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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비눈 Sep 09. 2021

맥주 남았는데, 다음 버스 탈까요?

첫사랑을 만난다면(5_소설)

답사를 마치고 버스 정류장에 오니 6시였다. 저녁 시간이지만 여름이라 어둡지 않았다. 더워서인지, 남자 친구와의 약속이 취소되어서인지, 입맛이 없었다. 버스를 기다리며 그가 말했다.  



   


 “덥네요. 버스 기다리며 캔 맥주 마실래요?” 


아주 반가웠다. 자고로 여름엔 길맥(길에서 마시는 맥주) 아니겠는가. 그러나 돈이 없어서 거절하려 했으나 그가 마음을 알아차린 듯 말했다.   

  


 “맥주는 내가 살게요. 돌아가는 버스비도요. 같은 학교니까 다음에 만나면 밥 사줘요.” 

그 말에 우리는 버스 승강장 옆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그는 기네스, 나는 블랑. 맥주 두 캔을 산 후 편의점 앞 작은 벤치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눴다.     



지난 엠티에서 학과 동기들이랑 있었던 이야기를 시작으로 고등학교 때 수능 공부하던 이야기, 중학교 때 선생님께 혼난 이야기도 나눴다.          



“왠지 여름씨에겐 부끄러운 기억도 다 말해도 될 것 같아요.” 술기운 때문인지 조금씩 지는 노을 때문인지 그의 얼굴이 붉은빛으로 보였다.


“어떤 이야기는 오래 알던 지인보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더 말하기 쉽기도 해요.”      

         


“네, 비웃지 말아요. 저는 초등학교 1학년 때 반에서 오줌 싼 적이 있어요. 너무 부끄러워서 실내화 신은 채로 그냥 집으로 뛰어갔어요. 다음 날 학교에 가고 싶지 않았죠.”


“귀여워요. 8살이니 실수할 수도 있죠. 선생님이랑 부모님은 별말씀 없으셨어요?”          

“부모님이 바쁘셔서 할머니랑 같이 살았어요. 할머니께서 선생님과 통화하신 뒤에 ‘내 강아지, 괜찮아.’ 라며 안아주셨어요. 다독여주셨던 품이 아직 생각나요.”


     

“따뜻한 분이시네요. 유현씨 이야기 들으니 저도 8살 때 생각이 나네요. 좋아하던 남자아이에게 고백하는 편지를 적었어요. 분홍색 봉투에 넣고 하트 모양 스티커도 붙였죠.”     

“이야기 듣기 전인데 벌써 귀여워요.” 그가 웃으며 말했다.     



“그 편지를 전해주려고 남자아이 집에 갔어요. 같은 아파트였거든요. 그런데 그 아이는 없고 아주머니만 계셔서 전해달라고 부탁드렸어요. 그런데 다음날 온 동네에 제가 그 아이를 좋아한다고 소문이 난 거예요. 알고 보니 아주머니께서 제 편지를 동네 아주머니들이랑 돌려 보신 거였죠.”     


“아이고, 부끄러웠겠네요. 아주머니는 그 편지가 너무 귀엽고 재밌으셨나 봐요.”  

   

“네, 맞아요. 저도 초등학생들이 고백하는 거 보면 그저 귀여울 것 같은데, 그땐 진심이었거든요. 너무 속상하고 민망해서 많이 울었죠. 그 아이도 부끄러운 지 이후로 사이도 어색해졌어요.”     





          

말을 마치자 버스가 도착했다. 


“맥주 남았는데… 다음 버스 탈까요?” 



그의 물음에 좋다고 대답했다. 한적한 버스 승강장 앞, 맥주 마시며 대화하는 시간이 즐거웠다. 처음 봤고 앞으로 보지 않을 것이기에 더 편하게 말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유현씨는 쉴 때 뭐해요? 취미가 뭔지 궁금해요.”

“저는 음악 듣는 거 좋아해요. 요즘은 성시경 노래 좋아해요. 여름씨는요?”

“성시경 노래 좋죠. 저는 연극 보는 거 좋아해요.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보러 가요.”




“우와, 저는 연극은 한 번도 본 적 없어요. 영화보다 재밌어요?”

“그럼요. 여러 번 볼 수 있는 영화랑 달리 연극은 딱 한 번밖에 못 본다는 게 매력이에요.”


“같은 연극을 다시 볼 수 있지 않아요?”

