 대화를 나눴지만 눈을 정면으로 몇 초간 응시하는 건 처음이었다. 순간 또다시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를 의식하니 평소에 침을 어떻게 삼켰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침 삼키는 소리가 그에게 들릴까 봐 입안에 머금은 채 그를 응시했다. 내쉬는 콧바람도 세게 느껴지고 눈 깜빡이는 횟수도 신경 쓰였다. 모든 감각이 예민해져서 헛기침하며 그의 눈을 피했다.
“와, 제가 이겼네요! 봐요, 제가 여름씨 눈빛이 흔들리는 걸 잘 읽었죠? 게임은 심리전이죠.”
그가 눈웃음을 짓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아쉽네요. 유현씨 소원은 뭐예요?”
“반말 쓰기 할게요. 내가 먼저 반말할게? 너도 해.”
“반말? 내가 더 좋은 거 아닌가? 좋아!”
제법 친해졌기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말을 놓았다. 이후 한 번 더 게임을 했으나 이번에도 내가 지고 말았다.
“이번 소원은 보류할게. 오늘 안에만 사용하면 되지?”
그가 아이처럼 들떠서 말했다. 게임의 승패를 떠나 어릴 적 친구와 놀듯이 웃고 떠들며 노는 게 오랜만이라 너무 즐거웠다.
우리는 카페에서 나와 집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역 방향으로 걸었다. 가는 길에 백화점이 보였다. 옥상 전망대에서 보는 야경이 예쁘기로 유명한 백화점이었다.
“이 백화점 옥상에서 야경 본 적 있어? 바다 보여서 엄청 예쁘다던데.” 내가 말했다.
“나도 들었는데 가보진 않았어. 우리 어제 갔던 벽화마을도 보이려나? 한 번 가볼까?”
“그래. 백화점 폐점 시간 9시지? ”
시계를 보니 8시 40분이었다. 우리는 서둘러 백화점 엘리베이터를 타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폐점 시간이 가까워서 우리와 관람객 2명, 직원 1명밖에 없었다. 밤늦은 시간이라 벽화마을이 눈에 보이진 않았다. 그 앞에 펼쳐진 검고 넓은 바다와 나지막한 주택에서 흘러나온 불빛이 아름다웠다.
“와, 덕분에 연극도 보고 야경도 보네. 너무 좋다. 저긴 어디지?”
그가 불빛이 많이 반짝이는 곳을 가리키며 물었다.
“야시장이야. 6시부터 12시까지 포장마차에서 야식 파는 곳."
“야시장도 한 번도 안 가봤는데 궁금하다. 여름이 넌 가봤어?”
“아니 나도 아직 안 가봤어. 올해 안에 꼭 캔맥주 들고 애시장 갈거야.”
“4개월 남았네? 길거리 맥주에 야식이라니. 환상의 조합이네.”
야경을 바라보며 예쁘다는 말을 반복하다 그가 쑥스러운 듯, 하지만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나 소원권 지금 사용할게. 나랑 손 잡자.”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나는 우리 반대편에 있는 관람객들에게 직원이 다가가서 이야기하는 모습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10초쯤 흘렀을까.
그 10초가 나에겐 10분도 넘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나의 욕구와 도덕성이 충돌했기에 그에게 어떤 말을 해주어야 할지 몰랐다.
당황스러웠지만 싫지 않았다. 실은 다시금 공포 연극을 볼 때처럼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감정에만 충실할 순 없었다. 마음속에서 두 자아가 엎치락뒤치락 싸우는 것이 느껴졌다.
한 자아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는 네가 솔로라고 생각했기에 말한 것이지만 너 남자 친구 있잖아. 그를 실망시켜선 안돼. 그러니 사실대로 연인이 있음을 밝히고 단호하게 거절하자.’
그러나 다른 자아는 이렇게 속삭였다. ‘너 남자 친구 안 좋아하잖아. 1년 반이면 그만 끌려다닐 때도 됐어. 이제 새로운 사람을 만나봐. 그의 손을 잡아봐.’
둘 중 어느 편도 들어줄 수 없었다.
두 자아가 대립하는 동안 백화점 직원이 우리에게 다가와서 폐점 시간이라고 말했다. 그 소리가 우리의 적막을 깨 주었다.
“내려가자. 그리고 그건 안 될 것 같아. 못 들은 걸로 할게.”
나의 말에 그는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 친구가 있었으니 손을 잡는 스킨십은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남자 친구가 있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알고 있다. 말해야 했지만 말하기 싫었다는 것을.
말할 수 있었지만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현재 남자 친구가 없었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분명 그에게 끌리고 있었다.
사진출처: 픽사베이, 직접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