“그렇죠. 그런데 같은 연극을 다시 봐도 배우의 컨디션과 관객의 호응에 따라 느낌이 달라져요. 그리고 배우와 눈을 맞출 때면 마치 나만을 위한 공연 같아요. 그 순간 특별한 사람이 된듯한 느낌이 좋아요.”


영화보다 연극이 재미있는 이유에 대해 열띤 설명을 하다 보니 다음 버스가 도착했다.          





우리는 기분 좋게 술기운이 오른 채로 버스에 타서 스무고개 게임을 했다. 스무고개가 뭐가 그리 재밌는지 끊임없이 웃음이 나왔다. 너무 큰 소리로 웃음이 나올 때면 흠칫 놀라 기사님의 눈치를 봤다. 그와 나 둘 다 학교 주변에서 자취를 했기에 집에 가는 길 내내 대화를 나눴다. 처음 본 이와 단 3시간 만에 많이 가까워진 것이 신기했다.     






저녁 8시, 학교 정문에 도착해서 내가 말을 꺼냈다.


“저는 동문 쪽에서 자취해요. 반대 방향이니 이제 인사해야겠어요. 오늘 재밌었어요.”


“네, 오랜만에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을 만나서 너무 즐거웠어요. 혹시 괜찮다면 핸드폰 번호를 물어봐도 될까요?” 그가 주저하며 말했다.

“아뇨. 다음에도 오늘처럼 우연히 만나면 더 재밌을 것 같아서요.”





그가 멋쩍지 않도록 돌려서 거절했다. 그는 단정하고 예의 바르며 유쾌한 사람이었지만,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싶지는 않았다. 남자 친구가 있기도 했고, 대화가 즐거웠을 뿐, 그에게 편한 사람 그 이상의 감정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다음에도 오늘처럼 만날 수 있으면 좋겠네요.”

“네 저도 그러길 바라요. 안녕히 가세요.”          

즐겁게 대화한 것에 비해 멋쩍은 마지막 인사를 나눈 뒤 우리는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해서 샤워하고 나오자 핸드폰에 '선우 오빠'라는 불빛이 반짝였다. 남자 친구의 전화였다.




“여름아, 스터디 지금 끝났어. 오늘 저녁 같이 못 먹어서 미안해.”

“괜찮아. 힘들었겠다.”



“아냐, 너무 보고 싶었는데 아쉽다. 시험이 가까워지니 마음이 좀 조급하네. 친구들은 하나둘씩 취업하기도 하고. 그건 그렇고 오늘 답사는 어땠어? 예약했어?”


“응. 벽화마을 예쁘더라. 민박집도 괜찮아서 예약했어. 오빠는 엠티 때 안 올 거지?”


“그럼. 이제 4학년인데 어떻게 엠티를 가겠어. 너희끼리 재밌게 놀다 와야지. 벽화마을 안 가봤는데 궁금하다. 다음에 같이 갈까?” 선우 오빠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응 그러자. 내가 사진 찍어줄게.”

“그래. 오늘 푹 쉬고 내일 보자. 내일 연극 보는 거 알지? 알바 마치는 시간에 데리러 갈게. 사랑해.”

“나도 사랑해 오빠. 잘 자.”               








나는 여중, 여고를 나와서 남자와 대화하는 법을 몰랐고 사랑이란 감정이 무엇인지 느껴본 적 없었다. 그런 내가 대학에 입학하고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갔을 때, 지금 남자 친구가 내게 다가왔다. 



“안녕, 여름아. 난 3학년 과대표 김선우야. 집행부끼리 상의해봤는데, 네가 1학년 대표를 하면 잘할 것 같아. 네 생각은 어때?”


선배들에게 미움을 받고 싶지 않고 첫 만남에 거절하기도 민망하여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이후 그는 학과 일을 핑계로 자주 연락했고 둘이서 밥 먹는 횟수가 늘었다. 몇 번의 식사 끝에 그는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고, 나는 신입생이 된 지 2주 만에 그와 만나게 되었다.



 동기들은 키 크고 멋진 선배와 연애한다며 나를 부러워했다. 그러나 정작 나는 그에게 한 번도 사랑이란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다정하고 나를 사랑해주는 그가 좋았지만, 드라마나 연애소설에서 보던 가슴 떨리는 감정을 느끼진 않았다. 그저 연인과 하는 행위들이 처음이라 새롭고 신기했을 뿐이었다.


그는 괜찮은 사람이었고 나에게 잘해줬기에 내가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사진출처: 핀터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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